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g-log in오빠는 열린 발코니 너머로 꽁꽁 얼어붙은 괴한들을 힐끗 보더니,
이내 무서운 살기를 거두고 내게 다가왔다.
"놀랐지. 걱정 마라, 버러지들이 결계에 걸려든 것뿐이니까."
오빠는 사색이 된 나를 잠시 꼭 안아주었다.
내 몸의 떨림이 멈춘 걸 확인한 후 조심히 안아 침대에 눕히고는 이불을 목 끝까지 꼼꼼하게 덮어주었다.
“오빠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고 자거라. 내일 아침이면 흔적도 없이 다 치워져 있을 거다.”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첫째 오빠의 다정한 목소리와 내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길이 좋았다.
다만, 나는 차마 ‘저기, 오빠! 저놈들 사실 황실 암살자들인데,
아무래도 나를 잡으러 온 것 같아요!’라는 진실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한 채,
아주 조그맣고 얌전한 막둥이가 되어 눈을 살포시 감아야 했다.
칼라일 오빠는 내가 잠들 때까지 침대 곁을 지키다,
규칙적인 숨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번쩍 눈을 떴다.
‘자겠냐고! 이 상황에 잠이 오겠냐고!’
이불을 뻥 차고 일어나 발코니 쪽을 힐끗 보았다.
이미 밖에서는 칼라일 오빠의 차가운 지시가 들려오고 있었다.
“……한 놈도 남기지 말고 지하 감옥으로 압송해라.
루체른의 결계를 넘본 버러지들이 누군지 영혼까지 털어서라도 알아내.”
오빠의 목소리는 방금 전 나를 달래던 것과는 180도 달랐다.
뼛속까지 시린 냉기가 문틈을 타고 넘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매트리스 속에 쑤셔 넣은 은 원통을 더듬거렸다.
별 탈은 없는 것 같았다.
‘황실 기사단이 직접 움직였다는 건, 황제가 내 정체를 확실히 알았다는 뜻이겠지? 아니면 이 원통을 노리는 건가?’
평생을 로판 여주처럼 꽃길만 걷고 싶었는데,
내 인생 장르는 왜 자꾸 ‘본격 가문 멸망 방지 첩보물’로 흘러가는 걸까.
**
막내의 방 앞을 정예 기사들에게 맡기고 집무실로 돌아온 칼라일의 표정은 혹한의 겨울 그 자체였다.
책상 위에는 기사들이 얼어붙은 괴한들에게서 찢어온 검은 천 조각이 놓여 있었다.
달빛 아래 비친 문양은 명백했다.
칠흑처럼 오만하게 타오르는 태양인 제국 황실의 문장이었다.
칼라일은 미간을 찌푸린 채, 거칠고 조악한 자수 위로 긴 손가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 모조품이군."
서늘한 목소리가 집무실의 정적을 깨뜨렸다.
암살자의 옷자락에서 찢어낸 천 조각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은밀히 움직여야 할 자가 황실 문양을 달고 나타난 것부터가 코미디였다.
누군가 루체른과 황실을 정면으로 충돌시키기 위해 던진 가짜 단서임이 분명했다.
칼라일의 미간이 좁아졌다.
감히 황실을 사칭해 가문을 모독하고,
게다가 하나뿐인 여동생의 목숨까지 노리다니…
14년 전, 사랑했던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부재는 열한 살 소년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하지만 슬퍼할 겨를조차 없었다.
칼라일은 누구에게도 우스워 보이지 않기 위해 검을 잡았고,
비명 같은 훈련 끝에 단 1년 만에 소드마스터의 반열에 올랐다.
제국 최고의 검사라는 칭호도,
당당한 가주의 자리도
오직 동생들을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일궈낸 피눈물의 결과물이었다.
제 눈에는 여전히 한참 모자라고 어설픈 동생들이었다.
사고뭉치 카시안도,
세상 물정 모르는 엘리노아도 그저 남들처럼 하고 싶은 일을 하며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들에게 티 없는 웃음을 선사하기 위해 칼라일은 스스로가 괴물이 되는 길을 택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가 일군 평화를 감히 깨뜨리려는 불청객이 나타났다.
그것도 가문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막내의 방을 노렸다는 점이 바로 칼라일의 역린을 건드렸다.
"이건 단순한 가문 간의 기싸움 수준이 아니다. 생각보다 거대한 무언가가 제국 전체의 판을 뒤흔들려 수를 쓰는군."
칼라일은 푸른 눈동자를 서늘하게 빛내며 보좌관을 호출했다.
"엘리노아의 방에서 잡은 그 '고드름 쥐새끼들'을 당장 황궁으로 압송해라. 카엘루스 폐하께도 감히 황실을 사칭하며 제국을 어지럽히려는 무뢰배들이 나타났다는 사실을 이 불쾌한 선물과 함께 전해 드려야겠지."
보좌관이 경악하며 되물었다.
"가, 가주님. 그들을 직접 황궁으로 보내신다는 건… 황제 폐하께 정면으로 항의하시겠다는 뜻입니까?"
"항의가 아니라 공조다."
칼라일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미소 지었다.
"누가 감히 황실의 이름을 더럽히고 루체른의 꽃을 탐내려 했는지 폐하께서도 아주 흥미로워하시지 않겠나? 범인이 누구든지 간에 루체른과 황실을 동시에 건드린 대가는 뼈저리게 치르게 될 테니까."
*“엄마.”둘만의 낭만은 정확히 삼 분 뒤 끝났다.나는 고개를 돌리자 테라스 문에는 작은 실루엣 하나가 생겼다.바로 루시아였다.한 손에는 카루 인형을 들고 다른 손에는 이불 끝을 들고 있었다.“왜 안 자?”“잠 안 와.”“유모는?”“잔다.”“네가 먼저 재웠어?”“응.”도대체 누가 누구를 재우는 건지. 루시아가 우리 쪽으로 걸어왔다.“엄마랑 잘래.”“그래.”내가 말하는 순간 카엘루스가 말했다.“안 돼.”루시아가 아빠를 봤다.“왜.”“네 침실이 있잖아.”“싫어.”“루시아.”“엄마랑 잘 거야.”“
황궁에 도착했을 때 나는 계단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엄마아!”루시아가 내게 달려왔다. 나는 아이를 번쩍 안으며 물었다.“잘 놀았어?”“응!”“뭐 했어?”“고양이 샀고! 사탕 먹었고! 공연 봤고!”루시아가 엄청 신나게 말했다.“그리고?”루시아가 아주 당당하게 말했다.“아빠가 길에서 나 잃어버렸어!”나는 천천히 카엘루스를 바라보자 그가 눈을 감았다.“……그건.”“카엘루스.”“잠깐이었다.”“애를 잃어버렸어요?”“루시아가 먼저 손을 놓은 거다.”“아빠 나한테 소리도 질렀어.”그러자 빠르게 카엘루스가 말을 막았다.“사과했다.”루시아가
그 뒤로 부녀는 사탕도 먹고 거리 공연도 봤다. 길 가다 만난 작은 분수에서 동전도 던지고 기도해보았다. 그리고 루시아는 끊임없이 말했다.“아빠.”“왜.”“저 사람은 왜 저래?”“아빠.”“왜.”“하늘은 왜 파래?”“아빠.”“왜.”“엄마는 왜 아빠랑 결혼했어?”카엘루스가 멈췄다. 이 질문은 뭔가 대답해 줘야만 할 것 같았다.“왜 궁금하지.”“그냥.”“…….”“엄마가 아빠 미쳤다고 맨날 말하잖아.”“…….”집에 가서 이야기할 사람이 하나 더 늘었다.“그래도 좋아하니까 결혼한 거겠지.”루시아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나도 아빠 좋아.”카엘루스의 표정이 조금 풀렸다.“그래.”“엄마가 더
다음 날 아침.황실 교육 일정이 전부 뒤집혔다.“뭐라고요?”황실 교육원장이 놀란 얼굴로 카엘루스를 바라봤다.“황녀 전하의 일정을 절반으로 줄여라.”“하, 하지만 폐하.”“오전 두 시간.”“그 정도로는 정규 황족 교육 과정을 소화하기 어렵습니다.”“그럼 정규 과정을 바꿔.”“예?”“네 살짜리가 소화하지 못하는 교육이라면.”카엘루스는 태연했다.“교육이 잘못된 거겠지.”교육원장의 입이 닫혔다. 나는 옆에서 차를 마시며 웃음을 참았다. 카엘루스의 시선이 날 향했다.“왜 웃지.”“아무것도.”“어제는 나보고 틀렸다더니.”“그래서 고쳤잖아요.”“…….”“잘했어요.”카엘루스가 묘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칭찬받는 기
“공부하기 싫어.”정확히 사흘 뒤 루시아는 다시 사고를 쳤다.이번에는 보물고가 아니라 바로 황녀궁 교육실이었다.나는 교육실 문을 열자마자 당황했다.“……이게 뭐야.”책이 날아다녔다. 정말로 공중에 떠 다니고 있었다.제국사 책과 예법서. 고대어 교본에 종이 수십 장이 허공을 빙글빙글 도는 중이었다. 교육 담당 궁정 마법사는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황후 전하…….”그의 얼굴에는 절망이 가득했다.“저는 분명 아무런 마법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알아요.”범인은 따로 있다.바로 루시아. 내 딸이었다.두 손을 허리에 얹고 서 있었다.그리고 그녀의 옆에는 바로 뀨. 녀석이 푸른 눈에서 마력이 반짝였다.“…&helli
황궁에는 절대로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장소가 몇 군데 있다.첫 번째. 제국의 국새와 역대 황실 보물이 보관된 황실 보물고.두 번째. 전쟁과 외교에 관련된 기밀문서가 쌓여 있는 황제의 비밀 집무실.세 번째. 황궁 지하 깊숙한 곳에 봉인된 침묵의 기록관.그리고 오늘 아침. 여기에 새로운 장소 하나가 추가되었다.바로. 제국의 하나뿐인 황녀, 루시아 아르카디온의 침실.이유는 간단했다.“황녀 전하가…….”시녀장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사라지셨습니다.”“…….”나는 찻잔을 든 채 굳었다. 맞은편에서 아침 신문을 읽던 카엘루스의 손도 그대로 멈췄다.아주 짧은 고요였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다시 한번 말해볼래?”“화, 황녀 전하께서 침실에 계시지 않습니다.”“언제부터?”&ldqu
질문이 끝나기 무섭게 카엘루스의 그림자가 나를 덮쳤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내 턱을 부드럽게 고정하며 들어 올렸다.“글쎄, 영애라면 이걸 어떻게 하고 싶을까?”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와 입가에 걸린 묘한 미소가 소름 끼치도록 매혹적이었다.‘헉! 위험하다…… 이건 마치 로판 30화쯤 나오는 남주의 전형적인 유혹 포즈잖아?!’머릿속 덕후 본능은 환호성을 질렀지만, 애석하게도 내 몸은 정직했다. 서 있는 황제를 앉은 채로 올려다보느라 목 근육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것이다.“저…… 폐
바닥에 놓인 조그마한 검은 알이 혹시라도 깨질세라 푹신한 바구니에 옮겨 담은 후, 우리들은 자리를 옮겨 응접실로 이동했다.조금 전까지 불꽃이 튀고 얼음 조각이 날리며 어둠의 파편에서 빛의 기둥까지 세상에 있는 힘없는 힘 모두 뒤엉키는 아수라장 속에서 겨우 살아남은 것 같은데, 응접실에서는 이질적으로 창가를 통해 나른한 햇갈이 쏟아져 내렸다.이 비현실적인 고요를 깬 것은 황제의 낮은 목소리였다.“그래, 그대들은 어디까지 알고 있지?”공작저의 최고급 소파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카엘루스는, 엘리노아의 부서진 아티팩
“내가 인내심이 없다고 말했을 텐데. 기억하지 못하나?”그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곁으로 다가왔다.“영애가 강조했던 그 ‘최상급 기념품’을 친히 받으러 왔지. 말했지 않은가, 내가 인내심이 좀 없다고… 그런데, 기념품치고는 꽤 살벌한 걸 준비했군. 영애의 취향이 이렇게 과격한 줄은 몰랐어. 앞으로 참고하도록 하지.”칼라일 오라버니가 내 앞을 가로막으려 했으나, 카엘루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황권의 마력이 오라버니의 한기를 단숨에 눌러버렸다.“비켜라, 공작. 저건 루체른의 힘으로 감당할 수 있는
쿠궁—!내 처절한 헛소리는 공중에서 마지막 발악을 하듯 팝콘처럼 튀어 오르는 매트리스 가 천장을 전통으로 들이받은 후 중간 부분이 부서졌다.동시에 비명 같은 파열음이 그 사이로 강렬한 은빛 광채와 함께 뿜어져 나오며, 힘을 이기지 못한 유리창들이 덜덜 떨리며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저건…!”카시안 오빠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저 물건은 설마! 너 지금 저 침대 속에서 튀어나온 저 물건이 뭔지나 알고 가지고 있었던 거야? 이 꼬맹아? 저게 지금 얼마나 위험한 물건인지 알기나 하냐고!”칼라일 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