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촘촘히 내렸다.유건은 우산을 들고 눈을 살짝 내리깔았지만, 시선은 여전히 시연을 향해 있었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듯한 태도였다.시연은 온몸이 비에 젖은 채 힘겹게 미소를 지었다.“유건 씨.”그 순간, 유건은 이성을 잃었고, 단숨에 시연에게 다가가 우산을 그녀 손에 쥐여 주었다.“이거 받아!”“네...”시연은 멍하니 우산을 잡았다.잠시 후, 유건은 자기 재킷을 벗어 여자 머리 위로 덮었다.“바보야! 우산도 없이 나왔어?”시연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깜빡했어요...”유건은 그녀를 흘깃 노려보더니, 거칠게 어깨를 감쌌다.“들어가!”그는 거의 시연을 반쯤 안은 채로 본가 안으로 데려갔다.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유건은 우산을 대충 한쪽에 던진 후, 시연을 바라보았다.“위층에 가서 씻어.”시연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요.”그녀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가 방으로 들어갔다.잠시 후, 조용한 1층에 주방에서부터 들려오는 희미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시연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는데, 그곳에 있던 유건은 한 손에 컵을 들고 있었다. 그는 시연을 흘깃 보더니, 컵을 식탁 위에 내려놓았다.“앉아.”“네.”시연은 조용히 의자를 당겨 앉았다.유건도 그녀 옆에 앉으며 뜨거운 김이 올라오는 컵을 가리켰다.“마셔. 생강차야.”“고마워요.”시연은 컵을 두 손으로 감싸고, 조심스럽게 한 모금씩 마시면서도 마음이 불안했다.‘이 사람... 화가 풀린 걸까?’‘나에게 직접 생강차까지 끓여주다니.’유건은 아무런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가만히 앉아 있었고, 시연이 거의 다 마신 걸 확인한 후에야 입을 열었다.“이제 말해. 왜 온 거야?”시연은 잔을 내려놓고, 긴장된 얼굴로 남자를 마주 보았다.‘지금 이 사람이 화내지 않은 것은, 나에게 기회를 주려고 한 것 같아.’“내가 잘못했어요. 함부로 이혼 얘기를 꺼낸 건 정말 내 실수였어요. 미안해요.”“잘못했다고?”유건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비가 완전히 그치자, 유건은 말없이 차에서 내려 앞장서 걸었다.‘정말 기숙사까지 왔네.’시연은 남자의 한 발짝 뒤에서 따라갔다.갑자기 유건이 멈춰 서더니 돌아보았다.“뭐 해? 안 따라오고.”“아, 갈게요!”유건의 의도를 알 수 없어 조심스러웠지만, 시연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었다.기숙사 입구에 서서, 유건은 말없이 팔에 걸쳐 있던 재킷을 시연에게 내밀었다.시연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아들고, 멍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여전히 말없이 셔츠 소매를 걷어 올리는 유건.하얀 셔츠 아래 드러난 단단한 남자의 팔뚝이 눈에 띄었다.유건이 시연을 바라보았다.“기숙사 관리인한테 말하고 와. 내가 들어가서 네 짐을 옮겨야 하니까.”‘아, 그 뜻이었구나.’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인에게 다가가 허락을 받은 후, 문 앞에서 손짓하며 말했다.“이제 들어와도 돼요!”유건은 미소를 지으며 성큼성큼 걸어왔는데, 오래된 기숙사는 어둡고 낡아 보였다.남자의 미간이 점점 깊어졌다.“계속 여기서 살았다고?”“네... 그런데 왜요?”시연은 유건이 왜 불만스러워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괜히 사람을 자극하고 싶지 않아 얼른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짐은 다 싸놨어요. 옮기기만 하면 돼요.”좁은 방 안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그중 하나는 가득 쌓인 짐들로 채워져 있었다.유건은 방 안으로 들어서며 고개를 돌렸다.남자의 큰 키 탓인지 방이 더 비좁아 보였고,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이런 곳에서 어떻게 지낸 거야...’그는 짐을 살펴보더니 곧바로 캐리어를 들었다.“이게 다야?”“네, 다예요.”시연도 함께 짐을 들려 했지만, 유건이 날카롭게 말했다.“놔. 네 상태에서 짐 옮기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해?”그 말에 시연은 움찔하며 손을 뗐다.‘맞다, 나 임신했잖아.’실은 이 사실에 시연보다 유건이 더 신경 쓰고 있었다.“내가 할 테니까 넌 가만히 있어.”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짐을 들고 밖으로 나갔지만, 곧 다시 돌아와 남은 짐들
시연은 망설이며 입을 열었다.“시간이 늦었네요...”유건이 그녀를 바라보며 입가를 살짝 올렸다.“그래, 씻어야지. 네가 먼저 씻을래, 아니면 내가 먼저 씻을까? 그것도 아니면... 같이?”“나...”시연은 순간 말을 더듬었다. “내가 먼저 할게요.”그 말을 끝으로 여자는 서둘러 드레스룸으로 가 옷을 꺼내고, 욕실로 들어갔다.‘일단 씻고 생각하자.’샤워기를 틀어 물줄기가 흐르자, 시연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그러나 잠시 후, 샤워 부스의 문이 열렸다.“유건 씨?”“같이 씻자.”남자는 듬직한 풍채를 뽐내며 좁은 공간에 들어와 문을 닫았다.한순간 허리에 감긴 팔에 의해 시연은 유건의 품에 안겼다.“일... 일부러 이러는 거죠?”유건이 낮게 웃으며 입꼬리를 올렸다.“아니?”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르며 황급히 변명했다.“그래, 좋아. 내가 일부러 그런 걸로 치자.”남자는 낮게 속삭이며 그녀에게 입을 맞췄다.“음...”“겁내지 마.”유건은 부드럽게 시연을 달랬다.“내가 조심할게.”그날 밤, 유건은 정말 약속대로 시연을 조심스럽게 대해 주었다.시연은 남녀 간의 관계에 있어서 경험이 풍부한 편은 아니었다. ‘로얄호텔’에서의 그날 밤, 그녀는 너무나도 당황했고, 마음의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 남자는 너무 거칠었고, 시연의 느낌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시연에게는 그저 수치심과 혼란, 그리고 아픔만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유건과 함께할 때는 달랐다. 시연도 서서히 이런 일이 꼭 두렵거나 고통스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니 말이다.마지막으로 흐릿한 시야로 유건을 바라보다가, 그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유건은 시연을 품에 안고,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잘 자, 좋은 꿈 꿔.”...아침이 밝았다.샤워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시연은 핸드폰을 확인했다.‘벌써 아침이네...’그녀가 침대에서 내려오자, 유건이 샤워를 마치고 나왔다.그는 그녀를 보자마자 다가와 아무
시연은 얼굴이 달아오른 채, 몸을 돌려 도망치듯 뛰어나갔다.유건은 그녀를 붙잡지 않고 그저 여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가를 올렸다.‘입맞춤도 제대로 못 하면서 도망은 또 빠르네.’여자의 수줍은 반응이 묘하게 유건의 마음을 간질였다....오전 10시, 시연은 임진아에게서 전화를 받았다.[시연아, 성빈이가 풀려났어! 이제 괜찮아!]그 말을 듣자 시연은 긴 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고유건이 ‘권력을 휘두르는 사람’이긴 했지만, 약속은 확실히 지켰어.’그날 하루는 조용히 집에서 보냈다.저녁 7시, 고상훈의 저녁 식사를 돕던 중, 유건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뭐 하고 있어?]“할아버지 식사를 준비 중이에요.”[그래, 내가 보고 싶진 않았고?]갑작스러운 질문에 시연은 순간 말을 잃었다.침묵이 길어지자, 유건은 불만스러운 듯 입맛을 다셨다.[쯧, 묻잖아. 대답은?]‘이 남자, 가끔 아이처럼 고집스럽다니까.’시연은 어쩔 수 없이 작게 대답했다.“네...”[오?]유건이 낮게 웃더니 말했다.[그럼 그 보답으로 오늘 저녁에 데이트하자. 10분 뒤에 현관에서 만나는 거야.]그리고 그는 바로 전화를 끊었다.시연은 순간 당황했다.‘설마 이미 돌아온 건가? 지금 현관 앞인 것 같은데?’‘그런데 들어오지도 않고 나를 부른다니?’여자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사모님.” 왕성애가 시연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식사할 준비는 다 되셨어요? 이제 올려도 될까요?”“아, 네.”시연은 얼른 정신을 차렸다.“이모님, 저 잠깐 나갔다 올게요. 할아버지를 부탁드려요.”“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시고 잘 다녀오세요.”시연은 황급히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망설이다가 가볍게 화장했다. 그리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벤틀리가 현관 앞에 멈춰 서 있었다.시연이 조심스럽게 차 문을 열고 올라타자, 유건이 손목시계를 보며 말했다.“늦었네. 10분이 아니라 20분이 걸렸어.’“미안해요.”시연은 살짝 미안한 듯 대답했지만, 유건은 별로
유건은 아주 화냈다는데, 좋은 분위기의 데이트가 시작부터 꼬여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당장이라도 직원을 꾸짖고 싶었지만, 시연이 손을 살짝 올려 그를 막았다.“됐어요. 별일도 아닌데요. 나 배고파요... 우리 빨리 주문해요.”‘이 여자, 진짜 화 안 난 걸까?’유건은 믿을 수 없었다.‘질투는 여자의 본능일 텐데.’“여기, 장소미랑 같이 온 적이 있어.”이미 말이 나온 김에, 그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그때는 우리가...”말을 흐리는 유건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굳이 설명 안 해도 돼요.”시연이 유건을 난처하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부드럽게 말했다.“다 알고 있어요.”그녀의 표정은 담담했고, 진짜 화난 게 아닌 것처럼 보였다.‘‘알고 있다’는 건 무슨 뜻일까?’시연이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고르자, 유건은 더욱 답답했다.메뉴가 나오고, 시연은 잘 익은 양갈비 한 조각을 잘라 유건의 입 앞에 내밀었다.“한 번 먹어봐요. 아...”여자의 행동에 기분이 풀린 유건은 입을 열었다.‘정말 대범한 건가... 아니면, 신경을 안 쓰는 건가.’유건은 한숨을 삼키고, 소매를 걷어 올려 직접 새우껍질을 벗기더니 소스를 묻혀 시연의 접시에 올렸다.“밥 먹고 나서, 하고 싶은 거 있어?”“네?”시연이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뭘 하려고요?”그녀는 밥만 먹고 돌아갈 줄 알았기에 예상 밖의 질문이었다.유건이 옅게 웃으며 말했다.“네가 정하지 않으면, 내가 정할 건데? 영화 보러 갈래?”‘식사 후 영화라니, 연인들의 평범한 데이트 코스인데?’‘고유건은 확실히 좋은 남자야. 이 남자가 마음속에 다른 여자를 품고 있다는 사실만 제외하면...’시연은 속으로 답답하지만, 여전히 고개를 끄덕였다.“좋아요.”‘어차피 이혼이 무산된 이상, 우리 같이 살아야 해.’‘나도 최대한으로 노력해 봐야지.’유건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보고 싶은 영화 있어?”시연은 고개를 저었다.“요즘 어떤 영화가 개봉했는지도 잘 몰라요.”“그럼 네가
잠시 후, 하늘에서 천둥이 울렸고, 곧이어 굵은 빗줄기가 쏟아졌다.시연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빨리 가요. 비가 더 심해지면 사람을 찾기 더 어려워질 거예요.”‘이 여자, 화나지 않았구나. 오히려 나를 걱정하고 있어.’그 순간, 유건은 기뻐해야 할지, 서운해해야 할지 몰랐다.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그럼 난 이만 가볼 테니까 천천히 먹어. 급하게 먹으면 소화 안 돼.”“알겠어요.”시연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유건은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그리고 기환이 널 데려다 줄 거야.”유건의 곁에는 항상 그를 보호하는 부하가 있었고, 시연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비록 유건이 직접 운전할 때도, 그가 믿는 부하들은 항상 그림자처럼 뒤따랐다.시연은 양갈비를 입에 물고 있었기에 대답 대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네, 알았어요.”“집에 도착하면 전화해.”“네.”시연은 웃으며 말했다.“인제 그만 가봐요. 난 애가 아니잖아요.”“간다.”필요한 말을 다 한 유건은 몸을 돌려 걸어 나가려 했지만, 몇 걸음 가지 않아 다시 뒤돌아보았다.시연은 남자의 시선을 느끼지 못한 듯, 조용히 국을 마시고 있었다.알 수 없는 기분이 든 유건이 갑자기 물었다.“여보, 나한테 가라고 한 거, 진심이야?”“네?”시연은 유건이가 무슨 뜻인지 몰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그게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였나?’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가야죠. 사람이 없어졌다면서요...”여자의 태도는 너무도 담담했다.갑자기 유건은 짜증이 밀려왔고,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알겠어.”그는 짧게 말하고 이번엔 진짜로 떠났다.문이 닫히는 순간, 시연은 제자리에 멍하니 선 채, 손을 가슴에 얹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시연은 더 이상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고, 먹어도 목구멍이 막힌 듯했다.사실, 유건이 전화를 받는 순간부터 시연은 입맛이 사라졌었다.그녀는 물을 한 모금 들이켜며 숨을 돌렸고, 입을 닦고서야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시연은 머리를 닦으며 핸드폰을 들었다.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이었는데, 전부 다 유건에게서 온 것이었다. 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무슨 일이지? 내가 다시 전화해 줘야 할까? ‘아니야, 그냥 두자.’ ‘어차피 장소미 찾느라 바쁠 거야. 정말 급한 일이면 다시 걸겠지.’시연은 잠시 기다리는 듯했으나, 유건이 더 이상 전화를 걸지 않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말린 뒤 침대에 누웠다. 임신한 탓일까? 시연은 요즘 깊이 잠드는 편이었다. 시연은 그렇게 깊은 잠에 빠져 있다가, 핸드폰 벨소리에 깨어났다. 잠결에 짜증이 난 시연의 목소리에 신경질이 섞여 있었다. “예보세요?” [형수님! 저예요, 지한이요.] ‘...지한 씨?’ 그 순간, 시연은 잠이 확 깼다. 주지한이 이렇게 한밤중에 전화를 건 데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니 말이다.그녀가 묻기도 전에, 지한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형님이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이미 병원으로 옮겨졌다고요!] “뭐라고요...?” 순간 여자의 머릿속이 하얘지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시연은 입술이 덜덜 떨리며 겨우 말을 뗐다. “많이 다쳤어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저는 의사가 아니잖아요... 근데, 형님 온몸에 피가 묻어 있었어요!] 눈으로 본 그대로를 전하는 지한의 목소리가 떨렸다. [형수님, 제가 민환을 보냈으니까 준비하고 계세요. 곧 도착할 거예요!] “...알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시연은 이불을 젖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는 순간, 다리가 휘청거리고 머릿속이 잠시 새하얘졌다. 그리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손이 계속 떨렸다. ...새벽 3시. 시연은 아무도 깨우지 않고 조용히 대문으로 향했다. “형수님.” 이미 도착해 있던 정민환이 차 문을 열어주었다고, 시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차에 올라탔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유건은 막 응급실에서 수술실로 옮겨지는 중이었다.
“다행이네요.” 시연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정말 다행이에요. 유건 씨의 교통사고도... 나름 값어치는 한 셈이니까요.” 뭔가 이상한 말이었기에, 지한이 찌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형수님,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그럼 어떻게 생각해야 하죠?” 여자의 눈은 한없이 담담하고 깨끗했다. “내가 한 말이, 틀리기라도 했다는 거예요?” 단 한마디였지만, 지한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 형님은 절대 형수님이 이렇게 생각하길 바라지 않으실 텐데...’그럼에도 지한은 유건을 어떻게 변호해야 할지 몰랐고, 괜히 말실수라도 할까 봐 입을 다물었다. “형수님.” 지한이 화제를 돌렸다. “배 안 고프세요? 뭐라도 사 올까요?” 시연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고마워요.” 아침은 기환이 사 왔는데, 다들 유건 걱정에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연만은 예외였다. 시연이 하얀 쌀죽에 작은 만두를 곁들여 조용히 식사하자, 기환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수님... 유건 형님이 걱정도 안 되세요?” “쉿!” 지한이 그를 날카롭게 쳐다봤다. “헛소리 좀 하지 마! 형수님은 임신 중이시잖아. 아기를 생각해서 그러시는 거라고.” “아, 그래?” 기환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의문이 들었다. ‘과연 그럴까?’ 오전 7시가 가까워졌을 무렵, 수술은 끝이 났다.유건은 VIP 병실로 옮겨졌는데, 지한이 모든 절차를 맡았기에 시연은 나설 필요가 없었다. 절차가 마무리된 후, 지한은 병실 문 앞에 멍하니 서 있는 시연을 발견했다. 여자의 얼굴은 아주 지쳐 보였다. “형수님, 피곤하시죠?” “네.” 시연은 솔직하게 인정했다. 한밤중에 불려 나와 지금까지 기다렸으니, 당연히 피곤할 만했다.지한이 바로 말했다. “형님 상태는 괜찮으니까, 민환이랑 댁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댁에 가서 좀 쉬세요.” “그래요.” 시연은
진아는 눈을 깜빡이며 말끝을 흐렸다.“그냥... 요즘 시험 준비 때문에 조금 힘들어서 그런가 봐.”“그럴 줄 알았어.”성빈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진아의 팔을 놓았다.“이따 밥 오면, 네 몫까지 두 배로 먹어야 해. 알지?”띵동-그 말을 막 끝내자마자, 현관 초인종이 울렸다.“오! 배달 왔다! 내가 받을게!”성빈은 성큼성큼 현관 쪽으로 향했다.“후...”그가 나가자마자, 진아는 긴 숨을 내쉬며 이마를 문질렀다.그 모습을 본 시연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머금고 진아를 바라봤다.“긴장 풀어. 얼굴 안 빨개졌어. 성빈이는 둔해서 눈치 못 챌 거야.”진아는 화들짝 고개를 들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근데... 너 어떻게 알았어? 티... 많이 났어?”“아니.”시연은 부드럽게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근데 난 성빈이처럼 눈치 없는 타입은 아니거든.”“시연아...”진아는 시연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절대 말하지 마. 제발. 약속해.”“안 해.”시연은 웃으며 진아의 등을 토닥였다.“말할 거였으면 진작에 했어. 근데 진아야, 너 이렇게 계속 말 안 하면... 성빈이는 평생 몰라.”진아는 입술을 꾹 깨물더니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괜찮아... 나는 성빈이가 날 안 좋아하는 거 알면서도... 나 혼자 좋아하는 거야.” “진아야...”시연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아를 바라보았다. 진아의 씩씩한 말투 뒤에 가려진 애정이 너무 뻔히 보였다.진아가 웃어 보이자, 눈꼬리가 살짝 휘어지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내가 성빈이를 좋아하는 건 내 마음이야. 성빈이는 날 그냥 여자 사람 친구로 생각하지.”“근데 내가 그 얘기 꺼내면, 그 친구마저 사라질 것 같아서 싫어. 그냥 지금 이대로도 좋아.”그 말에 시연은 가슴이 먹먹해졌다. ‘이런 마음을... 얼마나 오래 혼자 안고 있었을까.’그때, 성빈이 음식 봉투를 들고 들어왔다. “왔다!”두 사람의 분위기가 묘하게 가라앉아 있는 걸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뭐야? 무슨 비밀 얘
무언가를 깨달은 순간, 시연의 눈빛이 순식간에 흔들렸다. 그리고 몸이 저도 모르게 작게 떨렸고, 입술마저 새하얗게 질렸다.‘설마... 진짜 그 이유야?’“당신...”시연의 목소리는 갈라지고 있었다.“당신... 장소미를 살리려고,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거예요?”“당신 미래 장인어른의 목숨은 소중하고, 나는... 우리 우주는, 그저 버려도 되는 목숨이에요?”시연의 눈가가 붉어졌고, 울음이 복받쳐 올라왔다.“당신... 예전에 분명히 말했잖아요. 다신 나를 몰아붙이지 않겠다고.”‘맞아... 그땐 그 말을 믿었는데.’유건은 약속을 지켰다. 강제로 함께하자고 하지 않았고, 이혼하자는 말에도 아무 말 없이 수긍했다.그런데 지금, 다시 칼을 쥐고 휘두른 건, 장소미 때문이었다.[시연아.]유건은 그녀의 숨소리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너... 지금 떨고 있어? 어디 안 좋아? 추워?]시연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G시 고씨 가문의 고유건 대표님... 이 정도쯤은 마음만 먹으면 다 할 수 있지.’“진짜 대단해요. 힘 있는 사람이란 건 이런 거군요...”[시연아, 그런 뜻이 아니야. 난...]“그럼 뭐예요?”시연의 목소리가 커졌다.“그럼 당신, 대체 왜 날 이렇게까지 몰아붙여요? 내가 뭐 그렇게 잘못했는데요?!”유건은 입을 열지 못했다. 진실을 말 할 수 없으니까.‘오선화 교수 말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두고 쉬어야 아주 작은 가능성이라도 남겨둘 수 있다고 말 할 순 없어.’ ‘그 말을 지금 시연이에게 하면... 무너질 거야.’‘아이도, 이미 시연의 뱃속에서 꽤 자랐잖아.’ 아무리 생각해도 시연에게 사실을 말하는 건 너무 잔인했다.‘시연이가... 감당할 수 없을지도 몰라.’“하...”자조 섞인 웃음을 흘리자, 시연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바보였어요. 이런 전화... 걸질 말았어야 했는데...”‘한마디만 하면... 이 사람이 풀
“교수님.”시연은 당연히 무슨 업무 지시일 거라 생각하며 조용히 문을 닫고 다가섰다.“앉아.”양석현은 손짓으로 자리를 권하며 시연을 위아래로 찬찬히 살폈다.“아직도 컨디션 안 좋을 텐데, 벌써 출근한 거야?”“괜찮아요.”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 지었다.“감기 기운 조금 있었을 뿐이에요.”“음...”양석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말을 꺼내기 어려운 표정이었다.그러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이제 임신 후기가 됐잖니. 그냥... 이번 기회에 병가 좀 길게 쓰고, 출산하고 회복될 때까지 쉬는 게 어때?”“네?!”시연은 놀란 눈으로 양석현을 바라봤다.‘갑자기 왜 이런 얘기를...?’그동안 양 교수는 누구보다 그녀의 업무 능력을 신뢰하고, 임신 중에도 특별 대우 없이 똑같이 대해줬던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생긴 걸까?’“교수님... 저는 정말 괜찮아요. 이전에 선배 선생님들도 다 출산 직전까지 근무하셨어요.”“알아.”하지만 이번엔 양석현이 단호했다.“그렇지만, 지금은 상황이 좀 다르다고 판단했어. 시연아, 그냥 내 말 듣고 이번엔 좀 쉬어.”시연의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이상해. 무조건 쉬라니... 무슨 이유가 있는 게 분명해.’“교수님, 무슨 일 있었나요? 저에 대한 안 좋은 얘기라도 들으신 거예요?” 양석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곤, 조심스레 말했다.“병원 고위층에서 직접 전화가 왔어. 네가 당분간 병가 쓰게 해달라고 하더구나.”“네...?”시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병원 고위층...? 갑자기 왜 그런 명령이...?’“교수님... 이번엔 또 누가 뭐라고 한 건가요?”“그런 건 아니고...”양석현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별다른 설명은 없었어. 그냥 병원 측에서 종합적으로 판단한 거라고만 했어.”‘종합적인 판단...? ‘내가 그런 대우를 받을 만한 사람인가?’시연은 한순간 숨이 턱 막혔다. ‘나는... 그냥 평범한 레지던트일 뿐인데...’‘병원 고위층이 나서서 병가를 밀어
VIP 병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분주하게 들락날락했고, 장미리와 장소미는 병실 밖으로 내보내졌다. 문이 닫히고 나서야 안쪽에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유건 씨...!”유건이 복도에 모습을 드러내자, 장소미는 참았던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그대로 유건에게 달려들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무서워요... 아빠가... 아빠가 이대로 못 일어나시면 어쩌죠... 흐윽...”유건은 소미의 어깨를 조용히 토닥였다. “의사 선생님들이 최선을 다하고 계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하지만 위로의 말을 끝내기도 전, 유건의 시선은 복도 반대편에서 막 도착한 사람에게 향했다. 시연이었다. 유건은 반사적으로 손을 들었다가, 소미를 떼어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지금... 내가 장소미를 뿌리치면... 더 무너질 거야.’‘하지만... 시연이 앞에서 이러는 건...’시연은 그런 모습을 담담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이제 놀랍지도 않아. 저런 장면, 처음도 아니니까.’“지시연!”갑자기 장미리가 시연을 발견하곤 발걸음을 재촉해 다가왔다.“지시연! 도대체 뭐가 문제야?! 네 아버지가 지금 안에서 저러고 있는데, 왜 이러고만 있는 거야?!”장미리는 시연의 손을 거칠게 움켜쥐었다.“돈이 필요하니? 얼마든지 줄게. 필요한 게 얼마든 말만 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손을 너무 세게 잡힌 바람에 시연은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말했다.“놓으세요.”하지만 장미리는 놓지 않았다. ‘이 사람... 정말 절박하구나.’ ‘그 정도로... ‘그 사람’ 상태가 심각한 거야?’“맞다... 너 돈은 안 부족하지? 고씨 기문 며느리인데, 뭐가 부족하겠어?”장미리는 이를 악물며 말했다.“원하는 게 뭐야? 말만 해! 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게. 네 엄마 묘를 원래 자리로 돌리자는 거야? 아니면 내가 너한테 사과하길 바라는 거야? 뭐든지 해줄게...”시연은 아무 말 없이 서 있었고, 어떤 감정도
‘생명이 장담 못 할 수도 있다니...’유건은 상상도 못 했던 진실이었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된 거야?’ 유건의 눈매엔 서리가 맺힌 듯 차가운 빛이 감돌았다. 그리고 턱선은 단단히 굳었고, 두 손은 무의식중에 꽉 쥐어져 있었다.‘결국, 내가 시연이를 제대로 못 챙겼구나...’그 순간, 오선화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사실 전에 사모님께 말씀드린 적 있어요. 일 그만두고 푹 쉬시라고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태아랑 본인만 생각하시라고요. 그랬으면 상황이 조금 나아졌을 수도 있었어요. 근데... 사모님이 거절하셨죠.”‘왜 거절했어? 시연아.’유건은 더 이해가 안 됐다.그때, 안쪽 진료실에서 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오선화가 바로 유건 쪽을 향해 조용히 일렀다.“고 대표님, 사모님 나오십니다.”유건은 깊은 숨을 들이쉰 뒤, 표정을 최대한 평정심 있게 정리하고는 자연스럽게 시연 앞으로 다가갔다.“다 끝났어. 오선화 교수님이 그러는데, 특별한 건 없대.”시연은 잔뜩 찌푸렸던 미간을 살짝 펴며 말했다.“그래서 괜찮다고 했잖아요. 굳이 병원까지 올 필요는 없다고요.”하지만 속으론 안도하고 있었다. ‘다행이다... 정말 괜찮아서...’“조심해서 나쁠 건 없지.”유건은 조심스레 시연의 팔을 감싸며 말했다.“가자. 오선화 교수님께 인사드리고 가자.”“교수님, 수고하셨어요.”“두 분, 안녕히 가세요.”...돌아가는 길. 차 안은 무겁도록 조용했다. 유건은 말없이 운전대를 잡은 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그저 묵묵히, 시연을 집으로 데려가는 중이었다.도착하자, 먼저 내린 그는 시연 쪽으로 돌아와 문을 열어주었다.시연은 남자의 얼굴을 힐끔 보았는데, 표정은 어둡고, 눈빛엔 깊은 생각이 깃들어 있었다.‘뭐야... 분위기가 왜 이래. 장소미랑 문제 생긴 거야?’ ‘혹시... 또 안 좋은 소식 들은 건가?’시연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나 혼자 올라가도 돼요. 오늘 밤, 내가 시간을 뺏었잖아요.”그 말에,
“시연아!”유건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시연을 그대로 품에 안았다. 그러고는 눈을 떼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는 걱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어디 아파? 또 불편해?”시연은 눈을 꼭 감은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또야... 이 어지러운 느낌...’ ‘눈앞이 자꾸 흔들려...’세상이 좌우로 출렁이는 듯한 익숙하면서도 낯선 어지럼증이 다시 찾아왔다. “시연아?”아무런 대답 없는 시연에 유건의 불안은 점점 커졌다.“조금만... 잠시만 있으면 괜찮아질 거예요...”‘잠깐 기다리자고? 이 상태에서 어떻게 기다려?’유건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고, 두 팔로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며 말했다.“기다릴 수 없어. 병원 가자.”시연이 거절할 틈도 주지 않고, 유건은 그녀를 품에 안은 채 재빨리 차로 향했다. 두 사람이 향한 곳은 그가 평소 신뢰하던 사설 산부인과였다.예약하지 않았지만, 다행히도 오늘 밤 근무는 오선화 교수였다. 시연은 검진실 침대에 누워 있었고, 밖에서 대기 중이던 유건 앞에 오선화가 나타났다.그녀는 양팔을 가볍게 감싸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유건을 훑었다.“어머, 고 대표님. 그렇게 바쁜 분이 오늘은 웬일이세요?”그 말투에는... 분명한 날카로움이 깃들어 있었다.유건은 바로 기억해 냈다. 며칠 전, 오선화 교수에게 전화가 온 적 있었다. 하지만 당시 시연과 냉전 중이던 그는 그 전화를 받지 않았다.‘그땐 감정이 너무 엉켜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지.’그리고 바로 표정을 차분히 가다듬고, 진심으로 고개를 숙였다.“교수님, 지난번 연락하셨을 때 못 받아서 죄송합니다.”“됐어요.”오선화는 쿡 웃고 고개를 살짝 저었다.“고 대표님이 사과해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에요. 고 대표님의 아내와 아이에게 해야죠.” ‘그게 무슨 뜻이지?’유건은 직감적으로 불안감을 느꼈다. 그 말의 속뜻을 읽으려는 듯, 차분한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교수님, 돌려 말하지 마시고... 솔직히 말씀해 주
시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그 맑고 커다란 눈엔 어딘가 천진난만한 분위기가 맴돌았다.“여기 오자고 한 건 당신이니까, 오늘 당신이 사는 거죠?”“응...?”유건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당연하지. 근데 왜 그런 걸 물어?”“그냥 확실히 해두려고요.”시연은 장난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아직 옆에 있는 직원 눈치를 보며 작게,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앞으로 나 혼자선 이런 데 못 올 거예요. 오늘 제대로 배 채우고 가야죠.”그 말에 유건의 손이 잠시 멈칫했고, 표정도 살짝 굳었다.‘앞으로 못 온다니, 왜 이렇게 쉽게 선을 긋는 거야?’“아냐, 네가 먹고 싶으면 언제든 데려올게.”그가 조용히 말했다.“말이라도 고마워요.” 시연은 웃었지만, 전혀 믿지 않는 표정이었다.“근데... 굳이 다시 데려오진 마요. 혹시 장소미가 알게 되면...? 아마 속이 터져라 질투하겠죠? 그건 당신이 감당해야 할 몫이에요.”‘또 장소미...’미간을 살짝 떨던 유건이 입을 열었다.“시연아, 우리 일이랑 다른 사람은 아무 상관 없어.”“네?”시연은 눈을 깜빡이며 유건을 바라봤다. 곧 이해한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결국, 장소미 편을 들겠다는 거네. 우리 관계가 여기까지 온 게 그 사람 때문은 아니라는 뜻... 그래, 알아. 다 내 탓이지 뭐.’“나도 장소미를 탓하는 건 아니에요. 우리 이혼하는 건... 애초에 사랑이 없었기 때문이잖아요. 나도 잘 알고 있어요.”유건의 시선이 더욱 어두워졌다. ‘그게... 네가 알고 있는 전부라고?’‘아니야, 사랑... 없었던 건... 너 하나뿐이었어.’그때, 직원이 음식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고 대표님, 사모님, 실례하겠습니다.”테이블 위에 따뜻한 음식이 하나둘 차려졌다.“와, 냄새 진짜 좋네요.”시연은 코끝을 찌푸리며 군침 도는 표정으로 말했다.“먹어.”유건은 웃으며 젓가락을 들었고, 곧장 시연이 접시에 반찬을 덜어줬다.직접 국
병가를 낸 김에, 시연은 아예 집에서 푹 쉬기로 마음먹었다. 임신 후반기인 만큼, 몸 상태에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곤란했다. ‘지금은 무리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게 제일 좋은 휴식이지.’그녀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간단히 요기하고,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낮에도 마찬가지. 계속 잠을 자던 시연은, 해가 뉘엿뉘엿 지는 무렵에서야 속이 개운해지는 것을 느꼈다.커튼을 젖히자, 창밖엔 눈이 이미 멎어 있었다. 하지만 풍경은 오히려 더 쓸쓸하고 차가워 보였다.‘배고프다...’그 순간, 시연은 문득 컵라면이 당겼다. ‘가끔 한 번쯤은 괜찮겠지. 너무 자주만 아니면...’이어서 냉장고를 열어보니, 달걀도 있고 채소도 조금 남아 있었다. 적당히 끓여 먹기 딱 좋은 상태.그녀가 준비를 시작하던 중,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자는 유건이었다.“여보세요?”[집이야?]“네, 왜요?”[나 지금 네 아파트 1층이야. 올라갈게.]“알겠어요...”시연은 별다른 거절 없이 대답했다. ‘이혼 관련해서 정리하러 온 거겠지.’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벨이 울렸다.문을 열자, 카멜색 롱코트에 같은 톤의 머플러를 두른 유건이 서 있었다. 워낙 잘생긴 얼굴에 깔끔한 옷차림이라, 말 그대로 ‘탑모델’ 그 자체였다.“들어와요.”시연은 돌아서며 말했다.“슬리퍼가 큰 게 없네요. 그냥 양말 신고 들어와도 돼요. 집이 따뜻해서 안 추울 거거든요.”유건은 조용히 거실 소파에 앉았고, 시연은 부엌에서 물을 따라왔다.“여기... 물이에요.”유건에게 컵을 건네며 덧붙였다.“따뜻한 물이에요. 당신 위 약하잖아요. 더군다나 요즘 추워서 찬물 마시면 안 돼요.”순간 눈빛이 흔들린 유건이 입꼬리를 슬며시 올리며 말했다.“날 걱정하는 거야?”시연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마실 거예요, 말 거예요?”그 표정을 눈치챈 유건은 바로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했다.“마실게.”조용한 공간에, 컵을 탁 놓는 소리가 났고 시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이
“할아버지, 또 올게요.”시연은 조용히 인사한 뒤 고개를 숙였다.“그래, 그래. 우리 착한 아가.”고상훈은 인자한 미소로 시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시연은 단 한 번도 유건을 보지 않았다. 그저 고상훈에게 인사를 끝내고 곧장 병실 밖으로 돌아섰다.“시연아...”유건이 본능적으로 뒤따르려는 순간, 고상훈의 낮고 묵직한 한마디가 방 안을 가르며 울렸다.“멈춰라!”“넌, 무슨 자격으로 쫓아가냐?”“할아버지...”유건의 발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혼란스러웠다. 머릿속도, 가슴도 엉망이었다.‘어떻게 해야 하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도 모르겠는데... 왜 하필 지금... 할아버지는 이렇게까지...?’“따라가지 마.”고상훈의 목소리는 한층 더 가라앉아 있었다. 긴말을 내뱉은 뒤의 피로감이 얼굴에 역력했다.그는 유건을 바라보며 말했다.“넌 네 아이가 너처럼 자라길 바라는 거냐? 커서도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살아가길 원해?”유건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쪼여 드는 듯했다. 숨이 막혔고, 가슴 한가운데가 찢기는 기분이었다.‘나처럼...?’그 말은 유건에게 치명적이었다. 고상훈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반드시 해야 할 말이기에 던졌다.“한 가지만 약속해라.”고상훈은 더 이상 차가운 말투가 아니었다. 오히려 지친, 마지막 당부처럼 낮고 느린 말투였다.“그 여자 연예인? 좋다, 네가 좋다면 만나라. 나도 더 이상 참견하지 않으마. 하지만 내 눈앞엔 절대 데리고 오지 마. 우리 집안엔 한 발짝도 들이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엔 절대로.”‘너는 선택했고, 나는 그 선택의 결과를 받아들이는 대신, 내 마지막 자존심만은 지킬 거다.’그 말이 끝나자, 고상훈은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인제 그만 가봐. 피곤하구나. 쉬어야겠다.”유건은 말없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목은 뜨겁고, 가슴은 무겁고, 머릿속은 멍했다.‘나는 지금, 모든 걸 잃은 건가?’...결국 유건은 참지 못하고 시연을 따라 병실을 나섰다. 배가 많이 불러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