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우와 성유리는 그렇게 프라이빗한 식당에서 만나게 되었다.금성에 오랫동안 성유리도 처음 와본 곳이었다. 조경우가 안내하지 않았더라면 금성이 이런 곳이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 같았다.금성 시내와 교외의 경계선에 위치한 식당인데 하얀 벽돌에 짙은 녹색의 기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었다.식당 내부에는 연꽃이 잔뜩 피어있는 호수와 빽빽하게 들어선 대나무도 있어 성유리는 이곳이 관광지로 쓰이는 원림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식당의 사장은 여자였는데 미모는 그렇게 출중하지 않으나 특유의 분위가 아주 온화했다.조경우가 미리 예약을 해서인지 메뉴를 고르지도 않았기에 여자는 차만 올려주고는 밖으로 나갔다.“여기는 식재료를 다 당일 들어온 걸로 쓰거든요. 그래서 먹고 싶은 건 전날 미리 말해야 되요. 어젠 급해서 제가 혼자 정했는데 괜찮으세요?”성유리를 향해 다정하게 웃는 조경우의 얼굴에서는 털끝만큼의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그에 성유리는 빠르게 대답했다.“괜찮아요.”“이건 이곳에서만 마실 수 있는 특색 차에요. 사장님의 할아버지께서 직접 채집한 찻잎이라 다른 곳에 팔지도 않거든요.”조경우는 친절히 설명하며 차를 따라주었지만 할 말이 있던 성유리는 차 맛을 음미할 겨를이 없어 대충 입만 갖다 댈 뿐이었다.조경우는 곧바로 다른 얘기들을 꺼냈다.영화, 음악, 그리고 음식들까지 꺼내는 얘기마다 조급해하지 않고 나긋나긋하게 묻는 조경우에 성유리는 하나하나 다 흥미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었다.사실 조경우랑 만나는 게 성유리는 꽤나 즐거웠다.그래서 성유리는 조경우가 아직까지도 결혼을 하지 않은 게 의아했다.다리가 불편하긴 하지만 신분이 남달랐기에 결혼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을 것 같은데.그때 조경우가 갑자기 건넨 말에 성유리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우리 전에 봤었어요.”“2년 전인가 금성대학에 다닐 때 유리 씨가 뮤지컬을 하나 했었죠? 그때 저도 무대 아래에 있었거든요.”“로미오와 줄리엣이요?”“네.”성유리의 질문에 조경우
“박 대표님도 오실 줄 알았으면 미리 같이 식사하자고 요청이라도 할 걸 그랬네요.”자연스럽게 말을 하며 웃는 조경우는 박한빈 앞에서도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았다.악수를 마친 박한빈은 자연스레 조경우 앞에 앉아있는 사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하지만 성유리는 고개만 숙인 채 인사를 할 생각이 없어 보였기에 박한빈도 시선을 거두고 조경우를 보며 말했다.“데이트하시는 것 같은데 저는 이만 가볼게요. 두 분 방해하지 않겠습니다.”“네, 그럼 다음에 봬요.”짤막한 인사를 나눈 뒤 박한빈은 계속 앞으로 걸어갔고 조경우는 다시 성유리 앞에 앉았다.“오늘 박한빈도 여기 오는지는 저도 몰랐어요.”“괜찮아요.”혹시 성유리가 불편했을까 봐 해명하는 조경우를 향해 성유리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그러자 조경우도 더는 말하지 않았다.둘 사이에서 먼저 얘기를 시작하는 쪽은 항상 조경우였기에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그에 성유리가 입술을 달싹이며 조경우에게 제 뜻을 전하려고 할 때 갑자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이게 누구야, 서연아!”그 목소리에 몸을 부르르 떤 성유리가 고개를 들어보니 지석민이 이미 성유리가 앉아있는 테이블 옆에까지 와서 웃고 있었다.“밥 먹고 있었어?”“누구시죠?”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조경우가 지석민을 보며 묻자 지석민은 대뜸 조경우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안녕하세요! 조씨 집안 아드님이시죠? 정말 잘 생기셨네요!”“저는 유리 아빠에요, 시골에 있을 때 유리 키워준 양아빠요.”유난히 큰 지석민의 목소리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자 난감해진 조경우가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유리 씨, 진짜 유리 씨 양 아버님이세요?”“그렇다니까요! 몇 년 동안 외국에 있느라 유리 어떻게 사는지 와보지도 못했는데 둘이 결혼한다는 소리를 듣고 이렇게 찾아왔어요! 뭐 비록 이미 한번은 실패했지만 그래도 이번 결혼생활은 잘 보내야죠! 그래서 제가...”“지석민 씨.”그때 성유리가 차가운 목소리로 지석민의 이름을 불렀
하지만 지석민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성유리를 주시하고 있었다.그에 성유리는 실소를 터뜨리며 물었다.“왜 말을 못 해요?”“유리 씨.”점점 살얼음판 같아지는 분위기에 조경우가 일어나며 성유리의 손을 잡았지만 성유리는 그만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당신이 안 가면 내가 갈게요.”성유리가 뒤돌아 나가려 하자 조경우도 다급히 따라나서려는데 지석민이 또 느긋하게 말을 걸어왔다.“아가씨 노릇 몇 년 했다고 아주 기세가 장난 아니네.”“그런데 유리야, 사람이 초심을 잃으면 안 되지. 그때 나 아니었으면 넌 진작에 굶어 죽었어. 지금 여기서 나한테 이래라저래라할 수도 없었다고!”“근데 네가 지금 나를 내쫓아? 똑똑히 들어. 내가 우리의 부녀간의 정을 생각해서 일부러 말을 아끼는 것뿐이야. 그런데 네가 계속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시골에서 있었던 일들 다 까발릴 거야!”지석민의 말이 끝나자 등을 돌리던 성유리의 행동도 멈췄다.성유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본 지석민은 당당하게 웃고 있었다.지석민이 이토록 자신만만할 수 있었던 건 지석민이 쥐고 있는 그 카드가, 그날 일이 성유리는 감히 언급도 하지 못할 일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지석민은 제가 그 일을 들먹이면 성유리가 고개를 숙이고 제 말에 따를 거라 생각했다.그랬는데 지금의 성유리는 지석민을 향해 웃고 있었다.그 웃음에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지석민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성유리가 먼저 입을 열었다.“무슨 일이요? 당신한테 강간당할 뻔한 일이요?”평온하게 말하는 성유리는 남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손을 꽉 말아쥐었다.온 힘을 다해 말아쥔 탓에 손바닥에 닿은 손톱은 부러졌고 그 통증은 손끝에서부터 심장에까지 전해졌다.그 순간 성유리의 가슴도 갈기갈기 찢겨나가고 있었다.몇 년간 애써 보듬은 덕분에 새로 돋아난 살들이 다 찢겨버리고 그 옛날의 곪아 터진 상처들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성유리의 말에 조경우도 바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눈을
이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똑같았다.사실을 말해도 그 누구도 성유리를 피해자라 생각하지는 않았다.하지만 이미 제 친어머니에게도 똑같은 눈빛을 받아본 성유리는 아무렇지도 않았다.성유리는 조경우를 한번 보고 나서 뒤돌아 밖으로 향했다.“지서연! 성유리! 너 거기 안 서?! 이런 미친년!”등 뒤에서 들려오는 폭언에도 성유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걸어갔다.원래는 아무 택시나 잡아서 집으로 가려고 했지만 식당은 도로와 꽤 거리가 있었다.그제야 성유리는 이곳에 오는 사람은 다 돈 좀 있는 집 사람이라 택시를 탈 일이 없다는 걸 생각해냈다.그렇게 텅 빈 거리에 홀로 서 있던 성유리는 핸드폰으로 택시를 부르려고 했지만 손이 제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과 함께 손도 떨려와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는 것도 몇 분이나 걸렸다.그렇게 겨우 잠금을 풀고 핸드폰을 뒤져봤지만 이번에는 택시를 잡는 어플이 보이지 않았다.그렇게 하얘진 머리 때문에 성유리가 손을 떨고 있을 때 차의 방향지시등이 성유리를 비춰왔다.갑자기 비춰진 강한 불빛에 놀란 성유리는 저도 모르게 뒤로 몇 걸음 물러나 있었는데 그때 뒷좌석에 앉은 사람이 창문을 내리더니 말했다.“타.”목소리에는 여전히 아무런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지만 성유리는 아까 식당에서 일어난 소동 때문에 박한빈도 제 이야기를 다 들었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래서 고개를 들어 박한빈의 눈에도 드러났을 혐오와 놀라움을 찾아보았지만 그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비쳐있지 않았다.이미 다 놀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정말 아무 감정도 들지 않는 건지 확신이 서지 않았던 성유리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그때 박한빈의 시선이 창백해진 성유리의 얼굴에 닿았다.그리고 천천히 핸드폰을 꽉 잡고 있는 성유리의 손에도 닿았다.얼마나 힘을 주고 있었으면 새파란 핏줄이 도드라져있었다.그에 보다 못한 박한빈이 차에서 내려서 성유리의 손목을 잡았다.박한빈이 성유리를 차에 태울 때 까지도 성유리는 아무런 반
박한빈이 성유리 말에 대답을 하지 않자 기사도 당연히 성유리 말을 들을 수 없었기에 차를 세우지 못했다.박한빈은 저를 신경 쓰지 않을지 몰라도, 아니 어쩌면 박한빈 눈에 성유리는 항상 별 볼 일 없는 사람이었을지 몰라도 성유리는 박한빈에게만큼은 이렇게 망가진 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기에 저도 모르게 또 주먹을 꽉 쥐었다.박한빈이 다른 사람들처럼 저를 조롱하고 멸시한다 해도 아무렇지 않았다.그저 마지막 남은 자존심이라도 지킬 수 있다면 그걸로 성유리는 만족할 수 있었다.그리고 지금은 이 차에서 조용히 내리는 게 성유리의 자존심을 지키는 유일한 방법이었다.하지만 박한빈은 성유리의 그 자그마한 요구도 그냥 들어줄 마음이 없어 보였다.기사 역시 차를 세우지 않고 있었기에 성유리가 다시 입을 열려고 할 때 예상했던 사람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성유리, 당장 집으로 와!”성시원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핸드폰을 뚫고 나와 조용한 차 안에 울려 퍼졌지만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전화를 끊고는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성씨 집안 저택으로 가.”성유리가 입을 열기도 전에 박한빈이 기사를 향해 말했다.그에 마음이 가라앉은 성유리는 이내 옅은 웃음을 흘렸다.박한빈은 성유리의 마지막 남은 자존심마저 지켜주지 않았다.하지만 생각해보면 박한빈의 행동도 이해는 갔다.박씨 집안과 결혼할 때 성씨 집안에서 그 얘기를 했을 리가 없는데 그런 사실이 오늘 까발려 졌으니 이미 이혼을 했다 해도 앞으로 둘의 이름이 같이 떠돌게 될 것이다.그건 박한빈이 가장 질색하는 일이었으니 당장이라도 성씨 집안에 찾아가 따지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언니!”성유리가 차에서 내리자 성유정이 한달음에 달려왔다.그런데 성유정은 그 뒤에 따라오는 박한빈을 보더니 다급히 하려던 말을 바꾸었다.“한빈 오빠, 여긴 어떻게 왔어? 설마... 오빠가 언니 데려다준 거야?”말을 하며 성유리에게로 돌린 성유정의 시선이 어딘가 날카로웠지만 성유리는 그런 성유정을 상대해주지 않고 그녀를 지나쳐
성유리는 피했다.꽃병은 바닥에 떨어지면서 순식간에 산산조각이 났고 튄 파편이 그녀의 종아리를 스치자 곧바로 피가 흘러나왔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성시원이 그녀에게 삿대질했다.“너 일부러 그런 거지? 네 이미지를 망쳐서 금성 전체에 네가 쓰레기라는 걸 알리려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부러 그렇게 한 거지? 내가 어떻게 너같이 수치심도 모르는 딸을 낳았을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네가 태어났을 때 산 채로 목을 졸라 죽여야 했어! 괜히 우리 집안 망신시키지 못하게 널 데리고 오지 말아야 했어!”주위의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고 성시원의 목소리는 커다란 거실에 큰 소리로 계속 울려 퍼졌다.마치 성유리의 몸을 한 대씩 내리치는 칼날 같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다.그녀는 성시원의 눈을 피하지도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고만 있었다.“어딜 감히 눈 똑바로 뜨고 쳐다봐? 좋아! 내가 오늘 널 때려죽이지 않으면 성시원이 아니다!”그 말과 함께 성시원이 벨트를 풀어 성유리에게 휘두르려고 할 때 문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회장님.”그 목소리를 듣자 성시원의 움직임이 멈췄고 곧바로 성유정도 놀라며 소리쳤다.“언니!”그러고는 곧장 달려와 성유리를 껴안았다.“언니, 괜찮아? 아빠, 어떻게 이럴 수가...”성유정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가슴 아픈 표정으로 금세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성유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어온 사람을 바라보며 입술만 다물고 있었다.박한빈은 그녀를 그저 힐끗 쳐다보고는 성시원에게 눈길을 돌렸다.“얘기 좀 하시죠.”성시원은 박한빈이 찾아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그렇다면 지금쯤 이미 소문이 사방으로 퍼졌고 날이 밝기도 전에 성유리의 못난 일들이 까밝혀진다는 건가?성시원의 얼굴은 점점 더 추해졌지만 차마 박한빈의 앞에서 대놓고 면박을 줄 수 없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돌아섰다.“이쪽으로 오지.”박한빈은 바로 그 뒤를 따랐다.줄곧 옆에 있던 윤청하는 조금 전 성시원이 너무 세게 때린 탓인지 이 순간
“언니, 어떻게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윤청하의 말을 기다릴 새도 없이 성유정이 먼저 다가와서 성유리를 붉어진 눈으로 바라보며 말했다.“언니를 진심으로 아끼는데 왜 그렇게 생각해!”하지만 성유리는 더 이상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았다.이젠 보기만 해도 역겨운 사람들이라 성유정의 말에도 대꾸하지 않고 바로 돌아서서 나가려던 참이었다.“언니!”성유정이 쫓아오려는 듯했지만 윤청하가 말리면서 성유리의 등에 대고 이렇게 소리쳤다.“좋아, 성유리! 이 문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네가 밖에서 굶어 죽든 말든 여기 돌아올 생각 마!”그녀의 말이 끝나자 성유리의 발걸음이 멈칫했고 윤청하는 성유리가 마음을 바꾼 줄 알았다.그런데 성유리가 고개를 돌리더니 이렇게 받아쳤다.“그것참 고맙네요.”성유리의 표정은 여느 때처럼 차분했다.하지만 그 평온함이 윤청하의 눈엔 서늘함으로 보였고 마치 독사가 먹잇감을 무심하게 바라보며 침을 뱉는 것 같았다.윤청하는 순식간에 얼굴이 창백해지며 저도 모르게 두 걸음 뒤로 물러섰고 성유정이 황급히 그녀를 붙잡았다.“엄마, 괜찮아? 병원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윤청하는 계속해서 고개를 저으며 성유정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손을 밀어내더니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갔다.자리에 서 있던 성유정의 얼굴에 걱정스러운 표정이 금세 사라졌고 바로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울렸다.“시키는 대로 다 했는데 돈은 언제 줄 거야?”거친 남자의 목소리에 성유정은 눈을 흘기면서도 태연하게 대답했다.“걱정 마요, 내일 카드로 돈 보낼 테니까. 하지만 명심해요. 당신은 날 본적도 없는 거고 나한테 다시는 전화도 하지 마요, 알아들었어요?”...박한빈이 저택에서 나왔을 때는 거의 새벽 열두 시쯤이었다.운전기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나오는 것을 보고는 바로 내려서 문을 열었고 놀랍게도 성유리는 여전히 차 안에 있었다.그녀는 차창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는데 박한빈이 차에 타는 순간 바로 눈을 떴다.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머리를
예상치 못한 그의 질문에 성유리는 순간 자기 귀를 의심했다.몇 초가 지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그녀는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말했다.“박 대표님, 지금 그걸 묻기엔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박한빈은 눈을 가늘게 떴다.처음 그녀가 이혼을 제기했을 때만 해도 단순히 떼를 쓰는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아무리 기분이 안 좋은 거라고 해도 딱 한 번만 참아줄 생각이었고 그래서 두 번째 언급했을 땐 그녀의 뜻대로 해주었다.홧김에? 조금은 그랬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때만 해도 박한빈은 그녀가 분명 후회할 거라고 확신했는데 지금 보니 자신이 틀렸던 것 같다.박한빈은 이틀 전에 이미 그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다.실형을 선고받은 양아버지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진 양어머니.이 모든 것들은 성유리로부터 들은 적이 없었고 박한빈은 그제야 자신이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이유가 뭐였든 이제 다 의미 없어요.”성유리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렸다.“걱정 마요. 오늘 밤 일로 조경우는 절대 나랑 다시 만나지 않을 거고 당신이 걱정했던 일들도 다시는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우리도 아마 더 만날 일 없겠죠. 뭐가 됐든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으니 앞으로 박 대표님 하시는 일 바라는 대로 다 잘 되길 바랄게요.”말을 마친 성유리의 말투와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진지했고 박한빈은 한참 동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차 세워.” 그가 말하자 성유리는 무슨 뜻인지 알아듣고 더 이상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그대로 돌아섰다.그런데 그녀가 차 문을 열었을 때 박한빈은 갑자기 이렇게 말했다.“그때 일 넌 잘못 없어.”마치 길가에 버려진 불쌍한 새끼 고양이나 강아지에게 하는 듯한 그저 동정 섞인 말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는 가벼운 한마디였다.성유리는 그가 결코 친절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도 알고 있다.그래도 방금 그녀가 말한 것처럼 그래도 한때는 부부로 지냈던 두 사람이었고 결혼 이후 처음으로 그의 입에서 듣는 ‘위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