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이게 무슨…!”
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
“뭐, 뭐라고요…?”
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
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
“이, 이게….”
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지는 감추지 못했다.
“나 박현진 애 임신했다고! 이 인간, 나랑 사귀면서 너랑 바람피운 거야!”
여자가 식장이 떠나가라 결정타를 날렸다.
객석 곳곳에서 탄식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웅성거림은 순식간에 비난 섞인 고성으로 변해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혜영은 눈물이 가득 맺혀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조금 전까지 영원한 사랑을 약속했던 현진에게 매달렸다.
“현진 씨, 아니지? 제발 아니라고 말해줘….”
“혜영아, 내가 다 설명할게. 그게, 그러니까!”
다급하게 어깨를 붙잡는 현진의 손길이 닿는 순간, 위태롭게 휘청이던 혜영은 결국 정신을 잃고 바닥으로 쓰러졌다.
“혜영아!”
혜영의 부모가 허둥지둥 버진로드 위로 뛰어올랐다.
영숙은 쓰러진 딸을 품에 안고 통곡했고, 목까지 벌겋게 달아오른 태준은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너, 네 이놈! 감히 내 딸한테 이런 짓을 해?”
이번엔 현진의 부모가 앞을 가로막으며 태준의 팔을 붙잡았다.
“사돈어른, 일단 진정하세요! 남들 보는 데서 이게 무슨 추태입니까!”
“진정? 지금 진정하게 생겼냐고!”
눈이 뒤집힌 태준이 그대로 현진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마를 사정없이 들이받았다.
빡-!
둔탁한 충격음과 함께 현진이 비명을 지르며 나자빠졌다.
“아이씨, 이게 얼마짜리 코인데…! 어? 손에 이거 뭐야… 피? 나 지금 코피 나?”
코를 부여잡은 현진이 태준을 향해 악을 썼다.
그에게는 제 얼굴 속 가짜 코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종현 역시 아들의 부도덕함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듯 태준의 멱살을 틀어쥐며 소리를 질렀다.
“이봐요! 내 아들 코 어쩔 거야? 어? 귀한 아들 얼굴에 문제 생기면 당신이 책임질 거냐고!”
태준과 종현이 엉겨 붙어 옥신각신 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수현은 손수건으로 아들의 코피를 닦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난입했던 여자는 팔짱을 낀 채 이 아수라장을 구경하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 아비규환의 한구석, 혜영만이 영숙의 품에 안겨 처량하게 쓰러져 있었다.
주말 아침 막장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추태였다.
‘부전자전이라더니,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네.’
말리려는 직원과 친척들, 구경하는 하객들까지 뒤엉켜 단상 위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됐다.
격렬한 소동 끝에 종현이 중심을 잃고 넘어지며 장식된 꽃줄기를 잡아당겼다. 천장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연보랏빛 꽃들이 비명처럼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직원마저 중심을 잃고 쓰러지며 장식품들이 산산조각이 나 사방으로 튀었다. 구둣발에 짓이겨진 꽃잎과 파편들 사이로 순백의 버진로드는 점차 처참한 붉은빛으로 물들어 갔다.
모두가 이성을 잃고 날뛰는 와중에도 예리만은 홀로 침착하게 현진의 소매 끝을 주시했다.
그가 허둥대며 팔을 휘두르던 찰나, 말려 올라간 셔츠 아래로 손목 안쪽 살이 드러났다.
예리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역시, 아무것도 없어.’
식장 안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명백한 증거이기도 했다.
반면 바닥에 힘없이 축 처진 혜영의 가느다란 손목 위엔, 지우다 만 타투처럼 붉은 문양이 흐릿하게 남아 있었다.
[2031年 4月 3日]
문양을 훑는 예리의 몸 위로 서늘한 냉기가 스쳤다.
동시에 소음을 뚫고 예리의 귓가에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들려왔다.
끼익, 끼이익—.
한쪽 축은 멈췄으나 남은 하나가 억지로 회전하려 들 때 터져 나오는 비명 같은 소리.
예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익숙하지만 언제 들어도 불쾌한 소리였다.
‘앞으로 5년.’
혜영은 저 쓰레기 같은 남자를 5년이나 더 그리워해야 한다. 그것은 사랑에 빠진 대가이자 남겨진 자가 홀로 감당해야 할 형벌이었다.
원하던 답을 얻은 예리는 미련 없이 가방을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수라장이 된 웨딩홀을 뒤로하고 나서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떠한 경악도, 동정도 없었다.
복도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예리의 가방 안에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액정에 뜬 이름을 확인한 그녀가 태연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강 비서님.”
-확인은 잘 마치셨어요?
"그럼요. 예상대로예요. 박현진 손목은 깨끗하고, 신혜영 손목엔 만료 문양이 있고요.”
수화기 너머로 강 비서의 안타까운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가 첫 상담부터 그렇게 나 팀장님 말대로 하라고 설득했는데...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고집을 피우신 건지.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예리가 1층 버튼을 눌렀다. 닫히는 문 사이로 식장의 소음이 멀어졌다.
-저는 혜영 님께서 하도 자신만만하길래, 이번엔 정말 그분의 법칙을 깨는 예외라도 하나 탄생하나 싶었습니다.
예리가 휴대폰을 고쳐 잡으며 엘리베이터 거울 속을 응시했다.
흐트러짐 없이 단정하게 묶어 넘긴 머리. 그 아래로 서늘한 눈빛이 비쳤다.
“말씀드렸잖아요. 세상 다른 일에는 예외가 있을지 몰라도, 사랑엔 예외 없다고.”
웨딩홀 밖으로 나오자 강렬한 햇살이 쏟아졌다.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찾는 예리의 뒤로 오늘 결혼식을 막장 드라마로 만든 주인공이 걸어 나왔다.
여자는 쏟아지는 햇살이 제 조명이라도 된 듯 두 팔을 벌려 만끽했다. 그대로 빨간 스포츠카에 올라탄 여자가 거침없이 시동을 걸었다.
눈 부신 태양 아래 순백의 웨딩드레스와 빨간 스포츠카, 새카만 선글라스.
예리는 운전대를 잡은 여자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
흔적조차 남지 않은 깨끗한 살결까지.
오늘 날씨처럼 모든 게 완벽했다.
멀어져 가는 스포츠카를 바라보던 예리도 선글라스를 걸쳤다.
“탈출을 축하합니다.”
해미는 예리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여유로운 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그녀의 뒤를 서준이 그림자처럼 따랐다.홀로 남은 예리는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소파에 쓰러지듯 앉았다.대가만 따진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는 거래였다. 하지만 아까부터 마음 한구석의 무언가가 결정을 방해하고 있었다.커플 매니저로서 직업윤리 같은 건 없었다.굳이 만들자면 사랑을 철저히 비즈니스 수단으로 여기는 것 정도였다. 그 과정에서 고객의 마음은 철저히 배제되었다.그저 이득이 되는 조건을 계산하고 유효기간이 넉넉한 상대를 골라주면 그만이었다. 사랑을 운운하던 고객들도 조건에 딱 맞는 상대를 마주하면 금세 말을 바꾸곤 했으니까.예리가 업계 1위의 위상을 일궈낸 것도 이런 비정한 태도 덕분이었다.그런데 왜일까. 죽은 줄 알았던 양심이 자꾸만 옆구리를 찔러댔다.“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를 거 없잖아…?”지금껏 처리해 온 수만 건의 의뢰와 해미의 의뢰나 본질은 같았다.VIP 전담팀이 상대하는 고객들의 요구는 99%가 일치했다. 집안에서 정해준 기준에 부합하는 재력과 배경을 갖춘 가장 매칭률 좋은 조각을 찾을 것.그들이 제시한 기준에 당사자의 진정한 사랑이나 행복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그저 이 조각 저 조각을 비교하며 자신에게 가장 큰 이익을 가져다줄 맞춤형 조각을 끼워 맞추는 게 전부였다.결국 최고의 상대를 찾는 부모들이나, 최악의 상대를 찾는 박 회장이나 도긴개긴이었다.잠시 희생양이 될 유은호가 떠올랐지만, 예리는 금세 생각을 털어냈다.사랑에 빠질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해미의 함정에 빠져 지옥을 맛볼지 아니면 무사히 피해 갈지는 결국 그의 선택에 달린 문제였다.그렇게 결론을 내리자 마음을 괴롭히던 작은 불편함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깔끔하진 않지만 충분했다.자리로 돌아온 예리는 수화기를 들어 소진을 호출했다.“박 회장님께 제안 수락하겠다고 전달해 주세요. 아, 그리고 조건 하나 덧붙이세요.”수화기를 고쳐 쥐는 예리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어떤 방식을
“유은호 걔가 도통 반응을 안 하더라고. 어설픈 연기는 귀신같이 알아채는 건지, 아니면 눈이 지나치게 높은 건지. 그렇지, 문 비서?”해미가 이마를 짚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곁에 있던 서준이 말을 거들었다.“심지어 섭외한 배우들이 유 이사님께 역으로 빠져드는 바람에 작전이 틀어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미간을 짓누르며 화를 삭이던 해미가 돌연 고개를 치켜들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는 독기 어린 기대가 서려 있었다.“그래서 나 팀장을 찾아온 거예요. 업계 성혼율 1위. 한 번 맺은 인연은 파혼조차 없다는 그 전설적인 실력.”해미의 시선이 예리에게 못 박혔다.“대한민국에서 짝을 제일 잘 찾아준다는 전문가니까, 우리가 원하는 조건을 갖춘 사람도 기가 막히게 골라내지 않겠어?”예리는 내심 눈을 가늘게 떴다.그녀가 이런 꺼림칙한 의뢰를 맡아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게다가 서슬 퍼런 경영권 싸움에 끼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법이었다.무엇보다 예리의 본능이 경고하고 있었다.이 제안을 받아들이는 순간 결코 돌이킬 수 없는 늪에 발을 들이게 될 것이라고.예리가 정중한 거절의 말을 고르려 입술을 떼던 찰나였다.해미가 그 기색을 귀신같이 채가며 거부할 수 없는 패를 던졌다.“물론 우리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니에요. 나 팀장도 뭔가 얻는 게 있어야 움직일 거 아니야. 비즈니스라는 게 다 그런 거니까.”해미가 고개를 돌려 가볍게 손짓했다.대기하던 서준이 태블릿을 해미의 손 위에 올렸다. 그녀는 건네받은 태블릿을 여유롭게 테이블 중앙으로 밀어 놓았다.“요새 인연이 많이 힘들겠어요. 매치 랩인가 하는 곳에 고객을 꽤 뺏겼더라고.”예리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화면에는 인연에서 이탈해 경쟁사로 옮겨간 회원 수와 급락하는 시장 점유율 그래프가 띄워져 있었다.예리가 가장 감추고 싶어 하는 약점을 기막히게 꿰뚫는 박해미다운 방식이었다.‘매치 랩(Match Lab)’은 거대 IT 기
“최악의 짝이라는 게, 정확히 무슨 말씀인지….”박 회장이 테이블 너머 예리를 향해 상체를 깊숙이 숙였다. 그리곤 낮게 깔린 목소리로 은밀하게 속삭였다.“말 그대로예요. 나도 다른 고객들처럼 아들의 결혼 상대를 찾으러 인연에 온 게 맞습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세상에서 가장 끔찍하고 최악인 상대를 찾으러 왔다는 거?”잘못 들은 게 아닐까. 예리는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지구상 최악의 결혼 상대를 골라달라는 의뢰는 커플 매니저 일을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저희 인연의 설립 취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는 의뢰라 당혹스럽습니다. 실례지만 굳이 이런 일을 맡기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그 순간 해미가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숨이 넘어갈 듯 고개를 뒤로 젖히며 박장대소하는 그 기괴한 광경에 예리는 말문이 막혔다.한참을 끅끅대며 웃던 해미가 간신히 숨을 골랐다. 그녀는 눈가에 맺힌 눈물을 가볍게 훔치더니, 굳어버린 예리를 빤히 바라보았다.“그동안 나 같은 의뢰인은 없었나 봐요? 하기야 보통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길 바랄 테니까. 나 역시 그래요. 내 자식들은 누구보다 행복해야지.”말을 마친 해미가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를 지워냈다. 대신 입술 끝을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그런데 유은호는, 내 아들이 아니잖아?”아무리 친자식이 아니라지만 수십 년을 한 집에서 지내온 사이였다.그 긴 세월을 단 한 문장으로 부정하다니….일말의 애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심한 태도에 예리의 등 뒤로 얇은 소름이 돋았다.“나 팀장 아까 내가 은호의 지분이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고 했죠?”예리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맞아요. 나는 해상의 차기 리더 자리를 우리 도현이와 동현이에게 물려주기 위해 아주 오래전부터 준비해 왔어요. 그리고 최근에 그 모든 준비를 끝냈고.”순간 해미의 눈에 서슬 퍼런 살기가 돌았다.“그런데 해결 못 한 결정적인 문제가 딱 하나 있네?”해미가 짜증스러운 기억을 떨쳐내려는 듯 거칠게 다리를 바꿔 꼬았다.“유
멀리서 찍힌 사진이라 형체는 흐릿했으나 낮은 화질을 뚫고 뚜렷한 이목구비가 배어 나왔다.‘어디서 본 적 있는 것 같은데….’찰나의 기시감이 스쳤으나 예리는 곧장 의심을 지워냈다. 최근 자료조차 1년 전인 사람을 마주했을 리 없었다.언뜻 보기에도 수려한 외모, 좋은 학벌과 집안 게다가 선대 회장의 친아들이라는 상징성까지. 결혼 시장에서 그의 가치는 측정 불가였다.결정사 문을 두드리기도 전 내로라하는 가문들이 그를 사위로 삼으려 일찌감치 줄을 섰을 터였다.그중에서 고르면 되지 굳이 왜.예리는 습관적으로 턱을 괴고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 톡 두드렸다. 시선은 여전히 화면 속 흐릿한 유은호에게 고정된 채였다.시계 초침이 몇 바퀴를 돌고 나서야 짧은 노크 소리가 정적을 깼다.“팀장님, 박해미 회장님 곧 도착하신답니다.”데스크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예리가 흩어진 자료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요?”예리를 바라보는 소진의 눈빛에는 은근한 걱정이 서려 있었다.“해상 관련 자료는 충분히 확인하셨어요? 워낙 만만한 분이 아니시라… 걱정이 돼서요.”예리가 가벼운 한숨을 내쉬며 태블릿을 껐다.“지금 자료로는 턱없이 부족하네요. 특히 유은호 이사에 대한 건 백지상태나 다름없고요.”예리는 서류를 가지런히 모아 서랍에 넣었다. 그러곤 살짝 미소 지어 보였다.“그래도 지금부터 정신 똑바로 차려야죠. 박해미 회장이 무슨 패를 들고 왔든 휘둘리지 않으려면.”표정은 차갑게 가라앉았으나 눈동자만큼은 흔들림이 없었다.***소진의 안내를 받은 박해미가 예리의 사무실로 들어섰다.짙은 초록빛 슈트를 차려입은 그녀는 등장만으로 공간의 공기를 뒤바꿔 놓았다.예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걸어갔다.다가오는 예리를 향한 해미의 시선이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예리는 그 날카로운 안광에 목덜미의 솜털이 쭈뼛 섰으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숙이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고개를 숙였다.“처음 뵙겠습니다, 박해미 회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큼, 첫째와 둘째를 향한 박 회장의 애정은 유별났다. 그런 그녀가 발 벗고 나선 상대가 금지옥엽 두 아들이 아닌, 배다른 자식으로 알려진 막내 유은호라니.자식의 결혼조차 철저히 계산된 비즈니스로 이용할 박해미였다. 이득이 없는 곳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녀가 유은호의 결혼을 주도한다는 사실은, 이번 방문이 결코 순수한 의도가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유도현도 유동현도 아니고, 왜 하필 유은호지?’그때 태블릿 화면 속, 19년 전 기사 하나가 예리의 눈에 들어왔다.[[단독]’아르케 리서치’ 박해미 대표, 해상 유상만 회장과 11일 백년가약]이혼 후 두 아들을 홀로 키우던 박해미와 은호의 부친인 유상만 회장이 재혼했다는 소식이었다. 당시 정·재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해상 그룹의 새로운 안주인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자선 행사에서 만나 약속이라도 한 듯 빠르게 가까워진 두 사람은 혼인 신고 후 세 아들과 함께 매체에 자주 얼굴을 비췄다. 대중의 부러움을 사는 화목한 재벌가 가족의 표본이 되었지만, 그 행복은 그리 얼마 가지 못했다.예리는 화면을 위로 쓸어 넘겼다. 2년 뒤, 유 회장의 갑작스러운 부고를 알리는 대대적인 보도들이 줄을 이었다. 예리는 그 중 뉴스 영상 하나를 재생했다.-해상 그룹 유상만 회장이 어젯밤 교통사고로 별세했습니다. 유 회장은 가족과의 여행을 마치고 귀가하던 중, 직접 운전대를 잡았던 것으로 확인됐습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했다.“네, 어머니. 그럼 한번 만나 볼게요.”“잘 생각했어. 올해 결혼한 유력 가문 자제들 반 이상은 인연에서 진행했다더구나. 나 팀장, 실력 하나는 독보적이니 걱정 말렴.”해미는 얼마 전, 예리와의 만남을 떠올리며 나긋하게 말을 이었다.“내가 너는 특별히 더 신경 써달라고 직접 당부해 뒀어. 내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네 매칭은 아주 공들여 준비할 거야.”“네, 감사합니다.”은호는 막막한 속을 숨긴 채 강박적으로 미소를 지었다.“올해는 은호 덕분에 나도 혼주복 좀 입어볼 수 있으려나?”해미가 혼자 즐거운 듯 우아하면서도 기괴한 웃음을 터뜨렸다. 주방 안을 가득 채우는 해미의 서늘한 웃음소리 사이로, 달그락거리는 식기 소리만이 식탁 위를 위태롭게 채웠다.누구 하나 은호의 기분을 헤아려주는 이는 없었다. 도현은 여전히 은호를 없는 취급 했고, 동현은 은호를 얄밉게 쏘아볼 뿐이었다.은호는 입안의 음식물이 모래알처럼 느껴졌지만, 해미의 만족스러운 미소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기계적으로 턱을 움직였다.***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 은호가 답답한 듯 뒷좌석 창문을 내렸다.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니 울렁거리던 속이 조금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백미러로 은호의 안색을 살피던 선우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이사님, 근처 약국에서 약이라도 사다 드릴까요?”한강 너머 화려한 불빛을 내뿜는 빌딩 숲을 응시하던 은호가 선우에게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