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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거리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5-29 15:39:22

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

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

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

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

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

“이상하죠.”

그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

“뭐가요.”

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

“이런 날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괜히 집에 가기 싫어요.”

그 말은 오늘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집에 대한 말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남은 물기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동그랗게 번진 자국이 조금 흐려졌다.

“그럴 때 있죠.”

그녀가 말했다.

6화에서 썼던 말과 비슷했지만, 지금은 다른 무게였다.

진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웃음이 남아 있다는 건 말을 더 해도 괜찮다는 신호다.

“사람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너무 조용하면 괜히 자기를 돌아보게 되잖아요.”

조용하다는 말은 여전히 반복됐다.

그 단어는 이미 그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이수는 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았다.

잔을 들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을 느꼈다.

시선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이수가 말했다.

“답이 나오던가요.”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진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잔을 들이켰다.

이번엔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아니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더 싫은 것 같아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럼.”

그녀가 말했다.

“돌아보지 말아야죠.”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택을 다른 쪽으로 미는 말이었다.

진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불안이 아니라 기대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완전히 안 보는 것도 좀 무섭지 않아요?”

무섭다는 말은 도움 요청의 다른 이름이다.

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조절한 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혼자 안 있는 거겠죠.”

그 문장은 지금 이 자리를  정당화하는 말이었다.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들이마셨다.

길지 않은 숨. 그러나 가벼워진 숨.

“맞아요.”

그가 말했다.

“지금은…”

그는 말을 멈췄다.

그러나 이번엔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혼자인 느낌은 아니네요.”

그 말은 확인이자 고백이었다.

상대를 바라본 채 하는 고백은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줄인다.

이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눈을 내렸다가 올렸다.

그 짧은 동작이 상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건.”

이수가 말했다.

“술 때문일 수도 있고요.”

그녀는 책임을 술로 옮겨 주었다.

이런 배려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렇겠죠.”

진상은 웃었다.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죠.”

이 정도. 그는 계속해서 선을 숫자로 만들고 있었다.

숫자로 만들면 넘었다는 감각이 줄어든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동안 술집 안의 소음이 조금 커졌다.

다른 테이블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사이에서 진상은 다시 말을 꺼냈다.

“시간 괜찮아요?”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이었다.

시간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을 묻는 질문.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답은 오늘의 균형을 아주 조금 무너뜨렸다.

진상은 계산서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부르지 않았다.

머무를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세가 조금 바뀌자  거리도 달라졌다.

어깨가 아주 약간 더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인식이 공기를 바꿨다.

“이수 씨.”

그가 불렀다.

이번엔 아무 설명 없이.

“네.”

“내일도…”

그는 말을 멈췄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이미 관계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올 거죠.”

질문 같았지만, 확인에 가까웠다.

“네.”

이수는 다시 대답했다.

그 대답은 오늘의 연장이었다.

진상은 그제야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끝낼 때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공기가 확 달라졌다.

술집 안과는 다른 온도였다. 현실의 공기.

둘은 잠시 서 있었다. 말없이.

“오늘은…”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가 맞겠죠.”

이번엔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상대를 향한 말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아쉬움도, 안도도 없었다.

“네.”

짧은 대답.

그는 한 발 물러섰다. 이수도 움직였다.

이번엔 서로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기 전, 둘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넘지 않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은 지나왔다는 것을.

이수는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진상도 부르지 않았다.

부르지 않아도 다음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술의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지만, 남은 건 온기보다 오래 가는 것이었다.

선이 낮아졌다는 감각.

그리고. 그 낮아진 선을 다시 높이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사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먼저 났다.

이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알고 있던 소리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제 그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진상은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앞치마를 매고 있었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시선이 달랐다.

이수를 확인하는 시선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전제한 시선.

“왔어요?”

그가 말했다. 묻지 않는 인사였다.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었다.

끈을 묶는 손이 어제보다 느렸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몸의 판단.

카페 안은 조용했다.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없어도 유지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공기는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수는 컵을 닦았다. 이미 깨끗한 컵이었다.

닦을 필요는 없었지만, 손이 쉬는 게 더 어색했다.

진상은 머신을 켰다가 다시 껐다.

필요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필요 없는 동작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어제는…”

그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끝을 붙이지 않은 문장은 대개 이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말을 이어가게 두었다.

“좀 늦었죠.”

그가 말했다.

사과처럼 들렸지만, 사과가 아니었다.

사과는 관계를 정리하고, 이 말은 관계를 남긴다.

“괜찮아요.”

이수는 말했다.

어제와 같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인이었다.

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더 이상 불안이 섞여 있지 않았다.

이수는 주문을 받았다.

손님은 한 명뿐이었고, 금방 나갔다.

짧은 체류. 그러나 그 사이 공기는 다시 둘만의 것이 되었다.

“피곤해 보이진 않네요.”

그가 말했다.

관찰이었다.

관찰은 관심의 가장 안전한 형태다.

“네. 괜찮아요.”

이수는 대답했다.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은 친밀을 부른다.

“그래도…”

진상은 말을 이어갔다.

“어제는 좀.”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의 제스처.

“괜히 신경 쓰여서.”

신경 쓰인다는 말은 이미 신경을 썼다는 고백이다.

이수는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아주 조용히. 그가 그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이수는 말했다.

다시, 그 문장. 그러나 이 문장은 이제 안전한 거리의 말이 아니었다.

진상은 특별한 의미 없이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누르지 않는 웃음.

“이수 씨는…”

그가 잠시 망설였다.

“항상 그렇게 말하네요.”

그 말은 비난도, 칭찬도 아니었다.

관계가 반복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어떻게요.”

이수가 물었다.

“선을 딱 그어놓고.”

그는 손으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보이지 않는 선.

“넘지 말라는 것처럼.”

그 말은 불만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실은 기대였다.

이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시선을 오래 주었다.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넘고 싶으면.”

그녀가 말했다.

“본인이 결정해야죠.”

그 말은 책임을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말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묶는다.

진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풀렸다.

자유롭다는 착각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렇죠.”

그가 말했다.

“내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자기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이수는 그 계산을 방해하지 않았다.

방해하지 않는 태도는 상대를 더 멀리 가게 한다.

“괜히.”

그는 다시 그 단어를 썼다.

“괜히 기대를 하나 봐요.”

기대. 그 단어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이 낮아졌다는 건 분명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수건을 접었다.

접힌 수건은 다시 펼 수 있다.

그 사실을 그는 아직 모를 것이다.

“기대는.”

이수가 말했다.

“대개 실망을 같이 데려와요.”

경고처럼 들렸지만, 이 말은 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었다.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물러섬이 아니라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가 낮게 말했다.

“기대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기잖아요.”

그 말은 어제의 술보다 더 위험했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둘은 어색함을 지나온 상태였다.

그 침묵 속에서 머신이 다시 켜졌다.

커피가 내려오는 소리. 일상의 소리였다.

이수는 컵을 건네주며 그를 스쳤다.

이번엔 의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분명했다.

진상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닿았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챘다.

“죄송해요.”

이수가 말했다. 형식적인 말.

“아니요.”

그는 바로 답했다. 너무 빨랐다.

말이 빠를수록 감정은 숨겨지지 않는다.

둘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왔다는 감각은 없었다.

이미 같은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는 알았다.

이제부터는 술이 없어도 이 남자는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점점 더 일상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게 가장 위험한 단계라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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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건 있습니까.”그가 물었다.이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편집하지 말고 그대로 써주세요.”그녀는 덧붙였다.“제가 왜 그 선택을 했는지, 과정까지.”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이건… 오히려 그대로가 더 힘이 있겠네요.”그의 말은 판단이 끝났다는 의미였다.“인터뷰도 가능합니까.”이수는 잠깐 숨을 고른 뒤 말했다.“네.”하빈이 그 옆에서 조용히 보고 있었다.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수가 어디까지 가려고 하는지 이미 알고 있는 눈이었다.남자는 노트북을 열며 말했다.“지금 바로 정리해서 올리겠습니다. 다른 데보다 먼저.”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부탁드립니다.”그는 더 말을 이어가지 않았다.자료를 정리하고, 노트북을 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문 쪽으로 걸어가다가 한 번 멈췄다.“이건…”그가 말했다.“…단순한 해명이 아니네요.”이수는 그를 바라봤다.남자는 짧게 덧붙였다.“흐름 바뀝니다.”그리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종이 다시 울렸다.문이 닫히고, 공간이 다시 조용해졌다.하빈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이수.”그녀는 고개를 돌렸다.하빈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말했다.“지금부터는… 진짜다.”이수는 짧게 웃었다.“알아.”그녀의 시선이 카운터 위로 돌아왔다.비어 있는 자리.방금까지 봉투가 있던 자리.그 자리에 남아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오히려 더 무거워 보였다.같은 시각. 민준의 사무실.그는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업로드 창은 여전히 열려 있었지만, 손은 그 위에 멈춰 있었다.그때, 알림이 떴다.'단독 - 연명치료 중단 결정, 보호자 기록 공개'민준의 눈이 멈췄다.그는 천천히 클릭했다.기사.이미 올라와 있었다.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다.그리고 마지막 문장에서 손이 멈췄다.'보호자는 “고통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판단이었다”고 밝혔다.'민준의 입가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잠시 후, 그는 낮게 말했다.“결국 먼저 꺼냈구나.”그 말에는 감정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았다.

  • 불륜해드립니다.   251. 방어가 아니라 선공이네요

    같은 시간. 미용실 안.이수는 창가에 서 있었다.밖을 바라보는 시선은 멀리 가지 않았다.대신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모습과 겹쳐 있었다.하빈이 말했다.“기자, 금방 올 거야.”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알아.”그녀의 손이 자연스럽게 봉투 위에 올라갔다.그리고 아주 작게 말했다.“이번엔…”잠시 멈췄다가 이어갔다.“…내가 먼저 말한다.”그 말은 다짐이 아니라, 이미 시작된 행동이었다.문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누군가 빠르게 걸어오는 소리.그리고, 문이 열렸다.종이 울렸다.이야기가 이제, 공개되는 쪽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문이 열리는 소리는 짧았지만, 그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는 가볍지 않았다. 남자는 숨을 고른 채 안으로 들어왔고, 문을 닫는 동작까지 마친 뒤에야 시선을 들어 실내를 훑었다. 공간의 크기와 동선, 사람의 위치를 빠르게 확인한 다음 마지막으로 이수에게 시선이 멈췄고, 그 눈빛에는 이미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이수 씨죠.”확인에 가까운 말이었고, 불필요한 예의는 생략되어 있었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가리켰다.“앉으세요.”남자는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의자에 앉았고, 동시에 노트북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으며 말했다.“전화로 들었습니다. 원본 자료라고.”그의 말투는 조심스럽기보다는 정확했다. 확인해야 할 것과 확인할 수 있는 것을 구분하는 사람의 방식이었다.이수는 카운터 위에 놓여 있던 봉투를 들어 올렸다.종이가 서로 스치는 소리가 작게 울렸고, 그 소리가 오히려 공간을 더 조용하게 만들었다.“여기요.”그녀는 봉투를 그대로 건넸다.남자는 바로 열지 않았다.대신 봉투를 한 번 들어 무게를 가늠하듯 느끼고, 그 다음에야 천천히 봉투를 열었다. 안에 들어 있는 종이들을 꺼내 하나씩 펼치며 읽기 시작했고, 시선은 빠르게 움직였지만 아무 것도 놓치지 않는 방식으로 이어졌다.진단서, 의사 소견서, 연명치료 관련 동의서.그리고 마지막 서명.그의 시선이

  • 불륜해드립니다.   1. 제의

    비는 천천히 내리고 있었다.급하지도, 망설이지도 않는 속도였다.우산을 쓴 사람보다 쓰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어차피 젖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얼굴들 같았다.구급차가 교차로를 가르며 지나갔다.사이렌 소리는 빗소리에 섞여 둔해졌고,사람들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어떤 소음도 오래 머무르지 못하는 오후였다.이수는 미용실 안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정확히 말하면, 들었다기보다는 유리창 너머로 스쳐 지나가는 진동을 느꼈다.장미 미용실.간판의 ‘장미’는 오래전에 색이 바랬다.붉었던 글자는 연분홍

  • 불륜해드립니다.   10. 탐색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닿았다.커피가 아니라, 커피가 오래 머문 자리의 냄새였다.하루 이틀 사이에 바뀔 수 없는 공기였다.이수는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어 들었다.끈을 묶는 손길이 잠시 느려졌다가 다시 속도를 찾았는데, 매듭을 완전히 당긴 뒤에도 손이 한 번 더 머물렀다.단단히 묶어두는 습관은, 이미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되어 있었다.진상은 카운터 뒤에서 잔을 닦고 있었다.닦을 필요가 없는 잔이었다.투명했고, 얼룩도 없었다.그럼에도 그는 같은 자리를 몇 번이나 문질렀다.“오늘은 조

  • 불륜해드립니다.   8. 느려진 생각

    잔의 수위가 조금 내려가 있었다.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이수는 잔을 다시 내려놓았다.테이블에 닿는 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이 공간에서는 충분히 또렷했다.진상은 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마시지도, 내려놓지도 않은 채로. 손가락이 유리 표면을 따라 미끄러졌다.의미 없는 동작처럼 보였지만, 의미 없는 동작은 대개 마음을 숨길 때 나온다.“원래…”그가 다시 말을 꺼냈다.이번엔 서두가 길었다.“이렇게 늦게까지 밖에 있는 거, 잘 안 해요.”설명 같았고, 변명 같았고, 고백 같았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

  • 불륜해드립니다.   7. 문 앞

    문 앞에 불이 켜져 있었다.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불빛이었다.간판은 작았고, 글자는 오래돼서 몇 글자가 흐릿했다.진상은 문을 바로 열지 않았다.손이 손잡이 근처까지 갔다가 다시 내려왔다.“여기… 시끄럽진 않아요.”그가 말했다.설명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변명이었다.이수는 간판을 한 번 봤다.술집이라는 건 분명했지만, 어떤 술집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중요한 건 지금 이 앞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괜찮아요.”그녀는 그렇게 말했다.들어가겠다는 뜻도, 거절하겠다는 뜻도 아닌 말.문은 그대로 닫혀 있었다.안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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