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
“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
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
“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
“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돼.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으면, 슬퍼할 시간에 남긴 재산이나 확인해야지. 안 그래?”
예리의 진담 반농담 반의 섞인 말에 주은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만 이해 안 됐나 봐. 나 빼고 다 울더라. 특히 옆에 앉았던 남자는… 에휴, 됐다. 네 팬인 거 같으니까 그냥 넘길래.”
“다른 사람들 반응이 지극히 정상인 거랍니다, 나예리 팀장님.”
주은이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친구이긴 했지만, 사랑에 한해서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라곤 전혀 없었다.
주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리는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데, 그걸 어떻게 덥석 믿니?”
"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영원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잖아.”
주은의 귀여운 반박에 예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금까지 본 손목이 몇 개인 줄 알아? 단 한 번도 없었어. 내 사무실 찾아오는 사람들 봐. 다들 사랑 찾으러 왔다면서, 막상 리스트 내밀면 상대 등급부터 따져.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라면서.”
“그건... 현실적인 조건도 중요하니까….”
“난 그런 모순을 매일 밥 먹듯이 보고 사는데, 하루아침에 사랑의 힘 같은 게 믿어지겠어?”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은에게 예리가 충고하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사랑 타령하고, 돈이나 모아. 사랑은 변해도 돈은 안 변하니까.”
주은이 그런 예리를 보더니, 갑자기 두 손을 모아 허공에 대고 외쳤다.
“에로스 님! 여기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중생 좀 어여삐 봐주세요!”
주은의 말도 안 되는 기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예리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인데, 불교 용어로 기도하면 알아듣겠니?”
예리의 말에 주은이 입술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치, 어차피 간절하면 다 통하는 법이거든? 두고 봐. 너도 언젠가 그 에로스 화살 정통으로 맞고 ‘사랑해요!’ 외치는 날이 올 테니까.”
***
은호는 주방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잠시 멈춰 섰다. 어머니와 두 형을 마주하는 일은 매번 지독한 긴장을 동반했다.
“후우….”
은호는 짧게 숨을 내뱉고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인사를 건네며 들어서는 그는 누가 봐도 예의 바르고 정중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주방 안 커다란 테이블에는 박 회장과 두 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왔니.”
해미가 은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대답했다.
은호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식사를 시작한 상태였다. 식탁 위로 오가는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만이 차갑게 울려 퍼질 뿐, 누구도 은호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은호는 이러한 가족의 태도가 익숙한 듯,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형들 오랜만이에요.”
은호가 앞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첫째 도현은 은호가 오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에만 전념했다. 반면 둘째 동현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야, 좀 빨리빨리 다녀. 어머니랑 형 기다리시는 거 안 보여?”
“미안해, 형. 죄송합니다, 어머니.”
누가 봐도 노골적인 면박이었지만, 은호는 늘 그래왔듯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려 부드러운 사과를 건넸다.
“됐다, 너한테 뭘 바라겠니. 어서 먹기나 하렴.”
해미의 차가운 대꾸 뒤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가사도우미가 국을 내왔다.
“감사합니다.”
은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가에 맑은 호선을 그렸다. 보는 사람마저 무장해제 시킬 만큼 선하고 정중한 미소였다.
은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숟가락을 들었다. 아직 한 술도 뜨지 않았음에도 이미 명치 끝이 꽉 막힌 기분이었지만, 묵묵히 밥을 밀어 넣었다. 깨작거렸다가는 또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몰랐다.
“아 참, 은호야. 다음 주 중으로 시간 좀 내렴.”
해미가 은호에게 명령하듯 툭 던졌다. 은호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네, 시간 낼게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해미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조금 전까지 은호를 투명 인간 취급하던 냉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식탁 위에 놓인 은호의 손을 덮어 잡았다.
“은호야, 너도 이제 슬슬 결혼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줄곧 미소를 잘 유지하던 은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니, 갑자기 결혼이라니요….”
“네? 엄마, 저희도 있는데 이 자식 먼저요?”
동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해미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에 힘을 주어 그를 쏘아보았다.
옆에 있던 도현 역시 서늘한 눈빛으로 동현을 압박했다. 동현은 억울한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도현의 서슬 퍼런 기세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너도 서른이 넘었는데, 이제 할 때가 됐지.”
“하지만, 동현 형 말처럼 아직 형들도 있는걸요...”
해미는 은호의 대답을 가볍게 뭉개며 말을 이었다.
“인연의 나예리 팀장이 연락할 거다. 상담 날짜 잡으렴.”
갑작스러운 통보에 은호가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감정이 얼굴 위로 스쳤다.
“어머니,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제가….”
그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가득 묻어났지만, 해미는 은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네 형들은 경영 수업 때문에 바쁘잖니. 밖에서는 이 집 아들들이 나이가 찼는데 아무도 장가를 안 간다고 수군대고 있어. 그게 너희 욕이겠니? 어미인 나를 흠 잡는 거지.”
해미가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은 은호가 입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족쇄나 다름없었다.
은호는 습관적인 미소가 무너지지 않도록 입술을 꽉 맞물렸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해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죄인처럼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어야만 했다.
“팀장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은호를 바라보는 예리의 눈꺼풀이 미세하게 떨렸다.하지만 예리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테이블 위에 흐트러진 서류를 정리하기 시작했다.“그런데 팀장님께서도 잊으신 게 있네요.”서류 뭉치를 모아 테이블 위로 탁탁 내리치던 예리의 손길이 허공에서 멈췄다.은호가 테이블 쪽으로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제가 매칭에 참여하면서 걸었던 조건 말입니다.”예리의 미간이 좁혀졌다. 서류를 쥔 손가락 끝에 힘이 들어갔다.“그래서 해진 씨 일에 언제 손을 뗄지 역시 제 의사에 따라 결정할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수줍게 말문이 막히던 조금 전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이 은호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았다.“벌써 제게 인연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고 판단하셨다면 큰 오산입니다.”예리의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서늘하게 얼어붙은 채 은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드르륵- 은호가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이기적이라는 걸 알았다. 유치한 억지라는 것도.그래도 상관없었다.은호는 재킷 깃을 툭 잡아당기며 예리에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감정을 한 꺼풀 걷어낸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제 조건은 아직 유효합니다, 나 팀장님. 그러니 내일도, 이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오늘은 외부 일정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겠습니다.”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가는 은호의 뒤로 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 흩어져 있던 무거운 정적이 테이블 위로 툭 떨어졌다.***오후 6시가 조금 넘은 시간.인연의 1층 로비는 퇴근길에 오른 직원들로 북적였다.한참 동안 허공에 머물던 예리의 시선이 가방 속 휴대폰으로 향했다. 잠금 화면을 열어 지하철 노선도를 검색하는 손가락이 미세하게 굳었다가 움직였다. 조금 전 제게 등을 돌린 채 서늘한 말을 뱉고 가던 은호의 넓은 등판이 화면 위로 자꾸만 겹쳐 보였다.예리는 곧바로 투명한 회전문 앞으로 걸어갔다.고작 일주일이었다.그런데 혼자서 이 두꺼운 유리문을 밀어내는 감각이 낯설어 손끝이 멈칫거렸다.예리는 고개를 가볍게
순간 세 사람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승호가 이제야 모든 퍼즐이 다 맞춰졌다며 손가락을 튕겼다.“어쩐지! 무술 9단이라 할 때부터 보통 분은 아니라고 생각했어. 왜, 전에 팀장님한테 계속 질척거렸던 진상 고객도 딱 한 방에 제압하셨잖아.”승호가 허공에 주먹을 뻗으며 그날 소진이 보여준 동작을 요란하게 흉내 냈다. 은호의 시선이 승호의 요란한 몸짓을 훑다가 멈췄다.‘질척대?’은호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지는 사이, 혜린 역시 고개를 깊게 끄덕이며 곁에 있던 빈 의자를 은영 쪽으로 바짝 끌어당겨 앉았다.“맞아, 강 비서님 이번만이 아니라 매번 이런 구하기 어려운 정보들 무조건 따오시는 것도 수상했어. 올 초에 재직증명서 위조한 고객 털어낼 때도 진짜 대박이었잖아. 완전 사이다.”팀원들의 목소리가 겹치며 회의실이 소란스러워지는 와중, 가람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책상에 한쪽 팔을 올리곤 턱을 괴었다.“있냐, 나는 솔직히 국정원 출신 아닌가도 생각했었는디… 왜냐믄 강 비서님 과거 이야기 일절 안 하시자네.”“헉? 그럼, 막 블랙요원 이런 거?”입을 떡 벌린 승호가 두 손으로 총 모양을 만들더니, 조준하듯 손가락 끝을 예리에게 확 겨누었다.“팀장님, 팀장님은 강 비서님 이전 직장 아시죠? 이력서 직접 보셨을 거 아니에요.”승호가 채근하듯 물었지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는 예리의 손가락은 일정한 박자를 유지했다.예리는 서류 화면에서 시선조차 떼지 않은 채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아니요. 이력서에 전 직장 칸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강 비서님 뽑은 건 제가 아니라 나 대표님이시고요. 저도 그전에 무슨 일을 하셨는지는 몰라요.”은호가 조용히 시선을 예리의 얼굴로 돌렸다. 그녀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으나, 깜빡임 없는 눈동자에는 그저 노트북의 하얀 불빛만 반사되어 흔들릴 뿐이었다.예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승호가 아예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국정원 블랙요원 맞네! 솔직히 형사면 이력서에 적었지. 완전 스펙인데! 이력서에
예리가 리모컨으로 정체불명의 여자가 담긴 화면을 확대했다. 하지만 멀리서 찍힌 데다, 화질이 깨지는 탓에 이목구비가 잔뜩 뭉개졌다. “오지연 뿐만 아니라, 이 여성 역시 노민수의 자작극에 여러 차례 등장했어요. 오지연이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조력자가 있다는 뜻이죠.” 해진이 눈을 질끈 감으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옆에 있던 혜린이 모니터를 응시하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팀장님. 그럼, 저 사람도 노민수와 내연 관계일까요?” 예리가 팔짱을 낀 채 화면 속 여자의 실루엣을 응시했다. “그렇게 추정하는 중이에요. 아직 오지연처럼 명확한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지만요. 해진 씨, 혹시 짐작 가는 사람이 있어요?” 해진이 눈을 가늘게 뜨고 흐릿한 여자의 윤곽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내 무겁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모르겠어요….” 예리가 시선을 거두고 회의실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레이저 포인터의 붉은 불빛을 화면 속 여자에게 고정했다. “오지연, 그리고 이 정체불명의 여자. 두 사람을 미끼로 던져서 노민수가 제 발로 걸어 들어올 덫을 놓을 겁니다. 그게 우리의 이번 계획이에요” 입술과 코 사이에 볼펜을 끼운 채 멍하니 있던 승호가 손을 번쩍 들었다. “팀장님, 그런데 저 여자가 누군지도 모르는데 무슨 수로 노민수를 덫으로 몰아넣어요?” “그러니까 그걸 지금부터 알아내야겠죠?” 예리가 서류를 톡톡 치며 은영을 바라보았다. “은영 씨. 지금부터 노민수 SNS 계정부터 팔로워 목록까지 샅샅이 털어봐요. 저 실루엣이랑 겹치는 인물이 있는지.” “네, 알겠습니다.” 은영이 노트북 키패드 위로 손을 올렸다. 예리가 이어서 승호에게 턱끝을 까딱였다. “승호 씨, 우리 회원 중에 노민수랑 같은 직장 다니는 사람들, 명단 뽑아서 연락 돌려주세요. 노민수와 오지연에 대해서 사소한 소문이라도 좋으니, 귀에 걸리는 정보가 있다면 최대한 수집해 주시고요.” “예! 접수 완료했습니다!” 승호가 주먹을 불끈 쥐며 대답했다. 예리가 반대편에 앉은 가람
예리가 레이저 포인터로 예약 내역서의 출국 날짜를 가리켰다.“노민수, 오지연. 보험금 수령 즉시 한국을 떠날 계획이었어요. 저번 주 토요일이 두 사람이 정한 디데이였고요.”탑승객 이름부터 날짜까지 쭉 시선을 옮기던 해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막연한 의심과 실체를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칼날로 심장을 베이는 느낌에 해진의 뺨을 타고 참지 못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가람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 해진에게 건넸다.휴지가 해진의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예리가 말없이 새로운 영상을 재생시켰다.화면의 장소는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가구 무더기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회색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를 쓴 여자가 발을 들였다.“……!”해진이 벌어진 입술을 젖은 휴지로 틀어막았다.화면 속 여자는 난간으로 성큼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밑을 내려다본 여자가 곧장 옆에 놓인 화분을 집어 들었다.난간 밖으로 뻗어 나온 붉은색 화분이 허공에 멎은 것은 찰나였다. 물을 먹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잎사귀가 거센 바람에 파르르 흔들렸다.한 번 더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여자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붉은색 화분이 무서운 속도로 궤적을 그리며 화면 밑으로 추락했다.허리를 반쯤 숙여 밑을 내려다보던 여자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스크린에서 시선을 뗀 예리가 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처음으로 되돌아간 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해진 씨, 누군지 알아보겠어요?”“멀리서 찍혀서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저 모자.”해진이 훌쩍임을 참아내며 검지 손가락으로 스크린 한 곳을 가리켰다.“제가 오지연한테 선물한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예리가 굳은 표정으로 소진에게 시선을 돌렸다.“다음 영상 보여주세요.”화면이 전환되며 텅 빈 헬스장 내부가 비쳐 들었다. 곧이어 노민수가 들어왔다.카운터
“해진아, 넌 왜 항상 너만 생각하는 거 알아? 지금 네 이런 행동, 정말 이기적인 거야.”창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가로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민수가 낮게 읊조렸다.“민수 씨… 그게 무슨 말이야….”“너만 생각할 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도 생각해야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일이 또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만약에, 만약에….”톤이 높아졌던 그의 목소리에 일순간 물기가 어렸다.“그런 일이 또 일어나면, 너랑 아이 둘뿐이라 생각하니까….”민수가 뒷말을 삼키며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여보….”해진의 목소리에도 덩달아 물기가 비쳤다.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해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여보, 내가 지금은 휴직 상태라 당장 상해 보험에 새로 가입하긴 그렇고… 지금 가진 건강 보험에 상해 한도라도 올릴게.”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수가 창틀에 기댔던 팔을 떼며 해진을 돌아보았다. 붉어진 눈을 한 그가 가죽 시트 위에 놓여 있던 해진의 손을 잡아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끔 살폈지만, 민수는 해진을 안은 팔에 꽉 힘을 줄 뿐이었다.“그래, 잘 생각했어! 해진아. 우리, 그리고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민수의 어깨에 턱이 얹어진 해진은 귓가에 닿아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창문 너머로 초록색 잎사귀들만 빠르게 뒤로 스쳐 지나갔다.해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기시감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그래, 그가 이렇게 좋아하면 된 거다.***“그럼, 그때 한도 때문에 기존 보험을 해지하고 새로 가입하신 거군요.”팔짱을 낀 채 테이블 한곳에 시선을 묻고 있던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네, 맞아요. 설계사분 말씀으로는 상해사망 한도만 따로 올릴 수는 없고, 기존 계약을 해지한 뒤에 새로 가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렇다면 마지막 상해보험은 정확히 언제 가입하신 겁니까?”은호의 질문에 해진의 얼굴에 다시금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몸은 괜찮으시죠?”예리가 의자 바퀴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해진의 붉어진 눈가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들었다.“그럼요, 모두 도움 주신 덕분에 멀쩡해요.”해진이 회의실 안의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시선 끝마다 깊은 고마움이 묻어났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예리의 두 손을 맞잡았다.“저 그날, 팀장님 전화 받고 밤을 꼬박 새웠어요. 그동안은 민수 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기어들어 가던 목소리에서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용기 내 보려고요. 팀장님 말대로 지금은,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요.”예리는 제 손을 붙잡은 해진의 마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등이 주체할 수 없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손끝으로 전해지는 연약한 떨림과 온기를 가만히 받아내며, 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불안하게 떨리는 손과 달리, 해진의 눈동자는 곧게 살아 있었다. 예리도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저희도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약속할게요.”해진이 주먹을 쥐듯 예리의 손을 꽉 쥐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예리가 팔을 뻗어 회의실 테이블 상석을 가리켰다.“그럼, 한시가 급하니까 바로 시작할까요?”해진이 자리에 앉자, 예리가 커다란 스크린 앞으로 걸어 나가 돌아서며 리모컨을 쥐었다.“해진 씨, 지금까지 노민수와 전화 통화는 계속하고 계신 거죠?”해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집에서 나온 뒤로 마음 정리하러 템플스테이 왔다고 했어요. 휴대폰도 잠깐씩만 켤 수 있다고 못 박아뒀고요. 어제저녁에도 통화했는데, 아직까지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어요.”“힘드시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통화 부탁드려요.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려주시고요.”“남편, 아니, 노민수한테 사랑한다는 역겨운 거짓말을 듣는 게 곤욕스럽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