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잔의 수위는 더 이상 눈에 띄게 줄지 않았다.
마시지 않아도, 시간은 잔을 비워 갔다.
술집 안의 시간은 사람의 선택과 상관없이 흘렀다.
진상은 물컵을 들었다가 내려놓았다.
물이 반쯤 남아 있었다.
그는 그 반을 오래 바라봤다.
채우지 않은 선택과, 비우지 않은 선택 사이에서 사람은 자주 멈춘다.
“이상하죠.”
그가 말했다.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충동은 아니었다.
“뭐가요.”
이수는 잔을 내려놓은 채로 물었다.
목소리는 낮았고, 끝이 흐리지 않았다.
“이런 날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말을 삼킨다기보다, 말을 고르는 얼굴이었다.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 괜히 집에 가기 싫어요.”
그 말은 오늘에 대한 말이 아니었다.
집에 대한 말도 아니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말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 위에 남은 물기를 손끝으로 살짝 문질렀다.
동그랗게 번진 자국이 조금 흐려졌다.
“그럴 때 있죠.”
그녀가 말했다.
6화에서 썼던 말과 비슷했지만, 지금은 다른 무게였다.
진상은 그 말에 작게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웃음이 남아 있다는 건 말을 더 해도 괜찮다는 신호다.
“사람이…”
그는 말을 이어갔다.
“너무 조용하면 괜히 자기를 돌아보게 되잖아요.”
조용하다는 말은 여전히 반복됐다.
그 단어는 이미 그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이수는 잔을 들었다. 마시지 않았다.
잔을 들고 있는 동안 그의 시선을 느꼈다.
시선은 더 이상 숨겨지지 않았다.
“돌아보면.”
이수가 말했다.
“답이 나오던가요.”
질문은 부드러웠지만, 피할 수 없었다.
진상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잔을 들이켰다.
이번엔 천천히. 마시면서 생각하는 사람의 속도였다.
“아니요.”
그가 말했다.
“그래서 더 싫은 것 같아요.”
답이 없다는 사실을 그는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수는 고개를 들었다.
짧게, 그러나 분명하게.
“그럼.”
그녀가 말했다.
“돌아보지 말아야죠.”
그 말은 위로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선택을 다른 쪽으로 미는 말이었다.
진상의 눈이 잠시 흔들렸다.
그 흔들림은 불안이 아니라 기대에 가까웠다.
“그래도…”
그가 말했다.
“완전히 안 보는 것도 좀 무섭지 않아요?”
무섭다는 말은 도움 요청의 다른 이름이다.
이수는 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의도적으로 조절한 손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말했다.
“혼자 안 있는 거겠죠.”
그 문장은 지금 이 자리를 정당화하는 말이었다.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숨을 들이마셨다.
길지 않은 숨. 그러나 가벼워진 숨.
“맞아요.”
그가 말했다.
“지금은…”
그는 말을 멈췄다.
그러나 이번엔 끝까지 갈 생각이었다.
“지금은 혼자인 느낌은 아니네요.”
그 말은 확인이자 고백이었다.
상대를 바라본 채 하는 고백은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줄인다.
이수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잠깐 눈을 내렸다가 올렸다.
그 짧은 동작이 상대를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그건.”
이수가 말했다.
“술 때문일 수도 있고요.”
그녀는 책임을 술로 옮겨 주었다.
이런 배려는 사람을 대담하게 만든다.
“그렇겠죠.”
진상은 웃었다.
이번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그는 말을 이었다.
“이 정도면 괜찮겠죠.”
이 정도. 그는 계속해서 선을 숫자로 만들고 있었다.
숫자로 만들면 넘었다는 감각이 줄어든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이 없는 동안 술집 안의 소음이 조금 커졌다.
다른 테이블에서 잔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 사이에서 진상은 다시 말을 꺼냈다.
“시간 괜찮아요?”
이번엔 조금 다른 질문이었다.
시간이 아니라, 함께 있는 시간을 묻는 질문.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이번엔 망설이지 않았다.
그 대답은 오늘의 균형을 아주 조금 무너뜨렸다.
진상은 계산서를 한 번 봤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아직 부르지 않았다.
머무를 이유가 남아 있다는 뜻이었다.
이수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자세가 조금 바뀌자 거리도 달라졌다.
어깨가 아주 약간 더 가까워졌다.
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닿지 않았다는 사실을 서로가 인식하고 있었다.
그 인식이 공기를 바꿨다.
“이수 씨.”
그가 불렀다.
이번엔 아무 설명 없이.
“네.”
“내일도…”
그는 말을 멈췄다.
‘내일’이라는 단어가 이미 관계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나올 거죠.”
질문 같았지만, 확인에 가까웠다.
“네.”
이수는 다시 대답했다.
그 대답은 오늘의 연장이었다.
진상은 그제야 계산서를 집어 들었다.
끝낼 때를 스스로 정하는 사람의 손이었다.
밖으로 나왔을 때, 공기가 확 달라졌다.
술집 안과는 다른 온도였다. 현실의 공기.
둘은 잠시 서 있었다. 말없이.
“오늘은…”
그가 말했다.
“여기까지가 맞겠죠.”
이번엔 스스로에게 묻는 말이 아니었다.
상대를 향한 말이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아쉬움도, 안도도 없었다.
“네.”
짧은 대답.
그는 한 발 물러섰다. 이수도 움직였다.
이번엔 서로 같은 방향이 아니었다.
그러나 발걸음이 떨어지기 전, 둘 다 알고 있었다.
오늘은 아무것도 넘지 않았지만,
이미 돌아갈 수 있는 지점은 지나왔다는 것을.
이수는 걸음을 옮겼다.
뒤돌아보지 않았다.
진상도 부르지 않았다.
부르지 않아도 다음이 정해진 순간이었다.
술의 온기는 이미 사라지고 있었지만, 남은 건 온기보다 오래 가는 것이었다.
선이 낮아졌다는 감각.
그리고. 그 낮아진 선을 다시 높이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는 사실.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먼저 났다.
이수는 그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이미 알고 있던 소리였다.
언제부터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이제 그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진상은 계산대 뒤에 서 있었다.
앞치마를 매고 있었고,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러나 시선이 달랐다.
이수를 확인하는 시선이 아니라, 이미 그 자리에 있을 거라고 전제한 시선.
“왔어요?”
그가 말했다. 묻지 않는 인사였다.
“네.”
이수는 짧게 답했다.
가방을 내려놓고, 앞치마를 집었다.
끈을 묶는 손이 어제보다 느렸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몸의 판단.
카페 안은 조용했다.
손님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이 없어도 유지되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이런 공기는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수는 컵을 닦았다. 이미 깨끗한 컵이었다.
닦을 필요는 없었지만, 손이 쉬는 게 더 어색했다.
진상은 머신을 켰다가 다시 껐다.
필요 없는 동작이었다.
그러나 필요 없는 동작은 사람을 자연스럽게 만든다.
“어제는…”
그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끝을 붙이지 않은 문장은 대개 이어질 준비가 되어 있다.
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가 스스로 말을 이어가게 두었다.
“좀 늦었죠.”
그가 말했다.
사과처럼 들렸지만, 사과가 아니었다.
사과는 관계를 정리하고, 이 말은 관계를 남긴다.
“괜찮아요.”
이수는 말했다.
어제와 같은 말이었지만, 이번에는 확인이었다.
진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끄덕임에는 더 이상 불안이 섞여 있지 않았다.
이수는 주문을 받았다.
손님은 한 명뿐이었고, 금방 나갔다.
짧은 체류. 그러나 그 사이 공기는 다시 둘만의 것이 되었다.
“피곤해 보이진 않네요.”
그가 말했다.
관찰이었다.
관찰은 관심의 가장 안전한 형태다.
“네. 괜찮아요.”
이수는 대답했다. 설명하지 않았다.
설명은 친밀을 부른다.
“그래도…”
진상은 말을 이어갔다.
“어제는 좀.”
그는 손을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하는 사람의 제스처.
“괜히 신경 쓰여서.”
신경 쓰인다는 말은 이미 신경을 썼다는 고백이다.
이수는 컵을 내려놓았다.
이번엔 아주 조용히. 그가 그 소리를 놓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럴 수도 있죠.”
이수는 말했다.
다시, 그 문장. 그러나 이 문장은 이제 안전한 거리의 말이 아니었다.
진상은 특별한 의미 없이 웃었다.
이번엔 웃음이 자연스러웠다.
억지로 누르지 않는 웃음.
“이수 씨는…”
그가 잠시 망설였다.
“항상 그렇게 말하네요.”
그 말은 비난도, 칭찬도 아니었다.
관계가 반복되기 시작했다는 신호였다.
“어떻게요.”
이수가 물었다.
“선을 딱 그어놓고.”
그는 손으로 허공에 선을 그었다.
보이지 않는 선.
“넘지 말라는 것처럼.”
그 말은 불만처럼 들릴 수 있었지만, 실은 기대였다.
이수는 그를 보았다.
이번엔 시선을 오래 주었다.
피하지도, 밀어내지도 않았다.
“넘고 싶으면.”
그녀가 말했다.
“본인이 결정해야죠.”
그 말은 책임을 돌려주는 방식이었다.
이런 말은 상대를 자유롭게 하면서 동시에 묶는다.
진상의 표정이 잠시 굳었다. 그러나 곧 풀렸다.
자유롭다는 착각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든다.
“그렇죠.”
그가 말했다.
“내가…”
말을 꺼냈다가 멈췄다.
자기 이야기를 어디까지 해야 할지 계산하는 얼굴이었다.
이수는 그 계산을 방해하지 않았다.
방해하지 않는 태도는 상대를 더 멀리 가게 한다.
“괜히.”
그는 다시 그 단어를 썼다.
“괜히 기대를 하나 봐요.”
기대. 그 단어는 이미 선을 넘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선이 낮아졌다는 건 분명했다.
이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대신 수건을 접었다.
접힌 수건은 다시 펼 수 있다.
그 사실을 그는 아직 모를 것이다.
“기대는.”
이수가 말했다.
“대개 실망을 같이 데려와요.”
경고처럼 들렸지만, 이 말은 관계를 끊는 말이 아니었다.
진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조용해졌다.
그 조용함은 물러섬이 아니라 생각이었다.
“그래도.”
그가 낮게 말했다.
“기대가 없으면, 아무 일도 안 생기잖아요.”
그 말은 어제의 술보다 더 위험했다.
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흘렀다.
이 침묵은 어색하지 않았다.
이미 둘은 어색함을 지나온 상태였다.
그 침묵 속에서 머신이 다시 켜졌다.
커피가 내려오는 소리. 일상의 소리였다.
이수는 컵을 건네주며 그를 스쳤다.
이번엔 의도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분명했다.
진상의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굳었다.
닿았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알아챘다.
“죄송해요.”
이수가 말했다. 형식적인 말.
“아니요.”
그는 바로 답했다. 너무 빨랐다.
말이 빠를수록 감정은 숨겨지지 않는다.
둘은 다시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돌아왔다는 감각은 없었다.
이미 같은 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수는 알았다.
이제부터는 술이 없어도 이 남자는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점점 더 일상처럼 보이게 될 것이다.
그게 가장 위험한 단계라는 것도.
장미 미용실의 오후는 늘 조금 늦게 시작되는 것 같았다.간판은 걸려 있는데도 손님이 없으면, 공간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얼굴로 서 있고, 이수는 그런 얼굴을 억지로 흔들어 깨우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은 머리카락보다 마음이 먼저 들어오는 곳이었고, 마음은 소리를 내지 않으니까.이수는 수건을 개켜 올려두며 어제의 대화를 되짚었다.질문을 가르쳐달라는 말, 그것이 사실은 누군가에게 손을 잡아달라는 방식으로 변장한 요청이라는 걸 이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손을 내밀어 끌어올리는 순간, 상대는 자기 다리로 서는 법을 잊는다. 이수는 늘 그 지점을 경계했다. 다정함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다정함이 사람을 더 오래 그 자리에 묶어둘 때가 있어서.문이 열리는 소리는 크지 않았다.종이 울리기 전에 먼저 공기가 달라졌고, 이수는 그 변화로 누가 들어오는지 알아차렸다. 발걸음이 소란스럽지 않아서, 공간을 헤집지 않아서, 그러나 분명히 존재를 남기려고 해서. 어제와 비슷한 결의 움직임이었다.여자는 이번엔 의자에 앉지 않은 채로 서 있었다.한 번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것까지 끝낸 다음에야 말을 꺼냈다.“어제… 말씀하신 거요.”그녀는 손을 가볍게 쥐었다 폈다. 손끝이 자꾸 어딘가를 찾는 모양새였는데, 그건 보통 안정이 아니라 ‘계기’를 찾는 습관이었다.“제가 가장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생각해봤어요.”이수는 대답 대신, 조용히 수건을 내려놓고 카운터에 기대 섰다.여자가 의자에 앉지 않은 것을 보고도 “앉으세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늘의 시작은 ‘편해지는’ 방향이 아니라 ‘정확해지는’ 방향이어야 했다.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이번엔 바닥이 아니라 거울을 보았다.거울은 늘 잔인하게 정직했다. 남의 얼굴은 부드럽게 보이는데, 자기 얼굴은 늘 부족한 곳부터 먼저 드러나니까.“제가 제일 많이 하는 말은… ‘괜찮아’였어요.”말 끝이 조금 마르고, 혀끝이 아주 잠깐 떨렸다.“그리고 그 말 뒤에 붙는 게 있더라고요. ‘내가 이해
장미 미용실은 오전 내내 조용했다.머리를 자르러 오는 손님도 없었고, 예약 전화도 울리지 않았다.이수는 그 조용함이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사람이 말을 하기 전에는 공간이 먼저 숨을 고른다.가위를 닦고, 빗을 정리하고, 수건을 개켜 올려두었다.손이 익숙하게 움직이는 동안 이수는 어제의 얼굴을 떠올렸다.거울을 정면으로 보지 않던 눈, 말을 고르다 멈추던 입술.그건 준비가 덜 된 사람의 태도였다.하지만 도망칠 준비를 한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다.정오를 조금 넘긴 시각, 문이 열렸다.이번에는 노크가 없었다.그 대신 문을 여는 손이 조심스러웠다.문을 세게 열지 않는 사람은 대개 자기 이야기를 세게 하지 않는다.여자가 들어왔다. 어제의 그 여자였다.같은 옷은 아니었지만, 비슷한 결을 고른 차림이었다.튀지 않되, 사라지지도 않는 선택.“머리 말고요.”여자가 말했다.의자에 앉지 않은 채였다.“오늘은 잠깐만… 괜찮을까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의자를 가리키지 않았다.앉는 건 여전히 상대의 몫이었다.여자는 한 발짝 다가왔다가 다시 멈췄다.그 거리에서 말을 꺼내는 쪽을 택했다.“어제 집에 가서요.”여자가 말했다.시선은 여전히 바닥을 향해 있었다.“아무 일도 없었어요. 정말로요.”이수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은 대개 가장 많은 일이 있었을 때 나온다.“그래서 더… 이상했어요.”여자가 말을 이었다.“제가 왜 여기까지 왔는지 갑자기 생각이 나서요.”이수는 천천히 카운터에 기대 섰다.대화를 길게 가져갈 때의 자세였다.“그 생각이.”이수가 말했다.“정리됐나요.”여자는 잠시 침을 삼켰다.“아니요.”솔직한 대답이었다.솔직함은 항상 좋은 신호는 아니지만, 질문을 할 수 있는 상태라는 뜻은 된다.“그래도,”여자가 말했다.“어제보다 제가 덜 혼란스러운 건 알겠어요.”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혼란이 줄어들었다는 건 기준이 생겼다는 뜻이다.기준이 없으면 혼란은 줄지 않는다.“그
이수는 세면대 앞에 서서 물을 틀었다.물이 흘러나오는 소리는 일정했고, 그 일정함이 마음을 가라앉혔다.손을 씻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비누 거품이 생겼다가 금방 사라졌다.깨끗해졌다는 감각보다는 정리됐다는 느낌이 더 가까웠다.거울을 올려다봤다.낯선 얼굴은 아니었지만, 늘 같은 얼굴도 아니었다.사람은 일 하나를 끝낼 때마다 조금씩 달라진다.그 변화가 보이지 않을 뿐이다.휴대폰이 울렸다. 은하가 아니었다.그 이름이 아니라는 사실에 이수는 화면을 바로 확인했다.-상담 가능할까요.짧은 문장이었다.시간도, 이유도 없었다.그러나 이수는 이 문장이 어떤 종류의 문장인지금방 알 수 있었다.가능하다는 질문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라는 뜻이다.이수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답을 미루는 건 상대를 시험하는 게 아니라 자기 상태를 확인하는 일이다.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왔다.며칠 전과는 다른 공기였다.계절이 바뀌는 건 아니었지만, 사람의 체감은 사건 하나만으로도 바뀐다.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은하가 두고 간 것도 없고, 이수가 정리해둔 것도 없었다.그래서 이수는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일을 시작하기 전의 자세였다.하빈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수는 받았다.“끝났지.”하빈이 말했다.질문이 아니라 확인처럼 들렸다.“응.”이수는 짧게 답했다.“이번 건.”하빈이 잠시 말을 멈췄다.“좀 달랐어.”이수는 대답하지 않았다.다르다는 말에는 항상 설명이 따라오지만, 지금은 설명이 필요 없었다.“그래도.”하빈이 말을 이었다.“정확했어.”정확하다는 말은 잘했다는 말보다 이수에게 더 중요한 말이었다.전화를 끊고 나서 이수는 다시 휴대폰을 들었다.아까 온 메시지 창을 열었다.그리고 짧게 답장을 보냈다.-언제 괜찮으세요.보내고 나자 숨이 조금 깊어졌다.이 문장을 보내는 순간부터 다음 일은 이미 시작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외투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이수는 생각했다.은하는 떠나지 않았고,
은하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방향을 틀었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돌아갈 수 없는 방향이라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었다.발걸음이 조금 빨라졌고, 숨은 짧아졌다.휴대폰을 꺼내 사진 속 카페의 이름을 다시 확인했다.지도 앱을 켜지 않았다.이미 두 번이나 본 길이었다.확인은 필요했지만, 의존하고 싶지는 않았다.카페 앞에 섰을 때, 은하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유리 너머로 내부를 훑었다.익숙한 냄새가 상상처럼 떠올랐다.남편이 좋아한다고 말하던 종류의 커피.그 말이 이제는 설명처럼 들렸다.문 앞에서 잠시 멈췄다.들어가는 것과 돌아서는 것 사이의 거리.그 거리는 생각보다 짧았다.은하는 문을 열었다.종이 울렸고, 안쪽에서 바리스타가 고개를 들었다.낯선 얼굴이었다.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심을 줬다.“주문하시겠어요?”바리스타가 물었다.“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이요.”은하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어제 사진 속 각도와 비슷한 자리였다.의자를 밀어 넣는 소리가 조금 크게 들렸다.그녀는 아무 이유 없이 대신 주변을 봤다.카운터, 테이블 간격, 벽에 걸린 시계.시간을 숨길 수 없는 배치였다.커피가 나왔음을 알리는 벨이 울렸고. 은하는 커피를 가지고 왔지만,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컵에 김이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걸 그저 바라볼 뿐 그리고, 사라지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휴대폰을 꺼냈다.사진을 다시 열었다. 각도를 비교했다.유리창의 반사, 벽의 질감, 시계 위치. 틀리지 않았다.확인은 이렇게 끝났다.확인은 생각보다 조용했다.밖으로 나왔을 때, 바람이 불었다.은하은 잠시 눈을 감았다.눈을 감아도 이미 본 장면은 지워지지 않았다.집으로 돌아가는 길,은하는 중간에 멈춰 약국에 들어갔다.목적은 없었다.그냥 들어가야 할 것 같았다.계산대 앞에서 손이 멈췄다.결국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왔다.그 행동이 지금의 자신과 닮아 있었다.확인은 했지만, 아직 선택하지 않은 상태.집에 도착했을 때, 해는 아직 높았다.은하는
은하의 하루는 늘 같은 순서로 흘러갔다.아침에 일어나고, 남편의 셔츠를 다리고, 식탁을 정리하고, 문 앞에서 인사를 건넸다.그 인사는 언제나 짧았고, 남편은 늘 같은 시간에 집을 나섰다.그날도 다르지 않았다.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그래서 은하는 오히려 불안했다.집 안이 조용해지자 은하는 소파에 앉았다.TV를 켜지 않았고, 라디오도 틀지 않았다.소음이 있으면 생각이 흐려질까 봐서였다.어제 이수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지금은 아직 버티고 있잖아요.버티고 있다는 말은 위로처럼 들리면서도 책임처럼 남았다.그 말 이후로 은하는 스스로에게 자꾸 질문하게 됐다.‘나는 정말 버티고 있는 걸까.‘아니면 그냥 멈춰 있는 걸까.’부엌으로 가 컵을 하나 꺼냈다.물을 따르다 손이 미세하게 흔들렸다.컵 가장자리에서 물방울이 넘쳤다.은하는 급히 닦았지만, 바닥에 남은 자국은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그 자국을 보며 은하는 잠시 멈췄다.아주 작은 흔적이었지만, 있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점심 무렵, 은하는 외출 준비를 했다.특별한 약속은 없었다.그러나 집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 생각이 더 깊어질 것 같았다.밖으로 나가는 선택은 도망이 아니라 유예에 가까웠다.동네 마트에 들러 필요 없는 물건을 몇 개 샀다.사야 할 목록은 이미 끝났지만, 계산대에 서는 순간이 오늘의 목적 같았다.카드 결제 소리가 났고, 영수증이 나왔다.은하는 그 영수증을 바로 버리지 못했다.손에 쥔 채 잠시 서 있었다.이상하게도 그 작은 종이가 자기 하루의 증거처럼 느껴졌다.집으로 돌아와 봉투를 정리하다가 서랍 하나를 열었다.평소엔 잘 열지 않는 서랍이었다.그 안에는 남편의 물건들이 섞여 있었다.오래된 명함, 잊힌 충전기, 쓰지 않는 휴대폰 하나.은하의 손이 그 휴대폰 위에서 멈췄다.전원이 꺼진 상태였다.충전기를 연결하자 잠시 후 화면이 켜졌다.잠금은 없었다.남편은 집 안에서만큼은 경계를 풀어두는 사람이었다.은하는 메시지함을 열지
초인종은 한 번만 울렸다.길게 누르지 않은 소리였다.조심하는 사람이 내는 방식.이수는 소파에서 바로 일어나지 않았다.초인종이 울렸다는 사실을 몸이 먼저 확인할 시간을 조금 남겼다.다시 울리지 않았다.그 점이 더 신경 쓰였다.급한 사람은 기다리지 않는다.이수는 현관으로 걸어갔다.걸음은 느렸고, 문고리에 손을 얹기 전 잠시 멈췄다.문 하나 사이의 거리에서 사람의 태도는 대부분 드러난다.문을 열자 여자가 서 있었다.나이는 가늠하기 어려웠고, 옷차림은 지나치게 단정했다.단정함이 몸에 익은 사람처럼 머리는 묶여 있었고,손에는 작은 가방 하나만 들려 있었다.“서이수 씨 맞죠?”여자는 먼저 이름을 불렀다.호칭이 정확했다.확신이 섞인 발음이었다.“네. 맞아요.”이수는 문을 더 열지 않았다.여자도 안으로 들어오려 하지 않았다.둘 사이의 거리는 딱 한 발 정도였다.“잠깐.”여자가 말했다.“시간 괜찮으시면.”부탁처럼 들렸지만, 이미 거절을 예상한 말투였다.거절을 예상하는 사람은 쉽게 물러나지 않는다.이수는 고개를 끄덕였다.문을 조금 더 열고 몸을 옆으로 비켰다.초대라기보다는 통과 허락에 가까운 동작이었다.여자는 신발을 벗고 들어왔다.정렬해서 놓았다.그 작은 행동이 성격을 설명했다.거실에 앉자 여자는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열지 않았다. 말부터 꺼낼 생각이었다.“소개는.”여자가 말했다.“굳이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그 말은 이미 이수를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이수는 묻지 않았다.이제는 묻지 않는 편이 더 정확할 때가 많았다.“제 얘기를.”여자가 말을 이었다.“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요.”이수는 물을 한 잔 따랐다.여자 앞에 놓고, 자기 앞에도 하나 놓았다.말을 시작하기 전에 손이 할 일을 만들어주는 습관.“처음부터요.”이수는 말했다.“보통은.”여자는 잠시 물컵을 바라봤다.손은 컵을 잡지 않았다.잡지 않는다는 건 아직 자신을 내놓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저는.”여자가 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