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리가 무슨 볼일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은호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손수건…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잘 썼습니다!”
은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을 힐끔 내려다본 예리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이네요.”
말을 마친 예리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은호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연락처라도 알려주시면….”
예리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매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가지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저, 그래도…!”
예리는 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을 뒤로한 채 공연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은호는 손바닥 위에 남겨진 손수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짙은 남색과 주황색이 세련되게 배색된 실크 위로 기하학적인 패턴이 수놓아져 있었다.
손끝에 닿는 손수건의 매끄러운 감촉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놓고 싶지 않았다.
***
극장 로비를 가로질러 주은의 대기실로 향하던 예리는 조금 전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고맙긴. 시끄러우니까 입 좀 틀어막으라고 준 건데.”
뭐, 그 덩치 큰 울보에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예리는 대기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대답에 예리가 문을 열었다.
“나예리!”
어느새 무대 의상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은이 화장대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예리에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포옹부터 퍼부었다.
예리는 주은의 요란한 환영이 부담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예리를 실컷 껴안고 나서야 팔을 푼 주은이 대기실 한편에 놓인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오늘도 네가 준 꽃이 제일 큰 거 알아?”
바구니에는 노란 프리지어가 탐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래?”
예리는 무심하게 대꾸하면서도 시선은 잠시 꽃바구니에 머물렀다.
주은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예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너어, 정말 나 좋아하는구나! 어떻게 매번 이렇게 크고 예쁜 것만 골라 보내?”
예리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오늘 연기 좋더라. 객석에 있던 사람들 다 울었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오늘따라 유독 감정이 잘 올라오더라고. 아, 그래서 너도 울었어? 어? 울었냐고, 나예리!”
배시시 웃음을 터뜨린 주은이 예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집요하게 물었다.
“나도….”
예리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주은을 바라보았다.
주은이 침을 꿀꺽 삼킨 찰나 예리가 픽 웃으며 말을 뱉었다.
“울었을 리가 없지. 뭘 뻔한 걸 물어봐.”
예리의 얄미운 대답에 찰나의 기대를 품었던 주은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언제쯤 나예리 눈에서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꼴을 보려나….”
“죽어서도 그럴 일 없으니까 꿈 깨시고. 문주은 씨,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오늘은 제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예리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주은은 예리의 손에 들린 카드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머, 언니! 그래서 오늘 뭐 먹을 건데?”
“너 좋아하는 중식. 풀코스로 예약해 뒀어.”
“꺅! 당장 가야지. 잠만 기다려, 나 짐만 대충 정리하고!”
***
프라이빗한 룸 안, 원형 테이블 위로 윤기가 흐르는 중식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칠리새우를 거의 흡입하듯 먹어 치우는 주은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리가 슬쩍 운을 뗐다.
“주은아, 너 해상 그룹 막내아들 알아?”
“해상 막내면…, 유은호?”
주은이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되물었다. 예리가 주은의 잔에 차를 채워주며 다시 물었다.
“응. 뭐 아는 거 있어?”
찻잔을 받아 든 주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예리를 째려봤다.
“이거 봐라, 이거. 딱 보니까 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거하게 쏘는 거였구만.”
예리는 찻잔을 들어 입술만 축이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뭐,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은이 입술을 씰룩이며 미심쩍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은호는 왜 물어보는데? 네가 그 사람한테 사적인 관심이 있을 리는 없고….”
주은은 거짓말 탐지기라도 된 양 예리의 안색을 낱낱이 살폈다.
그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을, 예리가 단칼에 잘라내며 말했다.
“박 회장이 상담하러 왔었거든.”
“뭐? 박해미? 해상 그룹 박해미?”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해상 그룹의 수장인 박 회장이 직접 다녀갔다는 말에 주은의 커다란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왜? 본인 커플 매칭… 은 아닐 테고, 설마 유은호 매칭 건이야?”
“응, 맞아.”
주은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와, 친아들 아니라고 내놓은 자식 취급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가 보네? 직접 결혼 상대까지 찾아주고.”
“아니, 엄청 싫어하던데.”
“응? 싫어하는 아들 짝을 찾겠다고 너를 직접 찾아갔다고? 그게 말이 돼?”
“최악의 짝을 찾아달래.”
예리가 제 몫의 음식을 덜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최악의 짝?!”
예상치 못한 의뢰 내용에 주은이 비명 섞인 소리로 되물었다. 예리가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은은 단둘만 있는 방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그러니까, 완전 개차반에 결혼 상대로는 최악인 사람을 붙여달라는 거지? 대체 왜?”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지.”
예리가 모르는 척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박 회장의 속내는 진작 파악하고 있었지만, 굳이 주은에게까지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김이 샌 주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유은호,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만나본 사람은 얼마 없나 봐. 뭐, 직접 본 사람들 말로는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던데.”
“그래? 그렇게 잘생겼대?”
“어, 그런데 유은호 별명이 가면 쓴 왕자님이래. 속을 도통 안 내비치는 타입이라나 봐. 거기에 말수도 워낙 없어서 다들 신비주의라 부르더라고. 그리고….”
“유 이사님.”“네.”"그만 좀 보시죠?”예리는 손바닥을 쫙 펼쳐 얼굴 옆을 벽처럼 가렸다.“싫습니다.”‘이 사람이 정말…!’손을 내린 예리가 휙 고개를 돌려 은호를 노려보았다. 뻔뻔하게 눈썹을 한 번 까딱이는 은호 때문에 예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점심쯤 도운의 집을 나와 목상군 관광을 마치고 아윤의 촬영장에 도착한 지금까지, 유은호는 자신에게 꿀이라도 발라 놓은 듯 떨어질 줄을 몰랐다.“도대체 언제까지 이러실 건데요.”“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계획이라는 게 뭐냐고요.”소진과 이야기를 나누며 앞서가는 도운을 힐끔 본 은호가 나직이 속삭였다.“제가 이야기하면 이사님 가만히 안 있으실 거잖아요.”“그 내용이 뭔지에 따라 다르겠죠.”예리가 얄밉다는 듯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리며 은호를 흘겨보았다.“됐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아 참, 이렇게 된 거 오늘 잘 때도 제 옆에서 주무시지 그래요? 제가 팔베개도 해드릴게요.”제 팔을 넓게 펼쳐 탁탁 치는 예리를 보며 은호가 다급하게 시선을 내리깔았다.“저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아십니까? 그러니까 이번 의뢰는 그만두시는 게….”“예리야!”은호의 등 뒤로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어? 아윤 씨가 아니라… 언니!”뒤에 서 있던 도운을 의식한 예리가 아차 싶어 순간 말을 바꿨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예리를 향해, 아윤이 나풀거리는 연보랏빛 한복 치맛자락을 살짝 잡아 올리며 뛰어왔다.“도착했으면 연락하지 왜 여기에 이러고 서 있어…… 어?”눈꼬리를 접으며 예리의 두 손을 잡고 반갑게 흔들던 아윤은 뒤에 묵묵히 서 있던 도운을 발견하자마자 웃음이 싹 사라졌다.“저는 통화할 게 있어서 차에 가 있겠습니다. 구경하시고 주차장으로 오세요.”“도운 씨…!”아윤의 굳어버린 얼굴을 확인한 도운은 건조하게 말을 전하곤 미련 없이 등을 돌려 주차장으로 향했다.한숨을 푹 내쉰 예리는 아윤을 쳐다보았다. 아윤 역시 멀어지는 도운의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던 해
도운이 체크 셔츠 소매로 눈가에 맺힌 눈물을 쓱 닦아냈다.“이런 내가 어떻게 감히 그 마음을 받아. 아윤 씨 정말 좋은 사람인데… 나 같은 놈 말고, 아윤 씨만 온전히 아껴주고 바라봐 줄 사람 만나야지….”말을 잠시 멈춘 도운은 자신을 따라 축 처진 은호의 어깨를 툭 팔꿈치로 쳤다.“게다가 아윤 씨는 대스타잖아. 나 같은 시골 농사꾼이 가당키나 하냐?”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도운의 자조적인 농담에도 은호는 도저히 입꼬리가 올라가지 않았다.그저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죽죽 그어놓은 의미 없는 선 무더기만 가만히 시선으로 좇았다.***은호의 이야기가 끝나자, 예리는 대놓고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이 남자들을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네…?”상체를 은호 쪽으로 슬그머니 기울인 예리가 한쪽 눈썹을 쓱 들어 올렸다.“유 이사님은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 도운 씨가 아윤 씨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정말요?”예리의 상체가 바짝 기울어지며 이제는 거의 은호의 턱밑까지 다가서자, 은호가 살짝 몸을 물리며 고개를 뒤로 뺐다.“본인 입으로 다른 사람이 투영된다는데, 그러면 아닙니까?”“유 이사님은 착각해 본 적 없으세요?”“…무슨 착각 말입니까?”“사람들은 생각보다 자기 마음을 잘 모르거든요. 편의점에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왔는데, 막상 집에 와서 먹어보니 내가 원했던 맛이 아니었던 경험 없으세요?”“갑자기 그게 무슨 소립니까?”“그건 내가 진짜 무슨 맛을 원하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골라서 그래요. 그런데 사랑도 똑같거든요.”예리는 은호에게 바짝 기울였던 몸을 곧게 세웠다.“그럼, 오늘은 많이 늦었으니 이만 들어갈게요. 이사님도 얼른 들어가서 쉬세요.”땀과 밤이슬에 적셔진 은호의 이마와 흩어진 머리카락을 예리가 눈동자를 굴려 살짝 훑어 내렸다.“도운 씨 찾느라 고생 많이 하신 것 같은데.”“그럼… 이번 일은 여기서 끝내시는 겁니까?”은호가 기대에 찬 눈빛을 보냈다.“아니요. 그대로 진행할 겁니다. 이사님은
예리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어졌다. 악문 잇새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유은호 이사님. 선은 넘지 마시죠.”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은호를 쏘아본 예리가 어깨를 돌렸다.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은호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도운의 사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게 맞을까?하지만 예리를 멈추기 위해서는 이게 최선이었다.은호가 주먹을 그러쥐었다.“도운 형 말입니다….”떼어지지 않던 입술을 억지로 벌렸다.“실은 아윤 씨 말고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일, 억지로 진행해 봤자 결국 아윤 씨 상처만 더 커질 겁니다.”“방금 한 말, 다시 해보세요. 아윤 씨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니요?”어느새 은호의 앞까지 바짝 다가온 예리가 금방이라도 달려들듯 사나운 눈빛으로 쏘아붙였다.“…….”은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도운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시선을 허공으로 던졌다.그의 기억은 조금 전, 도운을 찾아 헤매던 뒷마당으로 거슬러 올라갔다.***타닥.은호의 하얀 운동화가 급하게 멈춰 섰다.저녁 식사 전에 도운이 알려주었던 뒷마당의 길고양이 집이 생각나 찾아왔다.낮은 나무가 우거져 가로등 불빛조차 제대로 들지 않는 곳에, 도운이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은호의 땀에 젖은 흰 티셔츠가 등에 달라붙은 채, 그는 도운을 향해 한달음에 달려갔다.“여기 계셨네요!”고양이를 조심스러운 손길로 쓰다듬던 도운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은호를 본 도운의 눈이 잠시 커졌다가 이내 가라앉았다.“…나 찾으러 온 거야?”은호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도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바닥에 떨어진 얇은 나뭇가지를 주워 괜히 바닥을 긁적였다.“아윤 씨는 울면서 나갔죠, 형은 돌아오질 않죠. 걱정돼서 여기저기 한참 찾으러 다녔어요.”도운의 동공이 순간 흔들렸다.“아윤 씨가… 울었어?”“하아… 네.”무거운 한숨이 섞인 대답에 도운의 표정이 한층 더 굳었다. 고양이를 쓰다듬던 그의 손길이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말을 마친 아윤은 예리에게 짧게 목인사를 남긴 채 가방을 고쳐 들었다.뛰다시피 대문 밖으로 향하는 그녀를 보며, 예리는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는 소진과 은호의 어깨를 거세게 흔들어 깨웠다.“강 비서님! 유 이사님! 빨리 일어나세요! 지금 한가하게 주무실 때가 아니라고요!”“팀장님…? 무슨 일 났어요…?”눈을 게슴츠레 뜬 소진이 기우뚱하게 몸을 일으켰다. 은호도 감겨오는 눈꺼풀을 억지로 밀어 올리며 예리를 올려다보았다.“설명은 나중에 할 테니까, 이사님은 도운 씨 좀 찾아봐 주세요! 강 비서님은 저 따라 오시고요! 빨리요!”예리가 평소답지 않게 조바심을 내자, 은호는 올라오는 술기운을 털어내려는 듯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네. 찾으면 바로 연락하겠습니다.”고개를 대충 끄덕인 예리는 소진의 팔을 단단히 붙잡고 아윤이 뛰어나간 방향으로 바쁘게 달려나갔다.변변찮은 가로등이 듬성듬성 놓인 밤의 시골길은 바로 앞조차 잘 보이지 않았다. 혹여 아윤이 위험한 상황이라도 맞닥뜨리지 않았을까 걱정된 예리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숨이 턱밑까지 차오를 때쯤, 저 멀리 노란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홀로 쓸쓸히 걷는 실루엣이 보였다.“아윤 씨! 잠시만요! 멈춰봐요!”느릿하게 걸음을 옮기던 아윤이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전속력으로 달려가 아윤의 앞에 선 예리는 가쁘게 터져 나오는 숨을 갈무리하기도 전에 그녀의 얼굴부터 살폈다. 그 짧은 사이 얼마나 눈물을 쏟아냈는지, 눈가와 뺨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예리는 아윤의 볼에 눌어붙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떼어내며 물었다.“아윤 씨,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저… 저 그냥 그만할래요. 이제 와서 말해봤자 의미 없어요….”고개를 가로젓던 아윤의 눈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다시는 오늘처럼 찾아오지 말래요….”아윤은 새어나오는 울음을 참으려는 듯 입술을 짓이기듯 깨물었다.“착각하지 말라고… 저를 보면 오히려 화가 난대요! 이런 상황에서 제가 뭘 어떻게 더 해요!”울분을 터뜨린
도운의 손목 위 문양은 이미 강렬한 붉은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의 표정은 정반대였다.“아윤 씨, 오랜만에 뵙네요. 그럼, 일단 안으로 들어가실까요? 두 분이 기다리고 계셔서요.”도운이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마당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그 무심한 뒷모습을 바라보는 예리의 미간이 미세하게 꿈틀거렸다.“아윤 씨, 상담 이후로 무슨 일 있었어요? 도운 씨 표정이 화난 사람 같아서요.”“아니요… 아, 전에 도운 씨가 바쁠 때 고양이들 밥을 한 번 대신 챙겨준 적이 있긴 한데, 그 뒤로 계속 저렇게 굳은 표정이에요. 그전엔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거든요. 예리 씨, 혹시 제가 뭘 크게 잘못한 걸까요?”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로 아윤이 예리의 소매 끝을 와락 붙들었다. 예리는 아윤의 손등을 다정하게 토닥이며 안심시켰다.
은호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쑥스러운 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은호는 고양이 좋아해? 보니까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은데.”“사실 제가 랜선… 집사이긴 합니다만. 이렇게 가까이서 직접 본 적이 없어서요. 어떻게 친해져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그럼, 이리 와서 자세 낮추고, 이렇게 주먹을 슬쩍 내밀어봐.”은호가 도운을 따라 웅크려 앉아 조심스럽게 주먹을 내밀었다.살금살금 다가온 고양이 한 마리가 은호의 손가락 마디에 머리를 꾹 비벼대더니, 금세 기분이 좋은지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워 핑크빛 배를 까뒤집었다.“와, 은호 너 마음에 들었나 보다! 얘도 은근히 얼굴 보거든. 눈이 아주 정확해, 우리 밤순이.”도운이 삼색 고양이의 말랑한 배를 쓰다듬으며 호탕하게 웃었다.은호 역시 조심스러운 손길로 밤순이의 배를 살살 만져보았다. 손끝에 닿는 털이 보드랍고 무척이나 따뜻했다. 은호는 손을 거두지 못한 채 밤순이의 배를 가만히 쓸어내렸다.은호를 대견한 동생 보듯 바라보던 도운이 툭 털고 몸을 일으켰다.“여기 말고 집 뒤쪽에도 몇 마리 더 있는데, 밥 주러 같이 갈래?”“아… 그래도 되겠습… 될까요?”“그럼, 당연하지!”도운이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은호의 어깨에 스스럼없이 팔을 둘렀다.은호의 몸이 순간 딱딱하게 굳었다. 아버지가 떠난 뒤로 이런 거리의 온기가 낯설기만 했다.“가자. 우리 애기들이 목 빠지게 기다리겠다.”도운이 저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주는 걸 보고서야, 은호는 마침내 참았던 숨을 작게 내쉬며 단단히 굳어 있던 어깨의 힘을 풀어냈다. 그러고는 도운의 걸음에 맞춰 나란히 발걸음을 옮겼다.***“형, 이건 여기 두면 될까요?”“어, 은호야. 거기다 내려놔.”본채 마당을 가로지르던 예리의 눈이 샐쭉 접혔다.‘또 언제 저렇게 친해졌대.’“나 팀장님, 오셨네요?”그릇을 정갈하게 내려놓던 은호가 다가온 예리를 발견하고는 한걸음에 달려왔다.“네. 아무리 찾아도 안 보이셔서 어디 나간 줄 알았더니, 여기 계셨네요?”“아
예리는 점심조차 1층 카페의 샌드위치로 대충 때운 채, 해성 관련 자료를 훑는 데 여념이 없었다.해상 그룹.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IT와 통신, 금융을 넘어 이커머스까지 국민의 일상을 장악한 그들은 거대한 블랙홀이라 불릴 만큼 압도적인 영향력 가졌다. ‘해상이 무너지는 날엔 대한민국 전 국민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 정도였다.그런 박 회장의 직접 움직이는 것도 이례적이지만, 의뢰 대상이 유은호라는 점이 예리를 더 깊은 생각에 잠기게 했다.마흔에 가까운 두 아들에게 직접 생선 살을 발라주는 사진이 화제가 될 만
“그러니 은호 너라도 가야 하지 않겠니? 엄마는, 우리 착한 아들이 절대 날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는 걸 잘 알아.”해미가 쥐고 있던 은호의 손에 힘을 주었다. 부드러운 손길과 달리, 눈빛은 서늘할 만큼 강압적이었다.해미가 자신을 '아들'이라 불러줄 때마다, 그는 매번 무너졌다. 그녀가 목적이 있을 때만 어머니 행세를 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은호에게는 그 가식적인 온기조차 절실했다.그녀와 두 형조차 자신을 외면한다면 정말 아무것도 남지 않을 거라는 공포. 은호는 이번에도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착한 아들의 가면을 쓰기로
“그래서? 너는 그 여자가 신랑 전 애인인 줄 어떻게 알았어?”이야기에 몰입하느라 젓가락질 한 번 못 한 주은이 물었다.“화장실에서 나란히 서서 손을 씻는데, 그 여자 손목에 문양이 보이더라고. 묘하게 예감이 이상해서 따라 나갔지.”예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무심하게 덧붙였다.“그런데 신랑을 몰래 지켜보더라. 죽일 듯이 노려보는 눈빛에 문양까지 반짝이는데, 전 애인 말고는 설명이 안 되지.”“와, 세상에 그런 일이 다 있냐.”“내가 항상 말하잖아. 사랑, 그거 별로 특별한 감정 아니라고. 오늘 네 배역도 솔직히 이해 안
웨딩홀이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혜영의 부모가 경악한 얼굴로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이게 무슨…!”하객들은 이 상황을 놓칠세라 앞다투어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하기 시작했다.“뭐, 뭐라고요…?”혜영이 귀를 의심하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여자는 대답 대신 가방에서 사진 뭉치를 꺼내 혜영의 가슴팍으로 사납게 내던졌다.사진들이 파르르 흩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한 장, 한 장 주워 확인하던 혜영이 비명을 막으려는 듯 급히 입을 틀어쥐며 주저앉았다.“이, 이게….”하지만 사시나무 떨듯 잘게 떨리는 손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