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올리비아의 어머니는 아윤에게 단순한 친구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영국에 온 뒤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주얼리 디자인을 권한 사람이었다.
자신에게 그런 재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을 때였다. [그리고 로빈도.] “로빈이?” [응. 윤 누나 언제 오냐고 아침부터 난리야.] 아윤의 얼굴이 풀렸다. “우리 로빈이 보고 싶다.” [봐! 나보다 로빈이 좋지?] “당연하지.” [도아윤!] 아윤이 웃었다. “알았어. 일찍 끝나면 갈게.” [약속!] “일찍 끝나면.” [그게 약속이지.] “네 마음대로 해.” [사랑해, 유니!] “응, 나도.” 전화를 끊은 아윤은 잠시 화면을 바라봤다. 사랑한다는 말. 예전에는 그 말을 듣는 것조차 어려웠다. 누군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하면 이유부터 의심했고, 영원히 곁에 있겠다고 하면 언제 떠날 생각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 올리비아는 달랐다. 그녀는 사랑한다고 말하고는 정말로 곁에 있었다. 대단한 약속을 하지도 않았다. 그저 아윤이 힘든 날이면 찾아와 함께 밥을 먹었고, 아무 말도 하기 싫은 날에는 옆에 앉아 영화를 봤다. 그런 시간을 지나며 아윤은 깨달았다. 사랑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는 것을. 다만 여전히. 남녀 사이의 사랑만큼은 믿을 수 없었다. ⸻ 오후 세 시 오십 분. 아윤은 HR 그룹 본사 로비에 도착했다. 천장이 높고 유리 벽면이 넓게 펼쳐진 건물이었다. 바닥에는 대리석이 깔려 있었고, 직원들은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면서도 누구 하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아윤은 안내 데스크에서 방문증을 받은 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확인했다. 오늘은 짙은 네이비색 원피스에 아이보리 재킷을 입었다. 장식은 최대한 줄이고 자신이 디자인한 작은 다이아몬드 귀걸이와 가느다란 팔찌만 착용했다. 과하게 꾸미지 않았지만 허술해 보이지도 않았다. 아윤은 그 균형을 좋아했다. “도아윤 대표님.” 담당 직원이 다가왔다.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제가 조금 일찍 왔어요.” “회의실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아윤은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높은 층으로 올라갈수록 런던의 풍경이 발아래 펼쳐졌다. 유리창 너머로 템스강이 보였고, 멀리 오래된 건물들의 지붕이 이어졌다. 아윤은 순간적으로 그 풍경에 시선을 빼앗겼다. 런던. 이 도시에 처음 왔을 때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영어로 말하는 것조차 자신이 없었고, 버스 노선을 잘못 확인해 엉뚱한 곳에 내리는 일도 많았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에서 새롭게 시작하면 과거를 잊을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과거는 장소를 바꾼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곳에서 새로운 삶을 만들었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회의실 문이 열렸다. “이쪽입니다.” 아윤이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테이블. 커다란 스크린. 정갈하게 놓인 서류. 먼저 와 있던 담당자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도 대표님,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아윤은 익숙하게 미소 지으며 악수를 나눴다. 그리고 준비해 온 자료를 펼쳤다. 회의는 순조롭게 시작됐다. HR 측은 DW의 디자인 경쟁력과 젊은 고객층의 반응을 높이 평가했다. 아윤은 브랜드가 추구하는 방향과 향후 컬렉션 계획을 설명했고, 실무 담당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는 마지막이었다. “다만 저희 쪽에서 한 가지 제안드리고 싶은 부분이 있습니다.” HR 측 이사가 화면을 넘겼다. “입점 첫해에는 영국 내 독점 판매권을 확보하는 방향으로 계약을 진행하고 싶습니다.” 아윤의 표정이 달라졌다. “영국 내 전체요?” “네.” “온라인 판매도 포함인가요?” “그렇습니다.” “기간은요?” “최소 삼 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윤은 자료를 내려놓았다. “어렵겠네요.” 회의실이 조용해졌다. 이사가 눈썹을 올렸다. “조건을 조금 더 검토해 보실 수는 없을까요?” “검토는 할 수 있죠. 하지만 지금 제시하신 조건으로는 계약할 생각이 없습니다.” “도 대표님, 저희가 제공하는 유통망의 규모를 생각하시면—” “알고 있습니다.” 아윤이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그래서 오늘 이 자리에 온 거고요. 다만 유통망을 확대하기 위해 브랜드의 운영권까지 제한받을 생각은 없어요.” 그녀는 화면 속 계약 조건을 가리켰다. “저희는 독립 디자이너 브랜드예요. 협업을 통해 성장하고 싶지만, 특정 기업의 부속 브랜드가 되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사는 잠시 아윤을 바라봤다. “젊은 브랜드로서는 상당히 좋은 제안입니다.” “그럴 수도 있겠죠.” 아윤이 웃었다. “하지만 좋은 제안인지는 제안받는 사람이 판단해야 하는 거니까요.” 회의실에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아윤은 서류를 정리했다. “대신 첫 시즌 한정 컬렉션의 오프라인 독점 판매권은 검토할 수 있습니다. 기간은 육 개월. 기존 온라인 채널은 유지하고요.” “육 개월은 너무 짧습니다.” “그럼 서로의 실적을 확인한 뒤 연장 여부를 논의하면 되겠네요.” 그녀는 상대를 똑바로 바라봤다. “저는 오래 함께할 파트너를 찾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처음부터 한쪽이 무리하게 양보하는 계약은 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였다. 달칵. 회의실 뒤쪽 문이 열렸다. 누군가 들어왔다. 아윤은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잠시 멈췄다. 키가 큰 남자였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 느슨하지 않게 매인 넥타이. 단정하게 정리한 검은 머리카락과 날카로운 눈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그는 특별히 서두르지 않았지만 이상하게 시선을 끌었다. 회의실에 있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컨덜튼 이사님.” 아윤의 눈썹이 미세하게 올라갔다. 컨덜튼? 남자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계속하시죠.” 목소리가 낮았다. 부드럽지는 않았지만 귀에 남는 목소리였다. 이사가 급하게 상황을 설명했다. “DW 측에서 독점 조건에 대한 조정을 요청하셨습니다.” 남자의 시선이 아윤에게 향했다. “어떤 조정입니까?” 아윤은 잠시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삼 년 독점 계약 대신 첫 시즌 한정 컬렉션의 육 개월 독점 판매를 제안했습니다.” “이유는요?” “브랜드 운영의 자율성을 유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남자가 서류를 넘겼다. “HR 측의 투자가 들어가는데 자율성만 요구하겠다는 겁니까?” 그 말에 아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자율성만 요구한 적은 없습니다.” “그럼요?” “저희가 제공하는 디자인과 브랜드 가치 역시 계약의 일부라는 뜻입니다.” 남자는 서류에서 눈을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잠깐. 이상한 침묵이 흘렀다. 아윤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가늘게 떴다. 어디선가 본 얼굴 같았다. 정확히는. 처음 보는 얼굴인데 묘하게 익숙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지웠다. 이렇게 눈에 띄게 잘생긴 사람을 어디선가 만났다면 기억하지 못할 리 없었다. 남자가 입을 열었다. “브랜드 가치라.” 그는 펜을 내려놓았다. “그렇다면 그 가치를 숫자로도 증명할 수 있겠군요.” 아윤은 미소를 지었다. “물론입니다.” 그녀는 준비해 온 별도의 자료를 열었다. “지난 세 시즌의 재구매율과 온라인 직접 판매 비중입니다. 고객 한 명당 평균 구매 금액은 전년 대비 증가했고, 신제품 출시 후 사십오 일 안에 발생하는 재구매 비율도 상승했습니다.” 남자는 화면을 바라봤다. 아윤은 말을 이어갔다. “DW 고객들이 저희를 선택하는 이유는 단순히 보석이 예뻐서가 아닙니다. 디자인과 함께 전달되는 이야기에 공감하기 때문이죠. 그 고객들과 직접 소통하는 채널을 포기한다면 장기적으로 브랜드의 경쟁력은 약해질 겁니다.” “독점권을 제한하지 않고도 매출을 높일 수 있다는 겁니까?” “네.” “자신 있습니까?” 아윤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아윤은 레이를 바라봤다.레이도 그녀를 보고 있었다.“왜요?”“아무것도 아니에요.”그녀가 웃었다.“그냥 조금 신기해서.”“뭐가요?”“그날 비가 안 왔으면 우리 못 만났을 수도 있잖아요.”레이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그렇겠죠.”“그럼 이렇게 다시 만나는 일도 없었을 테고.”“…….”레이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그래서.”그가 천천히 말했다.“나는 그날 비가 와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아윤의 심장이 내려앉았다.“…….”“아윤 씨를 만났으니까.”그 말이 끝나는 순간.톡.빗방울 하나가 아윤의 뺨에 떨어졌다.그녀가 고개를 들었다.이어서 두 번째.세 번째.비가 내리기 시작했다.“어?”아윤이 손을 뻗었다.“진짜 오네.”레이가 주변을 둘러봤다.가까운 곳에 건물의 차양이 보였다.“이쪽으로.”그가 아윤의 손을 잡았다.“……!”아윤은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봤다.레이도 곧바로 멈췄다.“괜찮습니까?”아윤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봤다.큰 손이 자신의 손가락을 감싸고 있었다.따뜻했다.삼 년 전.비 오는 거리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워 주던 손처럼.아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네.”그제야 레이가 그녀와 함께 걸었다.두 사람은 건물 차양 아래로 들어갔다.빗줄기가 점점 굵어졌다.레이는 휴대전화로 운전기사에게 연락한 뒤 아윤을 돌아봤다.“조금만 기다리죠.”“네.”아윤은 젖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그 순간 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머물렀다.“잠깐.”“네?”그가 손을 들었다.아윤은 움직이지 않았다.레이의 손끝이 그녀의 관자놀이 가까이 다가왔다.젖은 머리카락 한 가닥이 뺨에 붙어 있었다.그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떼어 귀 뒤로 넘겨주었다.손끝이 피부를 스쳤다.아윤의 숨이 멈췄다.“…….”레이도 잠시 움직이지 않았다.눈이 마주쳤다.차양 아래는 생각보다 좁았다.한 걸음만 움직이면 서로의 어깨가 닿을 거리였다.레이의 시선이 아윤의 눈에 머물렀다.그리고 아주 천천히.입술로 내
그런데 안전벨트를 당기는 순간 손목이 욱신거렸다. “아.”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레이는 바로 알아차렸다. “아직 아픕니까?” “조금요.” 레이가 몸을 숙였다. “제가 하죠.” “아니, 혼자 할 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가 멈췄다. 아윤을 바라봤다. “해도 됩니까?” 아윤은 잠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제야 레이가 상체를 숙였다. 순간 아윤의 숨이 멈췄다. 가까웠다. 예상보다 훨씬. 그의 어깨가 아윤의 시야를 가렸고, 코트 안쪽으로 부드러운 향이 스쳤다. 레이는 안전벨트를 당겨 그녀의 어깨와 허리 앞으로 넘겼다. 손끝이 닿지 않도록 조심하는 움직임이 오히려 아윤을 더 의식하게 만들었다. 딸깍. 벨트가 채워졌다. 하지만 레이는 바로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아윤의 목걸이가 안전벨트 아래에 걸려 있었다. “잠깐.” 그가 펜던트를 조심스럽게 빼냈다. 손가락이 쇄골 아래의 체인에 아주 잠깐 닿았다. 아윤의 어깨가 움찔했다. 레이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가까운 거리에서 마주쳤다. “불편합니까?” 아윤은 입술을 달싹였다. 불편한 건 아니었다. 다만. 심장이 너무 빨리 뛰고 있었다. “……아니요.” 레이의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 그러더니 아주 작게 웃었다. “그럼 다행이고.”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아윤은 차 문이 닫힐 때까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이 사람.’ 정말 위험했다. ⸻ 레이가 데려간 곳은 템스강이 내려다보이는 작은 프랑스식 레스토랑이었다. 유명한 호텔이나 화려한 고급 식당일 거라고 예상했던 아윤은 조금 놀랐다. 레스토랑은 생각보다 아담했고, 테이블마다 놓인 생화와 부드러운 조명이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창밖으로는 강물이 천천히 흘렀다. “여기 자주 오세요?” 아윤이 물었다. “가끔.”
[보고 싶어서.] 도아윤은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다섯 글자를 벌써 열두 번째 읽고 있었다. 처음 메시지를 받았을 때는 잘못 본 줄 알았다. 두 번째 읽었을 때는 상대방이 잘못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에는 혹시 자신이 모르는 영국식 농담인가 싶었고, 네 번째부터는 슬슬 화가 났다. 아니, 정확히는 화가 나는 척하고 싶었다. “이 남자는 대체 뭐야.” 아윤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끌어안았다. 목욕을 마친 뒤라 머리카락은 아직 조금 젖어 있었고, 무릎에는 가벼운 담요가 덮여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반쯤 마신 캐모마일 차와 오늘 병원에서 받은 처방전, 그리고 수정 중인 주얼리 스케치북이 놓여 있었다. 평소였다면 이미 노트북을 열고 내일 일정을 정리했을 시간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문제의 메시지 때문이었다. [내일 점심시간 괜찮습니까?] [무슨 일인데요?] [식사.] [왜요?] [보고 싶어서.] 다시 읽어도 이상했다. 업무적인 이유도 없고, 계약 조건을 추가로 검토하자는 말도 아니었다. 그저 보고 싶어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아윤은 휴대전화를 내려놓았다가 다시 집어 들었다. “……너무 직접적이잖아.” 그것이 문제였다. 레이 컨덜튼은 지금까지 아윤이 만난 남자들과 달랐다.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알 수 없게 굴다가도,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너무도 간단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걱정했다는 말도 그랬다. 보고 싶다는 말도. 무엇보다 그 말을 하는 사람이 레이라는 사실이 문제였다. 낮에 작업대 앞에서 벌어졌던 일이 떠올랐다. 뒤로 넘어지려는 자신을 붙잡아 주던 팔, 허리를 받치던 단단한 손바닥, 가까워진 얼굴과 입술에 잠시 머물렀던 시선까지. 그때 레이는 분명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상대방을 확인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아니야.’ 아윤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 착각하지 마.’ 삼 년 전의 일이 있은 뒤, 그
레이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천천히 웃었다. “생각보다.” “…….” “잘 넘어지네요.” 아윤이 고개를 들었다. “……네?” “어제도 그렇고.” “…….” “오늘도 그렇고.” 아윤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사님.” “네.” “지금 저 놀리세요?” 레이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조금.” 아윤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재수 없어!’ 방금 잠깐이라도 두근거렸던 자신이 너무 억울했다. ⸻ 레이가 돌아간 뒤에도 아윤은 한동안 작업대 앞을 떠나지 못했다. 완성된 수정 스케치가 눈앞에 있었다. 레이가 그린 선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꽤 훌륭했다. 그녀가 설명한 곡선의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했고, 수정 방향도 제대로 반영했다. 문제는. 그걸 그리던 사람이었다. 아윤은 스케치북을 덮었다. “……하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조금 전 그의 가슴에 닿았던 손이었다. 기억이 너무 선명했다. 단단했던 감촉. 허리를 받치던 손. 가까이서 바라본 눈. 그리고 잠깐 입술에 머물렀던 시선. “미쳤어.” 아윤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짜 왜 이래.” 그때 문이 열렸다. “대표님?” 엘리스였다. 아윤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네!” 엘리스가 멈칫했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안 놀랐는데요.” “얼굴이 빨개요.” “더워서요.” 엘리스가 주변을 둘러봤다. 에어컨이 켜져 있었다. “……지금 실내 온도 스물한 도인데요.” “제가 더위를 많이 타요.” “대표님은 추위를 많이 타시잖아요.” “…….” 아윤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말했다. “엘리스.” “네.” “오늘 회의 자료는요?” 엘리스가 피식 웃었다. “말 돌리시는군요.” “업무 얘기예요.” “알겠습니다.” 엘리스는 자료를 내밀었다. 그러다가 문득 스케치북을 보았다. “어? 이거 수정하셨네요?” “응.” “손목 괜찮으세요?” “레이 이사님이 그려주셨어요.” 엘리스의 손이 멈췄
“그런데 말하지 못한 사랑이라.” 아윤이 웃었다. “사랑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사람도 있잖아요.” 그녀는 첫 번째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누군가는 고백하기 전의 마음을 담아 선물하고, 누군가는 오래 함께한 사람에게 말없이 전하고 싶을 수도 있겠죠.” “말보다 물건이 더 솔직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윤은 잠시 생각했다. “그럴 때도 있다고 생각해요.” 레이는 그녀의 설명을 들으며 목걸이의 구조를 살폈다. “그런데 여기.” 그가 중앙의 보석을 가리켰다. “두 곡선이 끝까지 연결되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직 닿지 않은 마음이니까요.” “그렇군요.” 레이는 잠시 생각하다 말했다. “그럼 이건 완성되지 않은 사랑입니까?” 아윤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녀는 목걸이를 다시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사랑이 아닌 건 아니니까요.” 레이의 눈이 아윤에게 향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네.” “고백하지 않으면 상대방은 모를 텐데.” “그러니까 이걸 선물하는 거죠.” 아윤이 웃었다. “말하지 못한 마음을 대신 전해 달라고.” 레이는 한동안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이야기네요.” 아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감사합니다.” “다만.” 그 말에 아윤의 미소가 멈췄다. ‘역시.’ 레이는 태블릿을 들었다. “현재 디자인만 보면 그 의도가 충분히 드러나지는 않습니다.” “…….” “컨셉 설명을 읽기 전에는 평범한 커플 목걸이와 구별하기 어렵군요.” 아윤은 순간적으로 반박하고 싶었다. 하지만 입을 다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문제 때문에 수정 작업을 진행 중이었다. “맞아요.” 레이의 눈썹이 올라갔다. “인정하는군요.” “틀린 말은 아니니까요.” 아윤은 새로운 스케치를 꺼냈다. “그래서 이렇게 수정하고 있어요.” 레이가
도아윤은 그날 아침, 자신의 손목보다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남자였다. 그것도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에서 가장 재수 없는 남자라고 생각했던 사람. 레이 컨덜튼. “……왜.” 아윤은 욕실 거울 앞에 서서 미간을 찌푸렸다. “왜 자꾸 생각나는데.” 세면대 옆에는 하얀 손수건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삼 년 동안 가지고 있었던 물건이지만 어젯밤 이후로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손수건 모서리에 새겨진 R.C.라는 글자가 새삼스럽게 눈에 들어왔고, 그 글자를 볼 때마다 레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검은 머리카락. 짙은 눈동자. 사람을 내려다보며 여유롭게 웃던 입술. 그리고 이상하게 다정했던 목소리. ‘오래됐다고 안 아픈 건 아니죠.’ 그 말을 떠올리자 아윤은 손수건을 집어 서랍 안에 넣었다. 달칵. “그만.” 아무도 없는 욕실에 대고 선언했다. “도아윤, 정신 차려.” 레이가 잘생긴 건 사실이었다. 계약 협상을 할 때도 그의 얼굴이 눈에 띄었다는 사실까지 부정할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잘생긴 남자가 많았고, 그중에는 성격까지 좋은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굳이 자신과 만날 때마다 말싸움을 벌이는 남자에게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었다. 아윤은 스스로의 결론에 만족하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거울을 다시 봤다. “……그래도 웃을 때는 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입을 다물었다. “아, 진짜!” 그녀는 머리를 대충 묶고 욕실을 나왔다. 오늘은 바빴다. 새 컬렉션 디자인 수정도 끝내야 했고, HR과 논의한 입점 계약의 세부 조건도 검토해야 했다. 무엇보다 손목을 확인하러 병원에 가야 했다. 레이가 걱정해서가 아니었다. 절대로. 자신의 손은 소중한 업무 자산이었으니까. 그런 이유였다. ⸻ “다행히 골절은 없습니다. 가벼운 염좌로 보이네요.” 의사의 설명을 들은 아윤은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럼 작업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