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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Author: 금소
민하윤은 회사에 일주일 병가를 낸 뒤 홀로 병원으로 향했다.

민씨 가문에서는 며칠 동안 지속적으로 민하윤에게 결혼하라고 압박했고 그 탓에 민하윤은 잘 먹지도, 잘 자지도 못해서 많이 수척해졌다. 원래도 가녀린 그녀였는데 지금은 더 말라서 바람 한 번 불면 날아갈 듯했다.

민하윤은 우선 병원으로 가서 접수를 했고 의사는 검진부터 해보자고 했다. 산부인과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복도에는 처음 엄마가 된 여자들이 부끄러워하거나 기쁜 표정을 지으며 남편과 함께 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하윤은 저도 모르게 평탄한 복부에 손을 올리며 괴로워했다.

‘아기야, 엄마가 미안해.’

“민하윤 씨, 3번 진찰실로 와주세요.”

병원 복도가 소란스러워지더니 정장을 입은 남자 몇 명이 민하윤에게로 다가왔다. 맨 앞에 서 있던 남자가 사진을 꺼내더니 사진 속 여자와 민하윤의 얼굴을 대조해 보았다.

“안녕하세요, 민하윤 씨 맞으실까요?”

민하윤의 눈빛에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 결국 민하윤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와 함께 가시죠. 민하윤 씨를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십니다.”

“민하윤 씨, 3번 진찰실로 와주세요.”

민하윤은 거절의 의미로 고개를 저었다.

가장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민하윤에게 전화를 건넸고 민하윤은 망설이다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 너머로 남자의 허스키하면서도 냉담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가족들을 움직일 정도로 수완이 좋을 줄은 몰랐네. 네가 이겼어. 돈도 줄게. 그리고 네 아버지도 새로운 병원으로 옮겼어. 내가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너도 내 조건을 만족시켜 줘야 하지 않겠어?”

민하윤의 수려한 눈썹이 찡그려졌다. 전화를 받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 완전히 얼어붙었고 그 틈을 타 그녀의 앞에 서 있던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들은 민하윤을 빈틈없이 둘러쌌다.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와 현실 속 목소리가 겹치는 순간, 민하윤은 소리의 근원지가 어딘지 구분할 수 없었다. 늘씬한 자태의 하도진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민하윤은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하도진은 알 수 없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참을성이 많지 않은 사람이니까 간단히 말할게. 아이 지우면 안 돼. 그리고 너는 나랑 결혼해야 해.”

병원 로비에 햇볕이 드리워졌다. 하도진은 민하윤을 데리고 병원에서 나와 곧장 구청으로 향했다.

벤틀리 내부는 넓고 따뜻했다. 민하윤은 양아버지를 간호해 주는 간병인 서정아에게 연락했고, 서정아는 민하윤의 친구라는 사람이 민하윤의 양아버지를 아주 좋은 사립 재활병원으로 옮겼다고 전했다.

그 사실을 확인한 뒤에야 민하윤은 비로소 긴장의 끈을 조금 놓을 수 있었다.

그러자 옆에서 하도진이 계약서를 건넸다.

“사인해.”

민하윤은 의아한 얼굴로 계약서를 넘겨보았다. 내용을 확인한 뒤 민하윤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갑과 을의 혼인 관계 유지 기간 동안 갑의 재산은 을과 무관하다.]

[을이 아이를 출산한 당일, 갑과 을의 혼인 관계는 해지된다. 갑은 을에게 100억을 지급하고 을은 양육권, 면접교섭권을 포기하며 갑의 허락 없이 아이와 접촉할 수 없다.]

갑이라 적힌 곳에는 하도진의 이름이 대충 적혀 있었다.

민하윤은 을이라 적힌 곳에 사인하면 되었다.

계약서는 총 2부였다. 민하윤은 펜을 들었는데 금속 재질의 펜이라서 한기가 뼛속까지 스미는 것만 같았다. 민하윤은 오랫동안 손을 떨면서 사인하지 못했다.

하도진은 웃음을 터뜨리며 비아냥댔다.

“왜? 금액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얘기해. 지금 네게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민하윤은 마음을 굳게 먹은 뒤 자신의 이름을 사인했다.

차는 명원 구청 앞에 멈춰 섰다. 민하윤은 오늘 병원에 가기 위해 주민등록증과 기타 서류들을 전부 챙겼다. 하도진은 뒤에서 힘겹게 쫓아오는 민하윤을 신경 쓰지 않고 앞에서 빠르게 걸었다.

30분 뒤,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한 민하윤이 혼인신고를 마친 뒤 거리에 버려졌다.

“르네 별장 1동. 거기로 짐 옮겨.”

검은색 벤틀리가 자취를 감춘 뒤에야 민하윤은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신의 손에 들린 둘의 사진을 보았다. 하도진의 앞머리는 그의 짙은 눈썹을 살짝 가렸고 예쁜 두 눈은 매력적이었으며 콧대는 높고 입술은 얇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입을 다문 것뿐인데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민하윤은 처음으로 하도진이 잘생겼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웃은 걸까?’

민하윤은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사진 속 하도진의 얼굴을 만져보았다. 그녀는 하도진의 살짝 올라간 입꼬리에 정신이 팔렸다.

그러나 민하윤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하도진은 가족들의 압박에 못 이겨 강제로 그녀와 결혼한 것이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처럼 차가운 얼굴로 그녀를 발로 차던 남자가 오늘은 계약서를 들고 찾아와서 그녀에게 몸을 팔라고 했다.

민하윤은 고개를 저으며 둘 사이가 얼마나 최악인지를 떠올렸다. 그녀는 자취방으로 돌아가 이사할 준비를 하려고 택시를 탔다.

차 안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운전기사는 감히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하도진은 목적지를 얘기하지 않았고 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별로 막히지 않는 길들을 골라 근처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러나 번화한 도시인 명원에 막히지 않는 길이 있을 리가 없었다. 두 번째 바퀴에 그들은 퇴근 시간 정체 때문에 육교에 거의 멈춰서다시피 했다.

하도진은 눈을 감고 있으면서 이따금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그러다 저도 모르게 옆에 대충 던져두었던 사진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두 사람 모두 마침 흰색 옷을 입고 있어서 아주 깔끔해 보였다.

사진작가의 요구에 따라 하도진과 민하윤은 어깨가 닿을 정도로 아주 가까이 서서 사진을 찍게 되었는데 그 모습이 매우 다정해 보였다.

하도진은 저도 모르게 민하윤의 작은 얼굴, 깨끗한 피부, 수려한 눈썹, 울어서 빨갛게 된 눈을 바라보았다. 민하윤은 맑은 눈동자로 살짝 겁먹은 듯이 카메라 렌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꼬리를 살짝 올려 웃고 있었는데 볼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청순하면서도 요염했고 단순히 아름답다는 말로는 형용하기에는 부족하게 느껴졌다.

하도진은 저도 모르게 넋을 놓고 민하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손을 들어 단추를 두 개 정도 푼 뒤 창문을 내렸다. 가을밤의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열기를 식혀주었다.

하도진은 금욕적인 사람이 아니었고 욕망을 자제하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아내를 두고도 그냥 바라만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저도 모르게 하체에 열기가 몰렸다.

피부가 흰 편인 하도진은 귀 끝이 붉어지면 엄청 티가 났다. 차가 꽉 막혀서 답답했던 하도진이 말했다.

“헬리 아파트로 가.”

민하윤은 샤워를 한 뒤 간병인과 영상 통화를 했다. 그녀는 영상 통화를 통해서 아버지가 머무르고 있는 병실 환경을 확인했고, 간병인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하윤 씨, 이 병원 진짜 너무 좋은 것 같아요. 의사 선생님이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 번 회진하고 간호사도 수시로 찾아와서 약을 바꿀 때가 됐는지 확인해 주세요. 필요한 게 있으면 호출 벨을 누르면 되는데 호출 벨을 누르면 또 바로 와주세요. 게다가 다들 엄청 상냥하세요.”

“하윤 씨 아버님 다리 상처는 짓무르지 않았어요. 오늘은 열도 안 났어요. 여유가 있을 때면 하윤 씨 아버님을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햇볕도 좀 쐬어주고 꽃구경도 시켜주고 있어요. 게다가 제 식사도 자비로 해결할 필요가 없어요. 매일 식사 시간이 되면 음식을 가져다주시거든요. 게다가 반찬도 아주 훌륭해요. 국 한 가지에 반찬도 무려 네 가지라니까요! 저는 산후 조리할 때도 이런 대우를 받아본 적이 없는데 정말 너무 행복해요.”

서정아는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녀는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말했다.

“하윤 씨, 저 게으름 부린 적 없어요. 진짜예요!”

서정아는 오랫동안 민하윤의 양아버지를 옆에서 돌봐주었다. 그동안 서정아는 늘 최선을 다했고 민하윤은 그런 서정아를 매우 신뢰했다.

민하윤은 흐뭇한 얼굴로 서정아를 향해 웃어 보이며 수화를 사용하여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요. 저도 알아요.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쉬세요. 시간 있을 때 아빠 보러 갈게요.]

전화를 끊자마자 벨이 울렸다.

민하윤은 조금 전 주문한 배달 음식이 도착한 줄 알고 무방비한 상태로 문을 열었다. 익숙한 우드 향이 느껴지는 동시에 민하윤은 누군가의 품속에 갇혀버렸고 큰손이 민하윤의 뒤통수를 단단히 붙잡았다. 이내 창밖에서 쏟아지는 빗줄기보다도 더욱 강렬한 기세의 키스가 민하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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