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가더니 김서영에게 되물었다. “지금 이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냥 말 그대로지. 설마 한빈이를 떠날 생각이 없어진 거니?” 성유리는 김서영을 한참이나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이건 저와 그 사람 사이 일이잖아요. 게다가 어머님은 한빈 씨 친모인데 뭐가 어찌 됐든 박한빈 씨 쪽에 서야 하는 거 아닌가요?” 김서영은 그녀의 말에 정곡이 찔렸는지 침묵했다. 성유리는 김서영이 자신의 말을 귀담아들었다고 생각했지만 순간, 김서영이 씩 웃으며 물었다. “그래서 지금 한빈이가 안쓰럽다는 거야?” 성유리는 그녀의 상태가 어딘가 이상함을 느껴 무슨 대답을 하려 했지만 김서영이 먼저 말했다. “유리야, 지금 개한테 흔들리는 거지?” 가벼운 한마디일 뿐이지만 김서영의 말은 마치 총알처럼 정확히 성유리의 심장을 겨눴고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김서영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팔짱을 낀 채로 창밖의 정원을 바라보다 다시 말했다. “하지만 괜찮아. 이건 너희 둘 일이니 결국 유리 네 선택이지. 만약 지금처럼 같이 생활하고 싶다면 나도 끼어들 생각은 없단다.” “유리야, 한빈이한테 마음이 흔들리는 게 과연 맞는 일일까? 한번 잘 생각해 봐.” “맞다! 그리고 뭐 하나 모르는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건데 말이야. 너 혹시 피임약 자주 먹니?” 그제야 성유리가 김서영에게 시선을 돌렸다. “두 달 전, 한빈이가 전에 연락하던 의사한테 물어봤다고 하더라. 피임약이랑 비슷하게 생긴 약 뭐 있냐고. 사람 몸에 무해한 성분인 약이었으면 더 좋겠다는 말도 했어. 그래서 난 생각했지. 과연 유리 네가 지금 먹는 피임약이 진짜 약일까?” 김서영의 의미심장한 말에 성유리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한빈이가 너를 위해 그랬다고 생각하지는 마. 걔는 그냥 아이가 갖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 김서영은 아주 평온한 말투로 계속 말했다. “왜 그랬냐 묻는다면 아마 아이를 이용해 너를 곁에 남겨두기 위해서였을 거야.”
박한빈이 약방에 들어설 때, 마침 성유리가 이 말을 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약방 직원은 박한빈이 들어서자 친절하게 웃으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뭐가 필요하세요?” 박한빈은 아무 대답을 하지 않았고 직원은 성유리만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아!’ 직원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 무언가를 눈치 차린 듯 얼른 임신 테스트기 두 개를 꺼내 성유리에게 건네주었다. 물건을 사는 동안 성유리는 박한빈에게 시선 한번 돌리지 않았고 결제를 하고 나서 박한빈이 다가가 물건을 챙기려 하자 성유리가 그의 손등을 세게 내리쳤다. 짝! 가게를 울리는 큰 소리에 직원들도 깜짝 놀랐는데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물건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박한빈은 그녀 뒤를 빠르게 따라나섰고 자신의 차에 올라타는 성유리를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시간 동안 박한빈은 속으로 어떻게 말할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몸 상할까 봐 그랬다고 할까? 그렇다면 나는 왜 피임 도구를 안 쓴 거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까? 아니야. 다 알고 있을 거야.’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 때문에 박한빈은 도대체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두 사람은 도연제로 가는 길 내내 침묵했고 도착하자마자 성유리는 발 빠르게 차에서 내려버렸다. 박한빈은 성유리와 같이 들어가고 싶었지만 성유리에 의해 밖에 문밖에 갇혔다. 아침까지만 해도 처리해야 할 업무가 가득 밀려있어 독촉 전화가 많이 걸려 왔지만 지금 그는 업무를 해결할 마음 따위 없었다. 기다리는 시간은 일 초가 일 년같이 느껴졌고 박한빈은 자신이 밖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도 몰랐다. ‘언제 또 이렇게 힘들게 기다렸더라?’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은데.’ 박한빈은 체감상 일 년을 밖에서 기다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고 이때, 화장실 문이 스르륵 열렸다. 결과를 물어보기도 전, 성유리가 그에게 임신 테스트기 하나를 던지듯 건넸다. “계속 피임약 먹었는데 임신했어요. 박 대표님, 왜 이런지 알려
성유리의 말을 박한빈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비록 성유리도 지금 자신이 말을 너무 심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뭐가 어떻든 싸울 때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 일은 제일 잔인한 일이니까. 아무리 지금 원망과 혐오의 감정이 넘쳐난다 해도 그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은가! 게다가 아침에 친모한테 “배신”을 당해 기분이 상한 박한빈에게는 더더욱 그러면 안 됐다. 하지만 성유리는 결국 이성을 잃고 입 밖으로 하고 싶은 말을 다 내뱉었다. “역시. 너한테 그런 말을 했구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박한빈이 말을 했음에도 성유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갑자기 크게 웃더니 계속 말했다. “그래. 사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야. 필경 어머니 눈에 나는 그저 괴물일 뿐이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어머니는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할 거야. 과거로 돌아가서 갓 태어난 나를 목 졸라 살해하고 싶을 거고.” “내가 아니었다면 어머니도 박씨 가문에 이렇게 오랜 시간 묶여있지 않아도 됐고 자기가 진짜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아 있을 수 있으니까.” 박한빈의 목소리는 점점 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워졌고 김서영에 대한 조롱의 의도 또한 더 강해졌다. 자기 말에도 입술을 오므리기만 할 뿐 대답해 주지 않는 성유리를 보고 박한빈은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이제 박한빈은 더는 성유리 앞에서 불쌍한 척을 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사실 박한빈도 일부러 성유리에게 신세 한탄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박한빈은 이내 자기감정을 추스르고는 말을 이어갔다. “네 말이 맞아. 내가 네 약을 바꿨어. 아이를 이용해 너를 내 옆에 묶어두려고.” “네가 걱정하는 문제는 다 불필요한 거야. 우리가 앞으로도 서로 잘 지내면 아이도 모를 거잖아.” 성유리는 박한빈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물었다. “아이가 모른다 해서 저도 모르는 건 아니잖아요?” “너도 아이를 가지고 싶은 거 아니었어? 넌 그저...”
성유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제가 이 아이를 원한다고 했어요? 박한빈 씨, 제가 분명히 말해두는데 당신한테 절 묶어둘 기회는 절대 주지 않을 거예요. 박한빈 씨가 나가는 순간 전 당장 이 아이를 없앨 거라고요!” 박한빈은 자신의 마음이 이미 충분히 차갑고 단단하다고 생각했었다. 어젯밤과 오늘 아침, 그토록 행복했던 자신이 지금 얼마나 우스워 보이는지도 깨달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한빈는 자신이 아직 충분히 단단해지지 않았다는 걸 발견했다. 그렇기에 지금도 성유리의 말에 충격과 슬픔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성유리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다. 병실 침대에 혼자 앉아 있던 그녀는 두 사람의 첫 아이를 잃었고 그날 펑펑 울었었다. 성유리는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라고 박한빈은 늘 확신해 왔다. 그녀가 자신의 아이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도 잘 알고 있다. 예전에 보육원 행사에 참여했을 때, 박한빈은 그녀가 조용히 아이들을 위로하던 모습을 직접 보았다. 그토록 따뜻한 표정을 보던 박한빈은 좀처럼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아이를 없애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박한빈은 천천히 그녀를 돌아보았고 성유리는 마치 자신의 말이 진짜임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즉시 부엌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깜짝 놀란 박한빈은 곧바로 뒤따라가 뒤에서 성유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놔요! 박한빈, 이 미친놈! 손 떼라고! 제가 그랬죠? 당신이 오늘 저를 막아도 소용없어요. 전 이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제 몸은 제 거예요. 저한테는 아이를 낳을지 말지 결정할 권리가 있다고요! 당신이 도대체 무슨 권리로 절 속인 거죠? 처음부터 끝까지 박한빈 씨는 절 존중하지 않았잖아요!” “이게 무슨 사랑이에요? 누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아이를 강요하냐고? 저도 이 아이를 사랑할 수 없어요!” 미쳐 날뛰는 성유리를 보고도 박한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대신 그녀를 품에 안고 침실로 향했더니 침대 위에 그녀를
그날 하루, 성유리는 자신이 어떻게 버텼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박한빈이 보낸 사람이 오긴 했지만 그들에겐 수갑을 풀 수 있는 열쇠가 없었다. 수갑 한쪽은 그녀의 손목에, 다른 한쪽은 침대 헤드보드에 걸려 있었다. 그렇기에 성유리는 하루 종일 꼼짝없이 침대 위에 갇힌 채로 지내야만 했다. 그녀는 지금 자기가 마치 침대 위에 갇힌 짐승처럼 느껴졌다. 농촌에서 키우는 돼지나 소 말이다. 자기 생각은 아무런 의미도 없어 보였고 결국 자기는 단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모님, 뭐라도 조금 드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옆에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고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난감해진 가사도우미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은 뒤, 조용히 방을 나갔다. 성유리는 그들이 나가고 나서도 그대로 침대에 누운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아래층에서 익숙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성유리가 수도 없이 들어 너무도 익숙한 소리였다. 언젠가 그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녀의 가슴은 벅차올랐지만 행여나 남들이 눈치챌까 봐 감추기까지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그 소리를 들은 순간, 성유리의 마음엔 차가운 한기만이 가득 머물렀다. 곧이어 문밖에서 박한빈과 가사도우미가 대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우미는 성유리가 물 한 모금조차 마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고하는 듯했다. 박한빈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조용히 음식을 들고 직접 방으로 들어왔다. 성유리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일어나서 좀 먹어.” 박한빈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갑고 딱딱하게 들렸다. 성유리는 그의 말에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그러자 박한빈은 비웃듯 말을 이어갔다. “네가 이러면 내가 어쩔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해? 똑똑히 말해두지만, 네가 아무리 굶어도 난 널 침대에 묶어놓고 매일 영양제를 맞게 할 수 있어. 아이가 태어날 시간이 되면, 바로 제왕절개 수술을 받게 만들 거고.” “내가
“박한빈 씨는 심지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도 아니었잖아요. 당신은 그저... 이익을 위해서였잖아요.” “그러니까 당신은 정우보다 못한 사람이에요. 당신은 절대로 걔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요.” 사실 성유리는 연정우를 깊이 사랑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가장 약했던 순간에 연정우가 구세주나 백마 탄 왕자님처럼 나타났을 뿐이다. 성유리는 그런 연정우에게 믿음직함과 호감을 느꼈다. 그래서 그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박한빈의 반복된 방해는 오히려 성유리가 연정우에 대한 감정을 더 깊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저 복수를 위해서라도 연정우를 좋아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성유리의 말이 끝나자 박한빈의 안색은 순식간에 더 어두워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고 성유리의 턱을 쥔 손에 힘이 더해져 손가락 마디까지 하얗게 질렸다. 그러다가 갑자기 실성한 사람처럼 크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래? 그럼 두고 봐. 며칠 안에 내가 연정우를 내 앞에 무릎 꿇리고 눈물로 빌게 만들 수 있다는 걸 말이야. 어때? 그 꼴 한번 구경해보지 않을래? 네가 그 모습을 보고도 계속...” “그래도 전 정우를 계속 좋아할 거예요. 박한빈 씨가 그러면 오히려 더 많이 좋아하게 될지도 몰라요.” 성유리는 그의 말을 단호히 끊어버렸다. “결국 제가 정우를 망쳤으니까 잘못한 건 저예요. 걔는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해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제가 정우한테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다만...” 성유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박한빈은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을 막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의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그 순간, 그는 그녀를 통째로 삼켜버리고 싶었다. 뼛속까지 부숴서 그녀가 더 이상 이런 말을 하지 못하도록. 박한빈은 힘을 아끼지 않았고, 성유리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치 서로를 물어뜯는 야수처럼 서로를 처절하게 파괴하려고 했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퍼지기 시작하자 결국 먼
급하게 멈추는 차의 브레이크 소리가 마당에 울려 퍼졌다. 집사가 바로 밖으로 달려 나갔고 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자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도련님, 이 시간에 웬일이십니까?” 그의 말을 들었음에도 박한빈은 그를 무시한 채 곧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박한빈의 어두운 표정에 집사는 순간 당황했지만 무의식적으로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가며 막아섰다. 그러자 박한빈이 단호하게 소리쳤다. “비키세요!” 평소 차분하고 온화한 모습을 유지하던 박한빈이 이렇게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처음이었다. 갑작스러운 고함에 집사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김서영은 소란스러운 소리를 듣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지만 표정은 여전히 평온했다. “왔니?” 박한빈은 아래에서 그녀를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보아하니 내가 올 걸 알고 있었네.” 이 순간, 그는 김서영에게 존댓말조차 쓸 생각이 없었다. 김서영은 그런 걸 개의치 않는지 뒤를 돌며 말했다. “들어가자, 서재로.” 박한빈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서재 문이 닫히고, 넓은 공간에는 둘만 남았다. “오늘 성유리에게 무슨 말을 했죠?” 박한빈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별말 안 했어.” “허허” 박한빈은 김서영을 잔뜩 비웃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전 이해가 안 되네요. 제가 그렇게 미우세요? 제가 잘되는 꼴을 보기 싫은 겁니까? 모성애라는 게 이기심 없이 위대한 거라던데 당신한텐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네요.” “다른 어머니들처럼 희생하라는 말은 안 할게요. 제가 당신에게 뭘 바랄 일은 없으니까. 그런데 이제 겨우 제가 원하는 걸 이루려는 찰나에 왜 그걸 끊어놓으려는 겁니까?” 박한빈이 말을 끝내자, 김서영은 잠시 침묵했다.그는 그녀가 무언가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러는 줄 알았다. 하지만 이내, 김서영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런 질문, 나도 전에 너한테 했던 적이 있지.” “아, 그래서 아직도 진성민 씨 일로 절 원망하는 거군요.”
그녀는 말을 하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띠웠다. 그 눈빛은 박한빈을 보는 것 같으면서도, 그를 통해 다른 누군가를 떠올리는 듯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표정을 보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결국 어머니는 박세빈 편도 아니고 내 편도 아니란 거네요.” 상대방은 그의 말에 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박한빈은 답을 알 수 있었다. 박한빈은 김서영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으려는 듯 냉정히 뒤를 돌았다. “그렇다면 이제 일은 간단해지겠네요.” 그가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단 하나, 답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실 박한빈은 마음 한구석에 아주 조금의 기대를 품고 있었다. 어머니가 자신을 위해서라고, 혹은 성유리와 더 솔직해지게 하려고 그랬다고 변명이라도 해준다면 설령 그런 변명이 억지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해도 그는 믿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거짓말조차 하지 않았고 그 순간, 박한빈은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망설임마저 사라졌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박한빈의 삶에서 낯설고 무의미했지만 “적”이라면 다룰 방법은 명확했다. 어차피 그는 어릴 적부터 늘 혼자였으니까, 익숙한 일이었다. 박한빈은 다시 차를 몰고 도연제로 돌아갔다. 의사는 이미 와 있었고 그는 성유리에게 진정제를 투여했다고 말하며 지금은 수액을 놓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지만 의사는 이런 말을 조심스레 덧붙였다. “지금 환자분은 임신 중입니다. 이렇게 극심한 감정 변화는 아이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대로라면 산모와 아이 모두 위험합니다.” 의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불구하고 박한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했다. “알겠습니다.”의사는 박한빈의 짧은 대답에 더 이상 할 말을 찾지 못한 듯 대화 주제를 돌렸다. “도련님, 손에 난 상처는... 치료가 필요하지 않으신가요?” “필요 없습니다.” 박한빈은 의사 말에 거절 의사를 비추며 계단을 올라가려다 문득 멈춰 서더니 고개를 돌려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
“저 좀 놔주세요.”“제발 살살 좀... 박한빈 씨, 제발.”두 달 넘게 억눌러왔던 욕망을 지금 이 순간 남자는 모조리 터뜨리고 있었기에 성유리를 쉽게 놔줄 리가 없었다.성유리는 물에 빠졌다가 막 나온 사람처럼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머리카락이 목과 얼굴에 들러붙었고 붉어진 눈동자 너머로 드러난 얼굴은 아름다우면서도 어딘가 요염하고 아찔했다.마치 물속에서 기어 나온 아름다운 요괴 같았다.그 모습을 바라보던 박한빈은 성유리의 손을 더 세게 움켜쥐었다. 꼭 이 순간, 그녀를 완전히 무너뜨리겠다는 듯이.처음에 성유리는 그저 순순히 따르려고 했다. 하지만 뱃속의 아이를 무시하는 박한빈의 무심한 태도에 분노가 치밀었다.도저히 참을 수 없던 성유리는 몸을 뒤로 젖히며 박한빈의 어깨를 있는 힘껏 물었다.가지런한 치아 사이로 살짝 튀어나온 왼쪽 송곳니가 그의 피부를 파고들었고 곧 입안에 피비린내가 퍼졌다.갑작스러운 ‘공격’에 박한빈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성유리의 턱을 꽉 쥐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날 문 거야?”그제야 성유리는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지금까지 박한빈은 늘 순하고 얌전한 그녀만을 봐왔었다.성유리 역시 박한빈에게는 순응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겨왔지만 이번엔 달랐다.그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어가자 성유리는 본능적으로 입술을 오므리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이젠 정말 못 참겠어서...”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성유리를 바라봤다. 방금 그녀가 화가 난 고양이처럼 자신을 물어뜯던 순간이 떠올랐는데 그 장면이 묘하게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그래서 박한빈은 더 이상 화를 내지 않고 그녀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으며 느긋하게 대답했다.“아직 끝 내기엔 너무 일러. 걱정하지 마. 조금 살살 해줄 테니까.”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자신을 놓아줬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예전엔 관계가 끝나면 그녀는 꼭 스스로 먼저 방으로 돌아갔었다.박한빈은 누군가와 함께 자는 걸 싫어했으니까.하지만 임
박한빈은 아내인 성유리에게 한 번도 그런 사실을 얘기해주지 않았었다.“한빈이 왔니?”윤청하는 재빨리 박한빈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그럼 저녁 같이 먹을까?”“아니요.”박한빈은 차디찬 말투로 대답했다.“회사 일이 좀 바빠서 지금 가봐야 합니다.”바쁘다면서 박한빈은 한 바퀴 빙 돌아 성유정을 집까지 데려다줬다.성유리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숙여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그리고 그때, 박한빈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아직도 안 갈 거야?”박한빈의 목소리에는 분명한 불만이 섞여 있었지만 성유리는 원래 거절하고 싶었다.하지만 만약 여기 남아 있으면 윤청하가 계속 이상한 한약을 먹으라고 강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잠시 고민하던 성유리는 결국 박한빈을 따라가기로 했다.성씨 저택을 나선 박한빈의 발걸음은 매우 빨랐는데 성유리는 그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이내 차에 도착했을 때, 운전기사는 성유리를 보고 약간 놀라는 것 같았지만 바로 박한빈에게 물었다.“박 대표님, 회사로 가십니까? 아니면...”“회사요.”성유리는 박한빈 대신 대답했다.“가다가 적당한 곳에 내려 주세요.”그녀의 말이 끝났음에도 박한빈은 침묵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유리를 쳐다보았다.“회사 일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죠? 저 혼자 돌아갈 수 있어요.”심상치 않은 시선을 감지한 성유리가 바로 이런 말을 덧붙였다.박한빈은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성유리는 그 웃음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그녀는 더 이상 말하기 싫어 차창 밖을 바라보며 몸을 창문 쪽으로 홱 돌려버렸다.그때 박한빈이 운전기사에게 말했다.“집으로 갑시다.”그의 목소리는 짧고 단호했다.그러나 성유리는 왜 집으로 가는지 묻지 않았고 그대로 가만히 앉아 있었다.성유리와 박한빈이 함께 집에 돌아오자 저택의 도우미들도 많이 놀란 듯했지만 그는 그들에게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집에 들어서고 성유리가 신발을 갈아 신으려는 순간, 박한빈은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대로 앞쪽으로 끌고 갔다.
윤청하가 말한 좋은 물건은 아니나 다를까, 또 출처 불명의 한약이었다.이번 한약의 냄새는 그렇게까지 자극적이지 않았고 윤청하도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이건 내가 수많은 사람을 찾아가서 겨우 찾은 거야. 모두 말하길 이 한약만 먹으면 남자아이를 낳을 수 있대!”성유리는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리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이 시대에 이런 역설적인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전 안 먹을 거예요.”성유리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대답했다.“지금 제 뱃속에 아기가 있는데 이걸 먹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소용 있어! 그 사람들이 말했어. 만약 첫 6개월 안에 마시면 무조건 효과가 있다니까. 설사 성별이 정해져도 바꿀 수 있다고.”성유리는 순간 윤청하가 미친 사람처럼 보여 바로 반박했다.“전 안 마실 거예요. 그리고 저는 남자아이, 여자아이 모두 괜찮아요.”“너 미쳤어? 박한빈은 박씨 가문의 유일한 혈육이야. 그런 집에서 아들이 나와야 후계자가 되지 않겠어?”“하지만 이 아이는 박씨 가문의 아이일 뿐만 아니라 제 아이이기도 하죠.”“너...”윤청하는 뭔 말을 더하려고 했지만 성유리의 눈을 마주친 후 갑자기 뚝 멈췄다.성유리는 처음에 그녀가 자신에게 설득당한 줄 알았지만 이내 윤청하는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너는 내가 이렇게 하는 이유도 모르겠지?”“너랑 한빈이도 결혼했으니까 이 아이가 여자일지라도 별문제 없을 거야. 너희는 아직 젊고 앞으로 기회가 많을 테니까.”“그런데 너...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렸어? 한빈이도 그걸 아직 모르겠지? 한빈이가 원했던 조건이 그렇게 까다로웠는데 전에 네가...”윤청하의 말은 여기서 멈췄지만 그 말의 의미는 곧 성유리의 안색을 창백해지게 만들었다.“그래서 난 계속 너한테 빨리 임신하라고 재촉했던 거야. 아들이 생기면 너는 박씨 가문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 차지할 수 있잖아!”“세상에 감춰진 불씨는 없으니까... 한빈이가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너는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겠지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고개를 숙인 채 눈을 내리깔았다. 마치 이 모든 일이 자신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일인 것처럼.박한빈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리고 그의 시선은 갑자기 성유리의 손목으로 향했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역시 이럴 줄 알았어.’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김서영이 계속 말을 하고 있었지만 신경 쓸 겨를이 전혀 없었다.그는 뚜벅뚜벅 앞으로 나아갔고 차에 올라탄 후 곧바로 운전사에게 시동을 걸라고 지시했다.운전기사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고개만 끄덕인 뒤, 빠르게 출발했다.웅장한 저택은 금세 뒤처졌고 몇 개의 거리를 지나니 복잡한 도시가 펼쳐졌다.박한빈은 그 도시의 반짝이는 네온사인들을 바라보며 마음속에서 화염이 치솟는 느낌을 받았다.그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넥타이를 풀었다.그때 에릭의 전화가 걸려 왔고 박한빈은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전화를 받았다.이내 들려오는 에릭의 말에 박한빈은 바로 입꼬리를 쓱 올렸지만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한 번이라도 쳐다봤다면 알았을 것이다.박한빈은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 속에는 어떤 감정도 없어 마치 지옥에서 온 악마처럼 보였다.“들어보니까 꽤 흥미롭네.”박한빈이 대답했다.“나도 끼워줘.”“그럼 언제 올 건데?”에릭은 묻다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멈칫했다.“아, 맞다, 너 결혼한 지 얼마 안 됐지? 신혼부부를 떼놓으면 와이프가 싫어하는 거 아니야?”“쯧, 내가 결혼하지 말라고 했지? 대체 왜 그런 결정을 내린 건데? 잘 됐다. 지금 아주 그냥 잡혀 살고 있겠지.”박한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대답했다.“세상에서 누가 날 가둘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유언이 아니었으면 내가 걔랑 결혼했을까?”박한빈의 대답에 에릭은 매우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빙고! 이래야 박한빈이지. 그럼 요 며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