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 사람이 왜 여기에?’
천우가 놀란 눈으로 어리를 바라보았다.
“어, 어리님?”
이포교 역시 떨리는 목소리로 어리를 맞았다.
“여기는 어쩐 일로……”
“고깃국이라도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왔던 차에, 아는 얼굴들이 보여서요.”
어리가 사각- 부드럽게 땅을 디디며 다가섰다.
한 팔에 들린 쓰개치마 자락이 공중에서 하늘하늘하게 흔들렸다.
“그런데 남들 보기에 부끄러운 장면이 펼쳐지고 있지 뭡니까? 그래서 실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습니다.”
“그게……&rdqu
“어명을 받들겠습니다.”옆에 서 있던 장영실이 허리를 수그리며 대답했다.그렇지만 그리 말하는 표정 또한 밝지만은 않았다.“그래도 마음이 못내 아픕니다.”일어나고 난 장영실이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지운 권사께서도 천문과 수학에 밝으셨던 분인지라. 몇 번 뵙기도 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누었던 기억이 나니 말입니다.”“영실아. 나 또한 그러하다.”이도가 풀죽은 투로 대답했다.“어쩌다 권사가 붉빛미르와 뜻을 함께 하기로 했는지……. 뒷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다.”“드릴 말씀이 없나이다. 전하.”“그렇다고 내가 뭘 어찌하겠느냐? 나는 미르들처럼 날아갈 수도 없고, 물빛처럼 물을 다루지도, 붉빛미르처럼 불벼락을 내리지도 못한다. 권사처럼 비 오기를 바랄 수도 없다. 권사 또한 나와는 다른 결을 걷는 사람이니, 본인만의 신념이 있을 터. 나는 그 뜻을 존중할 것이다. 부딪히고 상하는 것은 나중에 생각할 따름이다.”이도의 한숨이 땅이 꺼져라 울렸다.단 한번만으로 모든 미련을 털어내려는 듯 깊은 한숨이었다.“물빛.”이도는 다시금 냉철해진 모습이었다.“네. 전하.”“붉빛미르가 말하기를, 그대를 밖으로 끌어내는데 성공했으니 백사성의 미끼로서의 역할이 소진되었다고 했습니다. 맞습니까?”“틀림없이 그리 말하였습니다. 전하.”천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이도의 고개가 살짝 갸우뚱- 기울여졌다.“꽤 요상한 사고방식입니다.”“무슨 말씀이신지?”“붉빛미르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인명도, 가옥도 불태우고도 남는 사악한 영입니다. 기우사들을 몰살시킨 것만 봐도 알지요. 그런데 이미 자기 수중에 떨어진 백사성을 놓아준다? 아무래도 이치에 맞지 않습니다.”“아버님을 붙잡아 고신한 이유가 물빛미르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라고 했으니…….”“그렇다면 더더욱 말이 안 됩니다.”이도가 단호하게 말했다.“붉빛미르가 왜 권사까지 끌어들여 천문 연구를 막으려 드는 지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이도는 천우와 장영실일 돌아보며 동의
“이번에 서로 맞붙었다가는 적어도 둘 중 하나는 팔다리 하나쯤은 날아가고도 남았을 것입니다.”천우가 중얼거렸다.“그렇다면 물빛께서는 붉빛미르와 싸우지 않고도 백사성을 구조하셨다는 말씀이군요.”“네. 오히려 저보고 아버님을 놓아줄 테니 서둘러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더 이상 기우사를 해치고 싶지 않다면서요.”“그 악독한 붉빛미르가 오히려 백사성을 놓아주다니…….”이도가 석연치 않다는 듯 말꼬리를 흐렸다.수염을 쓰다듬는 손길에도 의구심이 가득했다.“아무래도 이건 권사와 상의를 해봐야 할 사안인 듯 합니다.”이도가 먼저 지운을 입에 올렸다.“기우사의 수장이니, 실종되었던 기우사가 돌아온 것을 보면 또 반갑기도 할 테니까요.”“전하. 저, 그것이…….”천우가 머뭇거리며 입을 오물거렸다.이도가 쳐다보았다.“물빛. 하고 싶은 말씀이라도?”“…….”“속 시원히 얘기해보십시오. 무슨 일입니까?”“전하. 아뢰옵기 황송하오나…….”어쩔 수 없었다.“지운……. 영감께서……. 붉빛미르와 함께 계십니다.&rdqu
“물빛!”놀란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였다.이도가 다소 경박하다 할 만큼의 발걸음으로 이쪽을 보고 달려왔다.“어, 어떻게 된 겁니까?”이도는 천우, 그리고 옆에 축 처져 있는 백사성을 번갈아보다 흠칫- 핏기가 사라진 얼굴이 되어 한쪽을 물끄러미 응시했다.백사성 쪽이었다.이도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이, 이 사람…….”이도가 더듬거리며 천우를 쳐다보았다.“설마, 설마…….”“네. 전하.”천우는 짐짓 무덤덤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대답했다.“아버님이십니다.”“어찌……. 어찌 백사성이…….”“자세한 사정은 뒤에 알려드리겠나이다. 그 전에 우선 아버님을 의원으로…….”“아, 알겠소.”이도가 황망한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 *궁궐 내의 내의원들은 갑자기 임금이 직접 찾아오자 혼비백산하여 약재며 식재료 따위도 다 내팽개치고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그리고 임금이 데려온 정체불명의 사내를 극진히 보살피라는 엄명 앞에서 열과 성을 다해 보좌하리라 다짐하곤 곧바로 진료
코앞에서 불을 들이미는데, 절로 속이 울컥 치밀었다.천우 또한 지지 않고 손에 물덩이를 소환했다.물과 불이 강력하게 맞붙으려는 그 공기에, 산맥이 전율하며 웅웅- 귀가 먹먹한 소리를 냈다.힐끔-어리가 문득 천우의 물덩이를 흘겨보더니 살며시 마른 입술을 혀로 핥았다.“확실히.”어리가 가상하다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나날이 권능을 터득하고 계시네요. 물의 기운이 더 정교하고 강해졌어요. 저조차도 이제 쉬운 승리를 장담하지 못할만큼.”“아부를 떤다고 해서 내가 받아들이리라 착각한다면 오산이오.”“아부라니요. 순수한 감탄일 뿐이죠. 이래서 너무 급격하게 성장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니까.”“나는 한낱 강아지 따위가 아니오. 적어도 호랑이 콧잔등 정도는 할퀼 수 있는 표범이라도 되겠지.”“그건 두고 봐야지요.”논쟁이 즐거운 듯 어리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고 있었다.그러나 그런 어리와 대치중인 천우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곤란하다.’아닌 게 아니라, 확실히 붉빛미르를 상대로 싸우기에는 힘이 모자랐다.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깡마른 벌판도 아니고, 흐르는 물에 싱싱한 초목까지 무성하여 지금까지 싸웠던 어느 곳보다도 수분이 풍부한, 유리한 곳이었지만 여전히 붉빛미르는 강대한 상대였다.‘전력을 다한다면 나 혼자 빠져나가는 것쯤이야 가능하겠지만…….’천우는 저쪽에서 끙끙 앓고 있는 백사성을 흘깃거렸다.기우사인 지운이야 어떻게든 몸을 빼낼 수 있다고 쳐도,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백사성이 미르의 싸움에 휘말린다면 그 결과는 뻔했다.어리 또한 이를 알기에 거침없이 천우를 도발하는 것이리라.‘뻔뻔하고 야비해.’눈앞에서 헤실거리고 있는 이 여인이 가증스러웠다.이런 존재가 어찌 조선 땅 전체를 불바다로 밀어넣을 수 있는 미르라고 할 수 있는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기 힘들었다.“뭐, 확실히.”어리의 말이 이어졌다.“개보다는 조금 낫겠네요.”“조롱하는군.”“개는 불을 보면 피하죠. 사람이랑
“내가 누워있는 곳이 땅인지 하늘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고 천지분간이 희미해지게 됩니다. 몽롱해지는 거죠. 그러다보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알지 못해 있는 말, 없는 말 다 쏟아내게 됩니다.”“술에 취하는 것처럼 말이오?”“그것보다는 아팠을 겁니다. 백사성은 제정신을 유지하려고 끝까지 버티더군요. 정말 대단한 사람입니다. 과연 물빛미르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셨던 사람다워요.”“가해자가 오히려 감탄하는 지경이라니. 말하는 바에 참으로 어폐가 있소.”천우가 어리를 보고 가증스럽다는 듯 입가를 씰룩였다.본인이 해쳐놓고 잘 버틴다며 가상해하는 꼴이라니. 기가 차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지운이 말했던 것과 마찬가지로.”어리의 말이 이어졌다.“저 또한 백사성을 놓고서는 물빛께 드릴 말이 없습니다. 저 사람을 미끼로 물빛을 끌어내려 했고, 고통을 준 것은 사실이니까요. 낚시 바늘에 걸린 꿴 것처럼.”“남일 얘기하듯 말하지 마시오.”천우가 더욱 성이 난 채로 으르렁거렸다.“내 힘이 모자랄지언정, 붉빛미르 당신에게서 아버님은 반드시 모시고 나갈 것이니까. 명줄이 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오.”“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물빛.”“지금 말장난하자는 거요?”“사실을 전해드리는 겁니다.”어리가 조금 상기된 목
“자네.”지운이 그런 백사성을 보고 이쪽으로 다가왔다.스윽-천우가 지운을 노려보았다.아무리 백사성의 말이 있었다 하더라도 가벼이 받아들일 수 없었다.경계와 분노의 감정이 휘몰아쳤다.지운도 그런 천우의 속을 읽었던지 섣불리 더 가까이 오려 하지 않았다.다만 그 자리에 선 채 걱정 가득한 눈길로 백사성을 살필 뿐이었다.“땀이 많이 흐르는군. 몸을 너무 급하게 움직였어.”“…….”“열기를 빼는 약초를 조금 더 발라주겠네. 만약에 내가 백사성 자네에게 다가가는 것을 허락받는다면 말이지.”지운이 중얼거리는 한편, 천우를 흘깃거렸다.척-백사성이 부디 허가해달라는 투로 천우의 어깨를 붙잡았다.손아귀 힘이 너무나 미약해 잡은지 아닌지조차 모를 정도였다.“후…….”천우가 한숨을 내쉬며 조금 뒤로 물러났다.지운이 천천히 그들 앞으로 다가와 섰다.“영감.”“듣고 있네.”“이건 순전히 아버님께서 영감을 지켜주고 계시는 거요. 아버님께 더 이상의 위해를 가하지 마시오. 이건 경고요.”“걱정말게.”지운이 허리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