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윤택은 하지율의 심각한 표정을 보며 불안한 예감에 휩싸였다.고지후 역시 무언가를 감지한 듯 얼굴이 굳었다.“하지율, 뭘 하려는 거야?”하지율은 고지후의 물음을 무시한 채 고윤택을 바라보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엄마가 요즘 집에 들어오지 않아서 너도 눈치챘을 거라고 생각해. 엄마는 이미 짐을 다 정리했어. 이제 이 집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거야.”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윤택아, 너한테 꼭 알려줘야 할 게 있어. 난 네 아빠와 이혼할 거야. 너의 양육권은 아빠한테 가게 될 거고 앞으로는 아빠랑 함께 살게 될 거야.”고윤택은 멍한 표정으로 되물었다.“이혼이요?”다섯 살인 그는 이혼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하지율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고지후의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이마를 찌푸린 그의 눈썹 사이에는 분명한 분노가 비쳤다.“하지율, 꼭 아이 앞에서 이런 말을 해야겠어?”하지율은 어이없다는 듯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아이 앞에서 말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어? 애도 알아야 할 권리가 있어. 네 아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유, 평등, 존중을 입에 달고 살았잖아. 하물며...”그녀는 고개를 돌려 고지후를 바라봤다.“네가 나더러 임채아에게 사과하라고 했을 때는, 아이 생각한 적 있어? 날 곤란하게 만들 땐 아이가 안중에도 없었으면서.”고지후의 표정이 굳었다.“나랑 다투는 건 그렇다 쳐도 아이의 말까지 이렇게 따지고 들 거야? 하지율, 윤택이는 남이 아니야. 네 친아들이라고.”하지율은 비웃듯 말했다.“내가 낳은 아이인 건 맞아. 하지만 그거 말고는 내 아들이라고 할 만한 점이 하나도 없어. 네가 말하는 그 친아들은 하루 종일 남 눈치만 보고 아첨이나 하며 살잖아.”고지후는 억누르듯 말했다.“네가 아이한테 사랑받지 못하는 건, 네 문제야. 하지율, 항상 남 탓만 하지 말고 너 자신부터 돌아봐.”하지율은 조용히 그를 바라보다 냉소적인 목소리로 물었
고지후는 하지율이 차에 탄 뒤에도 멍하니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지 않는 모습을 보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왜 그래?”하지율은 대답 없이 한 곳만 멍하니 응시했다.그 시선을 따라간 고지후는 조수석 앞에 붙은 ‘전용석’ 스티커를 보고 눈빛이 어두워졌다.잠시 후, 그는 몸을 앞으로 기울였고 그의 상반신이 하지율 위로 드리워졌다.하지율은 본능적으로 몸을 살짝 뒤로 빼며 눈살을 찌푸렸다.고지후은 손을 옆으로 뻗어 말없이 안전벨트를 집어 들고 하지율의 어깨 너머로 조심스럽게 감아 채워주었다.예상치 못한 행동에 하지율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그리고 고지후의 낮고 차가운 음성이 그녀의 귓가에 스쳤다.“안전벨트는 매야지.”그 광경을 뒷좌석에서 지켜보던 임채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그러나 곧 어색한 미소를 띠며 말을 건넸다.“하지율 씨, 조수석에 앉더라도 안전벨트는 꼭 매야 해요. 지후가 정말 다정하네요.”하지율은 속으로 냉소를 머금었다.‘그래, 고지후는 참 다정하지. 다른 여자의 물건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 눈앞에 들이밀 정도로.’그녀는 입꼬리를 올리며 대꾸했다.“안전벨트를 채워주는 게 다정한 거라면 임채아 씨는 남자 보는 기준이 좀 낮은 것 같네요.”임채아는 웃으며 마치 장난을 주고받듯 말했다.“그럼 하지율 씨는 어떤 사람이 다정하다고 생각하세요?”하지율은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제가 전화하면 무슨 일이 있어도 곧장 달려와 주고, 제가 잘못했어도 제 편부터 들어주며 배려해 주는 사람이요. 제가 갖고 싶어 하는 물건이 있으면 제 것이 아니더라도 선물해 주고, 저의 눈물 한 방울만 봐도 저를 불쌍하게 여겨서 이성을 잃고 저를 대신해서 말해주는 그런 사람이요.”“그리고...”하지율은 고개를 돌려 임채아를 향해 웃으며 이어서 말했다.“제가 아플 때 직접 약을 챙겨주지 않으면서 어떻게 진심으로 저를 소중하게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겠어요.”임채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굳은 미소 위로는 자신이 저격당하고 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제가 돈을 내고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는 건 뭔가를 배우게 하려는 겁니다. 별일도 아닌 일로 불려 와 훈계 들으라고 보내는 게 아니에요.”정기석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단단한 압박감이 담겨 있었다.“아이들 사이 갈등 하나 제대로 해결할 능력도 없다면 이 유치원은 지금 당장 문을 닫아야 할 겁니다.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아이들을 잘못된 길로 이끌지 마시고요.”유치원 선생님들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고개를 숙인 채 말없이 서 있었다.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귀한 집 자제들이었다. 그래서 교사들은 손찌검은커녕 조금이라도 거친 말을 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분위기였다. 결국 문제 상황이 생길 때마다 교사들은 학부모를 불러 상황을 넘길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정기석 앞에서는 그 어떤 책임도 피해 갈 수 없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선생님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아버님 말씀이 맞습니다. 앞으로는 더 신중히 대처하겠습니다.”정기석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하지율에게 서류가 든 봉투를 건넸다.“이거 받아요.”하지율은 봉투를 받아 대충 훑어보다가 곧 내용물을 알아차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감사합니다.”정기석은 곁에 있던 정시온을 바라보며 말했다.“하율 이모는 일이 있으니까 오늘은 아빠랑 같이 집에 가자.”정시온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하율 이모, 오늘은 아빠랑 먼저 갈게요. 내일 다시 와서 피아노 연습할게요.”“그래.”하지율은 손을 흔들며 정시온과 인사를 나눴다.정기석 부자가 떠난 뒤, 선생님들도 하나둘씩 자리를 떴다.잠시 후, 하지율이 조용히 고지후를 향해 말했다.“당신과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고지후는 등을 돌린 채 짧게 말했다.“집에 가서 이야기하자.”유치원에서 대화하기엔 적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지율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세 사람은 유치원을 나와 고지후의 차 앞에 도착했다. 고지후는 임채아의 부은 얼굴을 바라보며 낮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채아의 격해졌던 감정은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순식간에 가라앉았다.그제야 자신이 너무 지나쳤다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예전 같았으면 하지율이 임채아를 조금만 건드렸어도, 그녀가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며 불쌍한 척하면 고지후와 고윤택은 언제나 그녀의 편을 들어주었을 것이다.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정시온의 기습적인 발언에 당황한 데다가 하지율에게 뺨까지 맞으면서 감정이 폭주해 결국 이성을 놓쳐버렸다.“머리가 너무 아파...”임채아는 이마를 짚으며 순간 아차 싶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미안해, 지후야. 또 병이 도진 것 같아...”하지율은 코웃음을 치듯 말했다.“임채아 씨는 하루가 멀다고 아프시네요. 무슨 병이 그렇게 많아요?”이미 정신을 차린 임채아는 그 말에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조용히 눈물만 흘렸다.“하지율 씨, 죄송해요. 시온아, 미안해. 아까 많이 놀랐지?”정기석은 묘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임채아 씨, 아까 일 벌써 잊으신 건 아니죠?”“아니에요.”임채아는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기억하고 있어요. 제가 가끔 감정이 조절 안 될 때가 있어서요.”“그래요?”정기석은 일부러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불치병에 이어 이번에는 감정 기복에 망상까지요? 병이 참 다양하시네요. 그런 사람이 우리 시온이한테 사과까지 하시다니 민망한걸요.”“아닙니다. 제가 잘못한 게 맞는걸요.”임채아는 정시온에게 다가가며 말했다.“시온아, 미안해. 이모가 병 때문에 순간 감정이 격해져서 널 그만 밀치고 말았어. 용서해 줄 수 있을까?”이런 상황은 그녀에게 익숙했다.쓸데없이 변명하는 것보다 순순히 잘못을 인정하고 동정을 유도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물론 속은 부글부글 끓었지만 말이다.정시온은 어른스럽게 웃으며 말했다.“아픈 사람이었군요. 괜찮아요. 용서해 드릴게요.”하지율은 곧 고개를 돌려 말했다.“윤택아, 너는?”예상치 못한 질문에 고윤택은 얼어붙었다.임채아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도
정기석은 말을 멈추고 이내 차갑게 굳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온몸에서는 압도적인 기세가 뿜어져 나왔다.“감히 이 정기석의 아들을 건드린 사람이 누구야?”유치원 선생님들은 조용히 숨을 삼켰다.그들 중 실제로 정기석을 마주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부유하거나 권력 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고지후는 그중에서도 S시를 좌지우지하는 인물로 감히 쉽게 대할 상대가 아니었다.그는 몇 차례 유치원에 직접 찾아와 고윤택을 각별히 신경 써주었고 선생님들 역시 자연스레 고윤택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들은 하지율에게 두 아이를 분리하여 다른 유치원으로 옮기는 방안을 권유했었다.하지만 정시온의 아버지가 등장하자 그들은 자신들이 상대하고 있는 이 남자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정기석은 단 한 마디의 위협도 없이 자연스럽게 하지율의 손을 고지후의 손아귀에서 빼냈다.고지후의 제지가 풀리자 하지율은 주저 없이 임채아의 뺨을 연거푸 내리쳤고 임채아는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고지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정기석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그를 바라보는 탓에 결국 손을 내리고 말았다.고지후는 한 발 앞으로 나서 임채아의 앞을 막아섰다.“하지율, 그만해.”하지율은 손을 내렸지만 고지후를 보지도 않은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임채아 씨, 사과하세요.”임채아는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말 그대로 인생 최대의 굴욕이었다.그녀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이런 모욕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지후야! 저 여자가 날 때렸어. 나를 때렸다고.”임채아의 눈은 벌겋게 충혈됐고 하얗고 곱던 얼굴은 분노에 일그러져 있었다.“저 여자 절대 용서하지 마. 절대 가만두면 안 돼.”임채아의 이성을 잃은 모습을 본 고윤택은 본능적으로 몇 걸음 물러섰다.늘 요정 같고 다정했던 채아 이모가 너무 낯설고 두려웠다.고지후는 낮은 목소리로 임채아를 진정시켰다.“채아야, 먼저 진정하자.”
고윤택의 머릿속은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다.정시온의 행동이 너무도 갑작스러워서 그는 한마디도 내뱉지 못한 채 얼어붙고 말았다.이런 상황은 태어나 처음이었다.정시온의 말 속엔 진실과 거짓이 뒤섞여 있었고 어릴 적부터 거짓말은 절대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아온 고윤택은 지금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전혀 감을 잡지 못했다.그의 얼굴에 드러난 주저함과 혼란스러움은 누구라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뚜렷했다.하지율은 고윤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시온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단번에 꿰뚫어 볼 수 있었다.그리고 더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한 그녀는 임채아의 뺨을 세차게 내리쳤다.“짝!”임채아는 바닥으로 나동그라졌고 하얗던 뺨은 순식간에 붉게 부어올랐다.임채아는 얼굴을 감싸 쥔 채 소리쳤다.“감히 날 때려?”하지율의 눈빛은 싸늘하게 얼어붙어 있었다.그녀는 냉정하고 단호하게 말했다.“그래, 때렸어. 이 아이한테 다시 손대기만 해 봐.”하지율은 남자의 외도는 남자 자신의 문제가 가장 크며 불륜녀는 그저 도화선일 뿐이라고만 생각해 왔다.그렇기에 임채아를 혐오하긴 했어도 직접적으로 해를 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하지만 임채아는 갖은 수를 써가며 고윤택을 세뇌시켰고 부자의 피는 속일 수 없는지 두 사람 모두 여우 같은 임채아한테 제대로 놀아나고 있었다.하지만 이제 죄 없는 아이에게까지 손을 댔다는 사실은 도저히 눈감아줄 수 없는 일이었다.하지율은 속이 뒤집히는 듯 치를 떨었다.‘임채아, 나를 도대체 얼마나 우습게 봤기에 이런 짓까지 저질러?’귀국 이후 줄곧 고지후와 장하준의 보호를 받으며 평온하게 지내온 임채아에게 이런 굴욕은 난생처음이었다.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녀는 소리치며 하지율에게 달려들었다.“하지율, 죽여 버릴 거야!”하지율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움켜잡았고 다시 한 번 뺨을 때리려고 했다.그때, 갑자기 누군가 그녀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낮고도 차가운 목소리가 공간을 가르며 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