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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수 없는 남자와 다시 만났습니다

Author: 유월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3 06:43:36

“없었으면 이 자리에서 제안하지 않았겠죠.”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남자가 웃었다.

아주 희미하게.

“좋습니다.”

HR 측 담당자들의 얼굴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첫 시즌 육 개월 독점 판매. 온라인 채널 유지.”

남자는 아윤을 바라봤다.

“대신 판매 실적에 따라 두 번째 시즌의 조건은 다시 협상하죠.”

아윤은 잠시 그를 살폈다.

생각보다 빠른 결정이었다.

“좋습니다.”

그녀가 손을 내밀었다.

남자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사람의 손이 맞닿았다.

순간.

아윤의 손끝에 묘한 감각이 스쳤다.

단단하고 따뜻한 손.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악수한 손을 내려다봤다.

남자의 시선이 그 움직임을 따라갔다.

“도아윤 대표.”

그가 이름을 불렀다.

이상하게 귀에 남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네. 저도요.”

남자가 손을 놓았다.

아윤은 손바닥에 남아 있는 온기를 애써 무시했다.

⸻

회의가 끝났을 때는 오후 여섯 시를 넘기고 있었다.

아윤은 HR 본사를 나오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하아…….”

성공적이었다.

계약서 최종 검토만 남았지만 가장 까다로웠던 독점 조건을 원하는 방향으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기분이 개운하지 않았다.

마지막에 들어왔던 남자 때문이었다.

컨덜튼.

어디서 많이 들어본 성이었다.

“컨덜튼…….”

아윤은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영국에서 드문 성일 수도 있지만,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때 휴대전화가 울렸다.

올리비아였다.

“응, 비아.”

[끝났어?]

“응. 이제 나왔어.”

[그럼 우리 집 오는 거지?]

“갈게. 대신 조금 늦을 수도 있어.”

[괜찮아! 엄마한테 말해둘게.]

“로빈이는?”

[벌써 현관에 앉아 있어.]

아윤이 웃었다.

“그럼 서둘러야겠네.”

[조심해서 와!]

“알았어.”

통화를 마친 아윤은 길가로 걸어갔다.

택시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마침 길 건너편에 작은 주얼리 쇼윈도가 보였다.

아윤의 걸음이 멈췄다.

새로 진열된 목걸이였다.

중앙에 작은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고, 주변에는 가느다란 금속 장식이 물결처럼 이어져 있었다.

“……예쁘네.”

직업병이었다.

예쁜 주얼리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아윤은 쇼윈도를 조금 더 자세히 보려고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 순간.

뒤쪽에서 자동차 경적이 울렸다.

빠앙―!

“……!”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검은 차 한 대가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윤은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발뒤꿈치가 보도 턱에 걸렸다.

“아!”

몸이 기울었다.

철퍼덕!

아윤은 그대로 보도 위에 주저앉았다.

차는 몇 미터 앞에서 급하게 멈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미쳤어.”

아윤은 숨을 고르며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다행히 심하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오른손이 욱신거렸다.

“아, 진짜…….”

내일 샘플 작업도 해야 하는데.

그때 차 문이 열렸다.

뚜벅.

구두 소리가 가까워졌다.

“괜찮습니까?”

낮고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윤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굳었다.

조금 전 회의실에서 만난 남자였다.

컨덜튼.

그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사님?”

그도 아윤을 알아본 듯했다.

눈썹이 조금 올라갔다.

“도 대표?”

아윤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하필.

하필이면.

오늘 처음 계약을 논의한 상대 앞에서 이런 꼴이라니.

“안녕하세요.”

자신도 모르게 인사가 나왔다.

남자의 시선이 아윤의 손목으로 내려갔다.

“일어날 수 있습니까?”

“네. 괜찮아요.”

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윽.”

손을 짚는 순간 통증이 올라왔다.

남자가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손 주세요.”

“괜찮은데요.”

“괜찮은 사람이 그렇게 앉아 있습니까?”

“…….”

아윤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말투 참.

그녀는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남자가 손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생각보다 쉽게 몸이 들렸다.

아윤은 균형을 잡으려고 무심코 그의 팔을 붙잡았다.

단단한 팔뚝이었다.

고개를 들자 남자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

순간 이상하게 숨이 멈췄다.

검은 눈동자.

반듯한 코.

선명한 입술.

그리고 은은하게 느껴지는 나무 향.

어디선가 맡아본 것 같은 향이었다.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다쳤습니까?”

“아…….”

아윤이 정신을 차렸다.

“손목을 조금 삔 것 같아요.”

“병원 가죠.”

“아니에요. 이 정도는—”

“손이 중요한 직업 아닙니까?”

아윤의 말이 멈췄다.

남자가 그녀의 손목을 바라봤다.

“그 손으로 디자인도 하고 세공도 할 텐데.”

“…….”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아까 회의실에서는 재수 없을 만큼 냉정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하게 걱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윤은 괜히 시선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병원 갈게요.”

“지금.”

“네?”

“지금 가죠.”

“아니, 저 약속이 있어서요.”

남자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손목보다 중요한 약속입니까?”

“친구 집에 가기로 했거든요.”

“친구?”

“네.”

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가 기다리고 있어서.”

남자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짧게 숨을 내쉬었다.

“고집이 세군요.”

아윤의 눈썹이 올라갔다.

“……네?”

“다친 것도 확인하지 않고 약속부터 생각하니까.”

아윤의 입꼬리가 굳었다.

“이사님.”

“네.”

“걱정해 주시는 건 감사한데요.”

“…….”

“원래 말을 그렇게 하세요?”

남자가 잠시 멈췄다.

“어떻게요?”

“꼭 혼내는 것처럼요.”

그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혼나는 기분이었습니까?”

“조금요.”

“그럼 잘못한 건 아나 보군요.”

“…….”

아윤의 입이 벌어졌다.

이 남자.

정말.

끝까지 사람 속을 뒤집는다.

“알겠습니다.”

아윤은 아주 예쁘게 웃었다.

“다음부터는 꼭 조심할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이사님도요.”

“저도요?”

“네.”

아윤은 살짝 고개를 기울였다.

“사람이 넘어졌으면 괜찮냐고 먼저 물어보는 게 예의거든요.”

남자가 그녀를 바라봤다.

“물었는데요.”

“…….”

아윤의 입이 다물어졌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물었다.

첫마디가 괜찮습니까였던 것 같았다.

‘아.’

망했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도 대표님.”

“……네.”

“기억력이 좋지는 않으신 모양입니다.”

아윤은 이를 악물었다.

“아주 좋은 편인데요.”

“그렇습니까?”

“네.”

“그런데 방금 들은 말도 잊습니까?”

“…….”

아윤은 속으로 열까지 셌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참자.

저 사람은 거래처다.

그것도 아주 중요한 거래처.

절대 여기서 싸우면 안 된다.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아윤이 고개를 숙였다.

“병원은요?”

“갈 거예요.”

“확실히?”

“네.”

“어디로.”

“…….”

아윤이 그를 바라봤다.

“이사님.”

“네.”

“혹시 제 보호자세요?”

남자가 멈췄다.

그리고.

웃었다.

소리 없이 입꼬리만 올라가는 웃음이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아윤은 순간 말을 잃었다.

‘뭐야.’

웃으니까.

괜히 더 잘생겼잖아.

남자가 한 발 가까워졌다.

“보호자가 필요합니까?”

“……네?”

“필요하면 해드릴 수도 있고.”

아윤의 심장이 이상하게 한번 뛰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됐거든요.”

“아쉽군요.”

“뭐가요?”

“거절당해서.”

“…….”

저 사람은 정말 정체가 뭘까.

아윤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이번에는 정말 가려고 했다.

그런데.

“도아윤.”

이름이 불렸다.

아윤이 멈췄다.

방금까지는 분명 도 대표라고 부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름을 불렀다.

아윤은 천천히 돌아봤다.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과 다른 눈빛이었다.

장난기도.

업무적인 냉정함도 없었다.

그저 이상하리만큼 오래.

아윤의 얼굴을 바라봤다.

“……왜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채 몇 초가 흘렀다.

아윤은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마치.

아주 오래전에도.

누군가 이렇게 자신을 바라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기억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가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아닙니다.”

“…….”

“조심히 가세요.”

아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사님도요.”

그녀가 돌아섰다.

몇 걸음 걷고 나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하아…….”

정말 이상한 남자였다.

잘생겼고.

능력도 있어 보이고.

그런데 성격은 재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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