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5년간의 해외 파견을 마치고 돌아오던 날, 나는 공항을 나서면서 심도윤이 약속대로 청혼해 주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나를 마중 나온 심도윤의 얼굴은 무심하기 짝이 없었다. “지아야, 미안해.” 내가 당황할 틈도 없이 그가 곧장 말을 이었다. “그 인사 발령... 사실은 내가 뒤에서 손을 써서 일부러 널 X국 프로젝트로 보낸 거야. 유라와 같이 있으려고...” “그때 유라가 임신해서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 순간 말문이 턱 막혀서 한동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번질 때까지. 거센 모래바람과 숨이 막히는 더위 속에서 하루 16시간씩 뼈 빠지게 일했던 5년. 그 모든 시간이 처음부터 심도윤이 치밀하게 파놓은 덫이었다. “넌 성격도 불같고 막무가내잖아. 유라가 상처받을까 봐 걱정됐어.” “용서를 받자고 털어놓는 게 아니야. 그냥 네가 알고 차분하게 받아들였으면 해서 말하는 거야. 괜히 일 크게 만들지 말고.” 마치 자신도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구는 뻔뻔한 말투였다. 심도윤이 내게 손을 뻗었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눈가가 뜨거워졌지만, 기가 차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심도윤, 원래라면 우리는 좋게 끝낼 수도 있었어. 그런데 네가 스스로 그 기회를 걷어찬 거야.”
더 보기심도윤은 결국 무너지면서 울음을 터뜨렸다.나는 그대로 돌아서서 탑승구로 향했다.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비행기가 이륙할 무렵, 심도윤에게서 메시지가 왔다.[미안해. 사랑해.]메시지를 바라보다, 심도윤이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내게 진실을 털어놓던 순간이 떠올랐다.일부러 나를 X국으로 보냈다고 했던 그날.나는 심도윤의 연락처를 삭제했다.사랑이라니.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X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새 프로젝트는 순조롭게 진행됐고, 내가 이끄는 팀은 큰 상까지 받았다.시상식에서 사회자가 나를 소개했다.“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5년 동안 현장을 지키며 핵심 기술 개발에 기여한 젊은 연구원입니다.”객석에서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그 순간 알 것 같았다.내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여기였다.그 사이 SY그룹은 결국 파산했다.심재윤은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끝내 의식을 되찾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실험실에서 테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동료가 내게 기분이 어떠냐고 물었다.“별생각 없어요.”그게 전부였다.이제 그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든 내 삶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임유라의 상황도 좋지 않았다.최건우는 임유라를 버렸다.이미 이용할 만큼 이용했다는 말까지 남겼다고 했다.임유라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살며 시장에서 아르바이트까지 하고 있다고 했다.예전처럼 화려하게 살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사람들은 자업자득이라며 떠들어댔다.나는 그저 씁쓸할 뿐이었다.엄마도 마침내 내게 연락해 왔다.뉴스를 보고서야 내가 누명을 썼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전화기 너머로 엄마가 울면서 말했다.[지아야, 엄마가 미안해. 너를 믿었어야 했는데...]“괜찮아요.”그렇게 대답했지만 우리 둘 다 알고 있었다.이미 되돌릴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걸.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고, 우리가 놓쳐 버린 시간도 다시 되찾을 수 없었다.그동안 X국에서 함께 일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박나미가 전화기 너머로 말했다.[요즘 회사에서 다들 지아 씨 얘기만 해요. 진짜 실력이 있는 사람은 지아 씨였고, 임유라는 그동안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인 거라고요.]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임유라는 결국 완전히 무너졌다.박나미에게 들은 바로는, 임유라와 심도윤은 집에서도 매일같이 싸운다고 했다.임유라는 집 안의 물건까지 집어던지며 심도윤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했다.“다 도윤 씨 때문이야! 도윤 씨가 날 망친 거라고! 도윤 씨가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내가 왜 이 지경까지 됐겠어!”친자확인 결과가 조작됐다는 사실까지 드러나면서, 심도윤도 자신이 5년 동안 속았다는 걸 알게 됐다.첫째 아이는 애초에 심도윤의 아들이 아니었다.거기에 임유라가 최건우와 몰래 만남을 이어온 사실까지 알려지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며칠 뒤, 심도윤의 어머니가 내가 사는 곳까지 찾아왔다.문밖에서 우는 목소리가 들렸다.“지아야, 우리가 너한테 잘못한 거 알아. 도윤이도 속은 거야. 걔도 지난 5년 동안 많이 힘들었어.”그녀는 문밖에 무릎을 꿇고 애원했다.“제발 우리 가족 좀 그만 놔줘. 도윤이 아버지도 충격으로 뇌졸중이 와서 아직 병원에 있어...”순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나는 끝내 문을 열지 않았다.언론은 사건을 계속 파고들었다.기자들은 내가 X국에서 일했던 5년간의 기록까지 찾아냈다.그동안 나는 팀을 이끌고 국가 차원의 핵심 기술 과제 세 건을 해결했고, 국제 특허 두 건을 취득했다.하지만 그 성과는 모두 임유라의 이름으로 넘어가 있었다.관련 보도가 나오자, 여론은 완전히 내 쪽으로 돌아섰다.사람들은 임유라와 심도윤의 신상까지 파헤쳐서 주소와 전화번호를 온라인에 퍼뜨렸다.[둘이 아주 천생연분이네. 평생 같이 살아라.][서지아 씨 응원합니다. 꼭 끝까지 법적으로 대응하세요!][SY그룹도 그냥 망해 버려라!]얼마 전까지 나를 욕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반대로 두 사람
메일 내역에는 심도윤이 직접 답장한 기록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임유라 씨 의견대로 수정할 것. 성과는 공동으로 처리.]“공동이라고?”헛웃음이 나왔다.조민호가 씁쓸한 얼굴로 말했다.“지아 씨, 저희도 정말 억울했어요. 죽어라 고생해서 만든 건 지아 씨인데, 결국 성과는 유라 씨가 다 가져갔잖아요.”나는 메일 내용을 빠짐없이 복사했다.밖으로 나오자 조민호가 뒤따라 나왔다.“지아 씨, 조심해요. 심씨 집안은 생각보다 훨씬 힘이 있는 사람들이에요.”나는 고개를 끄덕였다.조사하면 할수록 기가 막힌 사실이 계속 나왔다.임유라는 둘째를 임신한 뒤에도 다른 남자와 몰래 만나고 있었다.X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의 아내가 임유라가 다니던 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었다.그녀는 주변을 한번 살핀 뒤 목소리를 낮췄다.“임유라 씨가 임신했을 때 자주 찾아오던 남자가 있었어요. 안경을 썼는데 인상이 꽤 점잖았어요.” “둘이 얘기하는 걸 우연히 들은 적도 있고요. 심씨 집안에서 돈을 받으면 같이 떠나자고 하더라고요.”그녀가 흐릿한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주차장 CCTV 화면을 캡처한 사진이었다.남자는 옆모습만 찍혀 있었지만 누군지 알아보기에는 충분했다.나도 아는 사람이었다.SY그룹의 최대 경쟁사인 HS그룹의 영업팀장 최건우였다.나는 원룸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모은 자료를 하나씩 펼쳐 놓았다.학력 위조, 프로젝트 성과 가로채기, 조작된 친자확인 결과,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진행된 장기 파견, 그리고 불륜까지.책상 위에 펼쳐진 증거마다 내가 빼앗긴 지난 5년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증거를 모두 정리해서 여러 부를 복사했다.한 부는 익명으로 SY그룹 이사회에 보냈다.한 부는 관련 기관에 보냈고, 나머지는 주요 언론사 세 곳에 보냈다.자료를 발송한 날, 나는 우체국 앞에 서서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모든 걸 끝냈는데도 별다른 감정은 들지 않았다.통쾌하지도 않았고 후련하지도 않았다.그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일주일 뒤, 내가 보낸 자
상자를 열자 친자확인 검사 결과지가 들어 있었다.검사 기관은 제일대학병원.검사 날짜는 5년 전이었다.검사 대상에는 심도윤과 임유라의 아들 이름이 적혀 있었다.결론은 친자 관계 불성립.DNA가 일치하지 않아서 친부가 아니라는 내용이었다.몇 번을 다시 읽어도 결과는 같았다.5년 전 심도윤이 나 대신 임유라를 선택하게 만든 그 아이는 처음부터 심도윤의 아들이 아니었다.떨리는 손으로 마지막 장을 넘겼다.검사 담당자 이름은 김상철.낯익은 이름이었다.제일대학병원 유전의학과에서 오랫동안 근무하다 퇴직한 의사였다.예전 인맥을 통해서 김상철의 주소를 알아냈다.문을 열어 준 김상철은 나를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서지아 씨, 전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김상철이 문을 닫으려고 했다.나는 발로 문틈을 막았다.“김 선생님, 전 진실만 알고 싶어요.”김상철은 한숨을 내쉬더니 결국 나를 안으로 들였다.내가 소파에 앉자 김상철은 물을 가지러 갔다.컵에 물을 따르는 그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김 선생님, 누군가 친자확인 결과를 조작해 달라고 부탁했죠?”김상철은 물컵을 든 채 내 눈을 피했다.“네.”나는 가져온 검사 결과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이게 조작되기 전의 원본이 맞죠? 실제 검사 결과는 심도윤 씨가 친부가 아니었다는 거고요.”김상철은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그런데 당시에는 친자 관계가 성립하는 것처럼 결과를 바꿔서 넘긴 거죠?”결국 김상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구 부탁이었어요?”“임유라 씨 어머니였습니다.”김상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딸이 남자한테 속았다고 했어요. 아이 아빠가 심도윤 씨가 아니지만, 심도윤 씨 집안에서는 자기 핏줄이 아니면 아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대요.” “어떻게든 아이를 지키고 싶다면서 제발 도와 달라고 했습니다.”“그래서 도와주신 거예요?”“그게...”김상철이 얼굴을 감쌌다.“아내가 아파서 급하게 돈이 필요했습니다...”나는 핸드폰을 꺼내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김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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