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예리가 무슨 볼일이냐는 듯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자 은호가 허둥지둥 손수건을 내밀었다.
“이거, 손수건… 감사합니다. 덕분에 정말 잘 썼습니다!”
은호의 커다란 손바닥 위에 놓인 손수건을 힐끔 내려다본 예리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다행이네요.”
말을 마친 예리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러자 은호가 반걸음 앞으로 나서며 다시 그녀를 불러세웠다.
“저…! 손수건은 제가 세탁해서 돌려드리겠습니다. 연락처라도 알려주시면….”
예리는 걸음을 멈추고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를 바라보는 무심한 눈매에는 귀찮은 기색이 역력했다.
“그냥 가지든 버리든 마음대로 하세요.”
“저, 그래도…!”
예리는 은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의 시선을 뒤로한 채 공연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홀로 남겨진 은호는 손바닥 위에 남겨진 손수건을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짙은 남색과 주황색이 세련되게 배색된 실크 위로 기하학적인 패턴이 수놓아져 있었다.
손끝에 닿는 손수건의 매끄러운 감촉이 묘하게 간지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놓고 싶지 않았다.
***
극장 로비를 가로질러 주은의 대기실로 향하던 예리는 조금 전 남자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실소를 터뜨렸다.
“고맙긴. 시끄러우니까 입 좀 틀어막으라고 준 건데.”
뭐, 그 덩치 큰 울보에게 의도가 제대로 전달된 것 같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예리는 대기실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안에서 들려오는 경쾌한 대답에 예리가 문을 열었다.
“나예리!”
어느새 무대 의상을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주은이 화장대 앞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녀는 예리에게 달려오더니 다짜고짜 포옹부터 퍼부었다.
예리는 주은의 요란한 환영이 부담스러운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굳이 그녀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예리를 실컷 껴안고 나서야 팔을 푼 주은이 대기실 한편에 놓인 커다란 꽃바구니를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오늘도 네가 준 꽃이 제일 큰 거 알아?”
바구니에는 노란 프리지어가 탐스럽게 담겨 있었다.
“그래?”
예리는 무심하게 대꾸하면서도 시선은 잠시 꽃바구니에 머물렀다.
주은이 장난스럽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예리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너어, 정말 나 좋아하는구나! 어떻게 매번 이렇게 크고 예쁜 것만 골라 보내?”
예리는 대답 대신 화제를 돌렸다.
“오늘 연기 좋더라. 객석에 있던 사람들 다 울었어.”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오늘따라 유독 감정이 잘 올라오더라고. 아, 그래서 너도 울었어? 어? 울었냐고, 나예리!”
배시시 웃음을 터뜨린 주은이 예리의 옆구리를 간지럽히며 집요하게 물었다.
“나도….”
예리가 짐짓 진지한 표정으로 주은을 바라보았다.
주은이 침을 꿀꺽 삼킨 찰나 예리가 픽 웃으며 말을 뱉었다.
“울었을 리가 없지. 뭘 뻔한 걸 물어봐.”
예리의 얄미운 대답에 찰나의 기대를 품었던 주은의 어깨가 추욱 처졌다.
“언제쯤 나예리 눈에서 사랑 때문에 눈물 흘리는 꼴을 보려나….”
“죽어서도 그럴 일 없으니까 꿈 깨시고. 문주은 씨, 밥이나 먹으러 가시죠? 오늘은 제가 제대로 모시겠습니다.”
예리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주은은 예리의 손에 들린 카드를 보자마자 흥분해서 어깨에 대롱대롱 매달렸다.
“어머, 언니! 그래서 오늘 뭐 먹을 건데?”
“너 좋아하는 중식. 풀코스로 예약해 뒀어.”
“꺅! 당장 가야지. 잠만 기다려, 나 짐만 대충 정리하고!”
***
프라이빗한 룸 안, 원형 테이블 위로 윤기가 흐르는 중식 요리들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칠리새우를 거의 흡입하듯 먹어 치우는 주은을 가만히 지켜보던 예리가 슬쩍 운을 뗐다.
“주은아, 너 해상 그룹 막내아들 알아?”
“해상 막내면…, 유은호?”
주은이 입안 가득 음식을 우물거리며 되물었다. 예리가 주은의 잔에 차를 채워주며 다시 물었다.
“응. 뭐 아는 거 있어?”
찻잔을 받아 든 주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예리를 째려봤다.
“이거 봐라, 이거. 딱 보니까 나한테 물어볼 게 있어서 이렇게 거하게 쏘는 거였구만.”
예리는 찻잔을 들어 입술만 축이고는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뭐, 아예 아니라고는 할 수 없지만….”
주은이 입술을 씰룩이며 미심쩍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런데 유은호는 왜 물어보는데? 네가 그 사람한테 사적인 관심이 있을 리는 없고….”
주은은 거짓말 탐지기라도 된 양 예리의 안색을 낱낱이 살폈다.
그 집요하게 파고드는 시선을, 예리가 단칼에 잘라내며 말했다.
“박 회장이 상담하러 왔었거든.”
“뭐? 박해미? 해상 그룹 박해미?”
대한민국 재계 서열 1위, 해상 그룹의 수장인 박 회장이 직접 다녀갔다는 말에 주은의 커다란 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왜? 본인 커플 매칭… 은 아닐 테고, 설마 유은호 매칭 건이야?”
“응, 맞아.”
주은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탁 내려놓았다.
“와, 친아들 아니라고 내놓은 자식 취급한다는 소문은 사실이 아닌가 보네? 직접 결혼 상대까지 찾아주고.”
“아니, 엄청 싫어하던데.”
“응? 싫어하는 아들 짝을 찾겠다고 너를 직접 찾아갔다고? 그게 말이 돼?”
“최악의 짝을 찾아달래.”
예리가 제 몫의 음식을 덜며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최악의 짝?!”
예상치 못한 의뢰 내용에 주은이 비명 섞인 소리로 되물었다. 예리가 입술 위로 검지를 가져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주은은 단둘만 있는 방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목소리를 바짝 낮췄다.
“그러니까, 완전 개차반에 결혼 상대로는 최악인 사람을 붙여달라는 거지? 대체 왜?”
“글쎄, 나도 거기까지는 모르지.”
예리가 모르는 척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박 회장의 속내는 진작 파악하고 있었지만, 굳이 주은에게까지 털어놓을 이유는 없었다.
김이 샌 주은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팔짱을 꼈다.
“유은호, 사실 나도 아는 게 별로 없어. 소문만 무성하고 실제로 만나본 사람은 얼마 없나 봐. 뭐, 직접 본 사람들 말로는 연예인 뺨치게 잘생겼다던데.”
“그래? 그렇게 잘생겼대?”
“어, 그런데 유은호 별명이 가면 쓴 왕자님이래. 속을 도통 안 내비치는 타입이라나 봐. 거기에 말수도 워낙 없어서 다들 신비주의라 부르더라고. 그리고….”
예리가 레이저 포인터로 예약 내역서의 출국 날짜를 가리켰다.“노민수, 오지연. 보험금 수령 즉시 한국을 떠날 계획이었어요. 저번 주 토요일이 두 사람이 정한 디데이였고요.”탑승객 이름부터 날짜까지 쭉 시선을 옮기던 해진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막연한 의심과 실체를 마주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었다.칼날로 심장을 베이는 느낌에 해진의 뺨을 타고 참지 못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가람이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슈를 몇 장 뽑아 해진에게 건넸다.휴지가 해진의 눈물로 젖어 들어가는 걸 지켜보던 예리가 말없이 새로운 영상을 재생시켰다.화면의 장소는 어느 건물의 옥상이었다.먼지가 자욱하게 가라앉은 가구 무더기가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페인트칠이 군데군데 벗겨진 회색 문이 열리더니, 검은색 마스크와 모자를 쓴 여자가 발을 들였다.“……!”해진이 벌어진 입술을 젖은 휴지로 틀어막았다.화면 속 여자는 난간으로 성큼 다가갔다. 망설임 없이 밑을 내려다본 여자가 곧장 옆에 놓인 화분을 집어 들었다.난간 밖으로 뻗어 나온 붉은색 화분이 허공에 멎은 것은 찰나였다. 물을 먹지 못해 말라비틀어진 잎사귀가 거센 바람에 파르르 흔들렸다.한 번 더 아래를 향해 고개를 숙인 여자가 그대로 손을 놓았다.붉은색 화분이 무서운 속도로 궤적을 그리며 화면 밑으로 추락했다.허리를 반쯤 숙여 밑을 내려다보던 여자는 지체 없이 몸을 돌려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스크린에서 시선을 뗀 예리가 해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진은 흔들리는 눈으로 처음으로 되돌아간 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해진 씨, 누군지 알아보겠어요?”“멀리서 찍혀서 얼굴이 정확히 보이지는 않지만… 저 모자.”해진이 훌쩍임을 참아내며 검지 손가락으로 스크린 한 곳을 가리켰다.“제가 오지연한테 선물한 거예요.”고개를 끄덕인 예리가 굳은 표정으로 소진에게 시선을 돌렸다.“다음 영상 보여주세요.”화면이 전환되며 텅 빈 헬스장 내부가 비쳐 들었다. 곧이어 노민수가 들어왔다.카운터
“해진아, 넌 왜 항상 너만 생각하는 거 알아? 지금 네 이런 행동, 정말 이기적인 거야.”창밖으로 빠르게 지나치는 가로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민수가 낮게 읊조렸다.“민수 씨… 그게 무슨 말이야….”“너만 생각할 게 아니라, 앞으로 태어날 우리 아이도 생각해야지. 솔직히 말해서 이런 일이 또 없을 거라는 보장도 없는 거잖아. 만약에, 만약에….”톤이 높아졌던 그의 목소리에 일순간 물기가 어렸다.“그런 일이 또 일어나면, 너랑 아이 둘뿐이라 생각하니까….”민수가 뒷말을 삼키며 눈가를 손으로 꾹 눌렀다.“여보….”해진의 목소리에도 덩달아 물기가 비쳤다. 잔뜩 웅크린 채 떨고 있는 그의 등을 바라보던 해진이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여보, 내가 지금은 휴직 상태라 당장 상해 보험에 새로 가입하긴 그렇고… 지금 가진 건강 보험에 상해 한도라도 올릴게.”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민수가 창틀에 기댔던 팔을 떼며 해진을 돌아보았다. 붉어진 눈을 한 그가 가죽 시트 위에 놓여 있던 해진의 손을 잡아 제 품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택시 기사가 룸미러로 두 사람의 모습을 힐끔 살폈지만, 민수는 해진을 안은 팔에 꽉 힘을 줄 뿐이었다.“그래, 잘 생각했어! 해진아. 우리, 그리고 미래의 아이를 위해서….”민수의 어깨에 턱이 얹어진 해진은 귓가에 닿아오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의 등을 토닥였다.창문 너머로 초록색 잎사귀들만 빠르게 뒤로 스쳐 지나갔다.해진은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드는 기시감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그래, 그가 이렇게 좋아하면 된 거다.***“그럼, 그때 한도 때문에 기존 보험을 해지하고 새로 가입하신 거군요.”팔짱을 낀 채 테이블 한곳에 시선을 묻고 있던 은호가 고개를 들었다.“네, 맞아요. 설계사분 말씀으로는 상해사망 한도만 따로 올릴 수는 없고, 기존 계약을 해지한 뒤에 새로 가입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그렇다면 마지막 상해보험은 정확히 언제 가입하신 겁니까?”은호의 질문에 해진의 얼굴에 다시금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어요. 몸은 괜찮으시죠?”예리가 의자 바퀴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해진의 붉어진 눈가로 금세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고여 들었다.“그럼요, 모두 도움 주신 덕분에 멀쩡해요.”해진이 회의실 안의 팀원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시선 끝마다 깊은 고마움이 묻어났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예리의 두 손을 맞잡았다.“저 그날, 팀장님 전화 받고 밤을 꼬박 새웠어요. 그동안은 민수 씨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반쪽짜리라고만 생각했으니까요….”기어들어 가던 목소리에서 서서히 힘이 실리기 시작했다.“하지만 용기 내 보려고요. 팀장님 말대로 지금은,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요.”예리는 제 손을 붙잡은 해진의 마른 손을 내려다보았다. 뼈마디가 도드라진 손등이 주체할 수 없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손끝으로 전해지는 연약한 떨림과 온기를 가만히 받아내며, 예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불안하게 떨리는 손과 달리, 해진의 눈동자는 곧게 살아 있었다. 예리도 눈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했다.“저희도 힘닿는 데까지 돕겠다고 약속할게요.”해진이 주먹을 쥐듯 예리의 손을 꽉 쥐며 고개를 빠르게 끄덕였다.입가에 엷은 미소를 띤 예리가 팔을 뻗어 회의실 테이블 상석을 가리켰다.“그럼, 한시가 급하니까 바로 시작할까요?”해진이 자리에 앉자, 예리가 커다란 스크린 앞으로 걸어 나가 돌아서며 리모컨을 쥐었다.“해진 씨, 지금까지 노민수와 전화 통화는 계속하고 계신 거죠?”해진이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였다.“네, 팀장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집에서 나온 뒤로 마음 정리하러 템플스테이 왔다고 했어요. 휴대폰도 잠깐씩만 켤 수 있다고 못 박아뒀고요. 어제저녁에도 통화했는데, 아직까지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어요.”“힘드시겠지만, 지금처럼 계속 통화 부탁드려요. 조금이라도 평소와 다른 낌새가 보이면 바로 알려주시고요.”“남편, 아니, 노민수한테 사랑한다는 역겨운 거짓말을 듣는 게 곤욕스럽긴 하지만
은호는 꼬고 있던 긴 다리를 풀며 의자 깊숙이 기대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나 팀장님, 혹시 두통 있으십니까?”미세하게 흔들리는 눈빛으로 은호가 검지 손가락으로 제 관자놀이를 톡, 짚었다. 그의 손가락을 따라 예리가 커다란 눈동자를 위로 굴렸다.“아휴, 왜 이렇게 가렵지? 오늘 아침에 샴푸를 잘못 헹궜나….”그녀는 열 손가락이 머리카락에 파묻히도록 안으로 넣어 두피를 벅벅 긁었다.“여러분은 머리 감고 꼭 바짝 말리세요. 오늘 아침에 너무 바빠서 대충 말리고 왔더니 이 모양이네요….”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 넘기는 예리의 주변으로 가라앉은 침묵이 맴돌았다.잘게 눈살을 구긴 승호는 의자 등받이를 움켜잡았다. 바닥에서 마찰음이 나지 않게 살짝 들고는 예리와의 거리를 벌렸다.세 뼘 이상은 벌어진 그와의 빈 공간을 보며 예리가 큼, 목을 가다듬었다.“그래서, 하려던 이야기가 뭐였죠?”“박민수와 오지연 두 사람, 어떻게 대응할 건지 물었습니다.”어느새 견고하게 가라앉은 눈빛의 은호가 질문했다.예리의 귀에 두 사람의 이름이 꽂힌 순간, 예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곧바로 한쪽 입꼬리도 호선을 그리며 비틀려 올라갔다.“제가 제일 좋아하는 말이 있어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저 미소! 결국 나오고야 말았구나…!’한 여름 뙤약볕에서도 패딩을 챙겨 입게 만드는 서늘한 미소에 승호의 팔 위로 닭살이 오소소 돋았다. 테이블 밑으로 슬그머니 팔을 내린 그가 손바닥으로 팔을 문지르며 물었다.“팀장님, 혹시나 해서 묻는 말입니다… 화내지 말고 들어주세요.”옅은 숨소리가 섞인 그의 목소리가 공기 중에 떨렸다. 예리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가 내려갔다.“설마, 그 인간들 똑같이 차로… 들이받으시려는 건 아니죠?”말을 내뱉는 짧은 순간에도 지난날의 아찔한 광경들이 카메라 셔터처럼 눈앞을 가로막았다.소개팅 자리에서 성추행한 남성의 손목을 단숨에 뒤로 꺾어 테이블로 엎어뜨린 예리. 손목에 하얀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 앞에서 머
은호가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설마 모든 스케줄을 다 따라올까 싶었다.그런데 지난주 월요일, 출근 준비로 바쁜 예리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수신 화면에 뜬 이름은 유은호.받기가 무섭게 ‘지금 데리러 가고 있다’는 제 할 말만 툭 내뱉은 그는, 예리가 되묻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그날을 시작으로 그는 출퇴근 시간에 정확히 맞춰 매일 예리의 집 앞과 사무실을 제집 마당 드나들듯 찾았다.문제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은호는 아예 예리의 옆 책상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곤 아무렇지 않게 제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예상과 달리 업무 시간에 그는 예리에게 딱히 말을 걸거나 방해하지 않았다. 하지만 같은 공간에 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예리는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정작 그는 평온해 보이는데 자신만 온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 같아 은근히 짜증이 치밀었다.그리고 오늘도 어김없이, 예리와 함께 출근한 그가 회의실에 한 자리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완벽하게 몸에 딱 맞는 스리피스 슈트를 차려입고 찻잔을 입술로 기울이는 은호는, 심란한 자신과 달리 여유롭게 꼰 다리까지 까딱이며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그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삼키던 예리는 어디선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고개를 돌렸다.역시나, 가람이 자신과 은호를 번갈아 가며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는 중이었다.함께 출퇴근하는 것도 모자라 예리의 사무실에서 업무까지 같이 보겠다는 은호의 파격적인 행보에 인연 VIP 전담팀은 발칵 뒤집어졌으나, 곧 예리가 ‘신변 보호’ 때문이라고 적당히 둘러댄 탓에 다들 납득하는 눈치였다.단 한 사람, 가람만 빼고.지난주 내내 회의할 때도, 점심을 먹을 때도 은호와 자신이 함께 있는 모습만 포착하면 사설탐정처럼 집요하게 관찰하던 그녀였다.그리고 지난 금요일, 마침내 가람의 집요한 수사망이 예리를 덮쳤다.점심을 먹고 1층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한 예리에게, 먼저 나온 제 디카페인 아아를 쭉쭉 빨던 가람이 슬며시 다가와 은밀하게 속삭인 것이다.“팀장
사고 당일 밤, 은호가 입원한 응급실을 나와 집으로 향하던 차 안.예리의 휴대폰 너머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여보세요? 나예리 팀장님?속삭이듯 작게 들려오는 해진의 목소리에, 운전대를 잡고 있던 소진이 옆을 힐끔거렸다.“네, 해진 씨 저예요. 몸은 괜찮으세요?”-네, 검사 마치고 지금 막 병원에서 집으로 돌아왔어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 연락드려야 할 것 같아서 전화가 좀 늦었어요. 지금은 민수 씨가 씻는 중이라 그 사이에 조용히 건 거예요.“잘하셨어요.”예리의 짧은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해진의 음성은 사시나무 떨리듯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나 팀장님, 이제 말씀해 주세요. 아까 분명 범인이 누군지 안다고 그러셨잖아요….외면하고 싶었던 잔혹한 실체를 기어이 마주해야 하는 사람처럼, 해진의 목소리에는 다급함과 두려움이 기묘하게 뒤엉켜 있었다.“…….”잠시 숨을 고르던 예리가 마침내 무겁게 입을 열었다.“오늘 내내, 해진 씨 곁을 지키고 있던 사람.”차가운 차창 밖으로 도로의 불빛들이 빠르게 예리의 얼굴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사람이 범인이에요.”-…설마 지연 씨요?순간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해진이 되물었다. 스스로도 놀랐는지 다급하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고스란히 전해졌다.“맞아요. 그리고… 민수 씨도요. 오늘 일, 두 사람이 철저하게 계획하고 벌인 살인미수극이에요.”예리의 입에서 나온 잔혹한 진실에 해진의 목소리가 마구 젖어 들었다.-아, 아니에요, 팀장님. 민수 씨랑 지연 씨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두 사람… 아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민수 씨는 절대 그런 사람 아니에요! 팀장님이 뭔가 잘못 아신 게 분명해요. 저 오늘 통화, 못 들은 걸로 할게요.현실을 부정하며 전화를 끊으려는 해진의 태도에, 예리가 차분하지만, 송곳처럼 단호하게 쐐기를 박았다.“못 믿으시겠다면, 두 사람의 대화가 담긴 녹음본을 지금 보내드리겠습니다.”예리는 어두운 숲속에서 숨을 죽인 채 켰던 휴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