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오소정더러 강민아에게 전화하라고 스코틀랜드식 에그를 먹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이미 충분히 한발 물러선 반하준이었다.“사모님께서 돌아오시지 않겠다고 했어요.”“콜록콜록.”커피를 마시다가 그만 사레가 들려 참지 못하고 기침했다. 오소정이 뭔가 눈치채고 물었다.“두 분 혹시 싸우셨어요?”“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아요.”반하준의 호통에 주방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겁에 질린 오소정은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반하준이 손에 든 머그컵을 꽉 쥐었다.‘안 돌아올 리가 없는데? 지금쯤이면 점심에 회사로 가져올 도시락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예전에 그가 화를 낼 때면 강민아는 직접 회사로 도시락을 가져와 화해를 청하곤 했었다....식탁에 앉은 반우정이 아침상을 보고 두 눈을 번쩍 떴다.“와. 닭죽이다.”닭죽을 좋아하는 반우정과 달리 반현민은 닭죽만 보면 헛구역질을 했다.반하준과 반현민 모두 죽을 좋아하지 않아 반씨 저택에 있을 땐 죽을 거의 끓이지 않았다.연진숙은 죽이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는 음식이라고 했었다. 쌀이 부족해서 죽으로 끓여 먹는 거라고 말이다. 반씨 가문 사람들은 삼시 세끼를 과학적인 영양 균형에 맞춰 섭취했다.강민아는 죽도 영양아가 있고 아이들에게 먹이면 소화가 더 잘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죽에 닭고기와 야채 등을 넣으면 음식쓰레기 같다면서 혐오감을 드러내곤 했다.그리고 반현민에게 먹이려고 야채죽을 끓여준 적이 있었는데 반현민이 먹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 후로 다시는 죽을 끓이지 않았다.반현민에게 음식을 낭비하면 안 된다고 혼내자 반현민이 화를 내면서 따졌다.“이건 돼지들이나 먹는 건데 어떻게 나한테 먹일 수 있어요? 역시 엄마는 촌뜨기라니까요.”옛 생각에 강민아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반우정은 벌써 닭죽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그러고는 트림하면서 설거지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깨끗해진 그릇을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았다.“할머니 집에 와야만 닭죽을 먹을 수 있는 거예요?”강민
휴대폰 너머의 반하준은 진작 전화를 끊어버렸다.강민아는 차에 올라타 액셀을 밟고 달려나갔다. 하지만 검은색 스포츠카 한 대가 따라오고 있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도로 양쪽의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은색 볼보가 아스팔트 도로 위에서 번개처럼 달려갔다.강민아는 칠흑같이 어두운 눈빛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차를 이렇게 빨리 몰아본 게 정말 오랜만이라 계기판의 수치와 함께 아드레날린도 폭발했다.현란한 색상의 스포츠카 세 대를 연속 추월하자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쳤다.“대박. 저 사람 누구야?”다른 스포츠카에 타고 있던 사람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부하에게 지시했다.“저 차 번호판 좀 조회해봐.”강민아는 개조된 스포츠카들을 가볍게 제쳤고 커버에서도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몇몇 재벌 집 자제들이 낀 이어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찾았습니다. 강씨 가문의 차입니다.”누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강씨 가문? 그럼 운전자가 강나현인가?”“강나현이 운전 저렇게 잘한다고? 그럼 전에 우리랑 레이싱할 때 실력을 숨기고 있었단 말이야?”은색 볼보가 산길을 따라 뱅글뱅글 올라갔고 뒤에 검은색 페라리가 바짝 따라붙었다.심은호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그 순간 머리카락이 눈썹 앞으로 툭 내려왔다.그는 한때 카리스마가 넘쳤던 강민아를 본 적이 있었다.강민아는 14살에 고연대학교 영재반에 입학하여 국제수학올림피아드에서 3년 연속 우승한 천재였다. 19살에는 자동차 경주 연맹에 지원하여 레이싱 면허를 취득한 후 월드 랠리 챔피언십에서 10위 안에 들었다.그녀의 인생은 꽃길이었고 항상 꽃과 박수갈채가 함께했다.그런데 박사 공부를 한 지 3년이 되던 해에 갑자기 학업을 포기하더니 가정에 충실하기 위해 재벌가 전업주부가 되었다.그 후로 그녀의 차에는 카시트가 설치되었고 시속이 70㎞를 넘은 적이 없었다.타이어가 지면과 마찰하면서 귀를 째는 듯한 소리가 났다. 흰 연기가 피어오르던 그때 강민아의 차가 갑자기 멈춰 섰다.심은호의 페라리가 그
강나현이 비닐봉지를 들고 개조된 오토바이에서 내렸다.딱 붙는 요가 바지를 입은 여자를 본 경비원의 표정이 거의 넋이 나갔다.강나현은 풀어헤친 긴 머리를 흩날리면서 경비원에게 인사를 건넨 후 어린이집으로 들어갔다.미리 반현민의 반을 알아본 그녀는 담임 선생님을 보자마자 웃으며 다가갔다.“안녕하세요. 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주러 왔어요. 듣자 하니 다른 친구들한테 인기가 많다면서요?”담임 선생님이 강나현을 훑어보며 물었다.“혹시 현민이한테 왁스 병 캔디를 준 게 당신이에요?”강나현이 신난 얼굴로 말했다.“네. 제 친구가 만든 건데 최고급 식용 왁스로...”“당신이었군요. 당신 때문에 우리 아들이 질식할 뻔한 거 알아요?”그녀의 뒤에 있던 누군가가 고함을 질렀다. 강나현이 돌아서자마자 찰진 소리와 함께 뺨 한 대를 얻어맞았는데 그 순간 눈앞이 다 캄캄해졌다.“왜 때려요?”“당신 때문에 우리 애가 죽을 뻔했다고요.”남에게 얻어맞고 가만히 있을 강나현이 아니었다. 입가에 묻은 피를 핥더니 몇몇 학부모들에게 달려들어 몸싸움을 벌였다....어린이집 하원 시간, 반우정은 데리러 온 강민아에게 강나현이 얻어맞던 광경을 아주 실감 나게 묘사했다.강나현이 얻어맞는 걸 보고 반현민이 도와주려 하자 반우정이 반현민의 옷깃을 붙잡고 끌고 갔다고 했다.얼굴이 퉁퉁 붓고 멍이 든 강나현은 반현민을 데리고 선생님에게 조퇴를 신청했다.다른 어머니들도 강나현을 알아보고 욕설을 퍼부었다. 그들이 무슨 욕을 하는지 반우정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험한 욕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반우정이 카시트에 앉아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풍경을 바라봤다.“엄마, 우리 집에 가는 거예요?”아이의 반짝이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강민아가 대답했다.“마지막이야.”...“사모님, 아가씨, 드디어 오셨군요.”오소정은 강민아를 보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강민아가 집을 나간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저택의 도우미들은 거의 버티지 못할 지경이었다.그녀가 대답했다.“
그 순간 강민아는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몰아쳐 그녀의 몸을 찢고 분노와 굴욕감을 일으키는 듯했다.그녀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 목걸이를 받았다. 강나현의 눈빛이 반짝이더니 어느새 조롱할 준비를 마쳤다.반하준은 소파에 기대앉아 시선을 돌렸다.‘어쩜 저렇게 개처럼 굴어? 조금 전까지 그렇게 차갑더니 손가락 하나 까딱하니까 바로 꼬리를 흔드는 것 좀 봐.’강민아가 한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들더니 강나현의 목걸이 옆에 가져다 대며 비교했다.“나현아, 네가 한 목걸이 색깔이 더 좋네. 나랑 바꿀래?”만약 가짜라고 대놓고 말한다면 강나현이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온갖 변명을 늘어놓을 게 뻔했다.‘어디 한번 속으로 끙끙 앓아봐.’가느다란 목걸이였지만 강나현의 목덜미를 조이는 듯했다.강나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원래는 강민아가 어리석게 가짜 목걸이를 걸고 밖에 나가서 남들에게 비웃음을 살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진짜와 짝퉁을 단번에 구별해냈다.찔리는 구석이 있던 강나현이 반하준의 안색을 살폈다. 이 화해 선물은 그녀가 멋대로 반하준을 대신해 준비한 것이었다. 일부러 가짜 목걸이를 사서 강민아에게 줬다고 생각하게 해서는 안 되었다.“언니가 원하는 거라면 다 줘야지.”그러고는 쿨하게 목에 걸고 있던 목걸이를 풀었다.그녀가 진짜 목걸이를 건넸지만 강민아는 받지 않고 가짜 목걸이를 천천히 강나현의 목에 걸어주었다.“이게 더 잘 어울려.”강나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어울리긴 개뿔. 이 목걸이는 만 원도 안 되는 짝퉁이고 내 진짜 목걸이는 2백만 원이 넘는다고.’강민아는 그녀가 들고 있는 진짜 목걸이를 받아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언니, 화나면 나한테 풀 거지, 왜 멀쩡한 목걸이를 버리고 그래?”강민아가 강나현의 말을 가로챘다.“저 목걸이가 아까우면 직접 주워서 다시 해, 그럼.”“언니, 하준 씨랑 화해하고 싶은 마음이 없는 거야?”말하면서 목에 건 가짜 목걸이를 벗으려 했다. 조금만 더
강민아가 반하준에게 펜을 건넸다.강나현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쳐다보다가 반하준이 이혼 합의서에 사인한 순간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언니는 너무 약해빠졌어. 난 만약 하준 씨 같은 남편이랑 살면 자다가도 웃었을 텐데.”강민아가 웃을 듯 말 듯한 표정으로 강나현을 쳐다보았다.“이젠 한시도 못 참겠어? 너무 티가 나잖아.”반하준이 사인한 이혼 합의서를 강민아에게 던졌다.“억지 부리는 건 그렇다 쳐도 왜 나현이한테 뭐래 그래?”더는 강민아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반하준은 목소리를 낮추고 반우정에게 말했다.“집에 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아빠한테 전화해.”반우정은 반하준을 쳐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강민아의 손을 꽉 잡았다. 강민아를 쳐다보는 반하준의 눈빛이 차갑기 그지없었다.“정이는 내 딸이라서 언제든지 다시 돌아올 수 있지만 넌... 쉽지 않을 거야.”반하준이 경멸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사실은 강민아에게 수를 잘못 뒀으니 언젠가는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었다.강민아가 웃으며 말했다.“이 집을 떠나서 내 앞에 펼쳐진 길이 낭떠러지일지라도 절대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하준의 두 눈에 알 수 없는 빛이 스쳤다.“4주 후에 법원에서 만나.”이 말을 내뱉고 나니 마음이 다 후련했다. 강민아는 반우정의 손을 잡고 현관으로 걸어가 신발을 신은 후 마지막으로 반현민을 돌아보았다.“민아, 엄마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반현민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냥 빨리 가요. 맨날 아빠 화만 돋우는 엄마가 싫어요.”강민아가 반우정을 데리고 나간 후 강나현이 반하준에게 불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민아 언니는 너무 유난스러워. 여자들은 항상 징징거린다니까. 그중에서도 가정주부가 제일 징징거려. 능력도 없고 하는 일도 없어서 이 집을 나가면 굶어 죽을 수밖에 없을 텐데.”그러고는 반하준에게 속마음을 드러냈다.“난 만약 이혼하게 되면 무조건 빈손으로 나갈 거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더라도 사랑했던 사람한
강나현의 꼬드김에 반현민이 고민하기 시작했다.“근데 이렇게 간단한 걸 만들면 칭찬 스티커 못 받는데...”“형이 인터넷에서 칭찬 스티커 왕창 사 줄게. 그럼 우리 민이 칭찬 스티커 부자 되는 거야.”강나현을 쳐다보는 반현민의 눈빛은 마치 바보를 보는 듯했다.“현이 형, 평소에 짝퉁만 입고 다녀요?”강나현이 바로 부인했다.“절대 안 입지.”반현민이 목소리를 높였다.“형이 사 준 칭찬 스티커를 어린이집에 가져갔다가 친구들한테 놀림받으라는 거예요? 선생님이 주는 스티커야말로 진짜 칭찬 스티커란 말이에요.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 몰라요?”반현민이 씩씩거리면서 화를 냈다.“그건 자신을 속이는 거잖아요.”다섯 살짜리 어린이에게 혼나자 강나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알았어, 알았어. 건담 로봇 만들어주면 되잖아.”‘강민아도 플라스틱 빨대로 건담 로봇을 만들었는데 내가 못 만들 리가 없지.’10분 후 반현민의 처절한 비명과 함께 90%나 완성된 건담 로봇이 강나현의 실수로 와르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반현민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내... 내 건담 로봇 돌려줘요.”“민아,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네 엄마가 만든 건담 로봇이 튼튼하지 않아서 그래.”반현민이 울먹거리며 말했다.“내일 제출해야 한단 말이에요. 엄마한테 갈래요.”강나현이 반현민을 째깍 붙잡았다.“네 엄마는 널 버렸어. 이젠 숙제 안 도와줄 거야.”그러고는 휴대폰을 들고 연락처를 뒤졌다.“다른 사람 불러서 네 엄마가 만든 것보다 훨씬 멋진 건담 로봇을 만들어줄게.”강나현이 아는 이성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반씨 집안에 와서 숙제를 도와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건담 로봇은 무슨. 나와서 술이나 마시자. 아가씨들도 몇 명 불러줄게.”강나현이 솔깃해하는 표정으로 말했다.“약속 지켜. 난 애기 같은 여자애들이 제일 좋더라.”전화를 끊은 그녀는 숙제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오늘 밤에 무슨 일이 있어도 친구들과 밤새 술을 마실 생각이었다.결국 중고 거래
반우정이 지지 않고 맞섰다.“건담 로봇은 엄마가 밤새워서 만들어준 거잖아.”“엄마가 만든 건담 로봇이 튼튼하지 않아서 벌써 망가졌어. 현이 형이 다시 만들어준 새 건담 로봇이 최고야.”반현민의 의기양양한 모습에 반우정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엄마가 밤새워 숙제를 도와주는 모습을 다 봤을 텐데 왜 엄마의 노력을 저렇게 무시하는 거지?’사실 강민아도 그렇게까지 힘들게 밤새워 만들고 싶지 않았다. 가정부에게 야근 수당을 줘서 두 아이의 숙제를 맡긴 적이 있었지만 도우미가 시어머니에게 일러바친 바람에 크게 혼났었다.“우리 집의 후계자를 정성껏 키우라고 고연대를 졸업한 천재 소녀를 며느리로 들인 건데 애들 숙제를 도우미한테 맡기면 어떡해? 민이를 키우는 건 네 평생의 임무야.”도우미는 정해진 시간이 되면 퇴근할 수 있지만 엄마인 그녀는 계속 야근하면서 아이들의 숙제를 끝마쳐야 했다.반우정은 더는 반현민을 쳐다보지 않고 강민아의 손을 잡고 옆으로 지나갔다.반현민이 목을 길게 빼 들고 도로 끝을 애타게 보면서 중얼거렸다.“내 건담 로봇은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반현민은 다른 친구들이 부모와 함께 지나가는 걸 지켜보았다. 몇몇 아이들이 문 앞에서 뭐 하냐고 물을 때마다 웅장하고 멋진 건담 로봇을 기다린다고 자랑스럽게 말했다.이번 숙제는 환경 지킴이 발표회 행사 중 하나였고 선생님이 각 반에서 우수 작품을 선정할 예정이었다.우수 작품을 만든 아이만이 강단에 서서 작품을 소개할 자격이 있었다.어린이집에서는 매번 행사를 크게 열었는데 심지어 서경 방송국 어린이 채널 기자들까지 와서 이 발표회 행사를 촬영할 예정이었다.어린이집에 다닌 후로 반현민은 1등 자리를 놓친 적이 없었다. 그로 인해 무슨 일이든 1등을 하려는 습관이 생겼다.그때 강나현이 개조한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났고 오토바이 소리가 문 앞에 울려 퍼졌다.반현민이 강나현에게 달려갔다. 강나현이 오토바이를 타는 모습이 항상 멋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감상할 겨를이 없었다.“왜 이렇게 늦었어
건담 로봇을 제작한 사람은 강나현에게 상자를 열면 거대한 건담 로봇이 쉽게 무너질 수 있으니 상자를 조심해서 다루고 파손 시 책임은 그녀에게 있다고 주의를 줬다.반현민은 강나현을 굳게 믿었던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주아영이 엄숙하게 말했다.“강나현 씨, 이러시면 안 됩니다. 현민이 작품이 전시 및 심사를 거치지 않고 무대에 오를 자격을 얻는 건 다른 아이들에게 불공평합니다.”하지만 강나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연진숙 어르신이 이 어린이집 이사장인 거 아세요? 민이 아빠가 오늘 민이 발표를 보러 온다는 건 아시고요?”반현민의 두 눈이 반짝였다.“아빠가 여길 온다고요?”자리에 앉아 있던 반우정은 반현민의 말에 심장이 쿵쾅거렸고 두 눈이 다 반짝였다.“일이 바쁜 아빠가 어린이집에 온다고요?”반현민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묻자 강나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내가 오라고 하면 무조건 와.”“현이 형 진짜 대단해요.”강나현을 쳐다보는 반현민의 눈빛에 존경심이 가득했다.강나현이 한 손을 허리에 얹고 가슴을 쫙 펴더니 주아영을 차갑게 쏘아보았다.“제가 말한 대로 해야만 강당에서 진행되는 녹화가 최고의 효과를 낼 수 있을 겁니다. 반씨 가문의 도련님이 1등 하지 못하면 이사회에 어떻게 설명하는지 두고 보겠어요.”주아영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반현민을 건드리는 걸 그녀도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다른 학부모들조차도 반씨 가문에 함부로 하지 못했고 아이더러 항상 반현민에게 양보하라고 했다....강당 안에 학부모들로 가득 차 있었다. 대부분 엄마들이었는데 다들 한껏 치장한 티가 났다.재벌 사모님들은 함께 모여 아이들과 남편 얘기를 하는 것 외에 새로 산 명품이나 경매에서 낙찰받은 골동품에 대한 얘기도 나눴다.“현민이 어머님, 오늘 옷차림이 좀 수수하신데요?”몇몇 재벌 사모님들이 강민아에게 말을 걸면서 그녀를 훑었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이미 강민아의 결혼반지가 사라진 것을 알아챘다.모두 강민아가 아들딸 쌍둥이를 낳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심은호가 말했다. “셋 셀 테니까 알아서 결정해. 안 그러면 아무도 해독제를 못 받아.”그는 웃으며 반하준에게 말했다.“삼.”반하준의 이마엔 푸른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심은호는 순전히 그들을 놀리려고 해독제를 꺼낸 것이었다.“강나현한테 줘!”반하준은 강나현이 또다시 약기운을 빌미로 무모하게 자기 몸에 손대지 않도록 차갑게 말했다.이내 강나현이 소리를 질렀다.“하준 씨한테 줘!”반하준은 신경이 예민하게 지끈거리며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왜 나한테 먹여? 멀쩡한 정신으로 너한테 당하는 꼴을 보고만 있으라고?”반하준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강나현은 어깨가 살짝 떨렸다.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반하준은 욕설을 퍼붓고 난 뒤 서둘러 심은호를 다그쳤다.“나와 강나현을 여기 가둔 주범이 바로 너지? 민아 비서를 통해 민아 이름을 대고 날 여기로 끌어들인 것도 너야.”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는 그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반하준의 뺨에는 굵직한 땀방울이 줄줄 흘러내렸다.그는 우리에 갇힌 맹수처럼 심하게 헐떡이며 심은호를 향해 살벌하게 으르렁거렸다.심은호는 해독제를 바닥에 떨어뜨리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강나현은 곧바로 달려와 해독제를 집어 들고 다시 반하준에게 돌진했다.“하준 씨, 해독제 먹어!”어쨌든 반하준의 두 손은 이미 수갑이 채워진 상태였고, 그만 멀쩡한 상태로 둘이 일을 치르면 나중에 이성을 잃었다는 핑계를 댈 수가 없을 거다.강나현이 반하준의 앞을 가로막았다. 심은호가 문을 열고 나가려 하자 반하준이 강나현을 뿌리치고 가려는데 그녀가 앞을 가로막았다.“하준 씨, 빨리 약 먹어!”“꺼져, 나 나갈 거야!”소리를 지르며 강나현은 반하준의 입에 약을 밀어 넣었다.강나현은 곧바로 반하준의 입을 막았고 반하준은 작은 알약이 입에서 녹는 것을 느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의 목구멍에서 억눌린 분노의 소리가 흘러나왔다.그렇게 그는 심은호가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는 걸 보고만 있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목
강나현이 일어나 그에게 다가오자 반하준은 무언가를 감지하고 급히 돌아서서 강나현을 경계하며 마주 봤다.“그럴 필요 없어.”반하준은 강나현에 대한 경계심을 온몸으로 드러내며 딱딱하고 차갑게 말했다.하지만 강나현은 반하준이 왜 자신을 거절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화 꺼내서 구해줄 사람 부르면 되잖아!”반하준은 강나현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고, 강나현의 눈빛 속 욕망을 진작 꿰뚫어 보고 있었다.강나현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그녀는 지금 약기운을 빌미로 그를 산 채로 잡아먹으려는 속셈이다.휴대폰이 바지 주머니에 있는데 강나현이 주머니에 손을 대는 순간 또 어떤 선 넘는 행동을 할지 몰랐다.반하준은 등을 문에 딱 부이고 말했다.“멈춰! 움직이지 마!”그는 강나현을 위협했다.“나한테서 떨어져!”“하준 씨, 못 참을까 봐 걱정돼?”강나현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차마 감추지 못하며 반하준을 달랬다.“내가 하준 씨 다치게 할까 봐 걱정 안 해도 돼. 계속 이러면 몸이 망가질 거야.”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몸 안에서 비명을 지르던 세포들이 강나현을 통제했고, 그녀는 조바심을 내며 반하준을 향해 돌진했다.“내가 휴대폰 꺼내주겠다는데 왜 이렇게 날 무서워해?”그때 반하준의 등 뒤에서 달칵 소리가 들리더니 고개를 돌리자 방 문이 열렸다.반하준은 눈을 크게 뜨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밖에서 들어오는 밝은 빛이 그의 눈에는 희망처럼 보였다.누군가 그를 구하러 온 건가?방 문이 열리고 옷을 갈아입은 심은호가 밖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심은호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반하준을 훑어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그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셔츠부터 바지까지 모두 엉망이 된 채 흐트러진 반하준의 모습은 처음 본다.반하준은 숨을 헐떡이며 눈앞에 나타난 사람이 심은호라는 것을 발견한 순간 빠져나가기 쉽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그는 지금 자신의 초라한 모습이 심은호에게 보여도 전혀 상관이 없었고 그저 그를 제압한 뒤 도망치고 싶었다.심은호는 그의
강민아의 이름을 듣자마자 반하준은 눈을 크게 떴다.그 이름이 무수히 많은 작은 바늘로 뒤바뀌어 심장을 쿡쿡 쑤시며 온몸에 통증을 느끼게 했다.강나현은 두 손으로 그의 머리를 감쌌다.“하준 씨, 난 당신을 구하고 싶어. 당신도 날 구해줘!”반하준은 발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강나현이 그의 몸을 덮치고 있어 그녀를 떼어낼 수가 없었다.“꺼져!”그는 강나현의 얼굴이 눈앞으로 다가오는 걸 보며 고함을 질렀다.그가 홱 몸을 돌리자 강나현과 함께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아악!”강나현은 고통의 비명을 질렀고, 반하준은 도망치듯 몸을 웅크리고 재빨리 바닥에서 일어났다.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져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반하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너무 아파!”반하준은 몸에 천 조각만 남은 강나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문득 심장이 세차게 쿵쾅거리며 가슴을 뚫고 피부 밖으로 튀어나올 듯 심하게 요동쳤다.반하준의 눈앞에 헛것이 보였다. 강나현이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향해 울부짖을 때 그녀의 얼굴이 강민아의 얼굴과 겹쳐 보였다.순식간에 반하준의 몸속에서 난폭한 세포가 꿈틀거리고 피가 들끓으며 몸이 주체할 수 없이 심하게 떨렸다.“하준 씨!”강나현은 손과 발을 동원해 반하준을 향해 기어갔다.반하준은 제자리에 굳어진 채 눈가가 선홍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콧구멍에서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입술 위로 미세한 땀방울이 맺혔다.강나현은 그가 가만히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바닥에 엎드린 채 손을 뻗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이윽고 반하준의 동공이 훅 움츠러들며 단번에 시야에서 강민아의 흐릿한 얼굴이 사라졌다.강나현의 얼굴이 다시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는 설레던 마음이 사라지고 피가 차갑게 식으며 발로 강나현의 손을 뿌리쳤다.“하준 씨?”강나현의 의아한 눈빛에는 속상함이 내비쳤다.“난 너한테 관심 없으니까 역겹게 굴지 마!”그는 차갑게 이 말을 뱉어내고는 다시 방 문이 있는 방향으로 돌아섰다.강나현은 반하준이 문을 발로 차는 모습을 그저 바
반하준은 크게 헐떡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굵직한 땀방울이 아치형 눈썹을 따라 떨어지며 눈가에 고여 있었다.땀으로 인해 시야가 흐려졌고 창문 유리는 흔들리면서도 깨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그 순간 강나현이 뒤에서 다가와 그를 껴안더니 두 손으로 그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댔다.“하준 씨... 더는 못 참겠어...”그녀가 손을 뻗어 반하준의 옷을 벗기려 하자 반하준은 몸을 비틀며 강나현을 떨쳐내려고 했다.“놔!”그가 소리를 질렀지만 손이 등 뒤로 묶여 있어 강나현은 쉽게 그의 재킷을 벗겨냈다.양복 재킷은 반하준의 손목에 걸렸고, 여자는 그의 앞에서 뱀처럼 몸을 배배 꼬며 두 팔을 그의 목에 걸었다.강나현의 몸엔 남아있는 옷이 별로 없었고 그녀는 발끝으로 서서 남자의 턱에 닿으려 했다.그녀가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반하준의 속이 뒤집히며 말할 수 없는 메스꺼움이 밀려왔다.그는 급히 뒤로 물러서며 여자에게서 떨어지려 했고 강나현은 미꾸라지처럼 그에게 매달린 채 진득하게 붙어있었다.“강나현, 정신 차려!”반하준이 소리쳤지만 강나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흐릿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하준 씨... 나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온몸이 너무 이상해... 내 몸을 주체할 수가 없어...”그녀는 말하며 반하준의 얼굴로 다가가 키스하려 했다.눈을 크게 뜬 반하준은 공포에 질린 채 머리카락 한 올마저 강나현에 대한 거부감을 내비쳤다.그 순간 종아리가 소파에 부딪히며 반하준은 균형을 잃고 온몸이 뒤로 넘어졌다.강나현은 얼굴을 찡그린 채 그의 몸을 짓누르며 말했다.“하준 씨, 나 힘들어! 하준 씨도 힘들지? 나 좀 살려줘. 이러다간 우리 둘 다 미쳐버릴 거야!”“나한테 손대지 마!”반하준은 몸을 비틀었다.“강나현, 참아! 빌어먹을, 나한테서 떨어져!”강나현은 반하준의 어깨에 두 손을 얹었다.“하준 씨, 우린 약에 취했고 해결하지 않으면 괴롭고 고통스럽기만 해. 약효가 절정에 달하면 우리 둘은 미친개가 될 거야. 그때 가서 이성을 잃고 서로를
“나 건드리지 마!”반하준이 소리를 질렀지만 강나현은 더욱 거세게 그의 위로 뛰어올라 그를 제압하려 했다.“난 하준 씨 도와주려는 거야. 나도 벗었는데 왜 안 벗어?”“하지 마, 놓으라고!”그가 저항하면 할수록 강나현은 더욱 흥분했다.“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내가 잡아먹을까 봐 무서워?”강나현은 반하준의 정장 단추를 풀려고 했지만 풀리지 않아 짜증스럽게 소리를 질렀다.“아이참, 움직이지 마. 자꾸 몸을 비틀면 나도 정말 무슨 짓할지 몰라?”반하준은 소름이 끼치고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그는 두 다리를 쭉 뻗어 강나현을 소파에서 차버렸다.“아악!”강나현은 바닥에 쓰러지며 비참한 비명을 질렀다.반하준은 소파에 누운 채 바닥에 굴러떨어진 강나현을 공포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았다.“미쳤어?”자신을 방에 가둔 게 강나현의 짓이 아닌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하지만 생각해 보면 강나현은 그 정도로 똑똑하지 않았다.“하준 씨, 왜 날 발로 차? 날 친구로 생각하긴 해?”강나현이 씩씩거렸지만 반하준은 무시한 채 소파에서 버둥거리며 일어나 문 쪽으로 향했다.등을 돌리고 문에 손을 뻗었지만 방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젠장!”반하준이 거친 욕설을 퍼부었다.자신과 강나현을 함께 가두는 데 앞장선 사람이 강민아라는 생각에 더욱 화가 났다.창가로 걸어갔지만 창문도 잠겨 있었다.하지만 이대로 포기하고 도마 위의 물고기가 되어 도살당할 수는 없었기에 어떻게든 나갈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반하준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디퓨저 기계에 시선이 멈췄다.그는 숨을 참으며 기계로 걸어가 다시 한번 등을 돌려 이어진 전선을 뽑고는 기계를 집어 들어 창문 유리에 던졌다.창문만 깨지면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테니 그도, 강나현도 이성을 잃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그의 손은 수갑에 의해 등 뒤로 꽉 묶여 있었고, 기계를 잡고 있어도 힘을 쓸 수가 없었다.비를 맞은 듯 반하준의 얼굴이 뜨거운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디퓨저 기계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눈을 크게 뜬 강나현은 반하준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지만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 물었다.“하준 씨가 왜 여기 있어?”반하준은 굳어진 얼굴로 침착하려고 애쓰며 조목조목 분석했다.“강민아 비서는 강민아가 따로 만나고 싶어 한다며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어.”강나현이 등 뒤로 향한 그의 손을 보았다.“하준 씨 손은... 왜 수갑이 채워져 있어? 강민아가 그러라고 시켰어?”반하준의 얼굴이 검게 탄 냄비처럼 어둡게 변했다. 짜증이 난 그는 멍청한 자신을 욕할 수밖에 없었다.대체 어쩌다 강민아가 그런 걸 즐긴다고 생각했는지 더 분석하고 싶지도 않았다.강민아에게 한 방 먹은 거다.그 생각에 반하준은 마음이 복잡하고 오장육부에 불길이 타올랐다.주위를 둘러보며 열쇠를 찾던 그가 강나현을 재촉했다.“열쇠 좀 찾아봐!”“그래.”강나현도 수갑을 풀 열쇠를 찾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머릿속으론 지금 반하준과 단둘이 방에 갇혀 있고, 반하준의 손이 묶여 있는 상황에서 약기운을 빌미로 그에게 마음대로 들이댈 생각을 하고 있었다.생각만 해도 강나현은 온몸에 힘이 풀려 허리를 움직이면서 반하준을 향해 등을 돌렸다.반하준도 약에 취해 충동을 느끼기 쉬운 상태라면 충분히 남자를 유혹할 수 있을 것 같았다.강나현은 열쇠를 찾는 척하면서 말했다.“강민아가 우리 둘을 함정에 빠뜨렸어.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우리 둘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길 바라는 거야? 난 친동생인데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냐고!”모든 책임을 강민아에게 돌리고 그녀와 반하준이 밤을 보내면 반하준이 원하지 않아도 그녀가 아닌 강민아를 탓할 거다.애초에 심은호에게 하려던 짓이었는데 강민아가 미리 그들의 계획을 알아차린 것 같았다.강민아는 이참에 반하준과 강나현을 그들이 파놓은 함정에 밀어뜨릴 계획이었다.그녀에게 조롱당했다는 수치심에 강나현은 순식간에 분노가 치솟았다.하지만 곧 반하준과 벌어질 일을 생각하지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며 애써 드러나는 표정을 감추었다.줄곧 반하준과
반하준은 고개를 들어 방 문 쪽을 바라보았다.시야의 가장자리가 뿌옇게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다.눈을 크게 깜빡이자 들어온 여자가 이미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하준 씨.”강나현의 다리에 힘이 풀리더니 온몸이 그의 위로 쓰러졌다.반하준은 그녀를 밀어내려 했지만 손이 뒤로 묶여 움직일 수 없어 몸을 뒤로 빼기만 했다.강나현은 온몸에 뼈가 사라진 듯 그대로 무너져 내리며 반하준의 몸을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강나현, 뭐 하는 거야!”반하준이 고함을 지르자 강나현이 흐릿한 눈동자로 가슴을 움켜쥐더니 고개를 들어 뜨거운 숨을 뱉으며 반하준을 바라보았다.“나 너무 더워. 온몸이 간지러워.”반하준의 눈가엔 싸늘한 감정만 담겨 있었다.“쓸데없는 걸 먹은 건 아니지?”강나현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그냥 술을 조금 마셨을 뿐인데...”반하준이 불쑥 물었다.“술을 누가 줬는데?”“파티에 있던 웨이터가.”강나현이 고개를 들고 코를 훌쩍거렸다.“이 방 냄새 좋다. 향기로워.”강나현의 말을 듣는 순간 반하준은 온몸에 얼음이 섞인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느낌이었다.그는 숨을 꾹 참다가 다시 들이쉬는 순간 강나현이 말한 달콤한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반하준은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젠장!’그는 줄곧 방 안에 있었고 향기가 서서히 퍼졌기에 방금 들어온 강나현처럼 공기 중에 느껴지는 향기를 감지할 수가 없었다.반하준의 시선이 테이블 위에 놓인 와인 잔에 향했다.그도 조금 전 술을 마셨지만 나중에 두 손이 묶이면서 더 이상 잔에 손을 대지 않았다.만약 수갑이 채워지지 않았고 이 방에서 갈증을 느꼈다면 그는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 저 술을 찾았을 거다.반하준은 어렴풋이 직감했지만 마음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부정했다.그는 강나현에게 물었다.“누가 널 들여보냈어?”강나현은 볼이 붉게 물든 채 손을 들어 화끈거리는 이마를 만지작거렸다.“응? 기억이 안 나. 하준 씨, 나 취한 것 같아. 머리가 너무 어지러워!”강나현이 말하며 다시 반하준에
누군가 다가와 반하준의 귀에 속삭였다. “반 대표님, 부사장님이 단둘이 얘기하고 싶다고 하십니다.”그에게 말을 전하러 온 사람은 강민아 비서였다.멈칫하던 반하준이 잠시 주위를 둘러봤지만 강민아는 보이지 않았다.“민아 어디 있어요?”비서가 말했다.“부사장께서는 바깥 사무실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따라오세요.”반하준은 비서를 따라나섰다.조금 전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에게 말도 안 하고 눈길도 안 줬는데 이제 와서 단둘이 만난다고?그 생각에 반하준은 숨이 가빠졌다.참으로 방탕한 여자다. 두 남자를 동시에 만나려 한다니! 심은호 앞에서는 그를 무시하고 또 심은호의 눈을 피해 그와 만나려 하고 있다.남녀관계에서 강민아가 하는 행동은 반하준의 예상을 완전히 넘어섰다.‘방탕하게 살고 싶어서 이혼하자고 한 건가?’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심은호와 윤세현을 양옆에 둔 것도 모자라는가.결혼 생활 도중 그녀가 바람을 피운 적은 없는지 궁금할 정도다.그렇게 생각하며 반하준은 점점 더 짜증이 밀려왔다. 가슴이 무거운 돌덩이에 짓눌린 듯 심장이 아파서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직원이 방 문을 열며 안으로 안내했다.방 문 앞에 서 있던 반하준은 지금 강민아가 자존심을 버리고 용서를 빈다면 심은호, 윤세현과 깨끗하게 헤어지게 할 거라 다짐했다.물론 강민아가 기꺼이 그의 곁으로 돌아와 속죄해야만 용서할 거다.“반 대표님, 안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세요.”사람이 정신이 팔렸을 때 누군가 옆에서 뭐라고 시키면 생각 없이 따르게 된다.방으로 들어간 반하준은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리고 살펴보니 방에 아무도 없었다.‘조금 전 강민아 비서가 뭐라고 했지? 기다리라고?’그를 여기로 불러놓고 기다리게 한다니.강민아가 일부러 못되게 그의 인내심을 시험하는 걸까?하지만 오늘은 강승이 정식으로 인수된 날이라 강민아는 분명 할 일도 많고 만날 사람도 많을 거다.먼저 따로 만나자고 했으니 잠시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반하준은
“아니야!”반하준은 분노에 미칠 지경이다. 심은호가 어떻게 감히 이런 식으로 그를 모욕할 수 있나.‘이런 악랄한 놈!’“민아야, 날 믿어줘.”반하준은 살면서 이렇듯 비굴하게 누군가에게 애원해 본 적이 없었다.처음으로 막다른 궁지에 내몰리자 그는 고립된 채 가만히 서 있었다.강민아 뒤에 서 있던 재벌가 거물들이 서로 눈치를 보며 작게 속삭이고 있었다.“반하준이 다쳤나? 멀쩡해 보이는데. 오히려 심은호가 엉망진창이네.”“누가 봐도 심은호가 괴롭힘을 당했잖아.”“반하준이 심은호 저격한 게 하루 이틀이야? 전에 심은호를 주먹으로 때린 것도 내가 봤어.”“전에 화장실에서 핸드워시를 심은호에게 뿌렸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에도 눈에 거슬려서 와인을 쏟았네.”“강민아를 빼앗아 가려고? 방에 가서 단둘이 상처를 보여주기는 무슨, 누가 봐도 꼬드기는 거지!”“난 심은호 편이야. 심은호는 당당한 남자 친구인데 반하준은 전남편이잖아. 내연남이라도 되고 싶은 건가?”주변 사람들의 수군거림에 반하준의 얼굴이 먹물처럼 어두워졌다.“내연남?” 반하준은 억울한 듯 소리를 질렀다.“당신들 미쳤어? 내가 어떻게 내연남이야!”심은호는 웃으며 말했다.“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이 내연남이긴 하지.”반하준의 얼굴에 먹구름이 드리워졌고, 그는 강민아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궁금해 그녀를 돌아보았다.하지만 강민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심은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살펴보았다.“어디 다쳤어요?”“여기요.”심은호가 얼굴을 가리키자 반하준의 동공이 커지면서 소리를 질렀다.“안 때렸어!”강민아는 손을 뻗어 부드럽고 섬세한 손끝으로 심은호의 뺨을 어루만졌다.심은호는 사람 좋아하는 사모예드처럼 고개를 갸웃한 채 강민아의 손길을 느끼듯 천사 같은 미소를 지었다.강민아는 그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다.반하준은 자신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번 소리쳤다.“강민아, 나 진짜 안 때렸어!”강민아는 심은호에게 말했다.“가서 옷 갈아입어요. 복도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