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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6주년 기념일 저녁.
탁자 위에는 소율이 세 시간 동안 준비한 안심 스테이크와 프랑스산 와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은은한 촛농이 하얗게 굳어 내릴 무렵, 자정을 넘긴 시각에야 현관 도어록이 풀리는 전자음이 울렸다.
문이 열리고 남편 최민우가 들어섰다.
고급 맞춤 정장에서는 시트러스 향수와 함께, 낯설고 달콤한 플로럴 향기가 스치듯 풍겼다.
“민우 씨, 왔어? 늦는다는 연락이라도 주지…….”
소율이 앞치마를 풀며 다가갔다.
하지만 민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명품 서류 가방을 소파에 툭 던졌다.
“일이 바빴어. 이런 날이라고 굳이 유난 떨며 차리지 말라니까.”
식탁을 흘끗 본 민우의 눈동자에는 감동 대신 노골적인 피로와 귀찮음이 깔려 있었다.
소율은 풀던 앞치마 끈을 놓쳤다. 매듭 끝이 손목에 걸렸는데도 한동안 빼내지 못했다.
남편의 브랜드 사업이 연 매출 수백억을 기록하기 시작한 뒤로, 이런 냉대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
“하린이는?”
“아까 9시에 잠들었어. 아빠 기다린다고 끝까지 버티다가…….”
“그래. 피곤하니까 먼저 씻을게.”
민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안방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식탁을 정리하려던 소율의 시선에, 민우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온 은색 봉투 하나가 닿았다.
두툼한 엠보싱 봉투 겉면에는 청담동 초고가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의 금박 로고가 박혀 있었다.
'선물인가……?'
결혼기념일을 잊지 않은 남편의 깜짝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희망이 스쳤다.
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나온 민우는 봉투를 든 소율을 보고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
“벌써 봤네. 내일 아침에 주려고 했는데.”
“이게 뭐야, 민우 씨? 프라이빗 짐 회원권……?”
민우는 탄산수를 들이켠 뒤 식탁 맞은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
소율을 위아래로 훑는 남편의 시선은 재고 상품을 품평하듯 서늘했다.
“다음 달에 우리 브랜드 리뉴얼 VIP 갈라 파티 있는 거 알지?”
“응, 알지. 당신이 반년 넘게 준비한 행사잖아.”
“주요 투자사 대표들이랑 인플루언서들 전부 부부 동반으로 와.”
민우가 탄산수 병을 식탁에 탁 내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 자리에 내 아내로 당신 데리고 가야 하거든. 그런데 솔직히 지금 당신 꼴로 그 사람들 앞에 나설 수 있겠어?”
소율의 숨이 턱 막혀왔다.
“내…… 꼴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거울 좀 봐, 소율아. 등이 굽어서 어깨는 잔뜩 말려 있고, 걸을 때마다 발을 질질 끌잖아. 배는 출산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그대로 처져 있고.”
민우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웠다.
“내가 왜 회당 30만 원짜리 최고급 VVIP 1:1 PT를 100회나 끊어줬겠어? 파티 전까지 제발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라는 거야.”
“민우 씨…… 말이 너무 심하잖아! 내가 왜 이렇게 됐는데……!”
소율의 목소리가 모멸감으로 잘게 떨렸다.
“하린이 낳고 산후조리도 못 한 채 당신 회사 첫 로고랑 카탈로그 디자인했어. 초기 자금 부족할 때 친정에서 돈 끌어다 준 건 누구였는데? 당신 자리 잡을 때까지 밤낮없이 갈려 나간 게 나야!”
“또 그 소리야? 언제 적 이야기를 평생 우려먹을 셈이야?”
민우가 짜증스럽게 말을 잘랐다.
“그땐 나도 힘들었어. 지금 내가 벌어다 주는 돈으로 남들보다 백배는 편하게 살잖아? 남편이 잘나가면 그 격에 맞게 자기 관리라도 해야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게 굴어?”
민우는 다가와 소율의 턱을 억세게 쥐어 올렸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에 비친 소율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다른 집 여자들 좀 보고 배워. 다들 애 낳고도 처녀 때 몸매 유지해. 솔직히 지금 넌…… 여자로 안 보여.”
여자로 안 보인다.
청춘과 경력을 모두 갈아 넣었던 아내에게 던진 사형선고였다.
민우는 손을 털고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버렸다.
적막이 내려앉은 거실. 소율은 주저앉을 뻔한 다리를 간신히 버텼다. 손에 쥔 봉투가 구겨지며 바스락거렸다.
드레스룸 전신 거울 속에는 늘어난 티셔츠에 구부정한 어깨를 한 초라한 여자가 서 있었다.
결혼 전, 당당하게 무대를 누비던 디자이너 ‘한소율’의 빛은 어디에도 없었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소율은 이를 악물고 삼켰다.
'울지 마, 한소율. 울면 지는 거야.'
짓밟힌 수치심의 바닥에서 차가운 오기가 솟구쳤다.
***
다음 날 오전 10시.
청담동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의 묵직한 통유리 문이 열렸다.
블랙우드 아로마 향이 감도는 VIP 전용 트레이닝 룸.
소율이 긴장으로 굳은 채 들어섰을 때, 기구 앞에 서 있던 한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압도적인 피지컬.
기능성 티셔츠 너머로 드러난 단단한 근육과 베일 듯 날카로운 턱선, 그리고 깊고 서늘한 눈동자.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의 VVIP 전담 트레이너, 차도진이었다.
도진의 시선이 소율의 창백한 얼굴부터 굳어 있는 목덜미, 안으로 말린 어깨까지 정밀하게 훑어 내렸다.
남편의 멸시와는 다른, 신체의 비명과 무너진 밸런스를 꿰뚫어 보는 시선이었다.
“한소율 회원님?”
“……네.”
소율이 숨을 삼키자, 도진이 소율의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섰다.
188cm의 큰 키가 가까이 다가오자, 소율은 저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도진의 서늘한 시선이 소율의 굽은 등을 정확하게 짚었다.
“도망가지 마시죠.”
도진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사모님 몸, 지금 완전히 망가져 있습니다.”
1년 뒤, 가을의 초입.청담동의 아틀리에 한소율과 루미너스 웰니스 타워에는 올해 글로벌 웰니스·오트쿠튀르 대상 수상을 알리는 표지가 걸려 있었다.기업 가치 1조 원을 평가받은 뒤, 브랜드는 120개 주요 도시의 거점으로 판매와 운영을 넓혔다. 소율의 책상에는 여전히 확인할 원단과 서류가 함께 놓였다. 상을 받았다고 해서 마감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오후 4시, 8층 집무실.소율은 유럽 3호점 착공에 관한 결재를 마치고 펜을 내려놓았다. 버건디 블라우스의 소매를 정리하며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때 문이 열렸다.“엄마!”여섯 살이 된 하린이가 노란 원복 차림으로 들어왔다. 소율은 몸을 낮추고 두 팔을 벌렸다. 아이가 안겨오자 웃으며 등을 토닥였다.“유치원에서 뭐 했어?”하린이는 소율에게 안긴 채, 숨 돌릴 틈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소율은 아이를 의자에 앉히고 눈높이를 맞췄다. 뒤에서 들어온 도진이 가방을 내려놓았다.그는 소율의 책상 위를 한 번 보고 물었다.“오늘 일은 끝나셨습니까?”“네. 방금 마지막 결재했어요.”“그럼 아래층 예약한 시간에 내려가시죠. 하린이는 지은 씨하고 뮤지컬 보러 가기로 했습니다.”아이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잠시 뒤 지은이 찾아와 하린이의 손을 잡았다.“엄마, 아빠. 운동하고 저녁에 만나!”하린이가 손을 흔들었다. 소율도 손을 흔들고 지은에게 부탁한다는 눈인사를 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아이가 복도에서 들뜬 목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잠깐 들렸다.***7층 프라이빗 트레이닝 룸.소율은 검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에 섰다. 창 너머의
청담동 루미너스 타워 8층 그랜드 볼룸.아시아 메디컬 웰니스·하이엔드 패션 대상 시상식과 기념 갈라가 열렸다. 현장에는 바이어와 업계 관계자 등 400여 명이 참석했고, 100여 개국 매체에 관련 자료가 전달됐다.소율은 버건디 백리스 드레스를 입고 무대 옆에 섰다. 도진이 턱시도 소매를 정리하며 곁으로 왔다. 그녀는 그를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두 사람의 이름이 호명됐다.단상으로 걸어가며 소율은 객석의 직원들을 봤다. 익숙한 얼굴들이 웃으며 손뼉을 치고 있었다. 그녀는 마이크 앞에서 준비한 종이를 펼쳤다.“감사합니다. 현장에서 매일 사람을 만나고, 옷과 프로그램을 고치고, 다시 확인하는 분들과 함께 받는 상이라고 생각합니다.”그녀는 팀의 이름을 차례로 말했다. 원단과 패턴을 다듬는 사람, 매장에서 손님을 맞는 사람,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사람들의 일이 짧은 인사 속에 들어갔다.“제가 처음 일로 돌아왔을 때, 혼자서는 다 할 수 없다는 말을 인정하는 것이 어려웠습니다. 지금은 도움을 구하고 다른 의견을 듣는 것이 일을 더 낫게 만든다는 걸 배우고 있습니다.”소율은 곁의 도진을 봤다.“앞으로도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자기 이름으로 일할 수 있게 하겠습니다.”그녀가 인사를 마치자 박수가 났다. 협회 위원장이 최우수 브랜드 대상 트로피를 건넸다. 소율은 두 손으로 받고 도진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트로피가 생각보다 무거웠다. 그녀가 손을 조금 바꾸어 잡자 도진이 아래를 받쳐주었다. 사진 촬영이 끝나고 단상에서 내려오며 두 사람은 동시에 웃었다.“들어보니 무겁네요.”“저도 조금 놀랐습니다.”직원들이 다가와 축하했다. 소율은 트로피를 함께 들어보자며 내밀었다
제주 가족 서약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째.소율은 커피 냄새를 따라 침실 밖으로 나왔다. 한남동 집의 거실에는 아침 볕이 들어와 있었다. 주방에서 도진이 토스트를 접시에 옮겼다.“일어났어요?”그가 평소보다 편한 말투로 물었다. 소율은 식탁 앞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보카도와 스크램블에그, 자몽 주스가 놓여 있었다.“하린이는요?”“가방 챙긴다고 들어갔습니다. 인형도 데려가겠다고 해서 얘기 중이고요.”소율은 아이 방 쪽을 보고 웃었다. 도진이 가까이 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녀가 얼굴을 들자 입술에도 짧게 닿았다.“아침부터요?”“인사입니다.”“인사가 길어지겠는데요.”소율이 웃으며 그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때 방문이 열리고 하린이가 가방을 멘 채 나왔다.“엄마, 아빠! 다 챙겼어!”가방 지퍼 사이로 인형 귀가 나와 있었다. 도진이 무릎을 굽혀 아이를 봤다. 하린이는 그 시선을 눈치채고 가방을 뒤로 돌렸다.“인형은 집에서 기다리기로 하지 않았어?”“작은 것만.”소율은 아이 곁에 앉아 오늘 유치원에 가져가도 되는 날인지 물었다. 하린이는 잠깐 생각하다 고개를 저었다. 결국 인형은 소파에서 기다리기로 했다.도진은 가방을 식탁 옆에 세워주었다. 하린이는 인형이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아침을 먹었다.“오늘 끝나고 아빠가 데리러 와?”“응. 약속한 시간에 갈게.”“아이스크림도?”도진이 소율을 봤다. 그녀는 아이에게 밥을 다
제주 서귀포 해안의 풀빌라.소율은 전복죽 냄새에 눈을 떴다. 커튼 사이로 바다가 보였고, 거실에서는 하린이가 소라 껍데기를 테이블에 놓는 소리가 났다.주방의 도진이 그녀를 보고 웃었다.“일어나셨습니까?”“하린이도 일어났네요.”“조금 전에요. 여기서 소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아이가 껍데기를 귀에 대고 소율에게도 들어보라고 했다. 소율은 옆에 앉아 귀를 가까이했다. 하린이는 무슨 소리가 들리느냐고 몇 번이나 물었다.도진이 식탁에 전복죽과 빵, 한라봉 주스를 놓았다. 소율은 뜨거운 죽을 한 숟갈 떠 입으로 불었다. 하린이는 빵을 잘라 죽에 넣어도 되는지 물었다.“조금만 넣어봐. 마음에 안 들면 더 안 넣으면 되니까.”소율이 말하자 아이는 작은 조각부터 넣었다. 도진은 자기 그릇에도 조금 넣어 맛을 봤다. 하린이가 그 표정을 살피고 웃었다.***오전 10시, 풀빌라 앞 해변.하린이가 소라 껍데기를 들고 도진에게 달려왔다.“아빠, 여기서도 소리 나!”도진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어제 들은 호칭이 오늘도 이어졌다. 그는 아이 앞에 몸을 낮추고 껍데기를 받아 귀에 댔다.“하린이도 들어볼까?”아이와 번갈아 들어본 뒤 도진이 목말을 태워주었다. 하린이는 높아진 자리에서 바다를 보고 소리쳤다.“엄마! 바다가 더 커졌어!”소율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도진은 젖은 모래가 시작되는 곳 앞에서 멈췄다. 아이를 내려놓고 세 사람은 물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았다.모래성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진이 젖은 모래를 모아 올리고 소율이 옆면을 다졌다. 하린이는 조개껍데
제주의 작은 프라이빗 비치.흰 꽃으로 장식한 아치 뒤로 파도가 밀려왔다. 서울에서 부부의 서약을 한 두 사람은 이번에는 하린이와 함께 가족의 약속을 남기기 위해 섰다.지은과 강태욱, 가까운 팀원 등 십여 명이 자리를 지켰다. 화려한 조명 대신 해 질 무렵의 빛이 모래 위로 길게 놓였다. 첼로 소리가 바람에 섞였다.하린이는 분홍 화관을 쓰고 꽃바구니를 들었다. 꽃잎을 한 줌 집었다가 너무 많은 것 같아 조금 내려놓았다. 지은이 눈을 맞추며 천천히 해도 된다고 말했다.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고 아치 쪽을 봤다.“엄마, 아빠! 나 준비됐어!”도진이 그대로 멈췄다. 하린이는 자기가 어떤 말을 했는지 곱씹지도 않고 바구니를 높이 들었다. 소율은 도진의 손등에 손을 얹었다.그가 아이를 보고 웃었다.“응. 기다리고 있어.”하린이는 꽃잎을 뿌리며 걸었다. 바람에 몇 장이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자 아이가 잡으려 했다. 지은이 그대로 두어도 예쁘다고 말해주었다. 하린이는 다시 앞을 보고 천천히 걸었다.소율은 흰 실크 드레스의 자락을 들고 도진과 나란히 걸었다. 그가 손을 내밀었다. 잡은 손이 평소보다 조금 떨려 소율이 웃으며 물었다.“왜 이렇게 긴장했어요?”“방금 하린이가 부른 말 때문에요.”소율의 눈가도 뜨거워졌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손을 더 꼭 잡았다.아치 아래에서 세 사람이 나란히 섰다. 도진은 준비한 종이를 펴고 먼저 읽었다.“나는 하린이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듣겠습니다. 같이 놀기로 한 약속을 잊지 않겠습니다. 약속을 바꿔야 할 때는 먼저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말하겠습니다.”하린이가 진지하게 듣고 있었다. 도진은 소율을 보고 말을
토요일 오전, 한남동 펜트하우스의 다이닝 룸.식탁 위에 제주 항공 일정과 리조트 평면도, 짧은 서약서가 놓였다. 소율과 도진은 하린이를 가운데 앉히고 바닷가 사진을 함께 봤다.서울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약했던 두 사람은 이번에는 아이와 함께 조용한 약속을 남기기로 했다. 하린이는 사진 속 모래를 가리켰다.“여기서 꽃 뿌려?”“네가 하고 싶으면.”소율이 답했다. 도진은 아이가 들고 온 꽃바구니를 받아 바닥에 내려주었다. 하린이는 빈 바구니에서 꽃잎을 꺼내는 시늉을 하며 거실을 걸었다.“엄마, 봐봐. 이제 안 쏟아.”소율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도진은 아이가 자기 자리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이번에는 하린이도 하고 싶은 말 해보자.”“무슨 말?”“엄마랑 삼촌한테 바라는 거.”하린이가 진지하게 생각했다. 소율은 종이를 앞으로 당겨 아이의 말을 적을 준비를 했다. 아이는 한참 후에 쉬는 날 같이 놀아달라고 말했다.도진은 그것부터 적자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율은 작은 글씨로 받아썼다. 길고 근사한 서약보다 아이가 금방 기억할 수 있는 말들이 먼저 적혔다.***오후 2시, 청담동 아틀리에 피팅 룸.소율은 제주에서 입을 드레스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전부터 그려둔 스케치를 바탕으로 직접 마무리한 흰 실크 드레스였다. 앞선은 간결했고, 등은 깊게 파여 있었다.도진은 블랙 턱시도를 입고 기다리고 있었다. 커튼이 열리자 그가 다가왔다. 소율은 치맛자락을 조금 들어 걸어 보였다.“서울에서 입은 것보다 가볍죠?”“걷기도 편하십니까?”&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