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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Author: 정대천
"작은 마님, 작은 마님..."

귀에 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신수빈의 귀를 뚫고 들어왔다.

‘어머님을 모시던 이의 목소리였던 것 같은데...'

"다들 작은 마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큰 마님 측에서 이미 여러 번 재촉을 해오셔서 서둘러 가셔야 합니다. 그리고 큰 마님께서 이 혼사는 폐하께서 친히 내리신 혼사이니 작은 마님께서 마음이 편치 않으시더라도 오늘만큼은 부디 후부의 체면을 위해 첩실차(妾室茶:새로 들어온 첩이 올리는 차)를 들라 하십니다."

내실에 들어선 오상댁은 아직 꾸미지 않은 신수빈의 모습에 몸종들을 꾸짖기 시작했다.

"뭣들 하는 게냐? 어서 작은 마님의 치장을 돕지 않고! 나리께서 새 부인을 맞이하는 길시를 놓친다면, 네들 명줄을 내놓아야 할 것이야!"

그렇게 얼떨결에 신수빈은 꼭두각시 인형처럼 하인들에 둘러싸여 꾸며졌다. 능화경(菱花鏡:일종의 거울)에 비친 그녀의 눈동자는 한없이 맑았다. 의아함에 신수빈은 손을 들어 자기 얼굴을 매만져봤으나 불에 그을린 흉은커녕 오히려 살결이 부드러웠다.

'설마... 환생이라도 한 거야? 윤서원이 첩을 들인 그날로?'

아직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신수빈은 어느새 끌려가다시피 전청(前廳:현관홀)에 당도해 있었고 밖에서 터지는 폭죽 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화려한 등불 사이로 남녀가 붉은 비단을 손에 잡은 채 서서히 전청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렇다.

모든 액운의 시작은 이날부터였다.

혼인한 지 불과 석 달 만에, 이재민을 구하러 나간 윤서원은 태후의 손에서 자란 서화 군주와 대전 앞에서 무릎을 꿇고, 서로 진심으로 사모한다고 말했었다.

그야말로 일파만파였다.

갓 혼인한 정실 신수빈은 권세 있는 가문 출신은 아니었지만, 신씨 가문은 전조(前朝:전대의 왕조) 때부터 이미 나라를 대적할 만큼 부유했고, 지금의 신조에 돈과 식량을 줄곧 제공해 온 집안이었다. 비록 봉작은 얻지 못 했지만 조정에서 해금을 해제한 뒤 바다로 나가는 특권을 신씨 가문에게 내린 덕에 남쪽의 관원들조차 그들에게 아부를 떨어야 했다.

그랬기에 신씨 가문의 사람들은 이런 모욕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윤서원은 신수빈을 부인으로 맞이하기 위해, 신씨 가문 저택 앞에 무릎을 꿇고, 이번 생은 오직 그녀만을 사랑하겠노라 하늘에 맹세한 바 있었다. 그 맹세에 신씨 가문 사람들은 독녀인 신수빈과의 혼인을 허락한 것이다.

그러나 혼인한 지 고작 석 달 만에 윤서원이 다른 여인과 함께 조정의 대전 앞에서 서화 군주를 사모한다고 말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어린 황제는 아직 세상 이치를 알지 못했다. 그의 귀에 맴도는 소리는 오직 노발대발하는 태후의 목소리와 신하들의 의논 소리뿐이었다.

주서화를 아꼈던 태후는 그녀를 평처(平妻:정실은 아니지만 정실에 준하는 부인)로 올려, 정실부인인 신수빈과 나란히 하길 바랐으나 대신들과 백성들의 항의에 결국 주서화의 군주 칭호를 박탈하고 평양후 세자의 귀첩(贵妾:일반 첩보다 귀한 신분)으로 혼인을 하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칭호를 박탈한다고 한들, 혼례는 여전히 예부가 나서서 주관하였기에 공주의 혼례와 다를 게 없었다.

이는 태후의 뜻을 고스란히 보여줬고 감히 그런 귀첩을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전생에 혼령으로 지낼 당시, 주서화가 털어놓던 혼인날 합방의 진실과 그녀가 집으로 들어온 후 저지른 일들이 떠오른 신수빈의 눈에는 독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악귀가 되더라도, 이번 생은 내 반드시 이 가문 사람들과 함께 지옥으로 가겠어!'

곧 천지 신령님께 절을 올린 윤서원과 주서화가 신수빈의 앞으로 다가왔다.

윤서원의 무정함과 득의양양해하던 주서화의 표정, 그리고 뜨거운 불길 속에서 살려달라는 애원하던 어린 자식의 모습.

그 모든 게 눈앞에 아른거리자 신수빈의 두 눈은 점차 핏기가 서리고 가슴에서 분노가 들끓기 시작했다. 신수빈은 차오르는 역겨움에 순간 목구멍에서부터 비릿한 냄새와 함께 피가 솓구쳤지만 그녀는 애써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대가문의 어두운 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그녀는 오늘 같은 날 그 어떤 흠 잡힐 일도 하면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오히려 광증으로 몰려 갇힐 게 뻔했고 이를 빌미로 신씨 가문을 착취할 것도 뻔했다.

윤서원은 재해 구역에서 돌아온 뒤, 주서화와의 혼인으로 바삐 돌아쳤기에 오늘 신수빈을 처음 보는 것이었다.

화청(花廳:화원 등에 설치된 비교적 크고, 아름답게 장식된 응접실)에 앉은 그녀는 얼굴에 엷은 분칠을 했음에도 기품이 화려해 봄빛처럼 밝게 빛났고, 고개를 살짝 숙여 내려트린 눈매마저 청초해 보였다.

화려한 옷차림의 주서화도 그런 그녀에게 반도 못 미칠 정도였으니, 신수빈의 미모는 실로 아름다웠다.

천하 으뜸 가는 미녀라는 칭호는 역시 괜히 붙은 별명이 아니었다.

하지만 신혼 첫날밤을 떠올린 윤서원은 이내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눈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반면, 무릎을 꿇은 채 하인에게서 차를 받아 든 주서화는 버들개지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언니, 차를 올리겠습니다."

전생의 신수빈은 질투와 억울함에, 분을 이기지 못하고 차를 받아들이지 않았었다. 그를 본 윤서원은 여린 몸의 주서화가 무릎을 오래 꿇고 있지 못한다며, 난처하게 굴지 말라 했었다.

그 한마디에 경중에 소문이 무성해졌다. 신수빈이 질투심에 태후의 체면도 세워주지 않고, 공공연히 서화 군주를 괴롭힌다고.

환생한 지금의 신수빈은 여전히 차를 주서화의 얼굴에 들이붓고 싶었다. 하지만 이성의 끈이 그녀를 말렸고, 그녀는 한 손으로 찻잔을 든 채 주서화를 일으켜 세우며 웃는 얼굴로 응했다.

"앞으로 한 집식구이니, 이리 예를 차릴 필요 없다. 회임한 지 두 달이나 된 몸으로 무리하지 말고 어서 일어나거라. 복중에 태아가 더 중요한 법이지 않느냐."

얼굴이 삽시에 창백해진 주서화가 놀란 눈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그러다 이내, 실언했음을 깨닫고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언니, 그런 말을 어찌 함부로 하십니까? 전 결백한 몸으로 이 집안에 시집온 것입니다. 근데 어찌 절 이리 욕보이시는 겁니까?"

말을 마친 주서화가 눈물을 훔치며 다시 울먹였다.

"저도 압니다. 언니께서 태후마마가 하사하신 이 혼사를 아니꼽게 여긴다는 것을요. 하지만 저와 오라버니는 진심으로 서로 연모하고 있습니다. 제가 군주라는 칭호를 마다하고, 첩실로 들어왔는데도 정녕 제가 마음에 들지 않으신 겁니까? 그래서 이리 절 욕보이시는 겁니까?"

전생에 주서화와 함께 지낸 몇 해 동안 신수빈은 그녀의 얕은수를 진작에 파악해 왔었다. 주서화는 늘 이런 수단으로 사람들의 동정을 사곤 했었으니.

아니나 다를까, 주변에서 구시렁거리는 손님들의 목소리가 하나둘씩 들리기 시작했다.

"회임한 지 벌써 두 달이라니. 그때는 정실부인과 혼인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지 않소?"

"어디 그뿐이오? 그때는 나리가 남쪽에서 수해복구를 하고 있을 때고, 백성들이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잖소. 그런데 어찌 저런 망측한 짓을..."

"서화 군주는 정원왕의 자손인 데다 태후마마의 손에서 자란 귀한 분이신데, 그런 일을 저지를 사람으로 보이진 않소."

"옳소. 저 정실부인이 탐탁지 않은 마음에 거짓 발언으로 군주의 명성을 더럽히고 있을 줄도 모르잖소."

사람들의 의논에 따라 상황은 점점 뒤바뀌고 있었다.

"그러냐?"

신수빈이 짐짓 놀란 듯했고, 맑디맑은 눈망울에는 의혹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난 서방님께 들은 얘기를 그대로 했을 뿐인데 거짓일 리가? 나와 혼례를 올린 뒤로 서방님께서는 재해 구역으로 바로 떠나셨다. 서방님께서는 너의 애틋한 마음을 헤아려, 천리를 달려 널 만나러 갔다가 아이가 생겼다고 하던데... 날짜를 따져보면 지금쯤 아마 두 달 하고 보름은 되었겠구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다. 이젠 한 집 식구인 마당에 내가 너희 모자를 잘 돌볼 테니."

주서화가 도움의 눈길로 윤서원을 바라봤다. 연약하고 무력한 그 눈빛은 마치 왜 연관 없는 사람에게 이 일을 알렸는지 그에게 캐묻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뜻을 알아챈 윤서원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다는 거냐?"

그 말에 모든 손님이 일제히 신수빈을 바라봤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신수빈이 자책하듯 서서히 입을 열었다.

"얼마 전, 전 관례대로 어머님께 문안드리려고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나 날이 더운 탓에 그만 정신을 잃고 말았습니다. 눈을 떴을 때는 몸종들에 의해 안방으로 옮겨진 뒤였고, 정신이 들 때쯤 우연히 서방님과 어머님의 대화를 듣게 된 것입니다."

"다 제 탓입니다. 제가 미리 알았더라면 진작에 서화를 데려와 돌봤을 텐데... 그럼, 저들 모자가 이 더운 날에 명분도 없이 서방님을 따라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테죠."

예상치 못한 답변에 윤서원을 포함한 윤씨 가문 사람들의 안색이 달라졌다. 자리에 있던 손님들도 어리석은 자들은 아니었기에, 단연 신수빈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온 집 식구가 이 사실을 알고도, 본처를 속였다는 말 아니요?"

"평소에 자애로워 보이던 평양후 큰 마님이 며느리를 이리 가혹하게 대할 줄이야."

"게다가 한 해 중 제일 더운 이 유월에 며느리를 마당에 저리도 오래 세우다니! 관례대로라고 하는 걸 보니 분명 하루이틀 아니었을 테죠."

"저 작은 마님도 참으로 가엽지... 혼례를 올린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구박을 받고 살다니. 사람을 이리 대할 거였으면 애당초 떠들썩하게 구혼은 왜 한 것인지."

"그건 자네가 몰라서 그렇네. 저 작은 마님의 친정댁은 우리 대주 왕조에서 제일가는 부자일세. 섭정왕께서 남하하여 반란을 평정했을 당시, 신씨 가문에서 군자금과 기계, 병마, 식량은 물론 돈까지 전폭적으로 지지했다지."

"나도 그 얘기는 들은 적 있소. 섭정왕께서 천하를 평정한 뒤로 남쪽에서 장사를 더 크게 한다 들었소. 게다가 지금은 바다로 나가는 특권까지 쥐고 있어 국고를 능가하는 부를 갖고 있다 하오. 어쩌면 이 점을 노리고 혼례를 올린 것은 아닐지..."

사람들의 의논 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고, 그들이 하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윤서원의 정곡을 찔러댔다.

애당초 신수빈과 혼인한 목적이 바로 돈이었으니.

반면 신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터트릴 뿐이었다.

탓하려거든 전생에 사람을 잘못 본 저 자신을 탓해야 했다.

전생에 신수빈은 윤서원을 심성이 착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수많은 혼수를 들고 평양 후부로 시집왔었다.

그러나 이런 처지가 될 줄 그 누가 알았을까.

윤서원은 어두워진 얼굴로 죽일 듯이 신수빈을 노려봤다.

윤서원은 원래 신수빈이 쥐 죽은 듯 얌전히만 있으면 평양 후부의 작은 마님으로서 끼니 정도는 챙겨 줄 생각이었으나, 그녀가 만에 하나 후부의 체면에 먹칠이라도 할 심산이라면 그도 손 놓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연회 준비가 끝났으니, 다들 자리에 앉아 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연회는 태후마마의 명으로 내무부에서 직접 주관하셨고, 음식 또한 태후마마께서 직접 하사하신 것이니 다들 황은을 마음껏 누리십시오."

체면이 깎일 대로 깎인 윤서원은 태후를 내세워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제야 평양 후부 대감마님과 큰 마님이 손님들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연민의 눈길로 신수빈을 바라봤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돈 많은 댁의 여식이면 뭐한담. 곧 있으면 저 아리따운 외모도 사라지고 이 집안을 먹여 살릴 처지가 될 터인데.'

*

신혼부부가 합방에 들어서자 화청에 있던 사람들도 뿔뿔이 훑어지고, 신수빈과 몸종밖에 남지 않았다.

신수빈은 여전히 핏기 서린 두 눈으로 붉게 장식된 저택 곳곳을 둘러봤다. 서쪽으로 지는 뜨거운 태양은 마치 그날의 뜨거웠던 온도처럼 세상 만물을 태울 것만 같았다.

두려움과 무력함과 절망이 교차하는 기색으로 말없이 서 있는 그녀를 보며 몸종은 제 주인이 안쓰럽고 걱정됐다.

'나리께서 첩을 들인 일이 여간 충격이었나 보네.'

"아씨, 이만 돌아가시지요."

몸종의 부름에야 신수빈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

'내가 또 전생에 악몽 같은 그날로 빠져있었나 보군...'

그녀는 고개를 숙여 아직 평평한 아랫배와 가녀린 허리를 내려다봤다. 회임한 지 석 달 됐지만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뱃속의 아이는 혼인 첫날 밤에 회임 된 것이다.

전생에 주서화가 승자의 자태를 뽐내며 사실을 털어놓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주서화와 윤서원이 합동하여 죽인 아이가 실은 오늘날 나라를 군림하는 섭정왕 이도현의 아이라는 사실을 영원히 알지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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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도현이 어린 황제의 침전에서 나왔을 때, 하늘은 잔뜩 흐려져 있었고 금방이라도 비바람이 몰아칠 듯했다.근정전으로 돌아가던 그는 오늘 왕부에서 아직 아무런 소식도 전해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근정전에 도착하면 내관을 보내 상황을 알아보게 하려고 생각했던 차에, 윤수혁이 급히 찾아왔다.“왕야, 황성에 역병이 번진 근원을 찾아냈습니다.”“어디냐?”“용거 수원지입니다.”그 말을 듣는 순간, 이도현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장안성은 여덟 갈래 물줄기가 둘러싸고 있어 물이 부족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황실에서 사용하는 물은 일반 백성들과 달랐다.선황이 이곳에 도읍을 세운 뒤, 황형이 재위하던 십 년 동안 황성의 시설을 더욱 정비하면서 황실 전용 수로를 하나 만들었다.산골짜기의 샘물을 끌어와 별도의 수로를 통해 황성으로 공급했는데, 이를 용거라 불렀다.혹시라도 누군가 수로에 손을 쓸까 염려해 용거는 밤낮으로 엄중히 지켜졌다.“가 보자.”이도현은 윤수혁과 함께 용거 수원지로 향했다.하지만 최근 역병 사태로 인력이 부족해지면서 수비는 눈에 띄게 허술해져 있었다.그들이 도착했을 때는 마침 교대 시간이라 자리를 지키는 병사는 단 한 명뿐이었다. 물어보니 이곳을 지키던 병사들 역시 모두 병에 걸린 상태라고 했다.윤수혁이 상류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저는 저곳에서 대량의 동물 분뇨가 쌓여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아마 수원이 오염된 원인인 듯합니다.”“올라가 보자.”두 사람은 곧장 상류로 향했다.얼마 지나지 않아 수원지 아래로 이어지는 수로 곳곳에 동물 분뇨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이 보였다.이도현은 한눈에 그것이 말똥임을 알아보았다.전장을 누비는 사람으로서 평생 말을 상대해 왔으니 모를 리 없었다.이곳은 용거 수원지였다. 늘 사람이 지키는 곳인 만큼 누군가 말을 방목할 리도 없었다.황실의 어마원 역시 뒷산에 있을 뿐, 이 수로의 유역과는 전혀 관계없는 곳이었다.그런데도 이곳에 말똥이 나타났다는 건, 누군가 고의로 가져다 놓았다는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51화

    그러다 황제가 위독하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더는 병든 척을 이어 갈 수 없었던 그녀는 곧장 황제를 보러 가겠다며 나섰다.하지만 진하빈과 황 상궁이 필사적으로 그녀를 막아섰다.“태후 마마, 부디 신중히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쯤 왕야께서도 폐하 곁에 계실 터입니다. 이때 태후 마마께서 모습을 드러내신다면, 그동안 병을 가장해 오셨다는 사실을 왕야께서 반드시 알아차리실 것입니다.”“그래도 가야 한다! 어쩌면 내 아들을 해친 것도 그 사람일지 모른다. 스스로 황위를 차지하려는 속셈 아니겠느냐! 내가 분명히 말해 두마. 어림도 없다. 설령 내 아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선황께는 아직 황자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 사람 차례는 절대 오지 않을 것이다!”태후는 거의 이성을 잃은 사람처럼 몸부림치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그때 진하빈이 태후의 발치에 무릎을 꿇고 간절히 청했다.“태후 마마, 소인을 믿어 주신다면 저를 보내 주십시오. 제가 폐하를 곁에서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반드시 폐하를 무사히 지켜 내겠습니다!”태후는 진하빈을 바라보았다.진하빈이 어떤 경위로 궁에 들어왔는지, 그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그래서 태후는 그녀가 자신과 한마음이라고는 믿지 못했다.태후의 의중을 읽은 듯 진하빈이 서둘러 말했다.“태후 마마, 소인은 책사 어르신의 사람입니다. 지난번 궁에 들어오셨을 때 책사 어르신께서 약 한 병을 주시며, 폐하께 위급한 일이 생기면 쓰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이제야 알겠습니다. 분명 폐하께 이런 액운이 닥칠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약을 남겨 두신 것입니다.”그 말에 태후의 눈이 커졌다.“정말이더냐?”“태후 마마께서 소인을 믿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헌데 책사 어르신은 믿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말을 마친 진하빈은 늘 지니고 다니던 약병을 공손히 바쳤다.태후는 그 약병을 바라보다가 조금씩 마음을 가라앉혔다.지금 자신이 가 봐야 달라질 것은 없었다.오히려 진하빈이 가면 황제의 목숨을 구할 수도 있었다.“좋다. 내가

  • 부디, 그 허리를 굽히소서   제550화

    “그건 황성시가 일을 소홀히 한 탓이지, 아주버님 잘못은 아닙니다.”신수빈이 그렇게 말하자, 윤수혁은 그녀의 미간에 어린 근심을 바라보다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제가 그 사람을 호국사에서 데려와 경성으로 호송하던 중이었습니다. 마차 안에서 한 차례 잠깐 눈을 뜬 적이 있었습니다. 다만 머리를 크게 다친 탓에 오래 의식을 유지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래도 그때 한마디를 남겼는데, 이상하게도 그 말이 계속 마음에 걸립니다.”“무슨 말을 했나요?”신수빈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목소리마저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었다.그녀는 면포로 입과 코를 가리고 있었지만, 오히려 밖으로 드러난 눈매는 더욱 선명하고 아름다웠다. 빛나는 듯 생동감 있는 그 눈빛에 윤수혁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글쎄요... ‘산속에 병이 있다’는 말인지, 아니면 ‘산속에 병사가 있다’는 말인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충 그런 느낌이었습니다.”신수빈의 눈동자가 순간 크게 흔들렸다.윤수혁은 그녀의 길고 고운 속눈썹이 나비 날개처럼 가늘게 떨리는 것을 보았다.그 아름다운 눈동자에 스친 놀라움의 빛은 보는 이의 심장까지 울릴 만큼 선명했다.그는 그 찰나의 모습을 거의 탐하듯 바라보다가 더는 바라볼 수가 없어, 그녀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조용히 한 걸음 물러섰다.신수빈은 생각하면 할수록 그 말이 ‘산속에 병사가 있다’는 뜻이라는 확신이 들었다.그렇지 않고서야 장씨 가문이 그토록 많은 돈을 모을 이유가 없었다.“장씨 가문이 병사를 기르고 있었군요. 사병을 말이에요.”윤수혁 역시 눈을 크게 떴다. 그러고는 곧바로 미간이 깊게 좁혀졌다.“만약 사실이라면 즉시 왕야께 알려야 합니다.”신수빈은 눈을 내리깔았다.이도현처럼 총명한 사람이 장한월이 아들을 죽인 이유를 모를 리 없었다.그것이 자신의 죄를 감추고 남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기 위한 수작이라는 사실도 분명 알고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그는 끝내 못 본 척하며 장한월을 감싸 주었다. 그만큼 장씨 가문이 그의 마음속에서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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