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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습관

Author: 데이지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6-21 06:57:48

태성은 그날도 같은 시간에 움직였다.

회사의 불이 꺼지는 시각과 거의 겹쳤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동안 그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루를 끝냈다는 안도보다,

이제 어디로 갈지 이미 정해져 있다는 확신이 더 가까웠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차에 오르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 어제와 비슷한 리듬으로 이어졌다.

태성은 채널을 바꾸지 않았다.

바꾸지 않아도 되는 것들이 늘어날수록 사람은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착각에 기대게 된다.

그는 내비게이션을 켜지 않았다.

경로를 입력하는 행위 자체가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대신 몸이 먼저 움직였다.

익숙한 신호에서 속도를 줄이고, 익숙한 골목 앞에서 방향을 틀었다.

머리는 판단하지 않았고, 몸만이 길을 기억하고 있었다.

장미 미용실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불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이수는 창가 쪽 의자에 앉아 태블릿 화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도 위에는 점들이 찍혀 있었고, 점과 점을 잇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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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륜해드립니다.   69. 명분

    준혁은 예약 시간을 두 번이나 확인했다.의미 없는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는 화면을 닫지 못했다.확인하는 건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이미 정해진 선택을 다시 되돌아보지 않기 위해서였다.미용실에 가는 이유는 간단했다.머리를 정리해야 한다는 명분.그 명분은 집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설명이 되어주고,설명이 생기면 사람은 죄책감을 미룰 수 있다.그는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장미 미용실은 그날따라 조용했다.예약이 비어 있는 시간대, 손님이 몰리지 않는 틈.이수는 그 시간을 일부러 남겨두었다.강준혁이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놀라지 않는다는 태도는 상대를 ‘예정된 사람’으로 만든다.“오셨어요.”그 말은 환영도, 확인도 아니었다.기록에 가깝게 들렸다.“네.”준혁은 의자에 앉으며 주변을 한 번 훑었다.익숙한 공간인데도 어딘가 달라 보였다.그 이유를 그는 곧 알게 됐다.오늘의 이수는 평소보다 말을 적게 했다.질문하지 않았고, 설명하지도 않았다.필요한 말만, 필요한 순간에만 꺼냈다.그 침묵이 준혁을 편안하게 만들었다.사람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에서 가장 쉽게 선을 넘는다.머리를 다듬는 동안, 이수는 일부러 거울을 오래 보지 않았다. 시선이 오래 머물면 그건 선택이 된다.대신 손끝의 리듬을 일정하게 유지했다.기술적인 손길, 감정이 배제된 움직임.그 균형이 준혁을 안심시켰다.“요즘,”그가 먼저 말을 꺼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짧게 응했다.“네.”“집에 잘 안 들어가게 되네요.”그 문장은 자기 보고였다.상담을 원해서가 아니라, 말해도 되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이수는 그 문장을 받아 적듯이 들었다.“그래도,”그가 덧붙였다.“이상하진 않아요.”“뭐가요.”“이렇게 되는 게.”그는 자기 말을 스스로 정리했다.“원래 사람은 편한 쪽으로 가잖아요.”그 말은 합리화였다.이수는 그 합리화에 동의하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대신 다른 질문을 던졌다.“그

  • 불륜해드립니다.   68. 선택의 유예

    준혁은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정확히 말하면 돌아가려다 멈췄다.차는 이미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와 있었고, 경비실 앞에서 속도를 줄인 상태였다.그러나 차를 세우지 않았다.깜빡이를 켜지 않은 채 그는 그대로 단지를 지나쳤다.그 순간, 준혁은 자신이 뭘 선택했는지 명확히 알고 있었다.집을 지나친 뒤에도 곧장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았다.그게 중요했다.목적지가 정해지면 그건 계획이 되고, 계획은 되돌릴 수 없는 선을 만든다.그래서 그는 한동안 차를 몰았다.라디오를 켰다가 다시 끄고, 창문을 조금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바깥 공기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차 안에 혼자 있다는 감각이 답답해졌기 때문이다.휴대폰이 대시보드 위에서 가볍게 울렸다.아내였다.준혁은 화면을 보지 않았다.보는 순간, 지금의 선택을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진동이 멈추고 잠시 후, 다시 울렸다.이번에도 받지 않았다.그는 그 사실을 ‘무시’라고 부르지 않았다.‘나중’이라고 생각했다.나중이라는 말은 모든 선택을 미뤄두는 데 아주 유용한 단어였다.장미 미용실의 불은 이미 꺼져 있었다.그러나 준혁은 그 앞을 지나치며 속도를 줄였다.문은 닫혀 있었고, 안은 어두웠다.그럼에도 그는 차를 세웠다.차에서 내려 한동안 서 있었다.유리문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그 공간이 아직 거기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라앉았다.그는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연락하지 않았다.연락하면 그건 행동이 된다.아직은 행동이 되고 싶지 않았다.그 시각, 이수는 미용실 안에 있었다.불은 꺼져 있었지만, 완전히 닫힌 상태는 아니었다.하빈이 창가 쪽에서 밖을 보고 있었다.“있다.”그가 낮게 말했다.이수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차.”“알아.”“내렸어.”이수는 그제야 손을 멈췄다.이건 예상된 장면이었다.준혁이 집으로 가지 않고,그렇다고 들어오지도 못한 채 머무는 상태.선택을 미루는 사람의 전형적인 행동.“아직은 문 안 열어.

  • 불륜해드립니다.   67. 이동

    준혁은 그날 저녁, 집으로 바로 가지 않았다.이유는 없었다.아니, 이유가 없다는 말이 가장 정확했다.회사에서 나오는 시간도 평소와 같았고,차에 오르는 동작도 익숙했는데,핸들을 잡은 손이 자연스럽게 집 쪽이 아닌 방향으로 움직였다.그는 그 사실을 신호등 하나를 지나서야 알아차렸다.멈추지 않았다.멈추면 설명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자기 자신에게조차. 차 안은 조용했고, 라디오는 켜지지 않았다.엔진 소리만 일정한 박자로 귀를 채웠다.그 리듬이 이상하게 마음을 안정시켰다.장미 미용실 근처에 도착했을 때, 그는 미리 계획한 적 없다는 사실에 안도했다.계획은 의도가 되고, 의도는 죄책감을 만든다.우연은 그 모든 걸 비켜간다.차를 세우고 한동안 내리지 않았다.밖을 바라보며 유리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익숙한 얼굴이었다.그래서 더 낯설었다.문을 열고 내리는 순간까지도 그는 이게 무엇인지 정의하지 않았다.미용실 안은 이미 정리가 끝난 상태였다.조명이 절반쯤 꺼져 있었고, 바닥은 막 닦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이수는 카운터 안쪽에서 서류를 정리하다가 문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잠깐, 눈이 마주쳤다.그 짧은 시선 교환에는 놀람도, 반가움도 없었다.다만 예상 밖의 상황을 받아들이는 침착함만 있었다.“예약 없으셨어요.”그녀의 말은 질문이었지만, 거절은 아니었다.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아요.”그 대답이 자연스러워서, 그 스스로도 잠시 놀랐다.“그냥… 근처에 있다가.”이수는 더 묻지 않았다.대신 의자를 하나 꺼내며 말했다.“잠깐이면 괜찮아요.”‘잠깐’이라는 단어는 시간이 아니라 부담의 크기를 말한다.준혁은 그 말에 안심한 듯 의자에 앉았다.머리를 감을 이유는 없었고, 다듬을 필요도 없었다.그래서 이수는 그를 손님으로 대하지 않았다.컵에 물을 따르고, 앞에 놓아줬다.“요즘 많이 바쁘신가 봐요.”그 말은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상대를 말하게 만드는 문장이었다.준혁은 컵을 잡았다가 다시 내려

  • 불륜해드립니다.   66. 안도라는 도피

    준혁의 집은 정리되어 있었다. 늘 그랬다.가구의 위치도, 조명의 밝기도, 저녁 시간의 리듬도 크게 달라진 적이 없었다.그는 그 안정감을 사랑이라고 불렀다.혹은 책임이라고.현관에 들어서자 불은 켜져 있었고, 부엌에서는 미세한 기름 냄새가 났다.아내는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그녀는 준혁을 보자마자 시계를 보지 않았다.시간을 확인하는 대신 표정을 먼저 살폈다.“오늘도 늦었네.”그 말은 책망이 아니었다. 확인이었다.준혁은 외투를 벗어 걸며 고개를 끄덕였다.“일이 좀.”그 말은 습관처럼 나왔다.생각하지 않아도 입이 먼저 기억하는 문장이었다.아내는 더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다는 건 이해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포기라는 뜻이기도 했다.식탁 위에는 이미 식어 있는 음식들이 놓여 있었다.데우면 되지만,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그 사이의 공백이 오늘따라 길게 느껴졌다.“요즘,”아내가 조심스럽게 말했다.“집에 잘 안 있는 것 같아서.”준혁은 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잔을 내려놓았다.“그렇진 않아.”말은 빠르게 나왔지만, 시선은 식탁을 보지 않았다.“그래?”아내는 그를 보며 물었다.“그럼 내가 예민한 건가.”그 문장은 질문이 아니었다.이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이었다.준혁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그런 건 아니고.”그는 설명하려다 말았다.설명은 상대를 설득하기 위해 하는 말인데,지금은 무엇을 설득해야 할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아내는 그 침묵을 오래 붙잡지 않았다.“됐어.”그녀는 말했다.“피곤하면 그럴 수 있지.”그 말은 문을 닫는 소리처럼 들렸다.준혁은 자신이 그 문을 닫아버린 건지,아니면 닫히는 걸 가만히 보고 있었던 건지 분간하지 못했다.그날 밤, 그는 잠들지 못했다.침대에 누운 채 눈을 감았지만, 머릿속에는 낮의 공간들이 차례로 떠올랐다.회사, 차 안, 그리고 장미 미용실.그 공간들에는 공통점이 있었다.아무도 그에게 왜냐고 묻지 않는다는 것.그 사실이 이상하게 안도감을 주었다.

  • 불륜해드립니다.   65. 균열

    준혁은 자신이 흔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아직 인정하지 않았다.그에게 감정은 언제나 정리해야 할 대상이었고, 정리되지 않은 것은 일시적인 오류쯤으로 치부해왔다. 그래서 그는 요즘 자신의 행동을 ‘변화’라고 부르지 않았다.그저 일정의 변형, 동선의 미세한 수정이라고 생각했다.문제는 그 수정이 점점 집을 비껴가고 있다는 점이었다.그날 오후, 준혁은 약속보다 조금 일찍 미용실 근처에 도착했다.장미 미용실. 간판은 여전히 눈에 띄지 않았고, 유리문 너머의 풍경도 늘 비슷했다.그래서 더 안심이 됐다.사람은 자주 찾는 장소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장소에 더 쉽게 마음을 푼다.문을 열자 익숙한 소독약 냄새와 미세한 물기 섞인 공기가 그를 맞았다.“어서 오세요.”이수는 의자를 정리하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화장은 연하지 않았지만, 의도적으로 힘을 뺀 얼굴이었다.눈빛은 길게 머무르지 않았고, 목소리는 일정했다.그 일정함이 준혁을 편하게 만들었다.“오늘은 예약 없으시죠.”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이수는 굳이 이유를 묻지 않았다.묻지 않는 태도는 사람에게 선택권을 준다.그는 의자에 앉으며 거울 속 자신을 잠시 바라봤다.최근 들어 거울 속 얼굴이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요즘 자주 오시네요.”이수의 말은 확인이 아니라 기록처럼 들렸다.“그러네요.”준혁은 그 말을 가볍게 넘기려 했지만, 속도가 조금 느렸다.“회사 근처보다 여기가 편해서.”편하다는 말이 자기 입에서 나오는 순간, 그는 미세하게 눈을 찌푸렸다.이수는 그 표정을 놓치지 않았다.사람은 편하다는 말을 할 때보다 그 말을 후회할 때 더 많은 걸 드러낸다.“그럴 수 있죠.”이수는 거울로 그를 보며 말했다.“집이랑은 좀 다르니까.”그 문장은 집을 비난하지도, 자신을 강조하지도 않았다.그저 비교의 기준을 조용히 옮겼을 뿐이었다.준혁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대신 손을 무릎 위에 올려두고 고개를 약간 숙였다.그 자세는 스스로를 낮추는 게 아니라, 상황을 받아들이는 자세였다.

  • 불륜해드립니다.   64. 미세한 균열

    준혁은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알람이 울리기 전, 눈이 먼저 떠졌다.시간을 지킨다는 감각은 그에게 능력이었고, 능력은 곧 도덕이라고 믿는 사람이었다.그래서 그는 자기 하루가 흐트러지는 걸 유난히 싫어했다.부엌에서 커피를 내리는 동안, 그는 식탁 위를 한 번 훑었다.물컵의 위치, 의자의 각도, 전날 밤 정리해 둔 서류의 방향. 모든 것이 어제와 같았다.같다는 사실이 그를 안심시켰다.지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말하지 않는다는 건 그에게는 늘 좋은 신호였다.말이 없을수록, 질서는 유지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오늘은.”준혁이 말했다.말의 끝을 열어둔 채.“일찍 올 거야.”그 문장은 약속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통보였다.그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기다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질문하지 않았고,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그녀는 규칙을 기억하고 있었다.질문하지 말 것. 흔들리지 말 것.준혁은 그 반응에 아주 미세하게 만족했다.통제는 언제나 눈에 띄지 않을 때 가장 강해진다.장미 미용실에서는 이수가 커튼을 반만 걷어 두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오늘은 손님을 받지 않을 예정이었지만, 문을 닫지도 않았다.문을 열어두는 것과 누군가를 들이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하빈은 자료를 정리하며 말했다.“이 남자.”“응.”“시간에 집착해.”“질서에 집착하는 거지.”이수는 고개를 저었다. 시간은 도구일 뿐이었다.그가 지키고 싶은 건 자기 중심으로 배열된 세계였다.“그래서,”이수가 말을 이었다.“유혹으로 흔들면 안 돼.”“대신.”하빈이 말을 받았다.“질서를 바꾸는 거지.”“아니.”이수는 펜을 내려놓았다.“질서를 바꾸는 척만 할 거야.”하빈은 그 차이를 이해했다.완전히 바꾸면 상대는 즉시 방어한다.하지만 아주 사소한 어긋남은 스스로 원인을 찾게 만든다.“준혁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아.”“그래서.”이수는 천천히 말했다.“자기 입으로 설명하게 만들어야 해.”설명. 그 단

  • 불륜해드립니다.   48. 보호

    태성은 서윤에게 전화를 걸기 전 잠시 숨을 고르고 있었다.전화를 거는 일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문제는 어떤 말로 시작하느냐였다.사람은 첫 문장으로 자기 의도를 숨긴다.“오늘은,”그가 말했다.“차로 데려다줄게.”서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그 짧은 침묵이 태성의 신경을 건드렸다.“괜찮아요.”그녀가 말했다.“혼자 갈 수 있어요.”혼자.그 단어가 태성의 머릿속에서 한 번 더 울렸다.“요즘,”그는 최대한 부드럽게 말했다.“밖이 좀 복잡하잖아.”“괜히 걱정돼서 그래.”걱정. 보호. 늘 이 두 단어는 통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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