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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
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
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
장미 미용실.
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
붉었던 글자는 연분홍에 가까웠고,
밤이 되면 조명에 눌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
예약도 없었고, 문을 닫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가위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머리를 자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짧고 가벼운 소리.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마흔 초반쯤.
나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건 얼굴이 아니라 어깨였다.
힘이 빠진 어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자는 미용실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들어와도 되는지, 돌아가야 하는지 결정을 미루는 사람처럼.
“머리 하시게요?”
이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감정을 섞지 않은 톤.
“편하신 데 앉으세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으로 몇 발짝 들어왔다.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요…”
목소리는 작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
“건너 건너서 들었어요.”
“뭘요.”
이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상대가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방식이었다.
여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을 여러 번 되돌려 삼킨 얼굴이었다.
“이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이수의 손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는 미용사예요.”
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여자는 대답 대신 스카프를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마지막에는 윗옷까지 들어 올렸다.
이수는 그제야 여자의 몸을 보았다.
팔 안쪽. 손목. 옆구리.
시간을 두고 반복된 흔적들이었다.
어제 생긴 것도, 오래된 것도 섞여 있었다.
그건 넘어져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었다.
부딪혀서 남는 자국도 아니었다.
이수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충분했다.
“남편이 무서워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했다.
“이혼은… 절대 안 해준대요.”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기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요.”
그 말이 끝났을 때, 미용실 안은 아주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안쪽에는 닿지 않았다.
이수는 천천히 다가가 여자의 앞에 섰다.
가까웠지만, 닿지는 않았다.
“제가요.”
이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여자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울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는 이미 지나간 얼굴이었다.
이수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여자를 앉게 했다.
그 순간, 이수의 표정은 미용사였다.
그러나 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이건 상담이 아니었다.
치료도 아니었다.
제의였다.
그날 밤, 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손등을 덮었다가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깨끗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이수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여자의 팔이 떠올랐다.
상처의 모양은 기억보다 오래 남았다.
이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다시 시작될 거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그걸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끝날 기색 없이.
비가 그친 뒤의 아침은 이상하게 소리가 컸다.
물기 머금은 도로 위로 타이어가 지나가는 소리.
담벼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흙이 숨 쉬는 냄새.
이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춥다는 감각은 늦게 왔다.
먼저 온 건, 몸의 긴장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급한 동작은 하지 않았다.
급해질수록 실수가 많아지는 걸, 이수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 끝을 때리는 것 같았고,
그래도 이수는 손 끝의 시린 느낌을 이기고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고,
어젯밤에도 씼었는데, 다시 씻게 되는 손이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눈 밑이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잠이 부족한 얼굴이 아니라, 생각이 오래 남은 얼굴.
이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대충 묶었다.
미용실로 내려갔다.
장미 미용실의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좁은 골목에 퍼졌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를 걸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이수는 불을 켰다.
거울 앞에 앉아 잠시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 미용실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조용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그래야 했다.
상담이 이루어질수록 겉은 더 평범해야 했다.
숨겨야 하는 건 늘 안쪽에 있었고, 안쪽은 티를 내면 안 됐다.
이수는 의자를 닦고, 가위를 정렬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정돈은 변명이었다.
오늘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제 그 여자였다.
심미선.
어제와 같은 옷. 어제보다 조금 더 초조한 눈.
다만 오늘은 스카프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상처를 보여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미선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제의 말을 되새기러 온 사람처럼.
이수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무너져야, 대화가 시작된다.
미선이 입술을 열었다.
“진짜… 도와주실 수 있어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도, 작게도 아닌 정도로.
“남편 성함.”
미선이 잠깐 멈칫했다. 이수는 기다렸다.
이 질문이 ‘시작’이라는 걸, 미선도 알아차려야 했다.
“…최진상.”
이수는 그 이름을 한 번 마음속으로 굴렸다.
이름은 대개 주인을 닮지 않지만, 가끔 주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직업은요.”
“카페요. 혼자 해요.”
“어디.”
미선이 주소를 말했다.
설해시 외곽. 큰 길에서 한 번 꺾고, 한 번 더 들어가는 자리.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폭행은…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미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은 흔했다. 흔해서, 더 무거웠다.
“왜요.”
“진짜로 죽일까 봐요.”
미선은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
경찰을 부르면, 오늘 밤이 더 길어진다는 뜻.
이수는 잠시 손끝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진상 씨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미선이 눈을 깜빡였다.
이 질문은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에게는 늘 가장 먼저 필요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자길 우습게 보는 거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건요.”
미선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젊은 여자요.”
말이 끝났을 때, 미선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수치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홍조였다.
이수는 그 홍조를 가만히 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알겠어요.”
미선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이수는 미선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대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비친 미선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사람은 정면보다, 반사된 얼굴에서 더 솔직해진다.
“오늘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하시면 돼요.”
미선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아무것도요?”
“네. 아무것도.”
이수는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다기보다, 믿어야 했던 사람의 끄덕임.
미선이 나간 뒤, 미용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수는 잠시 서 있었다.
그 다음엔 움직였다.
오늘은 ‘접근’해야 했다.
이수는 화장을 시작했다.
평소의 미용실 화장과는 달랐다.
미용실 화장은 ‘단정’이 기준이었다면,
오늘의 화장은 ‘주목’이 기준이었다.
그러나 과하면 안 됐다.
죄책감 속에 묶어 두면, 움직이지 못한다고 믿는 것이다. 사랑도, 새로운 삶도, 전부 자격 없는 선택으로 만들어버리려는 방식.하빈은 조용히 운전대를 잡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우리는.”“자격을 증명하지 않아.”이수는 차분히 말했다.“그 프레임을 깨.”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같은 시간, 민준은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원 기록 접근 시도가 있었다는 알림을 확인한 순간, 그의 눈빛이 아주 미묘하게 변했다.“예상보다 빠르네.”그는 낮게 중얼거렸다.이수가 먼저 움직였다. 수동적으로 압박을 받는 쪽이 아니라, 판을 들여다보는 쪽으로.민준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다음 조각을 언제 던질지 계산이 다시 시작되었다. 너무 늦으면 긴장이 풀리고, 너무 빠르면 역으로 대비할 시간을 준다.그는 서랍에서 세 번째 사진을 꺼냈다.병원 밖. 하빈의 품에 안겨 있는 이수. 아직 보내지 않았다.대신 사진을 책상 위에 올려두고 한참 바라보았다.“이번엔.”그는 천천히 미소 지었다.“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전쟁은 조용히 깊어지고 있었다.그러나 이번에는, 이수도 준비된 상태였다.병원에서 돌아온 다음 날은 이상할 만큼 평온했다. 전날의 긴장과는 달리, 미용실 안은 평소의 소음으로 가득 차 있었다. 드라이기 바람 소리와 손님의 웃음, 거울 앞에서 오가는 가벼운 대화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었고, 그 평범함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였다.이수는 일부러 예약을 조금 더 받아두었다. 빈 시간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생각이 길어지면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손끝은 정확했고, 고객의 취향을 짚어내는 감각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지만 하빈은 알았다. 그녀의 시선이 거울 너머를 오래 바라볼 때마다, 무언가 계산이 이어지고 있다는 걸.오후 세 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휴대폰이 진동했다. 모르는 번호였다. 이수는 잠시 화면을 바라보다가 받지 않았다. 대신 메시지가 도착하기를 기다
사진 두 장이 도착한 다음 날, 미용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 예약이 갑자기 늘어난 것도 아닌데, 유난히 손이 바빴다. 이수는 의자 사이를 오가며 손님의 머리를 정리했고, 말투는 평소보다 더 안정적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몸을 움직이고 말을 이어가야 머릿속에서 같은 장면이 반복되지 않는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카운터 뒤에서 하빈은 병원 관련 법령과 판례를 정리하고 있었다. 산소호흡기 제거와 관련된 의료 동의 절차, 보호자 권한 범위, CCTV 보관 기간과 열람 조건까지 하나씩 체크했다. 민준이 사진을 이용해 ‘서사’를 만들려 한다면, 그 서사를 부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실관계를 먼저 확보하는 것이었다.점심 무렵, 손님이 모두 빠져나가자 미용실 안이 조용해졌다. 이수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잠시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서였다.“병원부터 가자.”그녀가 조용히 말했다.하빈은 노트북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지금?”“웅.”이수는 고개를 들었다.“그날 기록, 내가 직접 확인해야 돼. 민준이 뭘 갖고 있는지 모르고 버티는 건 의미 없어.”그 말에는 조급함이 아니라 방향이 담겨 있었다. 상대가 던지는 조각을 받을 때마다 흔들리는 구조가 아니라, 판을 통째로 들여다보는 쪽으로 움직이겠다는 선택이었다.하빈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 내가 절차 알아볼게.”그는 곧바로 병원 측에 연락해 열람 신청 절차를 확인했다. 보호자 기록, CCTV 보관 연장 여부, 의료진 서명 내역 등 필요한 자료 목록을 정리했다. 법적으로 접근 가능한 범위를 최대한 활용하는 방식이었다.이수는 그 모습을 보며 묘한 감정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이런 준비가 더 두려웠을지도 모른다. 기록을 들여다본다는 건, 그날을 다시 마주하는 일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피하지 않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덜 무섭다는 걸, 민준 덕분에 깨닫고 있었다.그날 저녁, 두 사람은
사진을 본 뒤에도 미용실은 예정대로 문을 열었다. 예약된 손님은 시간을 맞춰 들어왔고, 커피 머신은 평소처럼 소리를 냈으며, 바깥 골목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세상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지만, 카운터 아래 서랍 안에 들어 있는 그 한 장의 사진은 공간의 온도를 미묘하게 낮추고 있었다.이수는 거울 앞에 선 손님의 머리를 정리하면서도 한 번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염색약을 섞는 비율도 정확했고, 가위질의 리듬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러나 거울에 비친 자신의 눈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또렷하다는 걸, 그녀 스스로 알고 있었다. 흔들리지 않겠다고 다짐한 사람의 눈이었다.하빈은 카운터 뒤에서 노트북을 켜 둔 채 조용히 기록을 정리하고 있었다. 봉투가 발견된 시간, CCTV 사각지대 여부, 문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장면의 각도까지 세세하게 체크했다. 민준이 직접 왔는지, 다른 사람을 쓴 건지 단정할 수는 없었지만, 최소한 ‘우연’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했다.점심 무렵 손님이 모두 빠져나간 뒤, 미용실 안은 잠시 조용해졌다. 이수는 장갑을 벗고 손을 씻은 뒤 카운터 쪽으로 걸어왔다.“두 번째는 언제일까.”그녀가 물었다.“바로는 아닐 거야.”하빈이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답했다.“이건 예고야. 반응을 보겠다는 거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장은 비교적 모호했다. 산소호흡기 옆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이긴 했지만, 그 장면만으로는 법적 의미를 만들기 어렵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충분히 흔들 수 있다. ‘그날’을 다시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사람이 많으니까.“그는 내가 죄책감으로 무너질 거라 생각해.”이수가 낮게 말했다.“근데 넌 안 무너졌어.”하빈의 말은 단정이었다.“아직은.”이수는 솔직하게 덧붙였다. 완전히 무감각해진 건 아니었다. 사진을 보는 순간 심장이 잠깐 내려앉았고, 그날의 냄새와 소리가 짧게 스쳐 지나갔다. 다만 이번에는 그 기억이 그녀를 끌고 가지 못했다
민준을 만난 지 이틀이 지났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시지도, 사진도, 새로운 압박도 오지 않았다. 예상했던 충돌이 지연될수록 오히려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폭발 직전의 긴장이라기보다, 어딘가에서 이미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상태에 가까웠다.이수는 일부러 평소와 같은 일과를 유지했다. 오전 예약 손님을 맞이하고, 염색약을 섞고, 가위를 잡고, 계산을 정리했다. 손끝은 안정되어 있었고, 말투도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안정은 무감각이 아니라 의도적인 정렬이었다. 감정이 먼저 반응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일정한 리듬 안에 두고 있는 상태였다.하빈은 그런 그녀를 조용히 관찰했다. 그는 굳이 “괜찮아?” 같은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CCTV 위치를 다시 확인하고, 출입문 센서 기록을 점검하고, 주변 골목의 주차 차량을 유심히 살폈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었지만, 대비는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오늘도 아무 일 없지?"저녁 무렵, 하빈이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올 거야.”이수가 담담하게 답했다.“근데 지금은 아니야.”“왜 그렇게 확신해.”“내가 안 흔들렸으니까.”그녀는 가위를 정리하며 말을 이었다.“오늘 객실에서 내가 무너지길 기다렸어. 죄책감이든, 두려움이든. 근데 그게 안 됐잖아. 그럼 다음은 더 정교하게 들어와.”그 말은 예측이 아니라 구조 분석에 가까웠다. 민준은 감정적 폭발형이 아니라 계산형이었다. 한 번 실패했다고 즉각적인 공격으로 전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실패를 데이터로 저장하고, 더 정확한 각도로 들어온다.밤이 깊어갈수록 이상하게 평온했다. 휴대폰 화면은 조용했고, 외부에서 특별한 움직임도 감지되지 않았다. 그 고요는 누군가의 의도처럼 느껴졌다. 기다리게 만드는 방식. 불안을 서서히 키우는 방식.이수는 소파에 앉아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었다.“하빈.”“응.”“만약 어떤 일이 생겨도 이번에는 절대 도망 안 가.”그는
“그 남자 때문이야?”“아니.”이수는 고개를 저었다.“내가 나를 선택했기 때문이야.”그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그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이 두렵지 않았다. 과거를 들먹이며 흔들려 하지 않는 자신을 스스로도 인식하고 있었다.민준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넌 아직도 네가 주도권 잡았다고 생각하네.”“아니. 난 그냥 안 돌아가.”그녀는 덧붙였다.“그리고 네가 묻어준다는 말, 필요 없어. 드러나도 내가 감당해.”그 말은 민준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이었다. 죄책감을 이용하려던 카드가 힘을 잃는 순간이었다.민준의 표정이 서서히 굳어갔다.“끝까지 가보자는 거야?”이수는 짧게 답했다.“그래.”그녀는 더 머물지 않았다. 문을 열고 나가면서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는 조용했고, 카펫 위로 발소리만 부드럽게 흡수되었다.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는 숨을 길게 내쉬었다. 손끝이 약간 차가워져 있었지만, 흔들리지는 않았다.호텔 방 안에서, 민준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창가로 돌아가 도시를 내려다보던 그의 시선이 서서히 차갑게 가라앉았다.“그래.”그는 낮게 중얼거렸다.“그럼 다른 방법을 쓸 차례네.”회수는 실패했다.이제 그는 통제의 다음 단계를 계산하고 있었다.그리고 그 계산은, 더 이상 설득의 형태를 띠지 않을 것이었다.엘리베이터 문이 열렸을 때, 이수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객실 복도의 정적과는 달리 로비는 사람들의 움직임으로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고, 그 대비가 오히려 현실감을 선명하게 만들었다. 방금 전까지 마주 앉아 있던 민준의 얼굴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심장은 과하게 뛰지 않았다. 두려움보다는 확신이 먼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출입문을 나서자 건너편 카페 창가에 앉아 있던 하빈이 고개를 들었다. 둘은 눈을 마주쳤고, 그 짧은 시선 교환만으로도 대화의 절반은 끝난 셈이었다. 하빈은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말 없이 그녀 옆으로 걸어왔다.“어때.
“나 잘한 거지.”그녀가 낮게 말했다.그 질문은 누군가에게 묻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하는 확인이었다. 그날의 선택이 사랑이었는지, 포기였는지, 도망이었는지 수없이 되물어왔지만, 결국 결론은 늘 같았다. 고통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하빈이 옆에 앉았다.“후회해?”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이수는 고개를 저었다.“아니.”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그 사람이 그걸로 날 흔들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게… 더 화나.”그 말은 처음으로 분노가 섞여 있었다. 지금까지는 구조를 읽는 태도였지만, 이제는 감정이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상대가 자신을 죄책감으로만 정의하려는 것에 대한 반발이었다.약속 당일 아침, 이수는 평소보다 단정하게 옷을 입었다. 과하게 꾸미지도, 지나치게 무심하지도 않았다. 감정이 아니라 태도로 대면하겠다는 의지였다.하빈은 현관에서 그녀를 바라보았다.“마지막으로 묻는다.”그가 말했다.“지금이라도 안 가고 싶으면, 가지마.”이수는 잠시 미소를 지었다.“가야 끝나.”그 말은 단순한 만남을 의미하지 않았다. 과거와의 정면 대면이었다.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난 근처에 있어.”이수는 그를 잠시 바라보다가 말했다.“이번엔… 나 혼자 도망치지 않을게.”그 말에는 약속이 담겨 있었다.호텔 로비는 생각보다 밝았다. 낮 햇빛이 유리벽을 통과해 바닥에 길게 번지고 있었다. 사람들이 오가고, 커피 향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이수는 지정한 자리 근처에 섰다. 심장은 빨리 뛰었지만, 숨은 고르게 유지했다.몇 분 뒤, 로비 입구 쪽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걸음걸이, 어깨선, 고개를 드는 각도까지.시간이 흘렀어도 바뀌지 않은 방식.이수는 눈을 떼지 않았다.그도 이수를 발견했다.그리고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전쟁은 이제, 그림자 속이 아니라 햇빛 아래에서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호텔 로비는 지나치게 조용했다.늦은 오후의 햇빛이 통유리를 통과해 대리석 바닥 위로 길게 번졌고, 그 위를
남자들은 너무 완벽한 것 앞에서 경계한다.완벽은 함정의 냄새가 난다.대신 ‘조금 과한 듯한 자연스러움’이 필요했다.그래야 자기 욕망을 자기 탓으로 돌릴 수 있다.이수는 파운데이션을 얇게 올렸다.눈매를 길게 뺐다.립은 선명하지만 젖지 않게. 향수는 거의 쓰지 않았다.향은 기억을 남기고, 기억은 나중에 문제가 된다.옷은 고민하지 않았다.고민이 길어지면 마음이 늦어진다.이수는 얇은 니트와 코트를 걸쳤다.너무 화려하지 않은 색.하지만 얼굴은 눈에 띄게.거울 앞에서 한 번 더 확인했다.표정은 비워두었다.웃는 얼굴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이상하죠.”그가 말했다.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뭐가요.”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이런 날은…”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