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안서현의 얼굴에는 불안이 스쳤다.“그 남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우리가 다른 데로 보내지면 바로 손님을 받기 시작한대...”손님 받는다는 말은 그냥 떠올리기만 해도 온몸이 서늘해졌다.“응.”연정미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침착했다.“드디어 여기서 나가게 되는 거네.”안서현이 놀란 눈으로 연정미를 바라봤다.“드디어 나간다고? 정미야, 그게 무슨 뜻이야?”연정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건... 우리가 여기서 빠져나갈 기회가 생겼다는 뜻이야.”안서현이 멍해졌다.“빠져나간다고?”연정미의 눈동자가 깊게 가라앉았다. 연정미는 고개를 돌려 안서현을 바라봤다.“여긴 방어가 너무 철저해. 우리한테 날개가 있어도 못 나가. 평생 여기에 갇히면 누가 구하러 오지 않는 이상 절대 못 나가.”잠시 말을 멈춘 연정미가 낮게 덧붙였다.“하지만 장소를 옮기면 얘기가 달라지지. 그게 바로 우리가 도망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야.”...연씨 가문은 여전히 연정미를 찾느라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반면 하지율은 평소처럼 출근하며 일상을 이어갔다.도대체 레일 국왕이 어디에 사람을 숨겨둔 건지 연씨 가문과 단보현이 아무리 뒤져도 연정미의 행방은 끝내 드러나지 않았다.연정미의 실종으로 인해 연재영과 심다희의 약혼식도 결국 연기되었다.친동생이 생사도 모른 채 사라졌는데 오빠라는 연재영이 성대하게 약혼식을 올리는 건 아무리 봐도 말이 되지 않았다.최근 하지율의 상승세가 너무 빨라서 지지율이 거의 연재영과 맞먹게 되자 연재영은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예상대로 연재영은 자신의 인맥과 자금력을 동원해 하지율의 프로젝트와 협력 관계를 본격적으로 압박하기 시작했다.점심시간.하지율과 유소린은 식당에서 식사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유소린이 말했다.“난 쟤네가 요즘 연정미를 찾느라 정신없어서 우리까지 신경 쓸 여유 없을 줄 알았는데...”그러자 하지율은 담담하게 대답했다.“당연히 전력으로 연정미를 찾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 때문에 모든 걸
불과 며칠 만에 원래 고귀하고 우아했던 시장의 딸은 온몸이 더러워지고 눈빛이 텅 빈 산송장처럼 변해 있었다.예전의 빛은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싸늘한 공포가 모든 사람의 마음속으로 퍼져 나갔다.연정미는 금발 아가씨가 있는 방 앞을 지날 때마다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그날 밤, 여자들은 방 안에서 무너진 듯 울었다.“나 못 버티겠어. 이런 생활 정말 더는 못 버티겠어. 시장의 딸도 저렇게 됐는데 나도 나중에 저렇게 될까 봐 너무 무서워.”“그거 알아? 몸에 병이 있다고 검사 나온 그 여자도 사라졌대. 다들 그러더라... 이미 죽었을 거라고. 내가 이렇게 잡혀 올 줄 알았으면 절대 해외여행 같은 거 안 왔을 거야.”그런 말들 때문에 연정미의 미간에는 어두운 그늘이 내려앉았다.벌써 일주일이 지났다.‘그런데 아버지와 오빠들 그리고 단보현은 왜 아직도 날 찾지 못한 걸까?’그중 연정미와 비교적 가까워진 한 여자가 유일하게 울지 않고 있는 연정미를 바라보며 물었다.“정미야, 넌 안 무서워?”그 여자의 이름은 안서현이었다.안서현 역시 혼자 여행을 나왔다가 눈을 떠 보니 이곳에 끌려와 있었다.눈물로 얼굴이 젖은 안서현을 바라보며 연정미가 입을 열었다.“저 사람들이 잡아 온 건 전부 여자야. 우리에게 뭘 시키려는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어.”연정미는 차분하게 말했다.“우리가 얌전히 말을 듣는 한, 당장은 함부로 건드리지 않을 거야. 시장의 딸은 그저 본보기였을 뿐이야.”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연정미는 점점 냉정을 되찾고 있었다.연정미는 희망을 전부 아버지와 오빠들에게만 걸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가족들이 끝내 날 찾지 못한다면 난 그저 운명에 순순히 끌려가야 하는 걸까? 아니, 내 운명은 내가 정할 거야.’연정미는 절대 순순히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안서현은 연정미의 고요한 눈을 멍하니 바라봤다.사실 안서현은 처음부터 연정미를 눈여겨보고 있었다.이렇게 끔찍한 곳에 떨어졌는데도 연정미는 누구보다 침착하고 차분
강지연은 손을 휘저었다.“오늘은 일단 하루 쉬게 해 줄게. 나머지 일은 내일 다시 알려 주지.”강지연은 그렇게 말하고 떠났고 뒤에는 가슴이 찢어질 듯 울부짖는 여자들만 남았다....저녁 식사 시간.연정미는 식판 위에 담긴 돼지 사료보다도 못한 음식을 내려다보며 도저히 입맛이 돌지 않았다.“쾅!”멀지 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연정미는 조용히 그쪽을 바라봤다.금발 아가씨가 자기 앞의 식판을 바닥에 엎어 버린 채, 잔뜩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이 식판은 소독한 거예요? 기름때가 잔뜩 낀 것 같잖아요. 보기만 해도 역겨운데 이걸 어떻게 먹으라는 거예요!”역시 집에서 떠받들려 자란 가문의 아가씨였다.이런 처지까지 떨어지고도 아직 성질을 부리고 있었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먹기 싫으면 먹지 마.”밥을 가져온 남자가 비웃으며 말했다.“너도 며칠이나 더 그렇게 잘난 척할 수 있는지 보자.”“지금 누구한테 하는 말하는 거야!”금발 아가씨는 어려서부터 모두의 사랑을 받고 자랐다.집안의 어른들조차 그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다.그런데 지금 피부가 검고 못생긴 남자에게 대놓고 비웃음을 당하자 순식간에 분노가 치밀었다.“이 천하고 역겨운 두꺼비 같은 놈아. 우리 아빠가 날 찾기만 하면 네 머리부터 비틀어 버리라고 할 거야.”남자는 코웃음을 쳤다.“여기서 나갈 생각을 아직도 하는 거야? 꿈 깨. 다음 생에도 여기서 못 나갈걸? 네가 시장의 딸이라며? 앞으로는 남자들의 장난감이 될 물건 주제에 뭘 그렇게 잘난 척이야.”“짝!”금발의 여자가 손을 들어 남자의 뺨을 세게 후려치더니 오만하게 남자를 내려다봤다.“너 같은 개는 내 발가락을 핥을 자격도 없어. 감히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너!”남자는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변하더니 곧장 앞으로 나서며 그녀를 때리려 했지만 주변 동료들이 막아섰다.“그만해. 저런 분수 모르는 여자랑 뭘 그렇게
그 장면을 본 주변 여자들은 모두 역겨움과 두려움이 섞인 표정을 지었고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연정미도 역시 속이 뒤집혔다.그 남자가 여자의 몸을 함부로 더듬는 걸 보자 거의 토할 것 같았다.연정미는 겨우 참아냈지만 금발 머리의 시장 딸은 결국 옆에서 토해 버렸다.물에 빠졌던 여자는 정신을 차린 뒤, 자신이 그런 추악하고 끔찍한 남자에게 당했다는 걸 깨닫고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하지만 남자들은 그런 반응을 보고 오히려 더 흥분한 듯했고 심지어 여자의 몸을 툭툭 건드리며 입에 담기조차 더러운 말을 늘어놓았다.“이 여자가 꽤 맛있네. 나중에 우리 차례도 오겠지?”“잠깐 검사를 마치고 봐야지. 이번 여자들은 상태가 다 괜찮아. 시장의 딸도 있다던데...”그 일이 벌어진 뒤, 더는 아무도 쉽게 바다로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물에 빠져 죽지 않더라도 저런 꼴을 당하면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연정미는 그래도 어느 정도 세상 물정을 아는 사람이었다.절망으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다른 여자들에 비하면 비교적 침착한 편이었다.연정미는 아버지와 오빠들이 절대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단보현 역시 반드시 찾아 나설 것이다.‘그리고 형원 오빠는...’손형원을 떠올린 순간, 연정미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고 눈동자 깊은 곳에 짙은 냉기가 떠올랐다.잡혀 온 뒤에야 연정미는 알게 됐다.그날 자신과 손형원이 당한 습격은 손형원을 노린 게 아니라 실제 목표는 자신이었다.하지만 그때 연정미는 손형원이 목숨 걸고 자신을 지켜 준 것에 감동했고 정작 그들의 목표가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그래서 손형원을 병문안하러 갈 때도 경호원을 데려가지 않았다.그렇게 아무런 대비 없이 그대로 납치당한 것이다.연정미는 심지어 손형원이 일부러 자신을 착각하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연정미는 손형원이 하지율을 위해 자신을 치워 버리려는 줄 알았다.손형원이 정말 의도적으로 자신을 해치려 했든 아니든 결
좁은 공간에는 축축하고 불쾌한 냄새가 가득했다.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끊임없이 귓가를 맴도는 가운데 연정미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천천히 눈을 떴다.주변에서는 찰랑찰랑 물이 부딪히는 소리가 들렸고 희미하게 바다 냄새도 풍겨왔다.연정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주변을 살펴보니 자기 또래로 보이는 여자들이 여럿 모여 있었다.“여기... 어디야? 나 왜 여기 있는 거야! 문 열어. 당장 열어. 내가 누군지 알아? 감히 나를 납치해? 죽고 싶어!”외모가 뛰어나고 옷차림도 고급스러운 금발 여성이 문을 세게 두드리며 고함쳤다.“난 H시 시장의 딸이야. 우리 아버지가 알면 너희 전부 끝장이야. 빨리 풀어줘! 들었어?”누군가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자 다른 여자들도 하나둘씩 동요하며 소란을 피웠다.그들의 말 속에서 연정미는 여러 정보를 빠르게 파악했다.여기 있는 여자들은 모두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귀한 집안의 아가씨도 있었고 평범한 학생도 있었다.출신도 제각각이었고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었다.그때, 배 밖에서 남자의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하, 더 소리를 지르면서 울어봐. 육지에 도착하면 제대로 맛을 보여줄 테니까. 그때도 너희들이 지금처럼 기세등등할 수 있는지 보자고.”배는 대략 사흘을 항해했고 마침내 육지에 도착했다.선실 문이 열리자 눈부신 햇빛이 쏟아졌다.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던 연정미는 강한 빛에 눈물이 맺혀 제대로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그때 해안에 있던 남자들이 그녀들을 보며 음흉한 눈빛을 드러냈다.그들의 시선은 마치 먹잇감을 본 짐승처럼 집요하고 끈적했다.“오, 이번에 온 년들은 상태가 꽤 괜찮은데? 허리 잘록하고 다리 길고 다들 얼굴도 예쁘네. 며칠 뒤면 우리도 제대로 즐기겠는데?”“이번에는 지난번보다 훨씬 낫네. 지난번에 그 여자 기억나냐? 가슴이 남자 같아서 아무 느낌도 없더라.”“야, 그러면서 넌 세 번이나 했잖아.”“이번에는 다 괜찮아 보여. 다섯 번은 할 수 있겠는데?”연정미는 남자들의 더럽고 추잡한 모습에 속이
손씨 가문.윤기 나는 털을 가진 고양이 한 마리가 손형원의 무릎 위에 엎드려 느긋하게 잠들고 있었다.손형원은 휴대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음성 통화를 거절한 뒤로, 하지율은 더 이상 아무 메시지도 보내오지 않았다.손형원은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설마 하지율이 정말 위험한 일을 당해서 더 이상 도움 요청을 보낼 시간조차 없었던 걸까.’그런 생각이 들자 손형원의 마음속에는 후회스러운 감정이 서서히 번졌다.하지율은 지금까지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건 적이 없었고 만나자고 한 적도 없었다.늘 적당히 담담한 거리감을 유지했다.손형원은 하지율이 자기와 깊이 얽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하지만 그게 손형원에게는 오히려 다행이기도 했다.하지율이 언젠가 손형원의 정체를 알게 되면 더는 상대해 주지 않을 게 분명했으니까 말이다.그런데 하지율이 갑자기 평소답지 않게 전화를 걸었다.그렇다면 정말 무슨 일이 생긴 걸지도 몰랐다.여기까지 생각한 손형원은 더 이상 들킬 걱정 따위를 할 수 없었다.손형원은 곧바로 전화를 다시 걸었다.하지만 전화는 걸리자마자 자동으로 끊겼다.손형원은 순간 표정이 굳었다.다시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역시 전송되지 않았다.손형원은 곧바로 하지율이 자신을 차단했다는 걸 깨달았다.손형원의 눈에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떠올랐다.‘내가 전화를 받지 않았다고 하지율이 날 차단한 거야?’하지만 손형원의 직감은 절대 그것 때문만은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었다.하지만 손형원은 도무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손형원은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고 호흡까지 점점 거칠어졌다.손형원은 곧바로 부하에게 하지율의 행적을 조사하라고 지시하려 했다.그런데 그때 먼저 전화가 울렸고 보니 연재영이었다.연재영의 목소리에는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손형원, 고양이도 찾았으니 이제 정미를 찾는 일에 시간 좀 낼 수 있겠지?”연씨 가문 사람들은 이미 며칠째 D국에서 대기하고 있었고 입국이 가능한 모든 통로에 사람을 배치해 감시했다.그사이 연정
정기석이 눈썹을 치켜세우면서 뭔가 더 말하려던 그때 하지율이 가로챘다.“기석 씨, 먼저 들어가요. 지후 씨랑 따로 할 얘기가 있어요.”그러자 정기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전화해요.”고지후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굳어졌다. 정기석이 나간 후 고지후가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하지율, 우리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뭐가 급하다고 여기까지 불러? 그렇게 한시라도 빨리 가까워지고 싶어?”그는 듣기 좋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었다.하지율이 덤덤하게 말했다.“지후 씨는 연락이 안 되고 병원에 실려
경찰서를 나섰을 때 날은 이미 저물었다.하지율은 정기석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기석 씨, 고마워요.”“시온이가 지율 씨를 워낙 좋아해서 직원 복지라고 생각해요.”그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인터넷에 떠도는 루머를 제가 대신 처리해줄까요?”하지율의 눈이 반짝거렸다.“그게 가능해요?”정기석이 눈썹을 치켜올렸다.“왜요? 못 믿겠어요?”“제가 누군지 이미 알아냈을 것 같은데.”하지율이 말을 이어갔다.“전 고지후의 와이프에요. 고씨 가문의 영향력은 S시에서 워낙 막강해서 그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도 막지 못할 거
피를 흘리는 그녀를 보고도 첫마디는 걱정이 아니라 잘못을 따지는 것이었다.지나가던 낯선 이도 다친 사람을 보면 괜찮냐고 물을 텐데 아내가 잘못을 인정하기만을 기다리는 남편이라니.하지율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고지후가 눈살을 찌푸렸다.“왜 웃어?”이마의 피, 몸에 붙은 썩은 채소 그리고 끈적한 날달걀을 닦아냈더니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그동안 시간 낭비만 한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웃었어.”하지율은 툭툭 털고 차 안의 고지후를 무덤덤하게 바라보았다.“날 후회하게 만들겠다는 말이 이런 뜻이었어? 단지 첫사랑의
“다른 친구들은 다 부모님이 같이 오는데 아빠는 나한테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친구들이 내가 엄마 아빠가 없는 줄 알까 봐 싫어요.”정시온의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는 사실에 하지율은 마음이 약해졌다.유치원에 반이 워낙 많기에 선생님에게 휴가를 신청하러 가는 동안 고지후와 고윤택을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물론 마주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저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래.”그녀는 일부러 행사 시작 시간을 피했다.정시온과 유치원에 도착했을 때 행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