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 그룹은 최근 금성에서 가장 주목받는 기업이 되었다.몇 건의 대형 프로젝트를 따낸 것은 물론 해외 기업과의 협력 프로젝트가 국제적으로 상을 받으며 명성을 쌓았다.그 결과, 마치 지화 그룹조차 그 빛에 가려지는 듯했다.박한빈은 알고 있었다.이 모든 것이 사씨 가문의 지원 덕분이라는 것을.그렇지 않고서야 유효정이 연정우에게 남긴 자금만으로 이 정도 성과를 이루기는 불가능했다.하지만 아무렴 어떤가.사씨 가문이라 해도 박한빈에게는 눈엣가시일 뿐이었다.사실 지금 당장이라도 직접 손을 쓸 수 있었다.하지만 에릭이 말한 것처럼 국내의 법과 규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그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몇 달, 길게는 일 년도 걸릴 수 있었다.그런데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한 달.그것이 그의 인내심이 닿을 수 있는 한계였다.성유리의 소식이 더 이상 들려오지 않는다면 박한빈은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른다.차가 도착한 곳은 엔젤 월드.박한빈이 집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하늘이는 뒷마당에 서 있었다.나무 아래에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는 뒷모습.그는 아이를 부르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고 가까이 다가가서야 깨달았다.하늘이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것은 한 마리 나비였다.그러나 그 나비는 이미 사마귀에게 붙잡혀 있었다.가만히 놔둔다면 나비는 이제 곧 먹혀버릴 운명이었다.“구해주고 싶어?”박한빈이 하늘이에게 물으며 손을 뻗으려 하자 하늘이가 바로 대답했다.“아니요.”그 순간, 박한빈의 손이 멈췄다.“약육강식.”하늘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계속 말했다.“자연의 법칙이에요.”박한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는 고개를 숙여 하늘이를 바라보았다.그러나 아이의 얼굴엔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물론 하늘이는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한 편이었다.하지만 성유리 앞에서는 언제나 밝고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그런데 지금 그 표정이 사라져 버렸다.둘은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그사이 나비의 날개는 찢겨 나가고 몸뚱이는 천천히 먹혀 사라졌다.그렇
성유리는 그때 말했다.하늘이는 이날을 정말 손꼽아 기다리고 있으니까 꼭 하루 종일 시간을 내서 함께 있어 달라고.박한빈은 그 약속을 지켜야 했다.하지만 지금, 이 모든 것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 걸까?“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어?”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그가 물었다.그러자 하늘이는 고개를 돌려 박한빈을 바라보다 금세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아무것도 원하지 않아요.”박한빈은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하늘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지 박한빈이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그렇지만 그토록 자신 있던 일조차 이제는 확신할 수 없었다.박한빈도 안다.하늘이를 엔젤 월드에 두는 것이 더 나은 선택일 수도 있다는 것을.그는 너무 바빴고 아이와 어떻게 소통해야 할지도 몰랐다.하지만 박한빈은 하늘이를 데려오고 싶었다.실버 포레스트, 그들의 집으로.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혼자 돌아오는 집, 텅 빈 공간, 모든 것이 그대로인 듯 보이지만 단 하나만이 비어 있는 공간.그곳은 오직 하나를 끊임없이 상기시켰다.성유리는 이곳에 없다.그리고 만약 하늘이까지 없어진다면 박한빈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어쩌면 그 모든 순간이 박한빈의 행복이 그저 환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속에 갇히게 될 테니까 말이다.하지만 하늘이를 데려온 것이 정답이 아니었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아이는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고 박한빈 역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커다란 식탁,단둘이 앉아 조용히 식사를 했다.들려오는 것은 오직 숟가락과 젓가락이 부딪히는 소리뿐.박한빈은 새우를 까서 하늘이의 그릇에 놓으려 했지만 아이는 피해버렸다.그리고 담담히 말했다.“안 먹어요.”아이가 정말 새우를 싫어했었나?박한빈은 기억나지 않았다.그러나 분명 전에 성유리는 하늘이에게 새우를 까주곤 했다.그렇다면 하늘이는 정말 새우를 싫어하는 걸까? 아니면 박한빈이 까준 것을 먹기 싫은 걸까?그는 더 깊이 묻지 않았다. 그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새우를 먹었다.그렇게
박한빈이 직접 하늘이를 재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평소 성유리가 하던 것처럼 동화책을 읽어주기로 했다.하지만 어릴 때 한 번도 동화책을 들으며 잠든 적이 없었고 누군가를 위해 읽어준 적도 없어서 그의 목소리는 어딘가 어색하고 딱딱했다. 그래도 하늘이는 이미 울다 지쳐 있었기에 오래 지나지 않아 곧 깊이 잠들었다.박한빈은 잠든 하늘이의 옆에 한동안 앉아 있다가 아이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사람들은 늘 하늘이가 자신과 닮았다고 했다.그런데 이 순간, 아이에게서 더 많이 보이는 건 오히려 성유리의 모습이었다.눈과 얼굴의 윤곽, 그리고 화를 낼 때의 모습까지 성유리와 거의 똑같았다.박한빈은 눈을 감고는 자신의 감정을 다잡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그리고 침실로 돌아가니 예상대로 방 안은 캄캄했다.불을 켜고 드레스룸으로 이어진 작은 소파에 천천히 앉았다.이곳은 원래 침실에서 확장한 공간으로 처음에는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누어 그와 성유리의 옷을 정리해 두었었다.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성유리를 위해 산 옷들이 늘어나면서, 결국 그의 공간 일부까지 내주게 되었다.이제 바라보면 자신의 수트 옆으로 성유리의 형형색색의 원피스들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박한빈은 그 옷들을 오랫동안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러다 문득 차가운 무언가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기분이 들었다.얼음처럼 차가운 감촉이었다....“연 대표님!”뒤에서 들려온 공손한 목소리에 연정우의 걸음이 멈췄다.몸을 돌리자 한 남자가 다가오고 있었다.그는 한껏 비위를 맞추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오랜만입니다,연 대표님!”연정우는 상대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죄송합니다만, 누구시죠?”“역시 바쁘신 분이라 저 같은 사람은 잊으셨군요. 저는 장수아입니다! 지난번 회의 때 뵈었잖아요!”연정우는 남자의 말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죄송합니다. 요즘 회의가 많다 보니 기억이 잘 안 나네요.”“괜찮습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연 대표님께서 요즘 얼마나
“그러는 연 대표님께서는 무슨 의도로 하시는 말씀이죠?”“도대체 뭘 알고 있는 거죠?”연정우는 짜증 섞인 말투로 상대의 말을 끊었다.이 남자가 아는 것이 얼마나 되는지는 결국 연정우가 어떤 태도로 그녀를 대하느냐에 달려 있었다.하지만 지금은 시간도, 기분도 장수원과 빙빙 돌며 말장난할 여유가 없었다.장수원은 애써 뜸을 들이지 않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실 별거 아닙니다. 저는 그저 연 대표님께서 그 여자를 동약거리로 데려다주는 걸 봤을 뿐이에요.”그 말이 끝나자 연정우의 표정이 단숨에 굳어졌다.그리고 저도 모르게 책상 위에 올려둔 손이 천천히 힘을 주며 움켜쥐어졌다.이 남자가 하는 말은 사실이었다.그리고 동약거리라는 곳이 어떤 곳인지는 미국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화려한 도시가 한 폭의 아름다운 풍경화라면 그곳은 그 아래에서 썩어가는 축축한 하수도 같은 곳이었다.무수한 부랑자들과 범죄자들, 심지어 살인범들까지 숨어 있는 곳.그곳에 여자 혼자 던져진다는 건, 마치 늑대 무리에 떨어진 어린 양과도 같았다.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는 곳.연정우 역시 그 사실을 모르는 게 아니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유효정은 은 분명히 말했었다.절대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그래서 그녀는 아버지가 남긴 돈으로 여생을 보내길 원했다.그리고 그 삶에 연정우도 함께하기를 바랐다.하지만 그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그렇게 길에서 다투게 되었고 유효정이 연정우 앞에서 늘 유지하던 착한 모습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으로 그의 얼굴을 가리키며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을 퍼부었다.그래서 연정우는 일부러 차를 그곳으로 몰았다.그리고 일부러 유효정을 그곳에 버렸다.차를 몰고 떠날 때, 뒤에서 그녀의 절박한 울음소리가 귓가를 때렸다.하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유효정에게 일말의 연민도, 동정도 없었다.오히려 우스웠다.그리고... 후련했다.언제나 남들 위에 군림하려던 여자, 감옥에 몇 년을 있어도
[미끼를 물었어.]에릭의 메시지가 도착했을 때, 박한빈은 하늘이의 유치원에 있었다.오늘은 유치원 공개수업 날이었다.이런 행사에는 늘 성유리가 참석했었지만 이번엔 박한빈이 홀로 이곳에 앉아 있었다.주변은 거의 엄마들뿐이었다.남자인 그가 혼자 앉아 있으니 처음부터 사람들의 시선이 몰릴 수밖에 없었다.하지만 그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듯,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지켰다.공개수업의 마지막 순서는 아이들이 부모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손가락 춤을 추는 시간이었다.하늘이는 박한빈 앞에 앉아 있었고 작은 얼굴은 몹시 진지했다.그 모습에 박한빈은 살짝 의심이 들었다.혹시 자기 앞에서 공연하기 싫어서 저러는 걸까?다행히 공연은 무사히 끝났다.다만, 다른 아이들은 공연이 끝난 후 자연스럽게 부모에게 안겼지만 하늘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그저 조용히 그의 손을 잡았다.아이의 행동을 본 박한빈은 천천히 손을 펴 하늘이의 손을 감싸 쥐었다.행사가 끝난 후, 그는 하늘이를 데리고 나왔다.에릭은 아까부터 계속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지만 그는 답할 틈이 없었다.차에 오르고 난 뒤, 박한빈은 하늘이를 바라보며 먼저 말을 걸었다.“내가 요즘 좀 바빠. 우선 할머니 댁에 잠깐 가 있을 수 있겠니? 이틀 후에 데리러 갈게.”그 말에 하늘이가 고개를 들어 박한빈을 바라보았다.원래는 아무 반응도 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요즘 어떤 말을 해도 조용히 따르기만 했으니까.하지만 이번엔 달랐다.하늘이는 한참 동안 박한빈을 빤히 바라보더니 조용히 물었다.“이틀이라고 말했으면… 진짜 이틀이에요?”그 말을 듣고 나서야 박한빈은 깨달았다.하늘이는 지금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하고 있었다.“응. 딱 이틀이야.”그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그제야 하늘이는 안심한 듯,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박한빈은 하늘이를 먼저 엔젤 월드에 데려다준 후, 에릭에게 전화를 걸었다.“드디어 연락이 됐네. 난 네가 실종된 줄 알았어.”에릭이 비꼬듯 계속 말했다.“말해.”박한빈은 그의 농
그의 가슴은 점점 더 거칠게 오르내렸고 가만히 앉아 눈앞의 숫자들이 다시 반등하기만을 기다렸다.며칠 전까지만 해도, 늘 그래왔으니까.하지만 이번엔 아무 변화도 없었다.곧 거래 시간이 종료되었다.주식 시장이 닫히는 순간, 연정우는 이를 세게 악물었다.그리고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장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원래부터 시장에 깊이 발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애초에 장수원의 성가신 권유를 대충 받아들이며 시작한 일이었을 뿐.그러나 곧 깨달았다.그 남자가 단순한 허풍쟁이가 아니라는 것을.그때야 알았다.장수원이 단순한 중개인이 아니라 그쪽 펀드의 파트너라는 사실을.국내에서 신중하게 추진하는 사업들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 숫자가 뛰어오르는 쾌감, 그리고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고도 금융 피라미드 최상층에 오를 수 있다는 감각.그건 마치 마약과도 같았다.그렇게 두 번째 투자 제안서가 그에게 전달됐다.한 주당 10억.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몇 대를 걸쳐도 만질 수 없는 돈이었지만 연정우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숫자였다.그리고 무엇보다 연정우는 잘 알고 있었다.박한빈 역시 그쪽에 (파트너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더 흥미로운 건, 장수원이 속한 펀드와 박한빈 쪽 펀드가 서로 적대적 관계라는 점이었다.이건 아주 마음에 들었다.금성에서 그를 짓누르는 것뿐만 아니라 이 시장에서도 박한빈을 짓밟아야 했다.그리고 연정우는 박한빈을 완전히 끝장낼 시나리오까지 완벽하게 짜두었었다.심지어 승리 후 열릴 축하 파티에서 무엇을 할지까지.하지만 지금 그 모든 게 한순간에 불타버린 금박처럼 사라졌다.연정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아예 존재하지 않던 것처럼 없어져 버렸다.장수원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끊임없이 울리는 차가운 통화연결음을 들을수록 연정우의 심장은 점점 깊이 가라앉았다.그렇지만 그는 믿을 수 없었다.‘그럴 리가 없어. 내가 속았다고? 말도 안 돼... 그저 잠시 진 것뿐이야. 내일 시장이 열리면 반등만 하면...’그 순간을 기다리기 위해 연정우는 다시
박한빈은 약속대로 하늘이를 데리러 갔다.막 도착하자마자, 김서영이 그의 얼굴을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대체 어디 다녀온 거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그냥 지난 이틀 동안 너무 바빴을 뿐이에요.”박한빈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며 하늘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집에 갈까?”하늘이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겉으로는 담담한 척했지만 돌아서자마자 바로 그 작은 책가방을 챙기러 달려갔다.그 모습을 보며 박한빈은 미소를 지었다.바로 그때 박한빈의 휴대폰이 울렸다.발신자를 확인하는 순간, 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하늘이는 굳은 박한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그 표정이 기대처럼도 보였지만 한편으론 불안한 것처럼도 보였다.하지만 아이가 더 자세히 보기 전에 박한빈이 먼저 입을 열었다.“잠깐만 기다려. 전화 좀 받고 올게.”그렇게 말한 뒤, 천천히 정원 쪽으로 걸어 나갔다.일부러 느리게 걸었지만 전화를 건 쪽에서는 기다릴 생각이 충분한 듯했다.첫 번째 전화를 받지 않자 곧바로 두 번째 전화가 걸려 왔다.이번에는 박한빈 또한 피하지 않고 받았다.“박한빈 씨.”수화기 너머 연정우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당신이 한 짓입니까?”박한빈이 대답하지 않자 연정우가 피식 웃었다.“박 대표님은 늘 스스로 고결한 척하면서 이런 더러운 수법을 가장 경멸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제 와서 똑같이 쓰는 겁니까?”그의 비아냥에도 박한빈은 반응하지 않고 오직 한 가지만 물었다.“살고 싶습니까?”그 질문에 연정우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하지만 박한빈은 멈추지 않았다.“성유리는 어디에 있죠?”그 말을 듣는 순간, 연정우는 비아냥거렸다.“이 모든 일을 벌인 이유가 결국 그 여자 때문이야? 네 동업자들은 알고 있나? 이 난리를 친 게 단순히 성유리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였다고?”“연정우.”박한빈이 단호하게 그의 말을 끊었다.“나는 지금 너랑 돌려 말할 시간 없어. 딱 10분 줄게. 대답하지 않겠다면... 상관없어. 네가 했던 짓들, 전부 세상에 공개해
김서영은 옆에서 서 있다가 박한빈의 말을 듣고 놀란 듯한 목소리로 되물었다.“유리 소식이 있다고? 지금 어디 있어?”“서향시에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데리러 갈 거고.”“누가 알려줬어? 유리가 왜 서향시에 있지? 그리고 그동안 왜 너한테 한 번도 연락하지 않았는데? 이 정보는 확실한 거야?”김서영은 여전히 침착한 척하고는 있었지만 한꺼번에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그 무렵, 박한빈에게는 상황을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전 지금 바로 서향시로 갈 겁니다. 어머니는 하늘이만 잘 돌봐주십시오.”“아니, 그게 혹시 사기일 수도 있잖아? 박한빈!”김서영이 막아보려 했지만 박한빈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뒤따라 나왔을 땐 이미 차에 올라탄 뒤였다.사기?그래, 어쩌면 연정우가 박한빈을 속이려는 것일 수도 있고 시간을 끌기 위해 거짓 정보를 준 걸 수도 있다.서향시에는 그가 미리 짜놓은 함정이 있을 수도 있고 박한빈이 도착하는 순간 바로 그를 죽이려는 계획이 실행될지도 모른다.하지만 그게 뭐가 중요한가.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성유리는 마치 세상에서 사라진 것처럼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아무도 모른다. 박한빈이 이 시간을 어떻게 버텼는지.박한빈은 처음으로 행복이 없는 삶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마치 살아 있는 시체가 된 듯한 나날들.그를 붙잡고 있는 단 하나의 끈은 성유리를 찾아야 한다는 의지뿐이었다.만약 그마저도 없었다면 박한빈은 아마 진작에 죽어버렸을지도 몰랐다.그래서 그는 냉정해질 수 없었다.연정우가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걸 알면서도 직접 가서 확인해야만 했다.그 외에 다른 선택지는 없었으니까 말이다.비행 일정은 이미 예약해 두었다.서향시로 바로 가는 비행기가 없어 근처 도시까지 가는 티켓을 예약해 두었지만 문제될 건 없었다.다른 도시에 도착하는 즉시 차를 타고 이동하면 되니까.지금 박한빈은 단 1초도 기다릴 수 없었다.그가 서둘로 공항으로 향하는 길, 에릭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뉴스 다
성유리는 옆에 있는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중심을 잡지 못하고 그대로 굴러떨어졌다.20개의 계단.그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그녀의 이마는 다섯 번이나 모서리에 부딪혔다.이 숫자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성유리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성유리는 두 손으로 배를 꽉 끌어안았다.뱃속에 있는 아이를 어떻게든 지키기 위해 본능처럼 움직였지만 바닥에 내리꽂히는 순간, 아랫배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격렬한 통증이 몰려왔다.곧이어 도우미의 날카로운 비명이 들렸다.그리고 집안의 모든 사람들이 다급하게 몰려왔다.성유정 역시 마찬가지였다.그녀는 울먹이며 소리쳤다.“언니! 언니 왜 그래? 언니 제발 나 놀라게 하지 마.”성유정의 얼굴엔 진심 어린 걱정이 묻어 있었다.하지만 성유리는 기억하고 있었다.계단에서 굴러떨어지던 바로 그 순간, 성유정을 올려다봤을 때 그녀의 얼굴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는 사실을.그리고 성유정의 입꼬리가 분명히 움직였다.소리는 없었지만 그 입 모양은 너무나 선명했다.“성유리, 그냥 죽어버려.”“뭐 하고 있어? 빨리 구급차 불러.”윤청하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그렇지만 성유리는 알고 있었다.그녀가 걱정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자신의 뱃속에 있던 아이라는 사실을 말이다.아니, 아이마저도 진심으로 아끼지는 않았다.그녀가 바랐던 건 그 아이가 가져다줄 이익뿐이었다.하지만 이제 그 모든 게 없어졌다.성유리는 눈을 꽉 감았다.그리고 자신 아래에서 계속해서 흘러나오는 핏물을 느꼈다.작은 시냇물처럼 바닥을 타고 번져가는 붉은 피....아이를 임신한 주 수는 벌써 3개월이 넘었다.그래서 의사는 유도 분만 수술을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그 순간, 성유리는 마취를 했음에도 모든 감각을 생생히 느낄 수 있었다.그들이 자신의 몸에서 아이를 끄집어낼 때의 그 느낌, 살을 찢고 뼈를 뜯어내는 고통.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고통이 아니었다.성유리의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우러나온 절망 그 자체였다.“내 아이 데려가지 말라고.”
“하지만 그것도 이해는 돼.”성유정이 말을 이어갔다.“형부처럼 훌륭한 사람을 노리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언니가 이렇게 일찍 결혼한 것도 잘한 선택이야.”“근데 결혼을 했다고 해도 형부를 넘보는 여자들은 아직도 많을걸? 그러니까 언니, 진짜 조심해야 돼. 형부 잘 지키고!”성유정은 아주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그리고 성유리는 한참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그건 내가 조심한다고 해서 막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언니 그게... 무슨 뜻이야?”“다리는 결국 박한빈 씨 몸에 붙어 있어. 그 사람이 어디를 가고 싶은지, 누구를 만나고 싶은지는 내가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어?”성유리의 말에 성유정은 조용해졌고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성유리를 뚫어지게 바라봤다.그 평온한 눈빛이 성유리의 가슴을 순간 덜컥 내려앉게 만들었다.성유리는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갈 마음이 없었다.그녀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려 했지만 그 순간 성유정이 입을 열었다.“언니가 지금 그렇게 무심한 얼굴을 하고 있는 이유... 나는 알아.”“그건 언니가 자신감이 넘쳐서도 아니고 형부가 언니한테 잘해서도 아니야. 그저... 언니가 임신했으니 그래서 이제는 뭐든 다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그러니까 마음 놓고 있는 거지?”“언니도 알아? 아까 할머니가 그러셨거든. 엄마가 지화의 일부를 언니 뱃속에 있는 아이에게 넘기려고 한다고.”“말로는 아이에게 준다지만 지금은 겨우 조그만 태아일 뿐이다. 결국은 언니 손에 들어가는 거지. 안 그래?”“언니는 정말... 운도 좋다.”성유정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낮았다.조금 전까지 보였던 그 해맑은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그녀의 눈빛에는 차가운 음침함이 서려 있었다.그 시선에 성유리는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성유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다시 돌아서서 가려 했다.그러자 성유정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언니, 왜 그렇
말을 끝낸 뒤, 성유리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박한빈은 그녀가 떠나는 발소리를 들었고 순간, 넘기던 서류를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하지만 방 입구에는 이미 아무도 없었다.그가 차에 올라 떠날 준비를 할 때도 성유리는 배웅하러 나오지 않았다.뭐 이상할 것도 없었다.사실 예전부터 자신이 출장을 갈 때 성유리가 배웅을 한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방금 성유리가 자기를 불렀던 그 한마디 때문인지 박한빈은 은근히 기대감을 품고 있었다.그리고는 그 기대를 스스로 짓밟았다.생각해 보면 별로 큰 일도 아니기에 아무렇지도 않았다.어차피 이런 건 익숙한 일이었으니까.결혼을 했다고 해도 결혼하지 않은 것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그렇게 생각하며 박한빈은 시선을 거두고 앞좌석에 있는 기사에게 말했다.“출발하죠.”...박한빈이 출장을 간 사이, 매달 열리는 박씨 가문의 가족 식사는 여전히 계속되었다.성유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안은 꽤 떠들썩했다.그제야 성유리는 알게 되었다.성유정뿐 아니라 윤청하까지 오늘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을.“유정이 생일은 큰 행사니까.”김난희가 집안 어르신으로서 먼저 포문을 열었다.“올해는 막 대학도 졸업했잖아. 이제 어엿한 성인인데 당연히 성대하게 해야지!”그 말을 듣던 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예전에 유정이 16살 생일, 18살 생일 때도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그때마다 이번 생일은 꼭 잘 챙겨야 한다고 그러셨잖아요. 그러니 유정이 생일은 단 한 해도 대충 넘어간 적이 없네요.”“그야 당연하지.”김난희는 윤청하의 장난기 섞인 말을 전혀 개의치 않고 도리어 맞장구쳤다.“여자애는 보석 같은 존재야. 해마다 생일은 정성껏 챙겨줘야 해.”“그럼 오늘도 잘 따라야죠.”그들은 다 함께 웃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눴다.성유정도 중간중간 장난스럽게 말을 끼워 넣었고 거실 안은 유쾌하고 활기찼다.성유리가 다가가 인사를 했을 때조차 아무도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이런 일에 익숙했던 성유리는 아무 말 없이
성유리는 며칠이 지나고 나서야 성유정과 박한빈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도우미가 박한빈의 외투 주머니에서 티켓 한 장을 발견하고 성유리에게 이걸 보관할지 물어본 게 알게 된 계기였다.성유리는 입장권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봤고 표 뒷면에는 이번 전시회의 작품이 인쇄되어 있었다.형형색색으로 물든 유화였고 위에는 선명한 장미꽃에 꽃잎 위에는 이슬이 맺혀 있는 듯했다.이슬이 아래로 떨어질 때쯤이면 그림 배경은 어느새 한 여자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그리고 그 이슬은 자연스레 그녀의 눈물이 되어 있었다.이 작품은 온라인에서도 꽤 유명했다.만약 전시회에 초대한 사람이 성유정이 아니었다면 성유리는 정말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하지만 박한빈 주머니에서 그 티켓을 발견한 순간, 모든 흥미는 사라져 버렸다.성유리는 그 티켓을 더는 들여다보지도 않고 조용히 종이를 구겨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그날 저녁, 박한빈은 집에 돌아왔지만 성유리와 식사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그는 집에 들어서자마자 바로 위층으로 올라가 짐을 싸기 시작했고 성유리는 박한빈이 또 출장을 나가는 거라는 걸 알았다.성유리는 복도에 서서 멍한 표정으로 박한빈을 바라봤다.‘어디로 가는 걸까? 언제 돌아오는 거지?’사실 그녀는 박한빈에게 묻고 싶었다.그렇지만 그건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이를 위해서였다.임신하고 처음 병원에 갔을 때만 박한빈이 함께했고 그 이후 모든 산부인과 검진은 혼자 갔다.담당 의사는 그들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아이 아버지가 왜 안 왔냐고 묻지 않았다.그러나 초음파 검사를 맡은 다른 의사는 사정을 몰랐기에 지난번 초음파 검사 중, 성유리에게 이렇게 말했다.“기회가 되면 다음 검진에는 아이 아버지도 같이 오시면 좋겠네요.”왜냐하면 다음번 검진에는 4D 컬러 초음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기술을 통해 그들은 미리 아이의 윤곽과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그건 부모가 아이를 처음 ‘만나는’ 순간이기도 했다.그래서 성유리는 박한빈이 언제 돌아오는지 알고
게다가 여러 번 성씨 저택으로 돌아갈 때마다 윤청하가 온갖 종류의 음료를 억지로 마시게 했기 때문에 성유리는 이제 집조차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이렇게 되면 원유진은 기회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시간이 지날수록 성유정은 점점 초조해졌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다.만약 정말 성유리가 아이를 낳게 된다면 틀림없이 그녀와 박한빈 사이에 또 하나의 연결고리가 생기는 것이 분명했다.박한빈은 책임감이 매우 강한 사람이다.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그녀의 어머니가 말한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성유리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따라서 그들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정말로 평생을 함께해야 할 것이다.며칠 동안 성유정은 이 일로 인해 초조해했고 윤청하가 다음 달에 그녀를 위한 생일 파티를 열어주겠다고 해도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이미 초대장을 보냈단다. 그때 도시 전체의 청년 권사들이 다 참석할 거야.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다면 엄마한테 말해.”윤청하는 여전히 다정한 눈빛으로 성유정을 바라보았다.하지만 성유정은 여전히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그래? 기분이 안 좋니?” 윤청하가 물었다.성유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윤청하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전 아직 결혼하고 싶지 않아요. 이제 막 졸업했잖아요.”“바보야, 보자마자 지금 당장 결혼하는 게 아니야.”윤청하는 웃으며 말했다. “이건 너희들이 2년 동안 교제할 기회를 주는 거야. 그때 돼서는 약혼을 하고, 그리고 너...”“싫어요!”성유정이 화를 내며 말을 끊자 윤청하는 성유정의 이런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당황했다.그러자 성유정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장 윤청하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엄마, 나 아직 어린데 연애하고 싶지 않아요. 그냥 엄마 곁에만 있고 싶어요.”“바보야, 결혼해도 언제든지 올 수 있잖아.”윤청하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에 있는 사진들을 보여주며 말했다.“일단 한번 봐, 마음에 드는 사람이 있니?”성유정의 마음에는 박한빈밖에 없
“너 왜 저 여자를 감싸는 거야? 내가 방금 한 말 틀렸어?!”원유진은 성유정이 방으로 끌고 들어갔을 때도 여전히 분노에 차 있었다. “저 여자가 네 모든 걸 뺏어갔잖아! 다른 건 그렇다 치더라도, 저 여자도 어차피 성씨 가문의 핏줄이니 조금 나눠 주는 건 당연한 일이지만 박한빈은 달라! 전에 박한빈과 사귀던 사람은 분명 너였잖아!”“모두가 너희 둘이 한 쌍이라는 걸 알고 있는데 결과는 어땠어? 결국엔 김서영을 꼬드겨서 네 약혼자를 빼앗았잖아!”“유진아, 그만해.”성유정은 원래 차분한 태도였지만 원유진이 박한빈에 관한 얘기를 꺼내자 눈시울이 붉어졌다.원유진은 자신이 잘못 말했음을 깨닫고 서둘러 사과하며 말했다.“미안해, 네가 상처받은 이야기를 꺼내서는 안 됐는데. 하지만 나는 저 여자의 저런 태도를 참을 수가 없었어. 마치 자기가 피해자인 것처럼 굴잖아. 박한빈도 마찬가지야. 분명 널 좋아하면서 왜 굳이 어머니 말만 따르는지...”“유진아, 네가 틀렸어.”성유정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나와 한빈 오빠는... 이제 가능성이 없어.”“왜?!”원유진이 말했다.“내 생각엔 그렇지 않아. 박한빈이 어머니 말을 따라 성유리와 결혼했다지만 내 생각엔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네가 자리 잡고 있어서 전혀 좋아할 리 없다고.”“그들은 이미 아이가 있어.”성유정이 다시 그 말을 끊자 원유진은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녀는 서서히 눈을 크게 뜨며 믿을 수 없다는 듯 성유리를 바라봤다.“어떻게 그럴 수 있어? 너 나한테 거짓말하는 거지?”성유리는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거짓말하는 게 아니야. 이 일은... 우리 두 집안 사람들도 다 알고 있어. 아직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을 뿐이야.”“그래서 내가 말한 거야, 나와 오빠는 불가능하다고.”“예전에는... 난 자신을 속이며 그가 부모님과 박씨 가문의 명예 때문에, 설령 언니와 결혼했다 하더라도 그저 명목상의 일일 뿐이라고 생각했어.”“하지만 지금은, 언니가 이미 임신했어. 난 정말... 이제는 자신을
상대방은 마침 그녀 앞에 도착했다. 빨간 치마의 디자인은 매우 화려했고 두껍게 바른 립스틱은 그녀를 더욱 젊고 화사해 보이게 했다.이런 차림새는 분명히 병문안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유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성유리를 위아래로 훑어본 후 말했다.“네가 여기 있었네. 나는 사모님이 아주 바쁘신 줄 알고 한 번 얼굴 보려고 해도 예약을 해야 하는 줄 알았는데.”원유진은 성유리에 대해 여전히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악의를 드러냈다. 성유리는 원유진과 잠시 눈을 마주친 후 가볍게 대답했다.“어.”그 반응에 원유진은 눈을 크게 부릅뜨고 이를 악물며 말했다.“지금 무슨 태연한 척이야? 네가 아니었다면 성유정이 지금 이렇게 되었겠어? 박씨 집안 사모님이 될 사람은 원래 성유정이였어! 왜 돌아왔어? 돌아오자마자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것을 빼앗아갔잖아!”“너는 어젯밤에 성유정이 왜 교통사고가 났는지 알아? 다 너 때문이야. 너 때문에 그녀가 그렇게 많이 마셨던 거고!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차와 부딪힐 수 있었겠어?!”“성유정이 거의 죽을 뻔했다고, 알아?!”원유진의 목소리는 날카로웠다. 원유진은 독을 품은 눈빛으로 계속해서 성유리를 바라보았다. 마치 그 눈빛을 날카로운 칼날로 만들어 성유리의 몸을 찌르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러나 성유리는 다소 의아해하며 말했다.“성유정이 어젯밤에 술을 마셨다고?”“맞아! 바로 네가...”“그렇지만 내가 성유정에게 술 마시라고 한 건 아니잖아.”성유리가 말했다. 가볍게 던진 한마디에 원유진은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성유리를 보며 물었다.“ 뭐라고?”“나는 어젯밤에 성유정과 연락한 적도 없고 성유정이 술 마시러 간 것도 전혀 몰랐어. 그 차... 내가 사고를 낸 사람도 아닌데 이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성유리가 원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단순한 질문을 하는 것 같지만 원유진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결국 자신을 조롱하는 것이었다.원유진이 뭔가 말하
박한빈은 그곳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빛은 진지하면서도 날카로웠고 그녀의 얼굴에서 작은 불만이라도 읽어내려는 듯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그녀는 그저 평온하게 그를 바라보고 있었고 오히려 그가 서둘러 떠나길 바라는 듯했다.박한빈은 지금까지 자신의 남편을 다른 여자한테 밀어내는 그런 여성을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오늘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매번 그녀는 그렇게 행동했다. 마치 그가 집안의 결정에 따라 결혼한 것처럼 말이다.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을까?그녀가 그와 결혼한 것은 어쩌면 성씨 가문과 다투기 위해서 그랬던 것일까?그녀와 성유정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박한빈이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일이었다. 그는 아무리 그녀가 진짜 자식으로 태어난 딸이라 하더라도 성씨 집안 부모님 앞에서 성유정의 자리를 대체할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원래 그 자리는 본래 그녀의 부모님께 속해야 했기에 그녀가 질투와 슬픔을 느끼는 것은 당연했다. 따라서 박한빈과의 결혼 약속을 받아들인 것은 성유정에 대한 강력한 복수라고 할 수 있다.하지만 그녀는 결혼 후에도 그에게 변함없이 냉담했다.그녀는 그가 저녁 몇 시에 돌아오는지 출장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그와 성유정 사이의 친밀한 행동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직접 선물을 건넸을 때도 그녀는 조금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보다도 그녀가 원래 결혼하고 싶어 했던 이는 오히려 진씨 집안의 그 사생아였을지도 모른다. 이때 박한빈은 어젯밤 그녀가 자신의 앞에서 이빨을 드러낸 모습을 떠올렸다. 그것은 그가 처음으로 그녀의 온화하고 순진한 모습과는 다른, 진짜 성유리의 모습을 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그 앞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았다.그렇다면 진씨 가문의 그 사생아는 어땠을까?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의 감정은 아주 좋았다고 한다. 만약 그때 자신이 약간의 수를 써서 진씨 가문이 그를 보내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남편
성유리의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녀는 천천히 등을 쭉 펴며 몸을 돌렸다.“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내려와서 드세요.”가사도우미의 얼굴은 아무 일 없다는 듯 그저 공손하게 말할 뿐이었다.성유리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씻고 나가야겠어요.”말을 내뱉자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마치 오래도록 병을 앓은 노파처럼 거칠고 허스키하게 들린다는 것을 깨달았다.“알겠습니다.”가사도우미가 곧장 대답했다.돌아서서 가려던 순간, 성유리가 갑자기 가사도우미를 불러세웠다.“저기... 박한빈은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도련님께서는 아침 일찍 떠나셨습니다.”가사도우미가 대답하며 덧붙였다. “문 앞 경비원 말로는 새벽에 나가신 것 같다고 하던데요.”말이 끝나자 성유리는 마치 조각상처럼 멍하니 서서 한동안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부인님?”가사도우미가 한 번 더 부르자 성유리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가사도우미를 바라보며 억지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알겠어요.”말을 마치고 그녀는 앞에 있는 방의 문을 열었다.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있던 미소는 차갑게 식었다.비록 경비원이 모호한 시간을 말했지만 성유리는 그것이 분명히 그들의 일이 끝난 직후임을 알고 있었다.그는 그녀와 함께 자는 것을 그토록 싫어했고 심지어 단 하룻밤조차도 감내하기를 원치 않았다.그렇다면, 그런데도 그는 왜...성유리는 생각하자마자 곧바로 답을 알게 되었다.어차피 그녀는 그저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필요할 때 사용하고 필요 없을 때 버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그녀는 오히려 감사하고 고마워해야 했다. 어젯밤 박한빈이 그녀를 방에서 내쫓지 않았다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저녁에 박한빈은 꽤 일찍 돌아왔다.성유리는 방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을 때 그의 자동차 엔진 소리를 들었다.그녀는 순간 멈칫했으나 금방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앞으로 가방 문을 걸어 잠갔다.문을 잠그고 나서야 그녀는 다시 컴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