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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바람에 갇힌 거짓말

모래바람에 갇힌 거짓말

작가:  삼쓰리완결
언어: Kor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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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심도윤이 약속대로 청혼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를 마중 나온 심도윤의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아야, 미안해.”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인사 발령... 사실은 내가 뒤에서 손을 써서 일부러 널 X국 프로젝트로 보낸 거야. 유라와 같이 있으려고...” “그때 유라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때까지. 거센 모래바람과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하루 16시간씩 뼈 빠지게 일했던 5년. 그 모든 시간이 처음부터 심도윤이 치밀하게 파놓은 덫이었다. “넌 성격도 불같고 막무가내잖아. 유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어.” “용서를 받자고 털어놓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알고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구는 뻔뻔한 말투였다. 심도윤이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도윤, 원래라면 우리는 좋게 끝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네가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찬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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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챕터
제1화
심도윤의 차는 내가 탄 택시 뒤를 줄곧 따라오더니 몇 번이나 헤드라이트를 깜빡였다.기사가 백미러로 나를 힐끗 봤다.“아가씨, 뒤에 저 BMW가 계속 따라오는데 아는 사람이에요?”나는 입가에 묻은 피를 닦았다.“아니요.”“그럼 떼어 드릴까요?”“괜찮아요. 저 사람도 제가 어디로 가는지 알아요.”아파트는 5년 전 그대로였다. 엘리베이터 안의 광고판만 바뀌어 있었다.캐리어를 끌고 현관 앞에 도착해서 열쇠를 꺼냈다.열쇠를 꽂으려던 순간, 안에서 문이 열렸다.임유라가 실크 잠옷 차림으로 서 있었다. 품에는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가 안겨 있었다.나를 본 임유라는 잠깐 놀란 표정이더니 금세 웃었다.“돌아오셨네요.”아이는 임유라의 목을 끌어안은 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엄마, 이 아줌마 누구예요?”“예전에 여기 살던 아줌마야.”임유라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나를 바라봤다.“들어와서 잠깐 앉을래요? 도윤 씨한테 오늘 돌아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요.”나는 임유라의 뒤로 보이는 거실을 바라봤다.벽에는 두 사람의 결혼사진이 걸려 있었고, 소파도 새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베란다에는 아이 옷이 널려 있었다.“여기...”“제 집이에요.”임유라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내 말을 끊었다.“5년 전부터요. 도윤 씨가 이 집을 넘겨받자마자 저한테 들어와 살라고 했어요.”캐리어를 쥔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지아 씨가 X국으로 떠나면 결혼하자고 하더라고요.”아이가 몸을 비틀며 내려가겠다고 보챘다.임유라가 아이를 내려놓자, 아이는 곧장 거실의 장난감 상자로 달려갔다.임유라는 문틀에 기댄 채 나를 위아래로 훑어봤다.“살이 많이 빠졌네요. X국 생활이 많이 힘들었죠?”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꽉 쥐었다.“도윤 씨는 이따 들어와요?”“모르겠는데요.”임유라가 눈썹을 살짝 치켜세웠다.“도윤 씨는 왜 찾으세요? 돈이라도 받으려고요? 아니면 따지러 온 거예요?”“아무것도 안 바라요.”“그럼 왜 돌아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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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이수정은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에서 내 인사 기록을 열었다.“지아 씨가 X국에서 보낸 5년은 본인이 자원해서 파견을 신청했고, 열악한 환경에서도 맡은 업무를 무사히 마친 걸로 기록되어 있어요.”“맞아요.”“그런데...”이수정이 목소리를 낮췄다.“지아 씨가 주도했던 세 가지 프로젝트 있잖아요. 성과 보고서에는 전부 임유라 씨가 책임자로 올라가 있어요.”순간 말문이 막혔다.“그럴 리가요. 그건 제가...”“지아 씨가 직접 서명해서 동의한 거예요.”이수정이 파일 하나를 열어서 내 쪽으로 돌려놓았다.“보세요. 5년 전에 작성된 합의서예요. 프로젝트 성과를 팀 전체가 공유하는 데 동의한다고 지아 씨가 서명했어요.”분명 내 서명이었다.하지만 이런 서류에 서명한 기억은 전혀 없었다.“그때 워낙 급하게 떠났잖아요. 서류 대부분은 대표님이 대신 처리해 주셨고요.”이수정은 뭔가 더 말하려다가 그만뒀다.“지아 씨, 어떤 일들은... 됐어요. 일단 자리로 가세요.”5년 만에 돌아온 내 자리는 사무실 구석, 프린터 바로 옆이었다.책상 위에는 잡동사니가 잔뜩 쌓여 있었다.동료들은 내 옆을 지나가면서 못 본 척하거나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박나미만 다가와서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지아 씨, 왜 돌아왔어요?”“프로젝트가 끝났어요.”“그럼...”박나미는 임유라의 사무실 쪽을 한번 바라봤다.“조심해요. 유라 씨가 지금 팀장이잖아요. 게다가 대표님이 남편이기도 하고요.”나는 가방을 내려놓았다.“알아요.”오후가 되자 핸드폰이 울렸다.심도윤이었다.받지 않았다.하지만 곧 다시 전화가 걸려 왔고, 연달아 세 번이나 울렸다.네 번째 전화가 왔을 때야 통화 버튼을 눌렀다.[지아야, 우리 얘기 좀 하자.]“할 말 없어.”[유라가 둘째를 임신했는데 상태가 좀 안 좋아. 의사가 스트레스 받으면 안 된대.]심도윤의 목소리에는 피곤한 기색이 묻어났다.[그래서 말인데... 당분간 유라 눈앞에만 안 나타나 주면 안 될까?]그때 핸드폰 너머로 아이의 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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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나는 샴페인 잔을 든 채 말했다.“축하해요.”“고마워요.”임유라는 배를 쓰다듬었다.“병원에서 딸이랬어요. 도윤 씨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딸은 엄마를 닮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러다 나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췄다.“그거 알아요? 도윤 씨가 그러더라고요. 그때 지아 씨를 X국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한참 더 고민했을 거라고요.”“무슨 뜻이에요?”“말 그대로예요.”임유라가 환하게 웃었다.“그때 지아 씨가 떠나 줘서 정말 다행이었다고요. 지아 씨가 그렇게 희생해 준 덕분에 저희가 지금 이렇게 사는 거잖아요.”내 손이 떨렸다.잔에 담긴 샴페인이 몇 방울 튀면서 원피스 위로 떨어졌다.“임유라 씨.”나는 임유라를 똑바로 바라봤다.“첫째를 임신하셨을 때, 저는 X국 현장에서 40도가 넘는 고열로 죽을 뻔했다는 거 알아요?”임유라가 눈을 깜빡였다.“그래서요?”“그날 도윤 씨한테 17번이나 전화했어요. 한 번도 안 받았고요.”“그날은 저희 기념일이었어요.”임유라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었다.“도윤 씨는 저랑 웨딩드레스 고르고 있었고요.”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임유라가 덧붙였다.“한정판이었어요. 허리에 진주 자수가 들어간 거.”그 드레스는 5년 전 내가 입어 봤던 드레스였다.그때 심도윤은 내게 말했다.“우리 결혼할 때 이걸로 하자.”그때 그가 말한 ‘우리’에 나는 처음부터 없었던 모양이다.나는 잔을 내려놓고 돌아섰다.언제부터 거기 있었는지, 심도윤이 바로 뒤에 서 있었다.복잡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심도윤이 입을 열었다.“지아야...”“내 이름 부르지 마. 역겨워.”연회장을 나서자 비가 내리고 있었다.처마 아래에 서서 빗속에 흐릿해진 도시를 바라봤다.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심도윤이었다.손에 들고 있던 우산을 내밀었다.“써. 감기 걸려.”“너랑 무슨 상관이야?”심도윤은 잠시 말이 없었다.“나 미워하는 거 알아.”“안 미워해.”나는 담담하게 말했다.“그냥 너 같은 인간 때문에 내 인생 5년을 날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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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그 사진이랑 대화 내용, 너 말고 또 누가 가지고 있어?”심도윤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지아야, 진정해!”“내가 어떻게 진정해!”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우리 아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절대 가만 안 둬!”그때 병실 문이 열렸다.의사가 밖으로 나오며 마스크를 벗었다.“죄송합니다. 최선을 다했지만...”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사흘 뒤, 아버지의 장례식이 치러졌다.엄마는 내가 안으로 들어오는 것조차 막았다.“가.”문 너머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네 아빠도 너를 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나는 문 앞에 무릎을 꿇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꼼짝하지 않았다.오후가 되자 심도윤과 임유라가 찾아왔다.두 사람은 조화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조화 리본에는 아버지의 명복을 빈다는 문구와 함께 심도윤과 임유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나를 발견한 임유라가 조용히 말했다.“삼가 고인의 명복을 빌어요.”나는 심도윤을 노려봤다.심도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임유라가 남자의 소매를 가볍게 잡아당겼다.“이제 가자.”두 사람이 돌아간 뒤에야 엄마가 문을 열었다.엄마는 나를 원망 가득한 눈으로 바라봤다.“이제 만족해? 네 아빠가 죽었어. 이제 됐어?”나는 무릎을 꿇은 채 안으로 들어가서 엄마의 다리를 붙잡았다.“엄마...”“손대지 마!”엄마가 나를 밀쳐 냈다.“난 너 같은 딸 없어!”나는 힘없이 바닥에 엎어졌다. 차가운 타일에 이마를 댄 채 한참을 움직이지 못했다.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일주일째 되던 날,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서지아 씨, 오늘부로 해고됐습니다.]인사팀 직원의 목소리는 차가웠다.[사규를 심각하게 위반하셨기 때문입니다. X국 프로젝트 근무 기간 동안 여러 남성 동료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는 내용이 접수됐습니다.]나는 곧장 회사로 달려가서 인사팀 사무실로 들어갔다.“증거가 뭐죠?”인사팀장이 사진 한 뭉치를 내 앞에 던졌다.X국 현장에서 남자 동료들과 일하던 사진들이었다.평범한 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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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3개월 뒤, 나는 몰라볼 정도로 야위어 있었다.N시의 습한 공기가 끈적하게 피부에 달라붙었다.내가 사는 원룸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6층이었다.계단을 오를 때마다 벽을 짚고 한참씩 숨을 골라야 했다.문 뒤에 걸린 거울 속에는 헝클어진 짧은 머리에 광대는 툭 튀어나온 데다 눈 밑까지 푹 꺼진 여자가 서 있었다.내 모습인데도 낯설었다.집주인 아주머니는 좋은 사람이었다.내가 매일 집에서 번역 일을 하는 걸 보고 가끔 국을 챙겨 주곤 했다.“아가씨,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나는 감사하다고 인사한 뒤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수면제는 한 알에서 두 알로 늘었고, 나중에는 약 없이는 몇 시간조차 제대로 자지 못했다.잠이 들면 늘 X국의 거센 바람을 맞는 꿈을 꿨다.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베개가 흠뻑 젖어 있었다.그날 오후에도 계약서 번역을 하나 끝낸 뒤 지쳐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핸드폰이 울렸다.예전 직장 동료가 올린 SNS 게시물이었다.심도윤과 임유라가 뒤늦게 결혼식을 올렸다는 내용이었다.사진은 아홉 장이었다.가운데 사진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심도윤과 하얀 웨딩드레스 차림의 임유라가 교회 앞에서 입을 맞추고 있었다.게시물에는 짧은 글이 적혀 있었다.[두 분 너무 잘 어울려요. 축하합니다.]아래에는 수많은 ‘좋아요’와 댓글이 달려 있었다.[드디어 결혼식 올렸네요! 5년이나 기다렸잖아요!][유라 씨 너무 예뻐요! 대표님도 멋있고요!][결혼식 너무 예쁘다. 부러워요!]손가락으로 화면을 내리다 댓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서지아 그 재수 없는 여자가 떠나서 다행이지. 안 그랬으면 얼마나 찝찝했겠어.]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서랍을 열자 하얀 약병이 그대로 있었다.나는 수면제를 여러 알 꺼내서 물과 함께 삼켰다.이번에는 좀 오래 잘 수 있었으면 했다.다시 눈을 뜨지 않아도 상관없었다.정신을 차렸을 때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천장이었다.소독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손가락을 움직여 보니 손등에 주삿바늘이 꽂혀 있었다.“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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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휠체어에 앉은 여자는 무릎에 담요를 덮은 채 책을 읽고 있었다.마른 얼굴은 수척했지만 인상은 온화했다.그 앞을 지나치려는데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퇴원하시나 봐요?”나는 걸음을 멈췄다.“네.”여자가 살짝 웃었다.“전 여기서 반년째 입원 중이에요. 처음 보는 얼굴이라서요.”여자가 읽던 책을 덮었다.표지에는 ‘살아간다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유민지예요. 예전에는 피아노를 가르쳤어요.”“저는 서지아예요.”나도 모르게 시선이 비어 있는 오른쪽 바짓단으로 향했지만 차마 묻지는 못했다.유민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을 이었다.“2년 전에 교통사고가 나서 다리를 잃었어요. 남편은 다른 여자랑 떠났고, 일도 그만두게 됐고요.”마치 남의 일을 말하듯 담담한 목소리였다.“정말 힘들 때는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어요.”유민지가 손에 든 책을 가리켰다.“그러다 이 책을 읽었어요. 주인공은 가족을 다 잃고도 살아가잖아요.” “그걸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런 사람도 어떻게든 살아가는데, 나라고 못 살 이유가 있나 싶었어요.”유민지가 옆자리를 가리켰다.“잠깐 앉으실래요?”나는 옆에 앉았다.창문으로 들어온 햇빛이 유민지의 무릎을 덮은 담요 위로 내려앉았다.“지아 씨는요?”유민지가 물었다.“무슨 일이 있었어요?”나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유민지도 더는 묻지 않았다.그러다 겨우 입을 열었다.“5년 동안 속았어요.”잠시 말을 고른 뒤 덧붙였다.“일도, 사랑도, 가족도 다 잃었어요. 아빠도 저 때문에 돌아가셨고요.”유민지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그 사람들은 이제 결혼해서 잘 살고 있어요.”헛웃음이 나왔다.“저는 다 잃고 여기까지 도망쳐 왔는데.”유민지가 고개를 끄덕였다.“많이 힘드셨겠네요.”괜찮아질 거라거나 힘내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대신 물었다.“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어요?”“모르겠어요.”나는 한참 뒤에야 대답했다.“그냥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가서 사라지고 싶어요.”“사라지는 건 어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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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상자를 열자 친자확인 검사 결과지가 들어 있었다.검사 기관은 제일대학병원.검사 날짜는 5년 전이었다.검사 대상에는 심도윤과 임유라의 아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결론은 친자 관계 불성립.DNA가 일치하지 않아서 친부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몇 번을 다시 읽어도 결과는 같았다.5년 전 심도윤이 나 대신 임유라를 선택하게 만든 그 아이는 처음부터 심도윤의 아들이 아니었다.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넘겼다.검사 담당자 이름은 김상철.낯익은 이름이었다.제일대학병원 유전의학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퇴직한 의사였다.예전 인맥을 통해서 김상철의 주소를 알아냈다.문을 열어 준 김상철은 나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서지아 씨, 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김상철이 문을 닫으려고 했다.나는 발로 문틈을 막았다.“김 선생님, 전 진실만 알고 싶어요.”김상철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나를 안으로 들였다.내가 소파에 앉자 김상철은 물을 가지러 갔다.컵에 물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김 선생님, 누군가 친자확인 결과를 조작해 달라고 부탁했죠?”김상철은 물컵을 든 채 내 눈을 피했다.“네.”나는 가져온 검사 결과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이게 조작되기 전의 원본이 맞죠? 실제 검사 결과는 심도윤 씨가 친부가 아니었다는 거고요.”김상철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당시에는 친자 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결과를 바꿔서 넘긴 거죠?”결국 김상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구 부탁이었어요?”“임유라 씨 어머니였습니다.”김상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딸이 남자한테 속았다고 했어요. 아이 아빠가 심도윤 씨가 아니지만, 심도윤 씨 집안에서는 자기 핏줄이 아니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대요.”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서 제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도와주신 거예요?”“그게...”김상철이 얼굴을 감쌌다.“아내가 아파서 급하게 돈이 필요했습니다...”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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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메일 내역에는 심도윤이 직접 답장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임유라 씨 의견대로 수정할 것. 성과는 공동으로 처리.]“공동이라고?”헛웃음이 나왔다.조민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지아 씨, 저희도 정말 억울했어요. 죽어라 고생해서 만든 건 지아 씨인데, 결국 성과는 유라 씨가 다 가져갔잖아요.”나는 메일 내용을 빠짐없이 복사했다.밖으로 나오자 조민호가 뒤따라 나왔다.“지아 씨, 조심해요. 심씨 집안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있는 사람들이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조사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사실이 계속 나왔다.임유라는 둘째를 임신한 뒤에도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고 있었다.X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아내가 임유라가 다니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그녀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임유라 씨가 임신했을 때 자주 찾아오던 남자가 있었어요. 안경을 썼는데 인상이 꽤 점잖았어요.” “둘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도 있고요. 심씨 집안에서 돈을 받으면 같이 떠나자고 하더라고요.”그녀가 흐릿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주차장 CCTV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남자는 옆모습만 찍혀 있었지만 누군지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나도 아는 사람이었다.SY그룹의 최대 경쟁사인 HS그룹의 영업팀장 최건우였다.나는 원룸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하나씩 펼쳐 놓았다.학력 위조, 프로젝트 성과 가로채기, 조작된 친자확인 결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장기 파견, 그리고 불륜까지.책상 위에 펼쳐진 증거마다 내가 빼앗긴 지난 5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증거를 모두 정리해서 여러 부를 복사했다.한 부는 익명으로 SY그룹 이사회에 보냈다.한 부는 관련 기관에 보냈고, 나머지는 주요 언론사 세 곳에 보냈다.자료를 발송한 날, 나는 우체국 앞에 서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모든 걸 끝냈는데도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통쾌하지도 않았고 후련하지도 않았다.그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일주일 뒤, 내가 보낸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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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박나미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요즘 회사에서 다들 지아 씨 얘기만 해요.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지아 씨였고, 임유라는 그동안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인 거라고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유라는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박나미에게 들은 바로는, 임유라와 심도윤은 집에서도 매일같이 싸운다고 했다.임유라는 집 안의 물건까지 집어던지며 심도윤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다 도윤 씨 때문이야! 도윤 씨가 날 망친 거라고! 도윤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됐겠어!”친자확인 결과가 조작됐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심도윤도 자신이 5년 동안 속았다는 걸 알게 됐다.첫째 아이는 애초에 심도윤의 아들이 아니었다.거기에 임유라가 최건우와 몰래 만남을 이어온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며칠 뒤, 심도윤의 어머니가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다.문밖에서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우리가 너한테 잘못한 거 알아. 도윤이도 속은 거야. 걔도 지난 5년 동안 많이 힘들었어.”그녀는 문밖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제발 우리 가족 좀 그만 놔줘. 도윤이 아버지도 충격으로 뇌졸중이 와서 아직 병원에 있어...”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나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언론은 사건을 계속 파고들었다.기자들은 내가 X국에서 일했던 5년간의 기록까지 찾아냈다.그동안 나는 팀을 이끌고 국가 차원의 핵심 기술 과제 세 건을 해결했고, 국제 특허 두 건을 취득했다.하지만 그 성과는 모두 임유라의 이름으로 넘어가 있었다.관련 보도가 나오자, 여론은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사람들은 임유라와 심도윤의 신상까지 파헤쳐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온라인에 퍼뜨렸다.[둘이 아주 천생연분이네. 평생 같이 살아라.][서지아 씨 응원합니다. 꼭 끝까지 법적으로 대응하세요!][SY그룹도 그냥 망해 버려라!]얼마 전까지 나를 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두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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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심도윤은 결국 무너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탑승구로 향했다.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심도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미안해. 사랑해.]메시지를 바라보다, 심도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진실을 털어놓던 순간이 떠올랐다.일부러 나를 X국으로 보냈다고 했던 그날.나는 심도윤의 연락처를 삭제했다.사랑이라니.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X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새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내가 이끄는 팀은 큰 상까지 받았다.시상식에서 사회자가 나를 소개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5년 동안 현장을 지키며 핵심 기술 개발에 기여한 젊은 연구원입니다.”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그 순간 알 것 같았다.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였다.그 사이 SY그룹은 결국 파산했다.심재윤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실험실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동료가 내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별생각 없어요.”그게 전부였다.이제 그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든 내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임유라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최건우는 임유라를 버렸다.이미 이용할 만큼 이용했다는 말까지 남겼다고 했다.임유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살며 시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예전처럼 화려하게 살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사람들은 자업자득이라며 떠들어댔다.나는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엄마도 마침내 내게 연락해 왔다.뉴스를 보고서야 내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지아야, 엄마가 미안해. 너를 믿었어야 했는데...]“괜찮아요.”그렇게 대답했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걸.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가 놓쳐 버린 시간도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그동안 X국에서 함께 일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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