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날 저녁, 은하의 집 주방에서는 오늘도 음식을 만드는 소리로 가득했다.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는 우주.은하는 말없이 식탁에 앉아,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냉장고 문이 자꾸만 열리고, 정신없이 바쁜 손길이 자꾸만 오갔다.“오빠. 양이 너무 많지 않아…?”“일주일이나 비우는데. 충분히 해 놓고 가야 마음이 편하지.”“배달 시켜 먹어도 돼.”“안 돼. 잘 챙겨 먹어야 돼.”우주가 계란을 풀며 덧붙였다.“약 말이야, 가벼운 증상일 땐 되도록 먹지 말고.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꼭 챙겨 다니고. 알겠지?”“나, 오빠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알아. 이건 그냥 습관 같은 거야. 그래야 오빠 마음이 놓이니까.”은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창문 밖, 거리는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혼자 있는 일주일이라는 시간. 정말 혼자서 잘 버틸 수 있을까?긴 시간 혼자 남는 상황은 처음이었지만, 은하는 우주와는 다르게 별 걱정이 되지 않았다. “맞다. 새벽 출발이라, 내일은 학교 혼자 가야 하는데, 괜찮겠어?”“걱정 마시고 잘 다녀 오세요.”***다음날 새벽, 은하는 희미한 새벽빛이 비치는 천장을 바라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벌써 가는 거구나….’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들. 옷감이 스치는 소리, 서랍이 조심스레 열리는 소리까지.우주는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 했지만, 은하는 원래 잠이 깊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깊이 잠드는 것 자체가 어려웠다.이불을 걷어내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푸른 여명빛이 내려앉은 창밖.잠시 머뭇거리다, 결국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선 은하의 눈에 커피를 내리고 있는 우주의 모습이 보였다.테이블 아래에 놓인 묵직한 캐리어. 위에 올려진 서류와 여권까지.“미안, 시끄러워서 깼구나?”“괜찮아.”“좀 더 자지. 아직 일러.”“언제 출발해?”“이제 나가려고.”가슴 한 켠이 묘하게 서늘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지
홀로 교실로 돌아가던 중, 복도에서 한 학생과 어깨가 세게 부딪힌 이현. 차가운 눈빛이 그 학생을 매섭게도 노려보았다.“야. 눈깔을 어디다 두고 다니냐?”“미, 미안해….”“됐으니까 꺼져.”학생은 재빨리 자리를 떠났고, 그 모습을 찬희네 무리들이 흥미롭다는 듯 지켜보고 있었다. 주먹까지 쥔 모습에 키득거리는 소리가 얄밉게 울려 퍼졌다.“맞지? 쟤 요즘, 기분이 영 별로라니까.”“또 강은하 때문인가?”툴툴 거리며 교실로 돌아온 이현의 눈 앞에 영주가 밝은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야, 백이현! 어디 갔다 와. 한참 찾았잖아.”“왜?”“학교 끝나고 백화점 구경 가자. 겨울 신상 엄청 들어왔대!”“됐다. 관심 없다.”“왜 또 그래? 태하는?”그때였다. 영주의 눈에 은하, 그리고 민희와 함께 웃으며 교실로 들어서는 태하의 모습이 보였다.그 광경을 마주한 영주는 눈을 가늘게 뜨며 입술을 앙다물었다.“짜증 나네. 진짜.”그 짜증스러운 목소리에도 이현은 별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돌렸지만, 이상하게도 교실로 돌아온 세 사람의 모습을 바라본 그의 기분 역시 찝찝했다. 머릿속에는 아직도 던졌던 말이 맴돌고 있었다.기분이 상한 영주는 자신의 교실로 돌아가며 세 사람을 향해 차가운 말을 던졌다. “고새 절친이라도 됐나 봐? 셋이 아주 보기 좋네~”은하는 별 반응 없이 영주를 지나쳐 버렸고, 태하와 민희 역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 반응들이 더더욱 기분 나빴고 말이다.자신의 반으로 돌아온 영주의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자리에 털썩 앉자 핸드폰 진동음이 짧게 울렸다. [이영주. 학교 끝나고 얘기 좀 해.]‘박찬희? 얘가 날 왜 찾지?’곧바로 메시지를 입력하려다 멈칫했다.찬희와는 크게 엮인 적도 없었고, 평소에 그렇게 자주 대화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영주는 찬희의 무리가 싫었다. “뭐야, 갑자기.”핸드폰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이내 메시지 창을 닫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었으니까.
다음날, 출근을 한 우주는 곧장 설희의 방부터 찾았다. 한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김설희, 잠깐 시간 돼?”서류를 정리하던 설희가 우주의 목소라에 고개를 들었다. 반갑게 웃으며 들어오라는 손짓.“아침부터 웬일이야? 내 방에 다 찾아오고?”“그… 내일 학회 말이야. 이번엔 가야 할 것 같아서.”“잘 생각했어. 이번엔 원장님이 단단히 벼르고 있는 것 같더라.”“그래서 말인데… 은하 부탁 좀 하려고.”역시나 설희답게 고개부터 끄덕이는 모습에 우주는 안도했다.“나야 좋지. 은하도 오랜만에 보고. 근데 은하는 뭐래? 이렇게 부탁하는 거 알면 또 싫어할텐데.”“어, 안 그래도 민폐라더라.”설희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것 봐. 근데 은하 말도 맞긴 해. 고2면, 한참 예민할 나이잖아.”“그래도 미성년자잖아. 아직은 불안하기도 하고…”그가 걱정하는 건, 은하가 단순히 혼자 있는 게 아니다. 혼자 있을 때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 그게 가장 두려웠다.그리고 그 마음은, 옆에서 오랜 시간 봐왔던 설희 또한 알고 있었다.“그럼 이렇게 하자. 갑자기 찾아가기 보단, 은하랑 연락해서 의견 묻고 갈게.”“고맙다. 김설희.”“너도 좀 내려놔. 네 인생은 은하를 돌보는 게 전부가 아니야.”단호하게 떨어진 말에 우주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설희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건 우주에게 있어서 만큼은 가장 어려운 일.은하는 이미 그의 전부다. 유일하게 지켜야 하는 세상이란 말이다.***민희와 함께 초코우유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은하. 민희와 함께 있는 모습은 확실히 자연스러워 보였다.태하가 두 사람을 향해 다가가 말을 걸었다.“매점 다녀오는 길이야?” “응.”초코우유를 손에 쥐고 야금야금 빨아 마시는 모습. 언제나처럼 무덤덤한 표정이었지만, 태하에 눈에는 그 모습이 귀여워보였다.“은하야, 너 초코우유 좋아해?”빨대를 물고 있는 입술이 잠시 멈칫하더니, 별 의미 없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그냥.”“앞으론
주방에서는 오늘도 싱크대 물이 흐르는 소리와 도마에 칼이 부딪히는 소리가 부드럽게 공간을 메웠다.저녁을 준비하던 우주가 미소를 지었다. 은하를 집에 데려다준 태하라는 녀석, 그 녀석의 서글서글한 말투와 표정이 자꾸만 떠올랐다. ‘벌써 친구가 생긴 걸까?’기분이 묘하게 들떴다. 항상 혼자였던 동생이, 외로운 뒷모습만 보이던 동생이 누군가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마음 한구석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은하야. 밥 먹자.”“응.”평소처럼 마주 앉아 저녁 식사를 시작한 두 사람. 우주가 은하의 눈치를 스리슬쩍 살피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기 시작했다.“아까 데려다 준 친구, 태하라고 했지?”“응.”특별한 의미 없이 던진 듯한 짧은 대답. 하지만 우주는 그 반응조차도 다르게 받아들이려 노력 중이었다.생각해보니, 이번 학교에서 만큼은 유독 빠른 시간 안에 적응을 하는 것 같았다. 공황증상으로 인해 쓰러졌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저번에 보건실 앞에서도 가장 표정이 안 좋던데. 태하는 어떤 애 같아?”“몰라.”“응? 몰라?”“아직은 잘 모르겠어.” 단순히 관심이 없어서 인지, 아니면 감정을 숨기려는 방어막이 발동한 건지. 정확하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런 태도조차 분명한 의미가 있었다.“국 식겠다. 어서 먹어.”“오빠도.”***늦은 저녁, 방에서 쉬던 은하가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우주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걸까.“안된다니 까요. 저번에도 분명 말씀 드렸잖아요.”“아니, 동생이 아직 학생인데 혼자 있다니까요?”“당장 내일 모레 일정인데, 갑자기 또 이러시면….”오빠답지 않게 감정이 격해지고, 언성이 높아진 듯 한 목소리.통화 상대가 누구인지, 정확한 내용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이건,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 은하는 조심스럽게 우주의 방 쪽으로 다가가 귀를 귀울였다.“일주일은 너무 길어요. 안됩니다.”“네. 그럼 차라리 그만두겠습니다.”불편한
하교 시간이 되고, 태하가 은하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강은하.”이 이름을 부르기까지 얼마나 고민을 했는지. 얼마나 용기를 냈던지.“응?”“학교 끝나면, 보통 뭐 해?”예상 밖의 질문에 은하는 잠시 눈을 깜빡였다.“그건… 왜?”“그냥, 궁금해서.”“그냥 집에 가.”“오늘은 그냥 가지 말고, 나랑 가자.”은하는 걸음을 멈춰 태하를 똑바로 바라보았지만, 태하는 너무도 태연한 모습이었다. 속으로는 잔뜩 긴장했지만 말이다.“그냥 같이 걸으면서 얘기나 하자고.”이상하게 싫다는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태하는 쓰러진 자신을 안고 보건실로 달려갔었고, 이현과 불편한 신경전이 생겼을 때, 혹은 생길 것 같은 순간에 늘 제 편이었으니까.결국 고개를 끄덕이며 짧게 대답했다.“그래.”태하가 피식 웃으며 가방을 어깨에 둘러맸다.처음으로 둘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두 사람.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던 중, 석양빛이 길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러다 학교의 상징은 큰 은행나무 앞에 다다른 순간, 은하가 문득 발 걸음을 멈추었다.태하 역시 마찬가지였다.“왜 그래?”“이 학교에서는, 이 은행나무가 제일 예쁜 것 같아.”태하는 이해 되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은행나무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이제 잎도 다 떨어지고, 가지만 남았는데? 뭐가?”정말이었다. 은행나무는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차가운 바람을 고스란히 견디고 있었다. “그래도, 봄이 되면 또 다시 푸른 잎이 돋잖아. 반드시.”“반드시?”“응. 결국엔 푸르게, 노랗게 변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으니까.”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 거구나.2년이라는 시간 동안 매일같이 이 앞을 지나면서도 그냥 단순한 나무 그 자체로만 보아왔는데, 이제 막 전학 온 은하는 너무도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반드시 다시 푸르러질 것을 굳건히 믿고 있었다. 그 말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마음 속 깊이 와 닿았다. 이런 감정은 태어나 처음이었다. 오늘부터 태하에게는, 앞으로도 매일같이 마주
은하는 달라진 아이들의 반응이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이상하게 어색함은 생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지만, 변화 속에서 또 다른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백이현. 그는 이전보다 더 자주, 더 오래도록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다. 수업 중에도, 쉬는 시간에도, 가끔 고개를 돌릴 때마다. 그의 시선과 마주치는 순간이 계속해서 이어졌다.그러던 어느 날, 쉬는 시간.이현이 자연스럽게 은하의 책상 앞으로 걸어왔다. “강은하.”“…….”“우리, 친구 할래?”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고, 태하는 불편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학생들은 믿기지 않는 모습에 또 다시 웅성거렸다.“야 대박, 방금 들었어?”“백이현이? 설마.”“또 장난이겠지 뭐.”이현의 표정은 장난이 아니었다. 평소처럼 장난기가 담긴 표정이 아닌 진지한 표정으로 은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튀어나온 어이없는 대답.“싫어.”너무도 단호한 거절에 교실 분위기는 더더욱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이며 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 지켜보고 있었으니까.“왜?”단순한 궁금증이 아니었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가 간 건데, 그걸 보란듯이 거절한 강은하. 누군가는 그저 가볍게 웃어 넘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현은 아니었다. 진심이었으니까. “너에 대해 알고 싶지 않으니까.”이현의 눈빛이 처음으로 강하게 흔들렸다. 은하는 자신에게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선을 긋고 있었다. 때마침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고, 기분이 언짢아진 이현은 교실 문을 박차고 떠나 버렸다. “백이현 빡친 거 오랜만에 보네.”“진짜. 강은하 대박이다.”은하는 그 모든 웅성거림에도 말없이 교과서를 펴고, 수업을 준비했다.태하 역시 그 상황을 지켜보며, 이제야 안도한 듯 고개를 돌렸다.***교실 밖을 나선 이현은 옥상에 위치한 작은 창고로 향했다. 가끔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찾는 곳이자 몇몇의 학생들이 가끔 올라와 흡연을 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