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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륜해드립니다.
불륜해드립니다.
Author: 데이지

1. 제의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9 15:03:46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

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

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

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

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

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

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

장미 미용실.

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

붉었던 글자는 연분홍에 가까웠고,

밤이 되면 조명에 눌려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수는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손님은 없었다.

예약도 없었고, 문을 닫기엔 아직 이른 시간이었다.

가위는 이미 내려놓은 상태였다.

오늘은 머리를 자를 일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예감은 대개 틀리지 않았다.

문이 열렸다.

문 위에 달린 작은 종이 울렸다.

짧고 가벼운 소리.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마흔 초반쯤.

나이를 짐작하게 만드는 건 얼굴이 아니라 어깨였다.

힘이 빠진 어깨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여자는 미용실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들어와도 되는지, 돌아가야 하는지 결정을 미루는 사람처럼.

“머리 하시게요?”

이수는 평소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높지도, 낮지도 않게. 

감정을 섞지 않은 톤.

“편하신 데 앉으세요.”

여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안쪽으로 몇 발짝 들어왔다.

의자에 앉지 않은 채,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기요…”

목소리는 작았고, 끝이 조금 떨렸다.

“건너 건너서 들었어요.”

“뭘요.”

이수는 묻지 않아도 될 질문을 했다.

상대가 말을 꺼낼 수 있도록 시간을 주는 방식이었다.

여자는 잠시 입술을 깨물었다.

결심을 여러 번 되돌려 삼킨 얼굴이었다.

“이혼할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이수의 손이 멈췄다.

정확히 말하면, 멈춘 것처럼 보였다.

사실은 이미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저는 미용사예요.”

그 말은 거절이 아니었다.

확인에 가까웠다.

여자는 대답 대신 스카프를 풀었다.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소매를 걷었다.

마지막에는 윗옷까지 들어 올렸다.

이수는 그제야 여자의 몸을 보았다.

팔 안쪽. 손목. 옆구리.

시간을 두고 반복된 흔적들이었다.

어제 생긴 것도, 오래된 것도 섞여 있었다.

그건 넘어져서 생기는 상처가 아니었다.

부딪혀서 남는 자국도 아니었다.

이수는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너무 오래, 너무 가까이에서 본 적이 있었다.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명하지 않았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이미 충분했다.

“남편이 무서워요.”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이번에는 조금 더 또렷했다.

“이혼은… 절대 안 해준대요.”

이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자기한테서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요.”

그 말이 끝났을 때, 미용실 안은 아주 조용해졌다.

밖에서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안쪽에는 닿지 않았다.

이수는 천천히 다가가 여자의 앞에 섰다.

가까웠지만, 닿지는 않았다.

“제가요.”

이수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드릴 수 있어요.”

여자는 그제야 숨을 내쉬고, 울지는 않았다.

그럴 여유는 이미 지나간 얼굴이었다.

이수는 의자를 끌어당겼다.

여자를 앉게 했다.

그 순간, 이수의 표정은 미용사였다.

그러나 눈은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이건 상담이 아니었다.

치료도 아니었다.

제의였다.

그날 밤, 이수는 집으로 돌아와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손등을 덮었다가 흘러내렸다.

몇 번이나 문질렀지만 깨끗해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변한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이수는 수건으로 손을 닦고 불을 껐다.

침대에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여자의 팔이 떠올랐다.

상처의 모양은 기억보다 오래 남았다.

이수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생각하지 않았다.

망설이지도 않았다.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일은 다시 시작될 거라는 걸.’

그리고 자신이 그걸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

천천히, 끝날 기색 없이.

비가 그친 뒤의 아침은 이상하게 소리가 컸다.

물기 머금은 도로 위로 타이어가 지나가는 소리.

담벼락에서 떨어지는 물방울.

젖은 흙이 숨 쉬는 냄새.

이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을 떴다.

창문 틈으로 찬 공기가 들어왔다.

춥다는 감각은 늦게 왔다.

먼저 온 건, 몸의 긴장이었다.

그녀는 침대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급한 동작은 하지 않았다.

급해질수록 실수가 많아지는 걸, 이수는 알고 있었으니까.

세면대 앞에서 물을 틀었다.

차가운 물이 손 끝을 때리는 것 같았고,

그래도 이수는 손 끝의 시린 느낌을 이기고 손을 씻었다.

비누 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고,

어젯밤에도 씼었는데, 다시 씻게 되는 손이 있었다.

거울 속 얼굴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다만 눈 밑이 조금 더 무거워 보였다.

잠이 부족한 얼굴이 아니라, 생각이 오래 남은 얼굴.

이수는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머리를 대충 묶었다.

미용실로 내려갔다.

장미 미용실의 셔터를 올리는 소리가 좁은 골목에 퍼졌다.

이른 시간이라 사람은 없었고,

고양이 한 마리가 담장 위를 걸었다가 사라질 뿐이었다.

이수는 불을 켰다.

거울 앞에 앉아 잠시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 미용실은 늘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정하고, 조용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표정.

그래야 했다.

상담이 이루어질수록 겉은 더 평범해야 했다.

숨겨야 하는 건 늘 안쪽에 있었고, 안쪽은 티를 내면 안 됐다.

이수는 의자를 닦고, 가위를 정렬했다.

아무도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정돈은 변명이었다.

오늘 그녀가 해야 할 일은, 머리를 자르는 일이 아니었다.

잠시 후, 문이 열렸다. 어제 그 여자였다.

심미선.

어제와 같은 옷. 어제보다 조금 더 초조한 눈.

다만 오늘은 스카프를 단단히 묶고 있었다.

상처를 보여주는 건 한 번이면 충분하다는 듯이.

미선은 의자에 앉지 못하고 서 있었다.

어제의 말을 되새기러 온 사람처럼.

이수는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상대가 먼저 무너져야, 대화가 시작된다.

미선이 입술을 열었다.

“진짜… 도와주실 수 있어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도, 작게도 아닌 정도로.

“남편 성함.”

미선이 잠깐 멈칫했다. 이수는 기다렸다.

이 질문이 ‘시작’이라는 걸, 미선도 알아차려야 했다.

“…최진상.”

이수는 그 이름을 한 번 마음속으로 굴렸다.

이름은 대개 주인을 닮지 않지만, 가끔 주인의 태도를 드러낸다.

“직업은요.”

“카페요. 혼자 해요.”

“어디.”

미선이 주소를 말했다.

설해시 외곽. 큰 길에서 한 번 꺾고,  한 번 더 들어가는 자리.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폭행은… 경찰에 신고하셨어요?”

미선이 고개를 저었다.

그 대답은 흔했다. 흔해서, 더 무거웠다.

“왜요.”

“진짜로 죽일까 봐요.”

미선은 대답하면서도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이수는 그 문장을 이해했다.

경찰을 부르면, 오늘 밤이 더 길어진다는 뜻.

이수는 잠시 손끝으로 테이블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진상 씨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뭐예요.”

미선이 눈을 깜빡였다.

이 질문은 이상하게 들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수에게는 늘 가장 먼저 필요한 질문이었다.

“사람들이… 자길 우습게 보는 거요.”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제일 좋아하는 건요.”

미선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말했다.

“…젊은 여자요.”

말이 끝났을 때, 미선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수치심 때문인지, 분노 때문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홍조였다.

이수는 그 홍조를 가만히 봤다.

그리고 아주 짧게 말했다.

“알겠어요.”

미선은 숨을 들이마셨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요?”

이수는 미선의 눈을 똑바로 보지 않았다.

대신 거울을 봤다.

거울 속에 비친 미선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사람은 정면보다, 반사된 얼굴에서 더 솔직해진다.

“오늘부터 당신은 아무것도 안 하시면 돼요.”

미선의 눈이 흔들렸다.

“정말… 아무것도요?”

“네. 아무것도.”

이수는 덧붙였다.

“아무것도 안 하는 게 제일 어려워요.”

그 말은 위로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미선은 고개를 끄덕였다.

믿었다기보다, 믿어야 했던 사람의 끄덕임.

미선이 나간 뒤, 미용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수는 잠시 서 있었다.

그 다음엔 움직였다.

오늘은 ‘접근’해야 했다.

이수는 화장을 시작했다.

평소의 미용실 화장과는 달랐다.

미용실 화장은 ‘단정’이 기준이었다면,

오늘의 화장은 ‘주목’이 기준이었다.

그러나 과하면 안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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