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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작가: 깃나래
오후에 나는 관리사무소에 다녀왔다.

이 집 출입 시스템에서 내 지문을 삭제했다.

관리소 직원은 정 많은 중년 여성이었다. 내 손끝이 인식기 위에서 움직이는 걸 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모님, 멀쩡한 지문은 왜 지우세요? 앞으로 드나들 때 불편하실 텐데요.”

“이제 필요 없어서요.”

나는 살짝 웃었다.

집으로 돌아와 창고에서 큰 종이상자 두 개를 끌어냈다.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 집은 꽤 넓은 평수였다. 옆으로 강이 내려다보이는 60평대 고층 아파트였고, 심건하가 한 번에 값을 치른 집이었다.

심건하는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함께 견뎌 준 나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했다.

나는 이곳이 우리 둘의 집이라고 믿었다.

이제야 알았다. 내 물건은 놀랄 만큼 적었다.

드레스룸에서 내 옷은 달랑 옷장 두 칸을 차지했다.

나머지는 모두 심건하의 계절별 유니폼, 정장, 코트, 운동복이었다.

나는 평소 자주 입던 옷을 접어 캐리어에 넣었다.

심건하가 사 주었지만 내 취향과는 전혀 맞지 않던 값비싼 이브닝드레스들은 손도 대지 않고 그대로 걸어 두었다.

침대 옆 협탁에는 항공사에서 제작한 비행기 모형 하나가 놓여 있었다.

심건하가 처음 장거리 노선을 마치고 돌아오며 사 온 기념품이었다.

모형을 들어 올리자 아래에 사진 한 장이 눌려 있었다.

4년 전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그때 심건하는 막 기장으로 승진해 세상 모든 걸 다 가진 사람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사진을 조심히 빼내 옆 쓰레기통에 던졌다.

비행기 모형은 제자리에 돌려놓았다.

저녁 무렵, 핸드폰이 짧게 떨렸다.

심건하의 메시지였다.

[착륙했어. 호텔 도착.]

평소라면 나도 바로 답장을 보냈을 것이다. 몸이 피곤하지는 않은지, 호텔 침대는 괜찮은지 그의 안부를 물었을 것이다.

오늘 내가 보낸 답은 한 글자였다.

[응.]

30분쯤 지나 또 다른 메시지가 왔다.

[프랑크푸르트 쪽은 상당히 추워.]

[아, 맞다. 면세품 뭐 살 거 있어?]

나는 세면대 위에 늘어져 있던 화장품 병들을 파우치에 쓸어 담는 중이었다.

[없어.]

[평소엔 그 무슨 브랜드 세럼 사 달라고 노래를 부르더니.]

나는 거울 속 내 모습을 보았다.

[됐어. 이제 안 쓸래.]

그 뒤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심건하는 내가 예민해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챙기느라 바빴을지도...

그리고 때마침 나는 진한나의 SNS를 봤다.

첫 게시물은 10분 전에 올라온 것이었다.

라인강 근처의 밤 풍경 사진이었다.

옆에는 따뜻한 향신 와인 한 잔이 놓여 있었고, 컵 가장자리에 남자의 손이 걸쳐져 있었다.

그 손 중지에는 아주 옅은 흉터가 있었다.

심건하가 과일을 깎다가 다친 흉터였다.

그때 나는 마음이 아파 일주일 내내 약을 갈아서 붙여 주었다.

진한나의 글은 이랬다.

[프랑크푸르트 바람은 차가운데, 따뜻한 와인은 참 포근하다. 누군가 챙겨 주는 비행은 언제나 최고의 여정.]

아래에는 같은 회사 동료들의 ‘좋아요’가 몇 개 달려 있었다.

누군가 댓글을 남겼다.

[우리 기장님이 쏘신 거죠? 언니 복도 많으셔라.]

진한나는 수줍게 웃는 이모티콘을 달았다.

나는 평온하게 SNS 화면을 닫았다. 가슴 한가운데를 찌르던 날카로운 통증은 이미 무뎌져 있었다.

8년 동안 나는 눈먼 사람처럼, 심건하가 그려 준 허상을 붙잡고 허기를 달랬다.

심건하는 세심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었다. 낭만을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만 자기가 가진 모든 세심함과 낭만을 다른 사람에게 썼을 뿐이었다.

며칠 뒤, 심건하의 비행기가 도착했다.

저녁 7시, 심건하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손에는 정교하게 포장된 선물 상자가 들려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심건하가 신발을 벗는 모습을 보았다.

“왜 밥 안 했어?”

심건하는 텅 빈 식탁을 흘깃 보았다.

“나는 먼저 먹었어.”

심건하의 미간이 더 깊게 접혔다.

“나 열 시간 넘게 비행하고 왔는데, 집에 와서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먹어?”

“배달시키면 되잖아.”

심건하는 손에 든 선물 상자를 거칠게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너 요 며칠 대체 무슨 심통을 이렇게 부려? 애도 아니고.”

“심통 아니야.”

“심통 아닌데 메시지 하나 안 보내? 뭐 사다 줄지 물어도 대답도 없고?”

나는 선물 상자를 보았다.

“그거, 나 주려고 산 거야?”

심건하는 잠깐 굳었다. 시선이 살짝 흔들렸다.

“이건... 다른 사람이 부탁한 거야. 네 건 내일 백화점 가서 따로 사 줄게.”

‘부탁?’

“진한나 씨가 부탁한 거야?”

나는 심건하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심건하의 안색이 굳어졌다.

“내 핸드폰 봤어?”

“진한나 씨의 SNS는 전체 공개던데?”

심건하는 안도한 듯 숨을 풀었다. 태도는 다시 뻔뻔해졌다.

“그 사람이 날 도와줘서 오는 김에 선물 하나 챙겨 준 게 뭐 어때서. 너 이렇게까지 속 좁게 굴어야겠어?”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는데?”

“그렇게 나한테 계속 따지는 게 그 자체가 맘에 안 든다는 뜻이잖아!”

심건하는 짜증스럽게 넥타이를 풀었다.

“그냥 동료야, 일하면서 매일 얼굴 보는 사이인데, 좀 챙겨 주는 게 뭐가 문제야?”

“아주 잘 챙겨 주더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말싸움하고 싶지 않았다.

“한소이!”

심건하가 뒤에서 나를 불렀다.

“나는 하루 종일 일하다가 지쳐서 돌아왔는데, 넌 좀 철 좀 들면 안 돼? 집에 와서까지 네 눈치 보게 하지 말고.”

‘철? 8년을 철들어 있었잖아!’

나는 눈물을 삼킨 채 뒤돌아보지 않고 손님방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여기서 잘게. 당신도 푹 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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