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레드카펫 끝에 선 채원이 마이크를 받았다.
사진 찍는 소리가 커지는 동안 카메라 뒤의 채린은 입장문을 한 번 접었다. 채원이 직접 고쳐 놓은 문장은 종이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저 짧은 말로 여기까지 나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오늘 행사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릴게요.” 짧은 안내가 있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들은 진행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질문은 받지 않기로 약속한 자리였다.
“문제가 된 물품은 제 대기실에 들어온 적이 없고, 제 소유도 아닙니다. 반입 경위는 관계자들이 확인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약속한 시상을 하겠습니다.” 채원은 마이크를 내려놓으려다 조금 더 붙잡았다.
준비한 말은 끝났는데. 채린은 접어 둔 종이를 조금 더 세게 쥐었다.
“저도 여기 서기까지 겁이 났어요. 그래도 오늘 후보인 분들께 축하드리고 싶었습니다.” 박수가 조금 늦게 시작됐다. 마지막 줄에서 채원의 목소리가 흔들렸지만, 그녀는 웃음을 고쳐 짓지 않고 진행자에게 마이크를 돌려줬다.
객석 쪽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경찰 조사받으시는 건 맞습니까?” 채원의 발이 잠깐 멎었다. 채린은 준비한 설명을 다시 들이밀지 않고 본행사 입구를 가리켰다. 현정이 드레스 자락을 짚고 지우가 문을 열자, 채원은 질문이 날아오는 쪽에 등을 돌려 무대로 향했다.
문 안으로 들어온 채원은 크게 숨을 내뱉었다.
“마지막 말 빼는 게 나았어요?”
“아니요.”
“본부장님 표정이 무서워서.”
“제가 다음 말을 몰라서 그랬어요.” 채원은 그녀를 쳐다보다 작게 웃었다.
“저도 몰랐어요. 입이 먼저 나갔어요.”
그제야 채린도 작게 웃었다. 준비한 문장 밖으로 나가는 사람을, 오늘은 그 모습 그대로 무대에 보내야 했다.
본행사가 시작된 뒤, 뒤쪽 복도에서 경찰관에게 출입증 발급 내역과 반입 요청 메일, 의상실의 배송 확인 답변을 전달했다. 채린은 자신의 권한으로 승인할 수 있는 요청이었지만 실제로 승인한 적은 없다는 점도 짚었다.
“대기실에서 발견됐다는 게시물이 올라왔습니다. 저희가 확보한 내용은 여기까지예요.” 경찰관이 실제 물품을 확인한 위치와 시각을 다시 묻자 채린은 기억에 남은 다른 날의 화장대를 떠올리지 않으려고, 오늘 관리자가 적어 둔 시각을 봤다.
서류를 넘기고 돌아오자 수정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약물 누명 시도 차단. 이 제목으로 자료 달래.”
채린의 눈이 제목에 잠깐 머물렀다. 누군가 일부러 벌인 일을 자신이 막았다는 말. 오늘 누구보다 듣고 싶었던 설명이라서, 오히려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물건이 뭔지 아직 안 나왔어. 반입 확인 중 발견된 물품이라고 써.”
“그러면 제목 안 뽑힌다고 할걸.”
“그럼 내 욕을 제목으로 뽑으라 그래. 재미도 없고 말도 길다고.” 수정이 피식 웃으며 전화를 받으러 갔다.
채원의 이름이 호명되자 커튼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드레스의 매끈한 옆선을 눈으로 쫓는 사이 채원이 시상대의 봉투를 열었고, 후보들의 얼굴이 화면에 나란히 떠올랐다.
이름이 불린 젊은 배우가 앞줄에서 입을 가렸다. 채원은 그가 계단을 다 오를 때까지 한 걸음 물러나 기다렸다. 조금 전까지 해명을 요구받던 사람이 이제는 수상자를 맞고 있었다. 대기 통로까지 밀려오는 박수 속에서 채린은 쥐고 있던 입장문을 가방에 넣었다.
박수가 잦아들자 이번에는 채린의 배에서 소리가 났다. 아침부터 아무것도 못 먹었구나. 그걸 알아차린 뒤에야 빈속이 아프기 시작했다.
“밥은?” 다음 시상을 기다리던 이헌이 옆에서 작은 샌드위치 상자를 내밀었다.
“배우님 거 아닌가요?”
“하나 먹었어요. 나머지 하나는 질문에 답하면 줄게.”
“못 먹었습니다.”
“정답.” 받으려는 손에 무전기 줄이 걸렸다. 이헌은 상자를 내민 채 가만히 기다려 줬는데, 그 침묵이 오히려 신경 쓰여 채린은 줄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고맙습니다.”
“내가 아까 말 길게 해서 배고픈 건 아니죠?”
“그건 다음 주까지 영향이 있을 겁니다.”
“그럼 다음 주 밥도 내가 사요?”
“그건 일정 확인하고요.”
“샌드위치는 그럼 외상으로 합니까?”
“영수증 가져오시면 검토하죠.”
“거절할 생각부터 하는 표정인데.”
“아직 금액을 모르잖아요.” 정해진 것도 없는 약속을 벌써 적어 둘 듯 웃는 얼굴이었다. 고작 샌드위치 하나에 대답이 자꾸 길어지는 건 왜일까. 채린은 괜히 상자 안을 내려다봤다.
그녀는 상자 가장자리에 묻은 빵가루를 털다가 수정의 손짓을 봤다. 샌드위치를 입에 넣기도 전이었다.
수정은 가까이 와 목소리를 낮췄다.
“오승재가 자기 휴대폰에서 지시 메시지를 보여 줬대. 담당자한테 직접 제출했어.” 채린은 샌드위치 상자를 닫았다. 물건이 어디로 가려 했는지, 이번에는 자신만 기억하는 하루를 설명하지 않아도 물을 수 있었다.
“누구 메시지인데?”
“백민우. 채원 씨 대기실로 보내라고 적혀 있대.”
사무실 유리문에 자기 얼굴이 두 개 비쳤다.밖은 어둡고 안은 밝았다. 채린은 모니터와 유리문을 번갈아 보다가 커튼을 닫았고, 반성하는 얼굴까지 옆에서 일하는 기분은 별로였다.감사 예고를 받은 다음 날 밤이었고, 라운에 보낼 수정안은 4번째 파일이 됐다. 기존 촬영분에서 만들 영상, 새로 찍어야 할 영상, 취소할 영상. 셋으로 나누면 될 일이 비용을 넣을 때마다 하나로 엉켰다.채린은 추가 인건비를 회사 부담 칸으로 옮겼고, 그만큼 본부 실적이 줄었다. 지우의 계약 연장을 설명할 때 또 이 숫자가 돌아올 터였다.“밑줄 친다고 돈이 생겨?” 수정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코트 단추를 채운 채로 채린의 책상부터 봤고, 가방도 내려놓기 전에 남아 있는 자료의 양을 훑었다.“왜 아직 있어요?”“네가 보낸 파일 기다리느라.” 채린은 낮에 검토본을 공유하겠다고 했던 것을 떠올렸다. 완성하고 보내려고 미뤘다. 미완성인 채로 부탁하면 남의 일까지 늘리는 것 같았다.“거의 됐어요.” 수정이 노트북 시계를 봤다.“그 말 듣고 3시간 지났어.” 채린은 반박하려다 파일 목록을 돌려 보여 줬다. 수정은 의자를 끌어 앉지 않고 선 채로 첫 장을 읽었다.“이 안이면 지우 씨가 내일 뭘 말해야 하는지는 정해져 있어?”“걔는 아직 거래처 앞에 세우기 어려워요.”“네가 쓴 초안 때문에 겁먹었는데, 그걸 네가
채린은 메일을 닫지 않은 채 가방을 들었다.“밥은 먹고 올게요.” 이헌이 대본에서 고개를 드는 표정을 보니 지금이라도 식사를 취소할 줄 알았던 모양이었고, 채린은 감사 대상 명단이 떠 있는 모니터를 끄고 문을 열었다. 굶으면 억울한 말부터 더 쉽게 나왔다.식당까지는 가지 못했다. 대표 비서가 로비에서 두 사람을 불렀고, 장태경이 잠깐 보자고 한다는 말에 채린은 이헌에게 먼저 내려가 달라고 했다.“잠깐이 몇 분인데요?”“이번 건 저도 모릅니다.” 그는 대답을 기다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채린은 빈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식사 약속 하나를 지키는 데도 회사 전체의 협조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대표실 탁자에는 라운 광고 계약서가 놓여 있었다. 감사 예고 메일은 출력되지 않았다.“분쟁부터 끝내자. 그러면 민석 이사한테도 내가 말할 수 있어.” 태경이 빈 의자를 가리켰다. 채린은 앉기 전에 물었다.“재무팀 접속 경위는 확인됐어요?”“그건 별도로 보겠지.”“저희 관리 실패는 지금 감사하고, 그쪽은 별도로요?” 태경은 펜을 내려놓았다. 부드럽던 목소리에서 온도가 빠졌다.“광고주가 손실 처리해 달라고 들어오면 이쪽에서도 책임을 정해야 해. 네가 합의해 오면 정보 관리 건은 개선 조치로 끝내도록 막아 줄 수 있다고.” 채린은 계약서를 펼쳤고, 추가 촬영 조건은 여전히 빈칸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확인하기 전에 얼마
“재무팀에서 쓴 적이 있어요.” 서진의 목소리는 수화기 안에서 작았다.“임원 보고에 넣을 파일을 바로 확인해야 한다고 해서요. 권한 신청하면 늦는다고, 잠깐만 제 계정으로 들어가겠다고 했어요.” 채린은 책상 모서리를 손으로 짚었고, 누가 시켰느냐고 묻는 말이 너무 빨리 튀어나올 것 같았다. 먼저 지금도 접속할 수 있는 상태인지를 물었다.“비밀번호를 바꿔 놓지는 않았어요.”“알겠어요. 기록 지우지 말고, 주고받은 연락은 그대로 두세요. 접속 차단은 담당자에게 요청할게요.”그날 밤 채린은 정보 담당자에게 계정 보호 조치를 맡기고 집으로 갔다. 의자에 더 앉아 있으면 밝혀질 일이 아니었는데, 잠들기 전까지 서진이 왜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는지 같은 질문이 반복됐다.다음 날 아침, 서진은 평소보다 일찍 와 있었고, 채린은 문 앞에서 서류를 받지 않고 면담실로 함께 갔다. 수정도 자리했다.“그 파일을 밖으로 보냈어요?”“아니요. 전 보고자료 출력 요청인 줄 알았어요. 열어 볼 수 있는 계정이 제 것밖에 없다고 해서…….”서진은 메시지를 보여 줬다. 재무팀 직원이 임원 보고 시각을 적어 보냈고, 접근 권한 처리를 기다릴 수 없다고 했다. 채린의 초안을 특정해 달라는 문장은 없었다. 보고용 폴더 안에서 어떤 파일을 열었는지는 추가로 확인해야 했다.“전달받은 사람이 그 글을 올렸다는 뜻은 아닙니다.” 수정의 말에 채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이름 대
“그거 초안이에요.” 채린은 지우의 얼굴을 보기도 전에 말했다.회의실 문 앞에 선 지우는 휴대폰을 내리지 않았다. 화면에는 보고서가 떠 있었고, 채린이 직접 쓴 문장, 직접 정한 제목, 아직 남겨 둔 이름이었다.“수정하려고 했어요. 배포할 문서가 아니고요.”“본부장님이 쓰신 건 맞죠?” 채린은 입을 다물었고, 유출됐다는 사실을 설명하면 문장의 잘못까지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다. 지우가 묻는 것은 경로가 아니었다.“맞아요.” 대답하자 그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안도한 모양은 아니었다. 더 확인할 것이 없어졌을 때의 움직임이었다.채린은 옆에 놓인 의자를 당겼다. 지우는 앉지 않았다.“지금 이야기하는 게 괜찮아요? 내일 해도 됩니다.”“지금 듣고 싶어요.” 그가 문을 닫았고, 채린은 노트북 덮개를 내렸다. 정정문도, 이 일에 대한 결론도 아직 쓰지 않은 상태로 마주 앉았다.“제가 승인 없이 답해서 일이 시작된 건 맞습니다. 그건 아니라고 해 달라는 게 아니에요.” 지우가 말했다.“그런데 이번에 못한 사람으로 정리되면, 다음번에도 현장에 나갈 수 있습니까?”채린은 당연하다고 답하려다 멈췄다. 인사 결정은 아직 하지 않았다. 지우가 원하는 말을 알았다. 그러나 여기서 섣불리 보장했다가는 또 자기가 모든 결과를 떠안게 될 터였다.“잘못한 범위를 확인하고 필요한
다경의 계정은 비공개로 바뀌어 있었다.이미 저장된 사진은 그대로 돌아다녔다. 예전 행사장에서 지우와 찍은 단체 사진, 회사 이름이 보이는 출입증, 가족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계정까지 화살표로 이어져 있었다.채린은 화면을 끄고 다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번은 받지 않았고, 두 번째에는 숨소리만 들렸다.“지금 통화할 수 있어요?”“제가 사진 찍은 건 맞다고 말하면 끝나요?” 채린은 대답을 고르지 못했다. 끝난다고 말하면 쉬웠다. 그 말을 믿고 얼굴을 내놓은 뒤에는 주워 담을 수 없었다.“끝난다고 약속은 못 하겠어요. 지금은 공개 답변하지 않아도 됩니다. 원하시면 이름과 가족 사진 내려 달라는 요청부터 도울게요.”다경은 자기 사진보다 옆에 찍힌 친구들의 얼굴을 먼저 가려 달라고 했다. 채린은 링크를 보내 달라는 말을 하다가 멈췄다. 이미 자신이 보고 있었다.“저희가 목록 만들고, 다경 씨는 빠진 것만 확인해 주세요.” 수정은 화면을 두 개 열고 삭제 요청을 나눴다. 지우가 아는 계정들에게 직접 따지러 가겠다고 하자 채린은 댓글부터 달지 말고 게시 주소를 모아 달라고 했다. 지우는 손을 쥐었다가 풀었다.“저랑 같이 찍힌 사진 때문에 더 찾기 쉬웠을 거예요.”“찍힌 사람들한테 연락은 하되, 지우 씨가 전부 해명하겠다고 약속하지는 마요.”그 말은 자신에게도 필요했다. 채린은 다경에게 법률 상담을 연결해 줄 수 있다고 덧붙였지만 당장 공개 대응을 맡기라고
견적서에는 ‘집중 대응’이라는 항목이 세 번 나왔다.채린은 세 번째 줄까지 읽고 금액보다 기간을 먼저 봤다. 사흘. 그 안에 검색 결과와 기사 분위기를 정리하겠다는 제안이었다.“지우는 데 돈이 드는 겁니까, 새로 쓰는 데 드는 겁니까?” 세라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둘 다 필요할 수 있죠. 지금은 사실 하나를 바로잡는다고 관심이 없어지지 않으니까요.”그 말은 맞았다. 채린은 영화 사건 뒤 며칠 동안 같은 삭제 요청을 반복했고, 사실이 전달되는 속도와 잘못된 설명이 사라지는 속도는 달랐다.광고주 담당자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배우 이미지도 캠페인에 중요하니까, 회사 쪽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해 주셨으면 합니다.” 채린은 사진 전달 대화를 그 앞에 놓았다.“그 전에 직원분이 사진을 받은 뒤 어디로 보냈는지 답해 주세요.” 세라의 손이 종이 위에서 멈췄다. 곧 부드럽게 웃었다.“제작사에서 상황 확인을 부탁했어요. 대외 대응 담당자에게 온 자료를 받는 건 이상하지 않죠.”“받은 다음이요.”“내부 확인 중입니다. 최초 게시 계정까지 저희가 관리하는 건 아니고요.” 답을 줄 수 없는 일은 짧았고, 돈을 받으면 해 주겠다는 일은 견적서 몇 장을 채웠다. 채린은 금액이 적힌 쪽을 넘기지 않았다.채린은 더 밀어붙이고 싶었다. 시상식, 사진 배포, 이번 광고. 같은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