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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作者: 정대천
"작은 마님, 작은 마님..."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신수빈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어머님을 모시던 이의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다들 작은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큰 마님 측에서 이미 여러 번 재촉을 해오셔서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큰 마님께서 이 혼사는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혼사이니 작은 마님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더라도 오늘만큼은 부디 후부의 체면을 위해 첩실차(妾室茶:새로 들어온 첩이 올리는 차)를 들라 하십니다."

내실에 들어선 오상댁은 아직 꾸미지 않은 신수빈의 모습에 몸종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작은 마님의 치장을 돕지 않고! 나리께서 새 부인을 맞이하는 길시를 놓친다면, 네들 명줄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그렇게 얼떨결에 신수빈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인들에 둘러싸여 꾸며졌다. 능화경(菱花鏡:일종의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의아함에 신수빈은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매만져봤으나 불에 그을린 흉은커녕 오히려 살결이 부드러웠다.

'설마... 환생이라도 한 거야? 윤서원이 첩을 들인 그날로?'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신수빈은 어느새 끌려가다시피 전청(前廳:현관홀)에 당도해 있었고 밖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려한 등불 사이로 남녀가 붉은 비단을 손에 잡은 채 서서히 전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액운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혼인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이재민을 구하러 나간 윤서원은 태후의 손에서 자란 서화 군주와 대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진심으로 사모한다고 말했었다.

그야말로 일파만파였다.

갓 혼인한 정실 신수빈은 권세 있는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신씨 가문은 전조(前朝:전대의 왕조) 때부터 이미 나라를 대적할 만큼 부유했고, 지금의 신조에 돈과 식량을 줄곧 제공해 온 집안이었다. 비록 봉작은 얻지 못 했지만 조정에서 해금을 해제한 뒤 바다로 나가는 특권을 신씨 가문에게 내린 덕에 남쪽의 관원들조차 그들에게 아부를 떨어야 했다.

그랬기에 신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런 모욕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윤서원은 신수빈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신씨 가문 저택 앞에 무릎을 꿇고, 이번 생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노라 하늘에 맹세한 바 있었다. 그 맹세에 신씨 가문 사람들은 독녀인 신수빈과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혼인한 지 고작 석 달 만에 윤서원이 다른 여인과 함께 조정의 대전 앞에서 서화 군주를 사모한다고 말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어린 황제는 아직 세상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의 귀에 맴도는 소리는 오직 노발대발하는 태후의 목소리와 신하들의 의논 소리뿐이었다.

주서화를 아꼈던 태후는 그녀를 평처(平妻:정실은 아니지만 정실에 준하는 부인)로 올려, 정실부인인 신수빈과 나란히 하길 바랐으나 대신들과 백성들의 항의에 결국 주서화의 군주 칭호를 박탈하고 평양후 세자의 귀첩(贵妾:일반 첩보다 귀한 신분)으로 혼인을 하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칭호를 박탈한다고 한들, 혼례는 여전히 예부가 나서서 주관하였기에 공주의 혼례와 다를 게 없었다.

이는 태후의 뜻을 고스란히 보여줬고 감히 그런 귀첩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전생에 혼령으로 지낼 당시, 주서화가 털어놓던 혼인날 합방의 진실과 그녀가 집으로 들어온 후 저지른 일들이 떠오른 신수빈의 눈에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귀가 되더라도, 이번 생은 내 반드시 이 가문 사람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겠어!'

곧 천지 신령님께 절을 올린 윤서원과 주서화가 신수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윤서원의 무정함과 득의양양해하던 주서화의 표정, 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하던 어린 자식의 모습.

그 모든 게 눈앞에 아른거리자 신수빈의 두 눈은 점차 핏기가 서리고 가슴에서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신수빈은 차오르는 역겨움에 순간 목구멍에서부터 비릿한 냄새와 함께 피가 솓구쳤지만 그녀는 애써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가문의 어두운 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오늘 같은 날 그 어떤 흠 잡힐 일도 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광증으로 몰려 갇힐 게 뻔했고 이를 빌미로 신씨 가문을 착취할 것도 뻔했다.

윤서원은 재해 구역에서 돌아온 뒤, 주서화와의 혼인으로 바삐 돌아쳤기에 오늘 신수빈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화청(花廳:화원 등에 설치된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에 앉은 그녀는 얼굴에 엷은 분칠을 했음에도 기품이 화려해 봄빛처럼 밝게 빛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트린 눈매마저 청초해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주서화도 그런 그녀에게 반도 못 미칠 정도였으니, 신수빈의 미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천하 으뜸 가는 미녀라는 칭호는 역시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을 떠올린 윤서원은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반면, 무릎을 꿇은 채 하인에게서 차를 받아 든 주서화는 버들개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니, 차를 올리겠습니다."

전생의 신수빈은 질투와 억울함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차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를 본 윤서원은 여린 몸의 주서화가 무릎을 오래 꿇고 있지 못한다며, 난처하게 굴지 말라 했었다.

그 한마디에 경중에 소문이 무성해졌다. 신수빈이 질투심에 태후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고, 공공연히 서화 군주를 괴롭힌다고.

환생한 지금의 신수빈은 여전히 차를 주서화의 얼굴에 들이붓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의 끈이 그녀를 말렸고, 그녀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든 채 주서화를 일으켜 세우며 웃는 얼굴로 응했다.

"앞으로 한 집식구이니, 이리 예를 차릴 필요 없다. 회임한 지 두 달이나 된 몸으로 무리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복중에 태아가 더 중요한 법이지 않느냐."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주서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러다 이내, 실언했음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언니, 그런 말을 어찌 함부로 하십니까? 전 결백한 몸으로 이 집안에 시집온 것입니다. 근데 어찌 절 이리 욕보이시는 겁니까?"

말을 마친 주서화가 눈물을 훔치며 다시 울먹였다.

"저도 압니다. 언니께서 태후마마가 하사하신 이 혼사를 아니꼽게 여긴다는 것을요. 하지만 저와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서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주라는 칭호를 마다하고, 첩실로 들어왔는데도 정녕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서 이리 절 욕보이시는 겁니까?"

전생에 주서화와 함께 지낸 몇 해 동안 신수빈은 그녀의 얕은수를 진작에 파악해 왔었다. 주서화는 늘 이런 수단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곤 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구시렁거리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회임한 지 벌써 두 달이라니. 그때는 정실부인과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지 않소?"

"어디 그뿐이오? 그때는 나리가 남쪽에서 수해복구를 하고 있을 때고, 백성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잖소. 그런데 어찌 저런 망측한 짓을..."

"서화 군주는 정원왕의 자손인 데다 태후마마의 손에서 자란 귀한 분이신데,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진 않소."

"옳소. 저 정실부인이 탐탁지 않은 마음에 거짓 발언으로 군주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을 줄도 모르잖소."

사람들의 의논에 따라 상황은 점점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냐?"

신수빈이 짐짓 놀란 듯했고, 맑디맑은 눈망울에는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서방님께 들은 얘기를 그대로 했을 뿐인데 거짓일 리가? 나와 혼례를 올린 뒤로 서방님께서는 재해 구역으로 바로 떠나셨다. 서방님께서는 너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천리를 달려 널 만나러 갔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하던데... 날짜를 따져보면 지금쯤 아마 두 달 하고 보름은 되었겠구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이젠 한 집 식구인 마당에 내가 너희 모자를 잘 돌볼 테니."

주서화가 도움의 눈길로 윤서원을 바라봤다. 연약하고 무력한 그 눈빛은 마치 왜 연관 없는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는지 그에게 캐묻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뜻을 알아챈 윤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그 말에 모든 손님이 일제히 신수빈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신수빈이 자책하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 관례대로 어머님께 문안드리려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날이 더운 탓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몸종들에 의해 안방으로 옮겨진 뒤였고, 정신이 들 때쯤 우연히 서방님과 어머님의 대화를 듣게 된 것입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서화를 데려와 돌봤을 텐데... 그럼, 저들 모자가 이 더운 날에 명분도 없이 서방님을 따라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테죠."

예상치 못한 답변에 윤서원을 포함한 윤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었기에, 단연 신수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 집 식구가 이 사실을 알고도, 본처를 속였다는 말 아니요?"

"평소에 자애로워 보이던 평양후 큰 마님이 며느리를 이리 가혹하게 대할 줄이야."

"게다가 한 해 중 제일 더운 이 유월에 며느리를 마당에 저리도 오래 세우다니! 관례대로라고 하는 걸 보니 분명 하루이틀 아니었을 테죠."

"저 작은 마님도 참으로 가엽지... 혼례를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구박을 받고 살다니. 사람을 이리 대할 거였으면 애당초 떠들썩하게 구혼은 왜 한 것인지."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렇네. 저 작은 마님의 친정댁은 우리 대주 왕조에서 제일가는 부자일세. 섭정왕께서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했을 당시, 신씨 가문에서 군자금과 기계, 병마, 식량은 물론 돈까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지."

"나도 그 얘기는 들은 적 있소. 섭정왕께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남쪽에서 장사를 더 크게 한다 들었소. 게다가 지금은 바다로 나가는 특권까지 쥐고 있어 국고를 능가하는 부를 갖고 있다 하오. 어쩌면 이 점을 노리고 혼례를 올린 것은 아닐지..."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고,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윤서원의 정곡을 찔러댔다.

애당초 신수빈과 혼인한 목적이 바로 돈이었으니.

반면 신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탓하려거든 전생에 사람을 잘못 본 저 자신을 탓해야 했다.

전생에 신수빈은 윤서원을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수많은 혼수를 들고 평양 후부로 시집왔었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윤서원은 어두워진 얼굴로 죽일 듯이 신수빈을 노려봤다.

윤서원은 원래 신수빈이 쥐 죽은 듯 얌전히만 있으면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으로서 끼니 정도는 챙겨 줄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만에 하나 후부의 체면에 먹칠이라도 할 심산이라면 그도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연회 준비가 끝났으니,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연회는 태후마마의 명으로 내무부에서 직접 주관하셨고, 음식 또한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다들 황은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윤서원은 태후를 내세워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평양 후부 대감마님과 큰 마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연민의 눈길로 신수빈을 바라봤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 많은 댁의 여식이면 뭐한담. 곧 있으면 저 아리따운 외모도 사라지고 이 집안을 먹여 살릴 처지가 될 터인데.'

*

신혼부부가 합방에 들어서자 화청에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훑어지고, 신수빈과 몸종밖에 남지 않았다.

신수빈은 여전히 핏기 서린 두 눈으로 붉게 장식된 저택 곳곳을 둘러봤다. 서쪽으로 지는 뜨거운 태양은 마치 그날의 뜨거웠던 온도처럼 세상 만물을 태울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무력함과 절망이 교차하는 기색으로 말없이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몸종은 제 주인이 안쓰럽고 걱정됐다.

'나리께서 첩을 들인 일이 여간 충격이었나 보네.'

"아씨, 이만 돌아가시지요."

몸종의 부름에야 신수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또 전생에 악몽 같은 그날로 빠져있었나 보군...'

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직 평평한 아랫배와 가녀린 허리를 내려다봤다. 회임한 지 석 달 됐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는 혼인 첫날 밤에 회임 된 것이다.

전생에 주서화가 승자의 자태를 뽐내며 사실을 털어놓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주서화와 윤서원이 합동하여 죽인 아이가 실은 오늘날 나라를 군림하는 섭정왕 이도현의 아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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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40화

    국공 부인이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들어 서씨 부인과 윤서령을 바라보았다. "윤 아가씨 머리 위의 비녀에는 ‘빈’ 자가 새겨져 있지 않으십니까?"윤서령의 얼굴은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마치 얼음천지에 홀로 선 듯,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자신을 베어오는 듯했다. 남월정에 모인 이들은 이제야 일의 전말을 모두 알아차렸고, 서씨 부인 모녀에 대한 경멸이 더욱 깊어졌다. 주서화를 바라보는 눈빛에도 의미심장한 빛이 어렸다. 내실의 이런 암투를 누구보다 잘 알지만, 윤가처럼 이렇게 보기 흉하게 구는 집안은 드물었다.국공 부인은 금비녀를 신수빈에게 돌려주며, 부채를 가볍게 흔들었다. 윤서령을 바라보는 얼굴에는 경멸의 빛이 역력하였다.신수빈은 금비녀를 들고 멍하니 서 있는 윤서령 앞으로 다가갔다. 손에 든 비녀를 그녀의 머리에 꽂아주며, 부드럽게 미소지었다."지금은 제가 윤가의 사람이 되었으니, 이제 한 식구입니다. 아씨께서 이 비녀를 좋아하거든 가져다 쓰시지요. 원래 한 쌍이니, ‘수’ 자가 없는 건 온전치 못하답니다."신수빈의 말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었다. 그녀의 빼어난 미모는 정원의 온갖 꽃도 무색하게 하였다.윤서령은 더 이상 이 자리에 남아 있을 면목이 없었다. 머리의 비녀를 뽑아 바닥에 내던지고, 얼굴을 감싼 채 울면서 달아났다.서씨 부인는 일이 이렇게 되어버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딸이 달아나는 모습을 보자, 분노와 수치가 한꺼번에 밀려와 신수빈을 향해 욕설을 퍼부으려 했다.바로 그때, 뜰 밖에서 누군가 인사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씨 부인의 욕설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삼켜졌다."불효 손자 윤수혁, 할머니께 문안드립니다. 할머니, 부디 만수무강하시옵소서."문밖에서 부는 바람과 함께, 검푸른 옷차림의 한 인물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준수한 이목구비에 시원스러운 기운이 감돌았고, 걸음걸이마다 늠름하고 당당한 풍채가 흘렀다. 우뚝 솟은 산처럼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속박받지 않는 가운데 세상의 풍파를 겪은 듯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9화

    주서화가 나서서 말하자, 자리에 있던 부인들이 신수빈을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졌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당당한 말에 거의 속을 뻔했으나, 이제 와서는 사실이 아닌가 싶어 의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서씨 부인는 요즘 주서화의 행실을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주서화가 자기 편을 들어주었고 큰 도움이 되었다. 서씨 부인는 기세가 등등해져 목소리를 높였다."신씨 집안의 가풍이니, 절개이니, 내가 보기엔 제 분수를 모르는 천한 집안일 뿐이다. 내 아들은 본래 서화처럼 황실의 귀한 규수를 맞이해야 했거늘, 너희 신씨가 더러운 수를 써서 우리 후부의 정실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후부에 들어와서는 본분도 모르고, 손버릇도 나쁘며, 감히 큰소리로 남을 모함하다니! 우리 윤가에는 너 같은 여인이 집안을 더럽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자리에 있던 부인들은 모두 구경거리가 생겨 즐거워하며, 누구도 나서서 말리지 않았다. 서씨 부인이 신수빈을 마음껏 조롱하게 내버려두었다.윤 노부인은 평소부터 자신의 며느리가 재물을 탐하고 우매하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 어미와 딸이 한 말이며, 주서화가 한 말까지도, 한 글자도 믿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이 ‘며느리의 혼수를 탐내 훔쳤다’는 소문이 서씨 부인 모녀에게 씌워진다면, 윤가의 어린 딸들은 앞으로 좋은 혼처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임을 알았다.서씨 부인이 실컷 퍼붓자, 윤 노부인은 지팡이로 ‘쾅’ 소리를 내며 바닥을 내리쳤다. 그 소리만으로도 위엄이 느껴졌다."이제 그만들 하거라! 오늘 일은 여기서 끝이다. 더는 입에 올리지 말라!" 윤 노부인이 단호히 말하자, 서씨 부인도 더 이상 감히 나서지 못했다. 이미 목적을 달성했으니 더 할 말도 없었다.한편, 청하는 옆에서 속이 타들어 갔다. 분명히 아씨의 금비녀인데, 윤가 사람들은 도둑이나 다름없었다!청하가 앞으로 나서서 변명하려 하자, 신수빈이 슬쩍 그녀를 붙잡았다. 신수빈은 조금도 당황하거나 화난 기색 없이, 차분하고 당당하게 윤 노부인 앞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8화

    이렇게 말하며 신수빈은 청하를 시켜 미리 준비해두었던 금비녀를 내오게 하였다.자리에 있던 부인들은 모두 세상 물정에 밝은 이들이라, 신수빈 머리 위 장신구를 한번 훑어보고, 윤서령을 다시 한번 훑어보았다. 속으로 모든 사정을 훤히 꿰뚫어 보았다.신씨 집안은 재물이 나라에 견줄 만큼 부유하여, 신씨가 윤가에 시집올 때 가져온 혼수는 그야말로 실로 십리홍장이라 모두의 부러움을 샀다. 그런데 이제 겨우 넉 달 남짓 시집온 사이에, 머리의 비녀며 몸의 장신구가 모두 이처럼 소박해진 것이다.반면에 윤서령은 몸에 걸친 비단이며, 패옥과 진주, 비녀까지 하나같이 사치스럽기 그지없었다.신수빈의 이 한마디는 분명히 윤서령이 남의 물건을 묻지도 않고 가져갔다는 뜻이었다. 부인들은 모두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들어, 고개를 숙이고 차를 음미하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았다.윤서령은 설마 신수빈이 이렇게 대놓고 망신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얼굴이 금세 붉게 달아올랐으나, 이 자리에서 당황해선 안 된다는 걸 잘 알았다. 오늘 이 자리는 각 가문의 부인들이 미혼 처녀들을 살피는 중에, 만약 새언니의 혼수를 강제로 빼앗았다는 평판이 돌아버리면, 좋은 혼처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었다. 윤서령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마치 놀란 듯 말했다."이 금비녀는 어머니께서 제 계례식 때 준비해 주신 것입니다. 어찌하여 새언니께 있습니까?"신수빈은 윤서령이 체면을 중히 여길 줄 알고, 느긋하게 대답했다. "이 비녀가 아씨의 계례 예물이란 말입니까?"서씨 부인도 덩달아 당황하여, 신수빈이 윤서령과 다툴까 두려워 얼른 중재에 나섰다. "그래, 이 금비녀가 어찌 네 손에 들어갔느냐? 서령이가 찾느라 애를 먹었겠구나. 네가 마음에 들면, 내가 장차 사람을 시켜 한 쌍 더 만들어줄 것이니, 굳이 서령이 것을 가져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서씨 부인는 평소 신수빈이 뭐든 자신의 잘못으로 돌리고, 반박하지 않는 성격임을 잘 알고 있었다.그래서 이번에도 자신이 금비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7화

    윤 노부인은 사람의 부축을 받으며 밖에서 들어왔고 자리에 있던 이들은 모두 일어나 윤 노부인께 생신을 축하드렸다. 윤 노부인은 환한 미소로 모두를 맞이하였다.이때 시녀들이 연이어 과일과 다과를 내오기 시작하였다. 모두가 손 가까이에 놓인 신선한 여지와 더위를 식혀주는 양매 여지 음료를 보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이 시절의 여지는 매우 귀한 것이거늘, 하물며 남쪽 지방은 얼마 전까지도 전왕조의 잔당이 들끓고, 도적과 도망병이 횡행하여 세상이 어지러웠다. 진상되는 여지도 극히 적어 오직 태후의 궁에만 바쳐지는 법이었다.그런데 이 평양 후부에서 손님을 대접하는 데 이렇게 귀한 여지를 내놓다니!주서화는 사람들 눈빛에 담긴 놀람과 부러움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얼굴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어렸다."여러분, 천천히 드십옵소서. 이 양매 여지 음료는 오늘 아침에 막 들어온 신선한 양매와 여지로, 전왕조 궁중의 어용 양조 대가가 친히 빚은 것이옵니다. 여지도 막 도착하여 빙고에 한 시진 담가두었으니, 시원하고 맑으니 부디 맛보시옵소서."새 왕조가 세워진 지 불과 이십 년, 전왕조는 장강의 험준함을 의지해 강을 경계 삼아 나라를 나누어 다스렸으니, 이 수년간 조정에서는 끊임없이 전조를 토벌하고 각지의 난을 평정하였다. 지난해에야 비로소 섭정왕이 조정으로 돌아와 천하가 겨우 안정되었다.왕후나 공작 집안이라도 이처럼 정교한 연회는 보기 힘들었다. 이것이 그저 더위를 식히는 음료일 뿐이니, 뒤에 어떤 호화로운 음식들이 이어질지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사람들 눈에는 부러움이 가득했고, 역시 황실의 군주는 다르다며, 이런 호사는 평범한 집안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라 속삭였다.이때 자리한 이들은 너도나도 주서화을 칭찬하기 바빴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서화가 혼례도 치르지 않고 먼저 아이를 가져 첩이 된 것을 손가락질하던 일은 까맣게 잊은 듯하였다.정국공 부인은 서씨 부인 곁에 앉은 소녀가 단아하고 얌전하며 자태가 고운 것을 보고, 그가 서씨 부인의 적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6화

    옹왕비의 지아비 옹왕야는 선황의 사촌 동생이자 섭정왕의 사촌 형님이기에, 예전의 일들을 자연스레 잘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옛이야기를 꺼내니, 모두가 속으로 짐작이 갔다. 섭정왕께서 마음에 둔 이가 바로 현 태후라는 사실을, 하지만 아무도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였다."그걸 어찌 알겠습니까? 섭정왕께서 정실을 맞으신다면야 우리가 모를 리 없지만, 첩을 들이신 일까지야 저희 같은 외인은 알 도리가 없지요." 다른 부인들은 섭정왕 이야기가 나오자 여전히 두려움이 남아 있어 말을 아꼈고, 그의 내실 일을 함부로 논하지 못하였다."섭정왕께서 평소 국사를 돌보시느라 바쁘시니, 내실에 몇몇 첩실이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부인들은 섭정왕의 내실에 첩이 생겼다는 소문을 듣고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섭정왕께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으신다 하여 감히 생각조차 못 했으나, 이제 첩이 생겼다 하니 혹여 기회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는 이도 있었다.그 중, 녕원후 부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옹왕비 곁에 다가와 앉으며 부드럽게 웃었다. "말이 나온 김에, 저희 집에도 혼기가 찬 여식이 몇 있습니다. 감히 자랑하자면, 하나같이 꽃처럼 고우며, 단아하고 어질지요. 왕비마마님의 덕을 입어 좋은 혼처를 얻게 된다면, 평생 잊지 못할 은혜가 될 것입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섭정왕의 내실 이야기를 했는데, 녕원후 부인이 이런 말을 하니, 누가 보아도 섭정왕 저택에 딸을 들이려는 속셈이 뻔히 드러났다.옹왕비가 어찌 그녀의 속내를 모를 리 있으랴.그녀가 담담히 한마디 건넸다. "내가 알기로, 댁의 적녀는 작년에 이미 출가하였다지요? 집에는 아직 출가하지 않은 서녀들만 남았겠군요?"녕원후 부인은 개의치 않고 계속 웃으며 말했다. "왕비마마 말씀이 옳으시옵니다. 서녀들이긴 하나, 용모와 인품은 흠잡을 데 없지요. 다만 서출이라 높은 집안 정실로 들이기엔 어렵겠으나, 첩실로라도 들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35화

    다음 날 아침, 신수빈이 잠에서 깨어나자 청하가 머리를 빗겨주며 근심스런 표정으로 말했다.“주서화 부인 쪽에서 며칠 전에 저희 창란원 하녀 네댓을 내보냈사온데 오늘은 또 평양 후부에 손님이 많다며 일손이 부족하다고 사람들을 모두 불러갔습니다. 지금은 저랑 금자, 은보 세 명만 남았습니다. 방금 전에도 또 사람을 보내 소인더러 전정으로 나가 시중들라 하던데 소인은 아씨의 몸종이지 그쪽을 시중드는 자가 아니잖습니까.”신수빈은 주서화가 청하를 데려가려 사람을 보냈다는 말에 살짝 눈썹을 치켜올렸다.전생에 윤 노부인 생신 때 자신이 살림을 맡고 있었고 주서화가 그 틈을 타 청하를 함정에 빠뜨려 전정에서 추문을 일으켰었다.이번에도 청하를 불러 같은 수를 쓰려는 것이 분명했다.“넌 가지 말고 금자를 보내. 오늘은 내 곁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말거라.” 신수빈이 청하에게 당부했다.청하는 곧장 대답하고 금자와 은보에게도 당부했다.“오늘 누가 너희에게 먹을 것, 마실 것을 준다 하면 반드시 조심해야 한다.”“예, 마님.”“내가 어제 부탁한 일은 잘 처리하였느냐?” 신수빈이 은보에게 물었다. 청하는 주로 내실에서 움직이기 때문에 바깥일은 대부분 은보에게 맡겼다.“마님, 모두 처리하였습니다.”“오늘 한 가지 더 맡길 일이 있어. 잘 처리하면 상을 내릴게.”“마님, 말씀만 하십시오!”신수빈은 그녀가 주먹을 쥐고 군중 예법으로 인사 하는 걸 보고 살짝 미소 지으며 손짓해 가까이 오게 한 뒤 귓가에 대고 몇 마디를 속삭였다.“기억해. 깔끔하게 처리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 해.”“염려 마시옵소서. 이런 일쯤은 소인에게 식은 죽 먹기입니다.” 은보는 이렇게 말하고 곧장 밖으로 나갔다.신수빈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청하가 머리를 빗겨주려 하자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청하가 금비녀를 꺼내 머리에 꽂으려 하자 신수빈은 손을 들어 막았다.“좀 더 수수한 걸로 골라줘.”“오늘은 노부인 생신이니 너무 수수하면 서씨 부인께서 아씨를 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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