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
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
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
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
“네, 어머니.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
“잘 생각했어. 올해 결혼한 유력 가문 자제들 반 이상은 인연에서 진행했다더구나. 나 팀장, 실력 하나는 독보적이니 걱정 말렴.”
해미는 얼마 전, 예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너는 특별히 더 신경 써달라고 직접 당부해 뒀어.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네 매칭은 아주 공들여 준비할 거야.”
“네, 감사합니다.”
은호는 막막한 속을 숨긴 채 강박적으로 미소를 지었다.
“올해는 은호 덕분에 나도 혼주복 좀 입어볼 수 있으려나?”
해미가 혼자 즐거운 듯 우아하면서도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해미의 서늘한 웃음소리 사이로,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식탁 위를 위태롭게 채웠다.
누구 하나 은호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도현은 여전히 은호를 없는 취급 했고, 동현은 은호를 얄밉게 쏘아볼 뿐이었다.
은호는 입안의 음식물이 모래알처럼 느껴졌지만, 해미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호가 답답한 듯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백미러로 은호의 안색을 살피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근처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
한강 너머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빌딩 숲을 응시하던 은호가 선우에게 시선을 옮겼다.
“괜찮습니다. 찬 바람을 좀 쐬니까 나아지는 것 같아요….”
은호는 애써 괜찮은 척 웃어 보였지만, 선우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가 넌지시 물었다.
“박 회장님께서 주선하신 자리, 정말 나가실 겁니까?”
박 회장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마련한 자리라는 걸 모를 리 없는 은호의 눈동자가 허공을 맴돌았다.
느릿하게 감겼다 뜨여진 눈동자 속으로 짙은 체념이 내려앉았다.
“…어머니를 실망시켜 드릴 순 없죠. 직접 마련하신 자리인데.”
희미하게 입가에 걸린 미소가 오히려 보는 사람의 마음을 더 아리게 만들었다. 선우가 핸들을 고쳐 쥐며 다시 물었다.
“인연에 대해 미리 좀 알아볼까요?”
은호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어차피 거절하고 올 자린데, 저 하나 때문에 다른 분들까지 힘 빼게 하고 싶지 않네요.”
은호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상류층 혼사를 전담하는 ‘인연’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화려한 명성조차 은호에겐 역겹게만 느껴졌다.
조건에 맞춰 인간의 등급을 매기고, 사랑을 돈으로 환산하는 속물들의 집합소.
어머니의 관심을 얻기 위해 그런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가야 하는 현실이 비참했다.
문득 은호는 낮에 건네받은 손수건을 떠올렸다.
재킷 주머니에서 정갈하게 접힌 손수건을 꺼내자, 자신을 올려다보던 투명하고 커다란 눈망울이 선명하게 되살아났다.
짙은 쌍꺼풀 아래로 길게 뻗은 눈매는 정교하게 세공된 보석처럼 아름다웠으나, 그 맑은 눈동자에 담긴 기운만은 서늘할 만큼 차가웠다.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와 무표정한 얼굴 역시 범접하기 힘든 아우라를 풍겼다.
그런 그녀가 울고 있는 자신에게 선뜻 손수건을 내밀었다. 찰나에 스친 손가락 끝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했다.
‘그냥 가지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듯 미련 없이 돌아서던 뒷모습. 사실 은호에게 이런 대가 없는 호의는 처음이었다.
늘 무언가를 바라고 다가오는 이들뿐이었기에, 이름도 모를 타인이 베푼 순수한 친절은 낯설기만 했다.
손수건을 고쳐 쥘 때마다 그녀와 어울리는 은은하고 시원한 배 향이 옅게 배어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생소한 감각에 은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창틈으로 밤바람 밀려들었지만, 은호의 곁에는 여전히 그녀의 향기가 맴돌았다.
***
박 회장이 처음 인연을 방문한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장대비를 겨우 뚫고 인연에 도착한 예리는 조수석에 던져두었던 가방과 휴대폰을 챙겼다. 액정 위에는 강 비서의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떠 있었다.
평소 철저한 강 비서의 성격상, 출근 시간도 전부터 서두른 연락은 분명 무언가 터졌다는 신호였다. 그리고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사무실 문을 열자마자 굳은 얼굴의 비서 소진이 다가와 목소리를 낮췄다.
“팀장님, 방금 해상 비서실 측에서 연락받았습니다. 박해미 회장님이 오늘 오후에 직접 방문하시겠답니다.”
막내아들의 커플 매칭 상담을 원한다는 말만 남긴 채, 구체적인 일정 협의도 없이 밀어붙이는 박 회장의 방식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대한민국 그 누구도 해상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할 거라는 확신이 묻어나는 통보였다.
소진의 보고를 듣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강 비서님, 우선 박 회장님 일정 제외하곤 오늘 스케줄 전부 취소해 주세요. 그리고 해상 관련 자료도, 박 회장 최근 동향 중심으로 모조리 긁어모아 주세요.”
예리의 지시에 소진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리는 가방을 툭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낮게 읊조렸다.
“누굴 만났고 어디에 지갑을 열었는지, 아주 사소한 동선 하나까지 전부.”
잠시 말을 멈춘 예리가 소진을 보며 자신 있게 미소 지었다.
“호랑이굴에 들어가려면, 준비부터 제대로 해야겠죠?”
“유 이사님.”“네.”"그만 좀 보시죠?”예리는 손바닥을 쫙 펼쳐 얼굴 옆을 벽처럼 가렸다.“싫습니다.”‘이 사람이 정말…!’손을 내린 예리가 휙 고개를 돌려 은호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눈썹을 한 번 까딱이는 은호 때문에 예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점심쯤 도운의 집을 나와 목상군 관광을 마치고 아윤의 촬영장에 도착한 지금까지, 유은호는 자신에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건데요.”“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계획이라는 게 뭐냐고요.”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가는 도운을 힐끔 본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제가 이야기하면 이사님 가만히 안 있으실 거잖아요.”“그 내용이 뭔지에 따라 다르겠죠.”예리가 얄밉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은호를 흘겨보았다.“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 참, 이렇게 된 거 오늘 잘 때도 제 옆에서 주무시지 그래요? 제가 팔베개도 해드릴게요.”제 팔을 넓게 펼쳐 탁탁 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번 의뢰는 그만두시는 게….”“예리야!”은호의 등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아윤 씨가 아니라… 언니!”뒤에 서 있던 도운을 의식한 예리가 아차 싶어 순간 말을 바꿨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예리를 향해, 아윤이 나풀거리는 연보랏빛 한복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뛰어왔다.“도착했으면 연락하지 왜 여기에 이러고 서 있어…… 어?”눈꼬리를 접으며 예리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들던 아윤은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도운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싹 사라졌다.“저는 통화할 게 있어서 차에 가 있겠습니다. 구경하시고 주차장으로 오세요.”“도운 씨…!”아윤의 굳어버린 얼굴을 확인한 도운은 건조하게 말을 전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한숨을 푹 내쉰 예리는 아윤을 쳐다보았다. 아윤 역시 멀어지는 도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
도운이 체크 셔츠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냈다.“이런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마음을 받아. 아윤 씨 정말 좋은 사람인데… 나 같은 놈 말고, 아윤 씨만 온전히 아껴주고 바라봐 줄 사람 만나야지….”말을 잠시 멈춘 도운은 자신을 따라 축 처진 은호의 어깨를 툭 팔꿈치로 쳤다.“게다가 아윤 씨는 대스타잖아. 나 같은 시골 농사꾼이 가당키나 하냐?”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도운의 자조적인 농담에도 은호는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그저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죽죽 그어놓은 의미 없는 선 무더기만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은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예리는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들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네…?”상체를 은호 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인 예리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유 이사님은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 도운 씨가 아윤 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말요?”예리의 상체가 바짝 기울어지며 이제는 거의 은호의 턱밑까지 다가서자, 은호가 살짝 몸을 물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본인 입으로 다른 사람이 투영된다는데, 그러면 아닙니까?”“유 이사님은 착각해 본 적 없으세요?”“…무슨 착각 말입니까?”“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거든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 먹어보니 내가 원했던 맛이 아니었던 경험 없으세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그건 내가 진짜 무슨 맛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서 그래요. 그런데 사랑도 똑같거든요.”예리는 은호에게 바짝 기울였던 몸을 곧게 세웠다.“그럼,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갈게요. 이사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땀과 밤이슬에 적셔진 은호의 이마와 흩어진 머리카락을 예리가 눈동자를 굴려 살짝 훑어 내렸다.“도운 씨 찾느라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그럼…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겁니까?”은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아니요.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이사님은
예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악문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은호 이사님. 선은 넘지 마시죠.”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호를 쏘아본 예리가 어깨를 돌렸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운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하지만 예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은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도운 형 말입니다….”떼어지지 않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실은 아윤 씨 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 억지로 진행해 봤자 결국 아윤 씨 상처만 더 커질 겁니다.”“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아윤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니요?”어느새 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그의 기억은 조금 전, 도운을 찾아 헤매던 뒷마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타닥.은호의 하얀 운동화가 급하게 멈춰 섰다.저녁 식사 전에 도운이 알려주었던 뒷마당의 길고양이 집이 생각나 찾아왔다.낮은 나무가 우거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도운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은호의 땀에 젖은 흰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채, 그는 도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여기 계셨네요!”고양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은호를 본 도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나 찾으러 온 거야?”은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괜히 바닥을 긁적였다.“아윤 씨는 울면서 나갔죠, 형은 돌아오질 않죠. 걱정돼서 여기저기 한참 찾으러 다녔어요.”도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아윤 씨가… 울었어?”“하아… 네.”무거운 한숨이 섞인 대답에 도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말을 마친 아윤은 예리에게 짧게 목인사를 남긴 채 가방을 고쳐 들었다.뛰다시피 대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예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소진과 은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강 비서님! 유 이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한가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고요!”“팀장님…? 무슨 일 났어요…?”눈을 게슴츠레 뜬 소진이 기우뚱하게 몸을 일으켰다. 은호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예리를 올려다보았다.“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이사님은 도운 씨 좀 찾아봐 주세요! 강 비서님은 저 따라 오시고요! 빨리요!”예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자, 은호는 올라오는 술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찾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고개를 대충 끄덕인 예리는 소진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아윤이 뛰어나간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나갔다.변변찮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밤의 시골길은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혹여 아윤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걱정된 예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홀로 쓸쓸히 걷는 실루엣이 보였다.“아윤 씨! 잠시만요! 멈춰봐요!”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윤의 앞에 선 예리는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눈가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예리는 아윤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물었다.“아윤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저… 저 그냥 그만할래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 없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아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다시는 오늘처럼 찾아오지 말래요….”아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착각하지 말라고… 저를 보면 오히려 화가 난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요!”울분을 터뜨린
도운의 손목 위 문양은 이미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아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도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윤 씨, 상담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요? 도운 씨 표정이 화난 사람 같아서요.”“아니요… 아, 전에 도운 씨가 바쁠 때 고양이들 밥을 한 번 대신 챙겨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계속 저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그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예리 씨, 혹시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윤이 예리의 소매 끝을 와락 붙들었다. 예리는 아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은호는 고양이 좋아해? 보니까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사실 제가 랜선… 집사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이리 와서 자세 낮추고, 이렇게 주먹을 슬쩍 내밀어봐.”은호가 도운을 따라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은호의 손가락 마디에 머리를 꾹 비벼대더니, 금세 기분이 좋은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핑크빛 배를 까뒤집었다.“와, 은호 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도 은근히 얼굴 보거든. 눈이 아주 정확해, 우리 밤순이.”도운이 삼색 고양이의 말랑한 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은호 역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밤순이의 배를 살살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털이 보드랍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은호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밤순이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은호를 대견한 동생 보듯 바라보던 도운이 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몇 마리 더 있는데, 밥 주러 같이 갈래?”“아… 그래도 되겠습… 될까요?”“그럼, 당연하지!”도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은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은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런 거리의 온기가 낯설기만 했다.“가자. 우리 애기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도운이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걸 보고서야, 은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며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도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형, 이건 여기 두면 될까요?”“어, 은호야. 거기다 내려놔.”본채 마당을 가로지르던 예리의 눈이 샐쭉 접혔다.‘또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나 팀장님, 오셨네요?”그릇을 정갈하게 내려놓던 은호가 다가온 예리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어디 나간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네요?”“아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수빈의 오른팔을 타고 뜨거운 선혈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그녀는 깊게 팬 상처를 움켜쥔 채 신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고통으로 미간이 일그러졌으나, 두찬을 응시하는 눈빛만큼은 서늘할 정도로 생생했다.“야, 곽두찬! 이제 그만 끝내자!”먼저 죽음을 입에 올리는 당돌함에 두찬의 얼굴을 가로지르는 흉터가 기괴하게 씰룩였다.그는 수빈의 심장을 향해 총구를 고정했다.“여기까지 오느라 고생 많았어, 오 형사. 아니… 오수빈.”눈앞의 총구에도 수빈은 지나치게 평온했다. 오히려 가소롭다는 듯 남자를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철컥, 안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