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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접근

Penulis: 데이지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06-11 12:10:58

서윤의 남편이 다녀간 뒤, 장미 미용실은 한동안 너무 조용했다.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라, 소리가 날 틈이 없어서였다.

공기가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고, 조금만 건드리면 무언가가 끊어질 것 같은 상태였다.

이수는 그날 저녁 미용실 문을 평소보다 일찍 닫았다.

정리를 핑계로 들었지만, 사실은 더 이상 사람을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특히, 그 남자를.

하지만 피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유형은 아니었다.

이수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휴대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다.

그러나 낯설지 않은 감각이 먼저 올라왔다.

받지 않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 진동이 울릴 때까지 이수는 화면을 바라보기만 했다.

문자가 먼저 왔다.

-오늘 낮에 뵌 사람입니다.

-갑작스러워서 죄송합니다.

죄송하다는 말이 이렇게 빠를 때는 대개 계산이 끝났다는 뜻이다.

이수는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침묵은 지금 가장 필요한 거리였다.

그날 밤, 서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집에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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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182. 저는 사실 편입니다, 거짓을 돕지 않아요

    이수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길게 늘어져 있었다. 이번 사건은 처음으로, 자신이 의도적으로 가해자의 설계를 막아야 하는 상황이었다.“선 그을 거야.”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그리고 기록 남길 거야.”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건 이제 상담이 아니라 사건이네.”이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그래. 사건이야.”장미 미용실에 들어온 의뢰 중 처음으로,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를 상대해야 하는 사건. 구조는 뒤집혔고, 선택은 무거워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을 것이다.균열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제 남은 건, 그 균열이 어디까지 번질지 지켜보는 일이었다.이수는 그날 밤 잠들지 못했다. 사건이 이제 단순한 상담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마음의 무게가 달라졌다. 그동안 장미 미용실로 들어왔던 의뢰들은 대부분 피해자의 탈출을 돕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상대를 밀어내기 위해 계산을 시작한 상황이었다. 그 계산이 성공한다면, 한 사람의 인생이 억울한 낙인과 함께 기울 수 있었다.하빈은 노트북을 펼쳐두고 자료를 정리하고 있었다. 여자의 상담 내용, 남편의 진술, 자산 변동 시점, 최근 투자 유치 발표 날짜까지 타임라인으로 정리해보니 흐름이 선명해졌다. 투자 발표 직후, 여자의 상담이 시작되었고, 외도 의심은 그 이후에 등장했다.“시점이 너무 정확해.”하빈이 낮게 말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투자 발표가 나고, 회사 가치가 오르고, 그다음 상담이 시작됐어.”“감정이 식었다는 말은 그 이후에 붙은 설명이겠지.”이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여자가 정말로 외도 증거를 만들 계획이라면, 다음 단계는 의심을 외부로 확산시키는 것이다. 친구나 지인에게 이야기를 흘리거나, 일부러 상황을 연출해 오해를 키우는 방식이 될 수 있었다.그 예상은 오래가지 않아 현실이 되었다.며칠 뒤, 남편이 다시 연락을 해왔다. 목소리는 이전보다 더 무거웠다.“회사에 이상한

  • 불륜해드립니다.   181. 역류

    남편 쪽에서 법률 자문을 알아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상황은 예상보다 빠르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여자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상담 요청이 아니라 통보에 가까운 메시지였다.[이혼 소송 준비하려고 해요. 변호사 추천해주실 수 있나요.]이수는 메시지를 읽고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그 문장에는 고민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이미 결론을 정해두고 절차를 묻는 톤이었다.그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빈을 바라보았다.“이제는 변호사 단계야.”하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남편 쪽이 먼저 움직일 가능성도 있어.”이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여자가 외도 프레임을 씌우려 한다면, 지금부터는 증거를 ‘만들거나’ ‘왜곡’하는 단계로 넘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이용하려 할 가능성이 높았다.“추천은 못 해.”그녀가 낮게 말했다.“이 사건에 나는 깊게 들어가면 안 돼.”하빈은 조용히 동의했다.며칠 뒤, 예상대로 남편 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직접적인 연락은 아니었다. 장미 미용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중년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원장님과 잠시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약속을 잡았다. 카페가 아닌, 변호사 사무실 근처의 조용한 찻집이었다.남편은 사진에서 보았던 인물과 동일했다. 정갈한 차림, 과장 없는 태도, 그리고 피곤이 묻어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그는 먼저 고개를 숙였다.“아내가 원장님께 상담을 받았다고 들었습니다.”이수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상담 내용은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그건 이해합니다.”남편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다만, 혹시 제가 외도를 하고 있다는 식의 이야기가 오갔다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그의 목소리는 과하게 억울함을 드러내지 않았다. 대신 피로가 깔려 있었다.“아내가 갑자기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이유를 묻자, 감정이 식었다고만 하더군요.”이수는 그 말을 들으며 여자의 상담 내용을 떠올렸다. ‘

  • 불륜해드립니다.   180. 저는 사실 편이지, 왜곡하는 편이 아닙니다

    여자가 남편의 수상한 행동을 언급한 뒤부터, 상황은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연락해왔다. 이번에는 상담 요청이 아니라, 확인을 부탁하는 톤이었다.[사진 하나 보내도 될까요.]이수는 잠시 망설이다가 답했다.[보내세요.]잠시 뒤 도착한 사진에는 한 레스토랑 창가 자리가 담겨 있었다. 유리 너머로 남편으로 보이는 남자가 누군가와 마주 앉아 있었다. 각도상 상대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위기만 보면 평범한 식사 자리였다.여자는 곧바로 메시지를 이어 보냈다.[이 여자예요.]확신에 가까운 단정이었다.이수는 사진을 확대해 보았다. 남편의 표정은 차분했고, 상대는 정장 차림이었다.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펼쳐져 있었고, 서류가 놓여 있었다. 회의처럼 보이는 장면이었다.그녀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하빈에게 사진을 보여주었다.하빈은 잠시 화면을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저었다.“업무 미팅 같아.”“나도 그렇게 보여.”이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근데 이미 저 사람은 확신하고 있어.”“확신을 만들려고 하는 거지.”하빈의 말은 단정적이지 않았지만 방향은 분명했다.카페에서 다시 마주 앉았을 때, 여자의 눈빛은 이전보다 더 단단해져 있었다. 그녀는 사진을 직접 보여주며 말했다.“이건 분명 외도예요.”이수는 침착하게 물었다.“왜 그렇게 생각하세요.”“저 시간에 굳이 저기서 만날 이유가 없잖아요.”“업무일 가능성은요.”“회사에서 할 수도 있죠.”이수는 고개를 기울였다.“회사 밖에서 만나는 게 항상 사적인 건 아니에요.”여자의 입술이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원장님은 제 편 아닌가요.”그 질문은 은근한 압박이었다. 이수는 잠시 숨을 고르고 대답했다.“저는 사실 편이에요.”“그럼.”“사실을 왜곡하는 편은 아니에요.”공기가 잠깐 무거워졌다. 여자는 커피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시선을 피했다. 이전까지의 부드러운 태도에 금이 가는 순간이었다.“그럼 제가 잘못 보고 있

  • 불륜해드립니다.   179. 설계선

    여자가 “정리하겠다”고 말한 뒤로 며칠 동안은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연락도 없었고, 추가 상담 요청도 없었다. 겉으로 보기엔 의뢰가 마무리된 듯한 고요함이었다. 그러나 이수는 오히려 그 고요함이 더 불편했다. 결심을 했다는 사람이 아무 행동도 하지 않는 건, 이미 다음 수순을 준비하고 있다는 뜻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하빈은 남편 쪽 자료를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다. 기업 등기부, 최근 투자 흐름, 재무제표 요약, 대표의 대외 활동까지 확인해보았지만, 의심할 만한 흔적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안정적인 성장 곡선과 보수적인 경영 스타일이 눈에 띄었다.“겉으로는 정말 깔끔해.”그가 자료를 넘기며 말했다.이수는 그의 맞은편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었다.“스캔들 기록도 없고, 별다른 분쟁도 없어. 최근에 자산 규모가 크게 늘긴 했지만, 그건 투자 성공 때문이야.”“그럼.”이수는 천천히 물었다.“문제는 그 사람한테 없다는 거네.”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적어도 지금까지 드러난 건 없어.”이수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 만약 여자가 말한 대로 ‘상대가 잘못이 없는데 내가 나가고 싶다’는 상황이라면,이 사건은 그동안 장미 미용실에 들어왔던 의뢰들과는 전혀 다른 결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은 피해자가 먼저 도망치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면, 이번에는 누군가를 밀어내기 위해 접근한 구조였다.“외도 프레임을 씌우려는 거라면.”이수가 낮게 말했다.“증거가 필요하겠지.”하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그래.”“그리고 그 증거는 자연스럽게 보이게 만들어야 하고.”이수의 눈빛이 서서히 선명해졌다.“그 사람, 나한테 외도 증거가 어떻게 만들어지냐고 물었어.”하빈의 표정이 굳었다.“직접적으로?”“가정이라고 했지만, 방향은 명확했어.”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 사건이 단순한 감정 상담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제는 추측을 넘어 구조로 자리 잡고 있었다.며칠 뒤, 여자는 다시 연락을 해왔다. 이번에는 다소 급한 말투였다

  • 불륜해드립니다.   178. 외도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

    며칠 사이, 상담은 두 번 더 이어졌다. 여자는 매번 시간을 정확히 지켰고, 질문은 조금씩 더 구체적으로 변했다. 처음에는 관계의 균열에 대한 이야기였고, 그다음에는 감정의 소진에 대한 이야기였으며, 이번에는 법적 유불리까지 은근히 떠보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카페 창가에 마주 앉은 자리에서, 여자는 종이 냅킨을 접으며 말했다.“남편이 외도하지 않았는데도, 외도로 보이게 만들 수 있을까요.”그 질문이 떨어지는 순간, 이수의 손이 아주 미세하게 멈췄다. 그러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왜 그런 생각을 하세요.”“가정이에요.”여자는 웃었다.“만약에요. 상대가 잘못이 없는데, 내가 먼저 나가고 싶다면.”이수는 잠시 시간을 끌 듯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상대가 자신을 관찰하고 있다는 감각이 더 또렷해졌다. 이 질문은 단순한 고민이 아니었다. 실행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었다.“사실을 왜곡하는 건 위험해요.”그녀는 부드럽지만 분명하게 말했다.“법적으로도 그렇고, 나중에 본인에게도 돌아와요.”여자는 시선을 낮추며 고개를 끄덕였다.“그렇겠죠. 근데 세상엔 그렇게 하는 사람도 많잖아요.”“많다고 해 그게 정상적이지는 않죠.”이수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더 이상 상담자의 중립적인 톤은 아니었다. 미묘하게 선이 그어지고 있었다.여자는 그 변화를 눈치챈 듯 잠시 말을 멈췄다. 그리고는 방향을 틀었다.“그럼 증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거예요.”이수는 그제야 확신에 가까운 감각을 느꼈다. 질문이 더 이상 관계의 문제를 향하지 않고, 전략을 향하고 있다는 사실을.“그건 제가 답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에요.”그녀는 이번에는 웃지 않았다.“제가 도와줄 수 있는 건 감정 정리까지예요.”여자의 눈빛이 아주 얇게 식었다가 다시 부드러워졌다.“알겠어요. 제가 좀 극단적인 질문을 했네요.”말은 사과였지만, 표정은 기록에 가까웠다. 이수는 확실히 느꼈다. 이 사람은 대화를 통해 정보를 모으고 있다.상담이 끝난 뒤, 하빈은 한 발

  • 불륜해드립니다.   177. 말을 줄이고 반응을 줄일 거야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자신이 먼저 조건을 바꾸는 쪽을 선택했다. 사소한 차이지만, 주도권의 감각은 중요했다.저녁이 되어 둘은 근처 카페에 자리를 잡았다. 이수는 여자가 들어오는 순간부터 표정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여자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이수 맞은편에 앉았다.“공간이 바뀌었네요.”그녀가 부드럽게 말했다.“오늘은 여기가 편할 것 같아서요.”이수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여자는 커피를 주문하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상대가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도, 이혼을 결심할 수 있을까요.”질문은 더 직접적이었다. 이수는 손을 모은 채 천천히 답했다.“결심은 할 수 있죠. 다만 이유가 무엇인지 스스로는 알아야겠죠.”“사랑이 식은 것도 이유가 되나요.”“그게 제일 솔직한 이유일 수 있어요.”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눈빛은 여전히 계산적이었다.“상대가 억울해해도요.”이수는 잠시 시선을 낮췄다가 다시 올렸다.“그 억울함까지 감당할 자신이 있어야겠죠.”대화는 겉으로는 평범한 상담처럼 흘러갔지만, 이수는 계속해서 느끼고 있었다. 질문의 방향이 자신의 과거와 묘하게 겹친다는 것을. 상대가 무너질 걸 알면서도 선택하겠느냐는 질문은 단순한 가정이 아니었다.여자는 말을 마치며 덧붙였다.“원장님은 그런 선택, 해본 적 있나요.”카페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듯했다. 이수는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제가 상담자가 되면 안 되겠네요.”가볍게 웃으며 넘겼지만, 속은 조금 식어 있었다. 여자는 그 반응을 오래 기억하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상담이 끝난 뒤, 여자는 먼저 자리를 떠났다. 하빈은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여자가 카페 문을 나서는 순간, 그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이수에게 다가왔다.“어땠어.”“이번엔 더 선명했어.”“뭐가.”“내 얘기를 끌어내려고 해.”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의뢰라기보단 조사 같지.”이수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응. 감정 상담을 빌미로.”그녀는 커피잔을

  • 불륜해드립니다.   2. 흔들리는 선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것 앞에서 경계한다.완벽은 함정의 냄새가 난다.대신 ‘조금 과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그래야 자기 욕망을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다.이수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올렸다.눈매를 길게 뺐다.립은 선명하지만 젖지 않게. 향수는 거의 쓰지 않았다.향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옷은 고민하지 않았다.고민이 길어지면 마음이 늦어진다.이수는 얇은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확인했다.표정은 비워두었다.웃는 얼굴

  • 불륜해드립니다.   1. 제의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장미 미용실.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붉었던 글자는 연분홍

  • 불륜해드립니다.   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 불륜해드립니다.   9. 거리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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