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
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
“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
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
“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
“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
“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돼. 사랑하는 남자가 죽었으면, 슬퍼할 시간에 남긴 재산이나 확인해야지. 안 그래?”
예리의 진담 반농담 반의 섞인 말에 주은이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나만 이해 안 됐나 봐. 나 빼고 다 울더라. 특히 옆에 앉았던 남자는… 에휴, 됐다. 네 팬인 거 같으니까 그냥 넘길래.”
“다른 사람들 반응이 지극히 정상인 거랍니다, 나예리 팀장님.”
주은이 이마를 짚고, 깊은 한숨을 쉬었다. 오랜 친구이긴 했지만, 사랑에 한해서만큼은 두 사람 사이에 공감대라곤 전혀 없었다.
주은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예리는 여전히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랑이 끝나는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데, 그걸 어떻게 덥석 믿니?”
"그래도, 세상 어딘가엔 영원한 사랑을 가진 사람이 존재할 수도 있는 거잖아.”
주은의 귀여운 반박에 예리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내가 지금까지 본 손목이 몇 개인 줄 알아? 단 한 번도 없었어. 내 사무실 찾아오는 사람들 봐. 다들 사랑 찾으러 왔다면서, 막상 리스트 내밀면 상대 등급부터 따져. 사랑이 그렇게 대단한 감정이라면서.”
“그건... 현실적인 조건도 중요하니까….”
“난 그런 모순을 매일 밥 먹듯이 보고 사는데, 하루아침에 사랑의 힘 같은 게 믿어지겠어?”
자신을 안타깝게 바라보는 주은에게 예리가 충고하듯 덧붙였다.
“그러니까 너도 그만 사랑 타령하고, 돈이나 모아. 사랑은 변해도 돈은 안 변하니까.”
주은이 그런 예리를 보더니, 갑자기 두 손을 모아 허공에 대고 외쳤다.
“에로스 님! 여기 사랑을 모르는 불쌍한 중생 좀 어여삐 봐주세요!”
주은의 말도 안 되는 기도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예리가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에로스는 그리스 신인데, 불교 용어로 기도하면 알아듣겠니?”
예리의 말에 주은이 입술을 삐죽이며 젓가락을 들었다.
“치, 어차피 간절하면 다 통하는 법이거든? 두고 봐. 너도 언젠가 그 에로스 화살 정통으로 맞고 ‘사랑해요!’ 외치는 날이 올 테니까.”
***
은호는 주방 안으로 발을 들이기 전 잠시 멈춰 섰다. 어머니와 두 형을 마주하는 일은 매번 지독한 긴장을 동반했다.
“후우….”
은호는 짧게 숨을 내뱉고는,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를 걸쳤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에서 긴장감이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어머니, 저 왔습니다.”
인사를 건네며 들어서는 그는 누가 봐도 예의 바르고 정중한 아들의 모습이었다.
주방 안 커다란 테이블에는 박 회장과 두 형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왔니.”
해미가 은호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건조하게 대답했다.
은호가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이미 식사를 시작한 상태였다. 식탁 위로 오가는 숟가락 부딪치는 소리만이 차갑게 울려 퍼질 뿐, 누구도 은호를 반갑게 맞아주지 않았다.
은호는 이러한 가족의 태도가 익숙한 듯,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리에 앉았다.
“형들 오랜만이에요.”
은호가 앞의 두 사람에게 인사를 건넸다.
첫째 도현은 은호가 오든 말든 안중에도 없다는 듯 묵묵히 식사에만 전념했다. 반면 둘째 동현이 젓가락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쏘아붙였다.
“야, 좀 빨리빨리 다녀. 어머니랑 형 기다리시는 거 안 보여?”
“미안해, 형. 죄송합니다, 어머니.”
누가 봐도 노골적인 면박이었지만, 은호는 늘 그래왔듯 상황을 유연하게 넘기려 부드러운 사과를 건넸다.
“됐다, 너한테 뭘 바라겠니. 어서 먹기나 하렴.”
해미의 차가운 대꾸 뒤로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때, 가사도우미가 국을 내왔다.
“감사합니다.”
은호가 그녀를 올려다보며 눈가에 맑은 호선을 그렸다. 보는 사람마저 무장해제 시킬 만큼 선하고 정중한 미소였다.
은호는 이내 시선을 거두고 숟가락을 들었다. 아직 한 술도 뜨지 않았음에도 이미 명치 끝이 꽉 막힌 기분이었지만, 묵묵히 밥을 밀어 넣었다. 깨작거렸다가는 또 어떤 트집이 잡힐지 몰랐다.
“아 참, 은호야. 다음 주 중으로 시간 좀 내렴.”
해미가 은호에게 명령하듯 툭 던졌다. 은호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소리 없이 내려놓았다.
“네, 시간 낼게요. 그런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세요?”
해미의 붉은 입술이 매끄럽게 호선을 그렸다. 조금 전까지 은호를 투명 인간 취급하던 냉담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녀는 부드럽게 손을 뻗어 식탁 위에 놓인 은호의 손을 덮어 잡았다.
“은호야, 너도 이제 슬슬 결혼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니?”
줄곧 미소를 잘 유지하던 은호의 얼굴이 미세하게 떨렸다.
“어머니, 갑자기 결혼이라니요….”
“네? 엄마, 저희도 있는데 이 자식 먼저요?”
동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해미가 조용히 하라는 듯 눈에 힘을 주어 그를 쏘아보았다.
옆에 있던 도현 역시 서늘한 눈빛으로 동현을 압박했다. 동현은 억울한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도현의 서슬 퍼런 기세에 결국 입을 다물었다.
“너도 서른이 넘었는데, 이제 할 때가 됐지.”
“하지만, 동현 형 말처럼 아직 형들도 있는걸요...”
해미는 은호의 대답을 가볍게 뭉개며 말을 이었다.
“인연의 나예리 팀장이 연락할 거다. 상담 날짜 잡으렴.”
갑작스러운 통보에 은호가 평소라면 절대 보이지 않았을 감정이 얼굴 위로 스쳤다.
“어머니,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제가….”
그의 목소리에 당황함이 가득 묻어났지만, 해미는 은호의 말을 단호하게 끊었다.
“네 형들은 경영 수업 때문에 바쁘잖니. 밖에서는 이 집 아들들이 나이가 찼는데 아무도 장가를 안 간다고 수군대고 있어. 그게 너희 욕이겠니? 어미인 나를 흠 잡는 거지.”
해미가 짐짓 서글픈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얼굴은 은호가 입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강력한 족쇄나 다름없었다.
은호는 습관적인 미소가 무너지지 않도록 입술을 꽉 맞물렸다.
일그러지려는 표정을 해미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그는 죄인처럼 시선을 바닥으로 떨구어야만 했다.
“유 이사님.”“네.”"그만 좀 보시죠?”예리는 손바닥을 쫙 펼쳐 얼굴 옆을 벽처럼 가렸다.“싫습니다.”‘이 사람이 정말…!’손을 내린 예리가 휙 고개를 돌려 은호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눈썹을 한 번 까딱이는 은호 때문에 예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점심쯤 도운의 집을 나와 목상군 관광을 마치고 아윤의 촬영장에 도착한 지금까지, 유은호는 자신에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건데요.”“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계획이라는 게 뭐냐고요.”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가는 도운을 힐끔 본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제가 이야기하면 이사님 가만히 안 있으실 거잖아요.”“그 내용이 뭔지에 따라 다르겠죠.”예리가 얄밉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은호를 흘겨보았다.“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 참, 이렇게 된 거 오늘 잘 때도 제 옆에서 주무시지 그래요? 제가 팔베개도 해드릴게요.”제 팔을 넓게 펼쳐 탁탁 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번 의뢰는 그만두시는 게….”“예리야!”은호의 등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아윤 씨가 아니라… 언니!”뒤에 서 있던 도운을 의식한 예리가 아차 싶어 순간 말을 바꿨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예리를 향해, 아윤이 나풀거리는 연보랏빛 한복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뛰어왔다.“도착했으면 연락하지 왜 여기에 이러고 서 있어…… 어?”눈꼬리를 접으며 예리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들던 아윤은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도운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싹 사라졌다.“저는 통화할 게 있어서 차에 가 있겠습니다. 구경하시고 주차장으로 오세요.”“도운 씨…!”아윤의 굳어버린 얼굴을 확인한 도운은 건조하게 말을 전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한숨을 푹 내쉰 예리는 아윤을 쳐다보았다. 아윤 역시 멀어지는 도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
도운이 체크 셔츠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냈다.“이런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마음을 받아. 아윤 씨 정말 좋은 사람인데… 나 같은 놈 말고, 아윤 씨만 온전히 아껴주고 바라봐 줄 사람 만나야지….”말을 잠시 멈춘 도운은 자신을 따라 축 처진 은호의 어깨를 툭 팔꿈치로 쳤다.“게다가 아윤 씨는 대스타잖아. 나 같은 시골 농사꾼이 가당키나 하냐?”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도운의 자조적인 농담에도 은호는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그저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죽죽 그어놓은 의미 없는 선 무더기만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은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예리는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들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네…?”상체를 은호 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인 예리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유 이사님은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 도운 씨가 아윤 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말요?”예리의 상체가 바짝 기울어지며 이제는 거의 은호의 턱밑까지 다가서자, 은호가 살짝 몸을 물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본인 입으로 다른 사람이 투영된다는데, 그러면 아닙니까?”“유 이사님은 착각해 본 적 없으세요?”“…무슨 착각 말입니까?”“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거든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 먹어보니 내가 원했던 맛이 아니었던 경험 없으세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그건 내가 진짜 무슨 맛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서 그래요. 그런데 사랑도 똑같거든요.”예리는 은호에게 바짝 기울였던 몸을 곧게 세웠다.“그럼,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갈게요. 이사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땀과 밤이슬에 적셔진 은호의 이마와 흩어진 머리카락을 예리가 눈동자를 굴려 살짝 훑어 내렸다.“도운 씨 찾느라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그럼…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겁니까?”은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아니요.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이사님은
예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악문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은호 이사님. 선은 넘지 마시죠.”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호를 쏘아본 예리가 어깨를 돌렸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운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하지만 예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은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도운 형 말입니다….”떼어지지 않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실은 아윤 씨 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 억지로 진행해 봤자 결국 아윤 씨 상처만 더 커질 겁니다.”“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아윤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니요?”어느새 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그의 기억은 조금 전, 도운을 찾아 헤매던 뒷마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타닥.은호의 하얀 운동화가 급하게 멈춰 섰다.저녁 식사 전에 도운이 알려주었던 뒷마당의 길고양이 집이 생각나 찾아왔다.낮은 나무가 우거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도운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은호의 땀에 젖은 흰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채, 그는 도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여기 계셨네요!”고양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은호를 본 도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나 찾으러 온 거야?”은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괜히 바닥을 긁적였다.“아윤 씨는 울면서 나갔죠, 형은 돌아오질 않죠. 걱정돼서 여기저기 한참 찾으러 다녔어요.”도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아윤 씨가… 울었어?”“하아… 네.”무거운 한숨이 섞인 대답에 도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말을 마친 아윤은 예리에게 짧게 목인사를 남긴 채 가방을 고쳐 들었다.뛰다시피 대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예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소진과 은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강 비서님! 유 이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한가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고요!”“팀장님…? 무슨 일 났어요…?”눈을 게슴츠레 뜬 소진이 기우뚱하게 몸을 일으켰다. 은호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예리를 올려다보았다.“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이사님은 도운 씨 좀 찾아봐 주세요! 강 비서님은 저 따라 오시고요! 빨리요!”예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자, 은호는 올라오는 술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찾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고개를 대충 끄덕인 예리는 소진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아윤이 뛰어나간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나갔다.변변찮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밤의 시골길은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혹여 아윤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걱정된 예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홀로 쓸쓸히 걷는 실루엣이 보였다.“아윤 씨! 잠시만요! 멈춰봐요!”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윤의 앞에 선 예리는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눈가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예리는 아윤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물었다.“아윤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저… 저 그냥 그만할래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 없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아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다시는 오늘처럼 찾아오지 말래요….”아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착각하지 말라고… 저를 보면 오히려 화가 난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요!”울분을 터뜨린
도운의 손목 위 문양은 이미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아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도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윤 씨, 상담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요? 도운 씨 표정이 화난 사람 같아서요.”“아니요… 아, 전에 도운 씨가 바쁠 때 고양이들 밥을 한 번 대신 챙겨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계속 저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그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예리 씨, 혹시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윤이 예리의 소매 끝을 와락 붙들었다. 예리는 아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은호는 고양이 좋아해? 보니까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사실 제가 랜선… 집사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이리 와서 자세 낮추고, 이렇게 주먹을 슬쩍 내밀어봐.”은호가 도운을 따라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은호의 손가락 마디에 머리를 꾹 비벼대더니, 금세 기분이 좋은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핑크빛 배를 까뒤집었다.“와, 은호 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도 은근히 얼굴 보거든. 눈이 아주 정확해, 우리 밤순이.”도운이 삼색 고양이의 말랑한 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은호 역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밤순이의 배를 살살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털이 보드랍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은호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밤순이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은호를 대견한 동생 보듯 바라보던 도운이 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몇 마리 더 있는데, 밥 주러 같이 갈래?”“아… 그래도 되겠습… 될까요?”“그럼, 당연하지!”도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은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은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런 거리의 온기가 낯설기만 했다.“가자. 우리 애기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도운이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걸 보고서야, 은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며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도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형, 이건 여기 두면 될까요?”“어, 은호야. 거기다 내려놔.”본채 마당을 가로지르던 예리의 눈이 샐쭉 접혔다.‘또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나 팀장님, 오셨네요?”그릇을 정갈하게 내려놓던 은호가 다가온 예리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어디 나간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네요?”“아
주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그거 말고는 더 들은 게 없는 거 같은데…."예리는 말없이 제 접시 위의 음식을 뒤적였다.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정치계까지 발이 넓은 주은조차 이 정도라면 유은호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될 것 같았다.“아트센터 행사 말고는 외부 활동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친구도 없고, 모임도 안 하는 것 같고… 아! 유은호 아는 사람, 딱 한 명 있다!”주은의 실낱같은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누구?”순간 주은이 대답 대신 미간을 잔뜩 찌
예리가 무슨 볼일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은호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내밀었다.“이거, 손수건…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잘 썼습니다!”은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을 힐끔 내려다본 예리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네, 다행이네요.”말을 마친 예리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그러자 은호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저…!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연락처라도 알려주시면….”예리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매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