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주은은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거 말고는 더 들은 게 없는 거 같은데…."
예리는 말없이 제 접시 위의 음식을 뒤적였다.
연예계는 물론 스포츠, 정치계까지 발이 넓은 주은조차 이 정도라면 유은호라는 남자를 파악하는 건 생각보다 더 까다로운 과제가 될 것 같았다.
“아트센터 행사 말고는 외부 활동도 아예 없는 것 같던데. 친구도 없고, 모임도 안 하는 것 같고… 아! 유은호 아는 사람, 딱 한 명 있다!”
주은의 실낱같은 말에 젓가락을 내려놓은 예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누구?”
순간 주은이 대답 대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너 예전에 나, 장 의원 아들이랑 사귀던 거 기억나?”
“기억 안 날 수가 없지. 그렇게 사귀지 말래도 난리를 치더니 결국엔 걔한테 들려줄 욕 리스트 만들었다면서 보여주던 게 누군데."
쾅, 주은은 그때 일이 생각나 테이블을 내리쳤다.
“걔는 더 먹어도 싸! 아무튼, 그 자식이 예전에 슬쩍 말한 적이 있거든. 유은호, 걔 완전 로맨스 드라마 덕후라고.”
“로맨스 드라마… 덕후? 그거 확실한 정보야?”
“그 자식 친구 중에 유은호랑 뉴욕에서 같이 유학한 애가 있나 봐. 인성 더러운 놈이 남 궁금한 건 또 못 참아서, 그 친구를 달달 볶아서 이것저것 캐물었나 보더라고.”
“그래서?”
예리가 찰나의 틈도 참지 못하고 주은을 재촉했다.
“하루는 유은호 집에 놀러 갔는데, 세상에. 방이 온통 드라마 포스터랑 블루레이로 가득하더래.”
주은이 흥분을 가라앉히듯 잠깐 숨을 고르더니 말을 이었다.
“너 블루레이 알지? 드라마 끝나면 팬들이 소장용으로 만드는 거. 하여튼 그거랑 대본집까지 아주 전시장 수준이었다나 봐.”
예리가 턱을 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거 웬만큼 좋아하는 사람 아니면 안 사거든. 게다가 제일 중요한 건 죄다 로맨스물뿐이었대.”
“로맨스 드라마라... 일이 길어지겠는데….”
예리가 막막함에 낮게 읊조렸다.
말이 없어진 예리를 가만히 살피던 주은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참, 너 오전에 결혼식은 잘 다녀왔어?”
“결혼식? 잘 다녀왔지.”
이제야 주은과 눈을 맞춘 예리가 별거 아니라는 듯 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네 예상대로였어? 예상 밖의… 뭐랄까, 의외의 달콤한 전개 같은 건 없었어?”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린 예리가 오전에 다녀온 신혜영의 결혼식을 떠올렸다.
***
천장 가득 흐드러진 연보랏빛 위스테리아가 은하수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테이블마다 놓인 야생화 화병과 기둥을 타고 올라간 푸른 덩굴 아치는 마치 이곳이 강남 한복판이 아닌, 요정들이 숨겨둔 숲속 궁전이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에 취하다'라는 꽃말처럼, 오늘의 주인공 현진과 혜영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로 서로에게 흠뻑 취해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의 눈부신 미래를 위한 마지막 행진만이 남아 있습니다. 하객 여러분 큰 박수로 맞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객들이 일제히 스마트폰을 들어 올리며 환호와 박수를 쏟아냈다.
하지만 그 속에서 홀로 한 여자만이 웨딩홀 입구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슬슬 올 때가 됐는데…"
신부의 손목을 흘끗 확인한 예리가 낮게 읊조렸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손가락 끝이 팔뚝 위를 신경질적으로 까딱였다.
바로 그때였다.
“신랑, 신부. 행...!”
사회자의 외침이 단칼에 베인 듯 툭 끊겼다.
쾅—!
거친 파열음과 함께 육중한 웨딩홀 문이 벽에 부딪히며 비명을 질렀다.
쏟아지던 박수 소리도, 축복 섞인 환호성도 일제히 얼어붙었다.
그 서늘한 정적 속에서 타이밍을 놓친 직원이 당황한 나머지 폭죽 버튼을 눌러버렸다.
퍼엉, 펑!
경쾌한 소음이 우아한 클래식 선율을 난도질했다.
눈치 없는 연보랏빛 꽃가루가 눈송이처럼 쏟아지는 사이 그 화사한 잔해를 헤치며 한 여자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가슴까지 깊게 파인, 누가 봐도 신부보다 풍성하고 화려한 웨딩드레스 차림이었다.
당황한 직원들이 손을 쓸 틈도 없이 여자는 성난 황소처럼 버진로드 위로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난입한 불청객의 모습에 현진과 혜영은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특히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현진은 저승사자라도 마주한 듯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갔다.
여자가 버진로드 끝에 선 현진을 죽일 듯 노려보더니 이내 포효에 가까운 괴성을 내질렀다.
“이 결혼, 무효야!”
그와 동시에 여자가 현진에게 몸통 박치기를 하듯 달려들어 멱살을 움켜쥐었다.
옆에 서 있던 혜영은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예리만이 그 아수라장 한복판에서 관망하듯 슬쩍 입꼬리를 올렸다.
"나만 사랑하겠다며! 나랑 결혼한다면서, 이 나쁜 놈아!”
여자가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며 울분을 토해냈지만, 현진은 귀찮은 벌레라도 떼어내듯 여자의 손을 털어냈다.
그는 낯선 사람을 보듯 차가운 시선으로 여자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거 왜 이러십니까? 사람 잘못 보셨어요.”
여자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여자는 다시 남자의 멱살을 억척스럽게 움켜쥐었다.
“뭐? 잘못 봐? 너 지금 나랑 장난해?”
참다못한 혜영이 서둘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여자의 팔을 밀어내며 외쳤다.
“도대체 누구신데 남의 남편한테 이러세요? 일단 이거 놓고 말씀하시라고요!”
여자는 혜영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 내렸다.
“허! 내가 누구냐고?”
그러고는 핏발 선 눈으로 현진을 노려보며 비릿하게 콧방귀를 뀌었다.
“나, 이 개자식 애인이다. 왜?”
“유 이사님.”“네.”"그만 좀 보시죠?”예리는 손바닥을 쫙 펼쳐 얼굴 옆을 벽처럼 가렸다.“싫습니다.”‘이 사람이 정말…!’손을 내린 예리가 휙 고개를 돌려 은호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눈썹을 한 번 까딱이는 은호 때문에 예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점심쯤 도운의 집을 나와 목상군 관광을 마치고 아윤의 촬영장에 도착한 지금까지, 유은호는 자신에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건데요.”“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계획이라는 게 뭐냐고요.”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가는 도운을 힐끔 본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제가 이야기하면 이사님 가만히 안 있으실 거잖아요.”“그 내용이 뭔지에 따라 다르겠죠.”예리가 얄밉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은호를 흘겨보았다.“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 참, 이렇게 된 거 오늘 잘 때도 제 옆에서 주무시지 그래요? 제가 팔베개도 해드릴게요.”제 팔을 넓게 펼쳐 탁탁 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번 의뢰는 그만두시는 게….”“예리야!”은호의 등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아윤 씨가 아니라… 언니!”뒤에 서 있던 도운을 의식한 예리가 아차 싶어 순간 말을 바꿨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예리를 향해, 아윤이 나풀거리는 연보랏빛 한복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뛰어왔다.“도착했으면 연락하지 왜 여기에 이러고 서 있어…… 어?”눈꼬리를 접으며 예리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들던 아윤은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도운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싹 사라졌다.“저는 통화할 게 있어서 차에 가 있겠습니다. 구경하시고 주차장으로 오세요.”“도운 씨…!”아윤의 굳어버린 얼굴을 확인한 도운은 건조하게 말을 전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한숨을 푹 내쉰 예리는 아윤을 쳐다보았다. 아윤 역시 멀어지는 도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
도운이 체크 셔츠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냈다.“이런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마음을 받아. 아윤 씨 정말 좋은 사람인데… 나 같은 놈 말고, 아윤 씨만 온전히 아껴주고 바라봐 줄 사람 만나야지….”말을 잠시 멈춘 도운은 자신을 따라 축 처진 은호의 어깨를 툭 팔꿈치로 쳤다.“게다가 아윤 씨는 대스타잖아. 나 같은 시골 농사꾼이 가당키나 하냐?”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도운의 자조적인 농담에도 은호는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그저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죽죽 그어놓은 의미 없는 선 무더기만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은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예리는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들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네…?”상체를 은호 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인 예리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유 이사님은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 도운 씨가 아윤 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말요?”예리의 상체가 바짝 기울어지며 이제는 거의 은호의 턱밑까지 다가서자, 은호가 살짝 몸을 물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본인 입으로 다른 사람이 투영된다는데, 그러면 아닙니까?”“유 이사님은 착각해 본 적 없으세요?”“…무슨 착각 말입니까?”“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거든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 먹어보니 내가 원했던 맛이 아니었던 경험 없으세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그건 내가 진짜 무슨 맛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서 그래요. 그런데 사랑도 똑같거든요.”예리는 은호에게 바짝 기울였던 몸을 곧게 세웠다.“그럼,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갈게요. 이사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땀과 밤이슬에 적셔진 은호의 이마와 흩어진 머리카락을 예리가 눈동자를 굴려 살짝 훑어 내렸다.“도운 씨 찾느라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그럼…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겁니까?”은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아니요.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이사님은
예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악문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은호 이사님. 선은 넘지 마시죠.”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호를 쏘아본 예리가 어깨를 돌렸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운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하지만 예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은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도운 형 말입니다….”떼어지지 않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실은 아윤 씨 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 억지로 진행해 봤자 결국 아윤 씨 상처만 더 커질 겁니다.”“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아윤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니요?”어느새 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그의 기억은 조금 전, 도운을 찾아 헤매던 뒷마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타닥.은호의 하얀 운동화가 급하게 멈춰 섰다.저녁 식사 전에 도운이 알려주었던 뒷마당의 길고양이 집이 생각나 찾아왔다.낮은 나무가 우거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도운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은호의 땀에 젖은 흰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채, 그는 도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여기 계셨네요!”고양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은호를 본 도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나 찾으러 온 거야?”은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괜히 바닥을 긁적였다.“아윤 씨는 울면서 나갔죠, 형은 돌아오질 않죠. 걱정돼서 여기저기 한참 찾으러 다녔어요.”도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아윤 씨가… 울었어?”“하아… 네.”무거운 한숨이 섞인 대답에 도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말을 마친 아윤은 예리에게 짧게 목인사를 남긴 채 가방을 고쳐 들었다.뛰다시피 대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예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소진과 은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강 비서님! 유 이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한가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고요!”“팀장님…? 무슨 일 났어요…?”눈을 게슴츠레 뜬 소진이 기우뚱하게 몸을 일으켰다. 은호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예리를 올려다보았다.“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이사님은 도운 씨 좀 찾아봐 주세요! 강 비서님은 저 따라 오시고요! 빨리요!”예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자, 은호는 올라오는 술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찾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고개를 대충 끄덕인 예리는 소진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아윤이 뛰어나간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나갔다.변변찮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밤의 시골길은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혹여 아윤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걱정된 예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홀로 쓸쓸히 걷는 실루엣이 보였다.“아윤 씨! 잠시만요! 멈춰봐요!”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윤의 앞에 선 예리는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눈가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예리는 아윤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물었다.“아윤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저… 저 그냥 그만할래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 없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아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다시는 오늘처럼 찾아오지 말래요….”아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착각하지 말라고… 저를 보면 오히려 화가 난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요!”울분을 터뜨린
도운의 손목 위 문양은 이미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아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도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윤 씨, 상담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요? 도운 씨 표정이 화난 사람 같아서요.”“아니요… 아, 전에 도운 씨가 바쁠 때 고양이들 밥을 한 번 대신 챙겨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계속 저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그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예리 씨, 혹시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윤이 예리의 소매 끝을 와락 붙들었다. 예리는 아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은호는 고양이 좋아해? 보니까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사실 제가 랜선… 집사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이리 와서 자세 낮추고, 이렇게 주먹을 슬쩍 내밀어봐.”은호가 도운을 따라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은호의 손가락 마디에 머리를 꾹 비벼대더니, 금세 기분이 좋은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핑크빛 배를 까뒤집었다.“와, 은호 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도 은근히 얼굴 보거든. 눈이 아주 정확해, 우리 밤순이.”도운이 삼색 고양이의 말랑한 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은호 역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밤순이의 배를 살살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털이 보드랍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은호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밤순이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은호를 대견한 동생 보듯 바라보던 도운이 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몇 마리 더 있는데, 밥 주러 같이 갈래?”“아… 그래도 되겠습… 될까요?”“그럼, 당연하지!”도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은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은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런 거리의 온기가 낯설기만 했다.“가자. 우리 애기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도운이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걸 보고서야, 은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며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도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형, 이건 여기 두면 될까요?”“어, 은호야. 거기다 내려놔.”본채 마당을 가로지르던 예리의 눈이 샐쭉 접혔다.‘또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나 팀장님, 오셨네요?”그릇을 정갈하게 내려놓던 은호가 다가온 예리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어디 나간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네요?”“아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