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이방원이 눈살을 찌푸렸다.“어찌 그리 단언하십니까?”“내가 아는 붉빛미르와, 지금 네놈을 탐하고 있는 붉빛미르는 차원이 다르다.”이성계의 말에, 이방원은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붉빛미르는 이 나라 왕가에 내려오는 유일무이한 권능! 아바마마의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과연 그러하다 생각하느냐?”캐묻는 말에, 이방원은 순간 할 말을 잃은 듯 했다.이성계는 그런 아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꿰뚫어보는 듯한 아버지의 시선을 차마 견디기 힘들었던지 이방원은 칼날 뒤로 자기 얼굴을 감췄다.“혹시 말이다.”이성계가 입을 열었다.“네놈의 마음 깊숙한 곳에 붉빛미르를 통제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일말도 없다 생각하느냐? 정말 조금도 겁나지 아니하느냐?”“두렵지 않습니다.”이방원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즉각 대답했다.그리 말하는 왕자의 목소리 끝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아바마마께서 붉빛미르를 다루는 장면을 보고 배웠으니까요.”“배웠다?”이성계가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그래서 붉빛미르를 통제할 수 있다고 믿은 것이냐? 내가 하는 것을 보고 말이냐?”“할 수 있습니다.
이방원은 이성계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수년간 북방을 헤치며 단련한 몸이건만, 한창 젊고, 기세까지 등등한 아들의 손아귀는 쉬이 뿌리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했다.“아바마마.”이방원이 다시 본연의 목소리로 불렀다.“이제 다 끝났습니다.”“무엇이 말이냐?”이성계가 쿨럭 기침을 하며 되물었다.“네놈이 말하는 끝이 당최 무어냐!”“이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이방원이 범처럼 포효했다.그 기세에 이성계마저 움찔할 정도였다.“아바마마의 눈을 흐리게 만들었던 작자들. 그리고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탐낸 자들을 모두 쳐냈습니다. 일이라는 것은 순리에 맞게 처리해야 하는 법이 아닙니까?”“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 순리에 맞게 처리해?”“그렇습니다.”“이 나라의 원훈(元勳)을 죽이고, 피를 나눈 네 동생을 죽이고! 이제는 아비까지 죽이려 드는 것이 순리에 맞는 일이더냐!”“아버님께서 말씀하시는 원훈은 대체 누구입니까!”“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남은! 심효생! 이제!”“그들이 전부 아바마마께 충성하였다고! 아바마마께서 세우신 나라에 충성하였다고 단언할 수 있으십니까!”“누구는 나와 맞섰고, 누구는 나와 협력했다! 모두가 나의 편일 수는 없는 법이야! 그게 정치고 왕이고 나라야!”“그래서 아버님은 실패하신 겁니다!”이방원이 한마디도 지지 않고 대들었다.흥분한 방원이 힘을 주자 목뼈가 부러질 듯 관절 틀어지는 소리가 뚜둑- 울렸다.“그래서 아바마마는 여기서! 홀로!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이 싸우고 계신 겁니다!”“뭐가 어째?”“모두가 나의 편일 수는 없다? 맞는 말이지요. 그래서 묻어놓고 가다가 등 뒤에 칼이라도 맞으면 누가 위로해준답니까?”“이놈! 감히 무슨 망발이냐!”“왕은 자기편만을 골라야합니다! 통치자는 자기편에 둘러싸여 있어야합니다! 그게 왕입니다! 적은 죽이고, 배신자는 처단하고! 권신은 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그래서 네 가족도 죽인 것이냐! 방번이! 방석이를!”“적이니까요!”둘의 말싸움이 극에
밤이었다.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위로 은빛 초승달이 빛나고 있었다. 별들은 소쿠리에 담긴 쌀알처럼 무성하고, 달빛에 반사된 빛무리가 밤하늘 차양처럼 드리워 있었다.대궐이었다. 야음에 휩싸인 터라 현판이 보이질 않았으나 이곳이 어디인지는 바로 알 수 있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친숙함이 느껴지는 장소였다.‘근정전(勤政殿).’경복궁의 정전이자 임금이 다니는 어도(御道)와 신하들이 도열하는 품계석이 놓여있는 곳. 바로 조선의 심장부였다.그리고 그는 그곳 근정전 계단 앞에 걸터앉아 있었다.익숙지 않은 몸을 한 채로.육신과 정신이 따로 노는 기분이었다. 팔도, 다리도 모두 제자리에 붙어 있었으나 남의 것을 보는 것처럼 어색했다.피부로 느껴지는 냉기도 이상했고, 숨을 쉬는 가슴도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몸을 이루는 모든 것이 잘못 틀어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다.‘깃들어 있다.’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지금 내 몸은 내 몸이 아니었다. 누군가의 육체에 들어와 있었다.구석구석 느껴지는 관절의 무게로 보아 꽤나 노쇠한 몸이었다.그러나 기골 자체는 강대하고 강인했으며, 오랫동안 창칼을 다룬 것처럼 단련되어 있었다. 비록 풍파에 닳은 몸이나, 검을 잡은 손아귀에는 대단한 호승심이 서려 있었다.무사였다.무인(武人)의 육신이었다.근정전으로 들어서는 정문, 근정문(勤政門)밖에서 수런거리는 소리가 났다.담장 위로 수십 명이 치켜든 횃불이
“한번 말해봐라.”이도가 속을 알 수 없는 목소리로 강권했다.“과연 세간의 백성들은 아바마마에 대해 어찌 생각들을 하고 있는지.”“전하…….”“솔직하게 얘기해봐라. 너를 탓하지도, 마음에 들어 하지도 않을 것이야. 그저 궁금할 뿐이니.”“전하…….”“정 위험하겠다 싶으면 휙 도망쳐버리면 되지 않느냐? 너 정도라면 능히 이 도성을 빠져나갈 수 있을 텐데. 안 그런가?”“불가하옵니다, 전하. 정말로 불가하옵나이다…….”천우는 거의 울상이 되어 호소하듯 중얼거렸다.포청에서조차 얌전히 하라는 대로 갇혀있던 천우였다. 감히 주상전하의 앞에서 도망을 한다? 차라리 수탉이 알을 낳았다고 지껄이는 편이 더 그럴 듯했다.“권사.”이도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천우를 내버려두고 지운을 불렀다.“예, 전하.”“백천우가 도망한다면, 붙잡을 수 있으시겠소?”“확답을 드릴 수 없나이다.”지운이 피식 웃는 소리와 함께 가볍게 손사래를 쳤다.“이미 저 만큼이나 물을 다루는데 통달해있는 까닭에 그 승부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직 이 자의 전력을 확인한 바가 없으니 실로 대답 드리기 곤란하나이다.&rd
붉빛미르.붉은 빛깔을 가진 용.그 이름을 듣는 순간, 몸통이 새빨간 거대한 산천초목을 불태우는 광경이 환상처럼 떠올랐다. 용이라는 짐승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음에도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머릿속을 헤집고 다녔다.열기가, 비명이, 잿가루가 그대로 덮쳐드는 듯했다.절로 숨이 막혔다.“윽…….”천우는 불현 중에 기침을 했다.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사당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그러나 살이 타는 열기와 귀청을 찢는 비명과 목구멍을 간지럽히는 재는 실제로 거기 있었던 것처럼 생생했다.“붉빛……. 미르?”“맞다.”“붉은색 용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용이라는 것은 본디 그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짐승이다. 그러나 붉빛미르는 붉디붉은 비늘로 자기 몸을 덮고 있지.”이도가 중얼거렸다.“불과 열의 화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악하기 그지없는 짐승이니라. 성질이 포악하고 과격한 것이, 그야말로 함부로 타오르는 불길과 같지.”한창 말하던 이도가 지운 쪽을 흘깃거렸다.지운은 동의한다는 듯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그러나...”이도가 말꼬리를 흐렸다.쉽게 꺼낼 수 없는 말을 꺼내듯, 군왕의
감당하기 힘든 말들이 전해져오자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역도?’천우는 어지러운 와중에도 정신을 부여잡으려 애를 썼다.그러나 지운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거머리처럼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역도(逆徒). 역도라.조선 땅에서 결코 용납될 수 없고, 용납해서도 안 되는 대죄(大罪)중의 대죄.일평생을 작은 밭을 갈며 초야에 묻혀 지내던 아버지가. 살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심하지도 않았던, 선량하기 짝이 없던 아버지가 그런 대죄를 저지른 사람이었다고?믿을 수가 없었다.믿고 싶지 않았다.“말도……. 안 됩니다.”천우가 겨우 목소리를 짜내 말했다.“제 아버님이……. 역도라니……. 그럴 리 없습니다.”“백사성은 틀림없이 우리를 배신했네.”“뭔가……. 뭔가 사정이 있었을 겁니다. 분명히…….”“이보게, 천우.”지운이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천우를 불렀다.천우는 그런 지운을 아득한 눈으로 쳐다보았다.“아까 자네가 아군이 될지, 적이 될지 모른다고 내가 말했던 것 기억하나?”천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네. 기억합니다.”“나는 자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