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망가졌다니…….”
소율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온몸의 피가 일순간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서늘함이 덮쳤다.
어젯밤 남편 최민우가 던졌던 서슬 퍼런 비수들이 다시금 귓가를 짓이겼다.
‘여자로 안 보여.’
‘제발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어.’
남편에게 받은 치욕적인 모멸감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생전 처음 본 이 건장한 남자 트레이너마저 제 몸을 ‘망가졌다’며 난도질하고 있었다.
소율의 주먹 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처음 보는 회원한테…… 말이 너무 지나치시네요.”
소율은 애써 턱을 치켜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
상처 입은 내색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에 가시를 돋웠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
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188cm의 압도적인 장신으로 소율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
그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묵직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기분 나쁘라고 드린 말씀 아닙니다.”
도진의 목소리는 격앙되지 않고 낮고 차분했다.
“문 열고 들어오실 때부터 봤습니다. 왼쪽 어깨는 안쪽으로 심하게 말려 있고, 턱은 앞으로 15도 이상 빠져 있습니다. 골반은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걸을 때마다 오른쪽 발뒤꿈치에 체중이 과하게 실리고 있죠.”
소율의 숨이 멎었다.
도진의 시선은 음흉하거나 평가하는 눈길이 아니었다.
마치 엑스레이 필름을 판독하는 외과의사처럼, 그녀의 뼈마디와 근육이 겪고 있는 비명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
“목과 허리에 부담이 쏠리는 자세입니다. 조금만 서 있어도 어깨가 아프지 않습니까? 밤에 다리에 쥐가 나거나, 허리가 쑤셔서 깨신 적은요?”
“…….”
정확했다.
하린이를 낳고 수유를 하던 시절부터, 밤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쑤셔 남몰래 파스를 붙이며 울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
민우는 그것을 ‘게으름과 나태함의 증거’라 치부했지만, 도진은 단 10초 만에 그녀가 감내해 온 육체적 고통의 궤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도진이 트레이닝 룸 한쪽에 위치한 프라이빗 라커룸의 도어를 턱 끝으로 가리켰다.
“지금 옷으로는 움직임을 정확히 보기 어렵습니다. 불편하시면 오늘은 상담만 하셔도 됩니다. 계속하실지는 설명을 듣고 결정하세요.”
“…….”
“운동을 해보실 생각이라면 라커에 준비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시죠. 어떤 동작이 불편한지부터 보겠습니다.”
도진이 문손잡이를 살짝 돌려 열어두며 덧붙였다.
“사모님.”
‘사모님’이라는 호칭이 도진의 깊은 중저음을 타고 귀를 파고들었다.
어쩐지 그 단어가 단순한 존칭이 아니라, 남편의 그늘 뒤에 숨어 자신을 갉아먹고 있는 소율의 현재를 꼬집는 것처럼 들렸다.
소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여기서 도망치면 영원히 남편의 비아냥 속에 갇힌 ‘쓸모없는 아내’로 남을 뿐이었다.
소율은 도진을 지나쳐 라커룸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탁, 소리와 함께 라커룸 문이 닫히고 완벽한 독립 공간이 되었다.
은은한 편백나무 향이 감도는 라커룸 중앙에는 최고급 원단의 짙은 네이비 컬러 브라톱과 레깅스가 단정하게 개어져 있었다.
소율은 입고 있던 두툼한 니트를 벗어 던졌다.
전신 거울 앞에 선 자신의 모습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출산 후 늘어진 아랫배의 미세한 흔적, 날개뼈 주변으로 굳어버린 승모근, 쇄골 라인이 묻혀버린 둥근 어깨.
디자인 에이전시의 에이스 디렉터로 불리며 당당하게 핀턱 수트를 입고 프레젠테이션을 이끌던 시절의 ‘한소율’은 흔적조차 희미했다.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나를 놓아버렸을까.’
남편의 야근과 접대를 뒷바라지하느라, 아이의 열을 내리느라 밤을 꼬박 새우면서도 제 몸 하나 돌볼 틈이 없었다.
그 헌신의 대가가 고작 남편의 외도 냄새와 외모 비하였다니.
소율은 이를 악물며 트레이닝복을 몸에 밀착시켜 입었다.
탄성 있는 원단이 군살과 체형을 가감 없이 드러냈지만, 묘하게 피부를 조여오는 텐션감이 굳어 있던 감각을 깨웠다.
소율은 머리를 높게 묶어 올린 뒤, 심호흡을 깊게 내쉬고 라커룸 문을 열었다.
트레이닝 룸의 밝은 조명 아래로 소율이 걸어 나왔다.
기구 정리를 하던 도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도진의 시선이 소율의 드러난 목선과 쇄골, 타이트한 레깅스 위로 드러난 골반 라인에 닿았다.
도진의 시선이 잠시 머물렀다가 소율의 얼굴로 올라왔다.
소율은 무의식적으로 팔을 교차해 가슴을 가리려 했다.
남편 외의 타인에게 이런 차림을 보이는 것은 결혼 후 처음이었기에 살갗이 타들어 갈 듯 수치스러웠다.
“팔 내리세요.”
도진이 소율의 앞을 가로막으며 낮게 명했다.
“숨길 필요 없습니다.”
도진은 곧바로 덧붙였다.
“불편하시면 수건을 걸치셔도 됩니다. 다만 어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는 봐야 해서요.”
소율은 거울을 한 번 보고 팔을 내렸다. 배를 감추고 싶은 마음보다, 어젯밤처럼 제 몸을 미워한 채 돌아가기는 싫다는 마음이 조금 더 컸다.
“아프면 바로 말할게요.”
“그러세요. 참는다고 좋은 운동이 되는 건 아닙니다.”
도진은 소율의 등 뒤로 걸음을 옮기더니, 거울 앞에 부착된 정밀 체형 측정용 그리드 눈금선 앞에 소율을 세웠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불과 한 뼘도 되지 않았다.
도진의 몸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숲 향과 짙은 남자의 열기가 소율의 뒷목에 고스란히 닿았다.
소율의 숨결이 긴장으로 가늘게 떨려왔다.
도진이 검은색 장갑을 낀 커다란 손을 들어 소율의 어깨선 위로 천천히 뻗었다.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셨으니.”
도진의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소율의 귓가를 서늘하게 긁고 지나갔다.
“이제 사모님이 뭘 그렇게 필사적으로 버텨왔는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죠.”
“수업? 지금 나보고 그 말을 믿으라는 거야?”매트 끝에 선 민우가 소율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남편의 거친 삿대질과 폭언이 고요하던 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찢어발겼다.민우의 시선은 땀에 젖은 소율의 탄탄한 허리 라인과, 그 곁에 서 있는 거대한 체격의 젊은 남자에게 사납게 꽂혀 있었다.민우가 더 다가서려 하자, 도진이 소율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어깨너머로 민우의 시야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도진의 목소리는 한겨울 얼음물처럼 차분하고 단호했다.“루미너스 VVIP 전담 1:1 홈 트레이닝 정식 계약에 따른 방문 지도 중입니다.”“뭐? 루미너스?”민우가 기가 찬다는 듯 코웃음을 쳤지만,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과 위압적인 체격에 본능적으로 반 걸음 물러섰다.전직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다운 단단한 골격과 묵직한 아우라는, 허세로 가득 찬 민우를 단숨에 짓눌렀다.“내가 분명 센터에 연락해서 회원권 환불하겠다고 통보했을 텐데? 당신들 강사들 수준이 이 따위야? 남의 집에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와서 불륜 수작질이야 뭐야!”민우가 자존심을 세우려 억지 고함을 질렀다.그때, 도진의 등 뒤에서 소율이 천천히 걸어 나왔다.소율의 어깨는 활짝 펴져 있었고,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주눅도 없었다.“최민우 씨. 착각하지 마.”소율의 낮고 또렷한 음성이 거실에 서늘하게 울려 퍼졌다.“내가 예약했고 내가 문 열어드렸어. 센터에도 내 의사부터 확인하라고 했고. 선생님한테 화풀이하지 마.”“뭐……? 너 지금 누구 돈으로 끊어준 건지 잊었어? 내가 벌어다 준 돈으로 호사 누리면서 감히 남편한테 대들어?”민우가 삿대질하며 다가오자, 소율은 서늘한 비소를 머금었다.“당신 혼자 번 돈이라고? 내가 6년 동안 뭘 했는데. 우리 부모님이 대준 돈으로 회사 시작하고, 내가 밤새 그린 디자인으로 첫 물건 팔았잖아. 100회 회원권 끊어줬다고 그게 전부 당신 덕이 돼? 내 몸 돌보는 일까지 허락받을 생각 없어. 내가 계속
월요일 오후 2시, 청담동 최고급 펜트하우스 15층.남편 최민우가 지방 공장 출장을 떠나고 딸 하린이가 유치원에 간 시간.차가운 대리석 바닥이 깔린 거실의 현관 인터폰 벨이 고요한 정적을 날카롭게 갈랐다.‘띵동-.’소율이 인터폰 화면을 확인하자, 블랙 트레이닝복 차림의 차도진이 단정한 자세로 서 있었다.188cm의 압도적인 피지컬과 서늘한 존재감.소율의 심장이 기묘한 긴장감으로 쿵쿵 뛰기 시작했다. 센터가 아닌, 남편의 집 안으로 그 몸을 들이는 일이 이상하게 숨이 막혔다.문을 열자, 도진의 서늘한 숲 향기와 시원한 바깥 공기가 거실 안으로 묵직하게 밀려들었다.“실례하겠습니다, 사모님.”도진이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거실로 들어섰다.남편 최민우의 허세와 과시욕으로 꾸며진 넓고 삭막한 거실.벽면에는 민우의 수상 트로피와 언론 인터뷰 액자들만 요란하게 걸려 있었고, 6년간 헌신한 소율의 흔적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그 차가운 공간 한가운데, 도진이 가져온 전문 운동 매트와 폼롤러, 저항 밴드들이 정갈하게 놓였다.“센터 기구에 의존하지 않고, 사모님이 매일 숨 쉬고 생활하는 이 공간에서 척추와 골반 정렬을 유지하는 법을 몸에 각인시켜야 합니다.”도진의 날카로운 시선이 소파와 식탁, 그리고 소율의 일상적인 걸음걸이를 예리하게 훑었다.“소파에 앉으실 때 늘 오른쪽 골반에 체중을 싣고 기대어 계시는군요. 아이를 안거나 집안일을 할 때 생긴 비대칭 습관 때문에 요추 4번과 골반 경사가 틀어지는 겁니다. 일상의 사소한 틀어짐이 체형을 무너뜨리는 주원인입니다.”도진의 한 치 오차 없는 지적에 소율은 절로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매트에 엎드리십시오. 오늘은 골반 심부 안정화 근육과 둔근 가동성을 집중적으로 잡겠습니다.”소율은 매트에 손바닥과 무릎을 대고 네발기기 자세를 잡았다.타이트한 기능성 레깅스와 탑 너머로 소율의 잘록한 허리와 탄탄한 등 라인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센터의 넓은 룸과 달리, 이 집의 매트는 안방 문과 너무 가까웠다. 남편
몇 주간의 레슨이 지나고, 브랜드 리뉴얼 VIP 갈라 파티를 사흘 앞둔 토요일 오후.남편 최민우는 소율에게 청담동 명품 거리에 위치한 최고급 하이엔드 드레스 살롱 피팅 일정을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파티 때 남들 눈에 띄지 않게 제일 얌전하고 몸 꽁꽁 가리는 걸로 골라 놔. 애 엄마 티 팍팍 내며 내 얼굴에 먹칠하지 말고.아침 출근길에 차가운 눈빛으로 내뱉었던 남편의 역겨운 폭언이 귓가를 맴돌았다.아내를 무대 위의 동반자가 아닌, 흠을 가려야 할 결격 상품 취급하는 비열하고 얄팍한 태도.지난 6년간 임신과 출산, 고된 독박 육아를 거치며 남편의 회사를 위해 밤낮없이 디자인을 쏟아부었던 대가가 고작 이런 모멸과 기만이었다.소율은 딸 하린이를 친정어머니께 잠시 맡긴 뒤, 등을 곧게 펴고 단정한 걸음으로 살롱 문을 열고 들어섰다.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화려한 크리스털 샹들리에 아래, 살롱의 수석 디자이너가 소율을 정중하게 맞이했다.“어서 오세요, 최민우 대표님 사모님 맞으시죠? 대표님께서 가장 단정하고 노출 없는 라인으로 특별히 준비해 달라고 신신당부하셨습니다.”디자이너가 내민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칙칙한 회색빛 무채색에 온몸을 헐렁하게 덮어버리는 통자 실루엣뿐이었다.아내를 철저히 ‘초라하고 무기력한 그림자’로 가두어두려는 남편의 추악한 통제욕이자 가스라이팅의 흔적이었다.소율의 붉은 입술이 서늘하게 호선을 그렸다.“아니요. 그 옷들은 전부 치워주세요.”“……네? 사모님, 하지만 대표님께서 직접 지정하신 가이드라인인데요…….”소율은 살롱 안쪽 중앙 쇼케이스 마네킹에 걸려 있는 에메랄드빛 실크 드레스를 손끝으로 우아하게 가리켰다.“저걸로 입어보겠습니다.”그것은 쇄골과 목선을 시원하게 드러내고, 등 라인이 깊게 U자로 파여 척추 기립근과 견갑골의 곡선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과감한 딥 백리스 실크 드레스였다.디자이너가 당황한 기색으로 조심스럽게 만류했다.“사모님, 이 드레스는 체형이 조금만 무너져 있거나 굽은 등이 있으면 단점이 극명하게
호텔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차 안에는 숨 막히는 침묵이 흘렀다.민우는 콘솔 위에 놓인 스마트폰을 힐끔거리며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었다.윤세라에게서 걸려 온 부재중 전화가 세 통, 그리고 거친 항의 문자가 화면을 쉼 없이 채우고 있었다.집에 도착하자마자 민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 던지며 서재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소율은 닫힌 서재 문을 차가운 시선으로 응시한 뒤, 안방으로 들어가 박지은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소율아! 만찬 잘 끝났어?“응. 지은아, 오늘 대명인베스트 강혜란 이사장님을 만났어.”소율은 만찬 자리에서 있었던 일과 강 이사장이 제안한 재단 총괄 디렉터 자리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했다.수화기 너머로 지은의 감탄 섞인 탄성이 터져 나왔다.- 대박이다, 한소율! 강혜란 이사장은 정재계와 문화계에서 영향력이 엄청난 거물이야. 그 프로젝트를 맡으면 네 커리어 복귀는 물론이고, 이혼 소송에서 경제적 자립 능력과 양육권 확보에 결정적인 무기가 돼!“나, 정말 잘해보고 싶어. 하린이한테 부끄럽지 않은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거든.”- 당연하지. 넌 원래 최고였어. 참, 그리고 내가 요청했던 최민우 대표 법인 자금 추적 결과가 1차로 나왔어.지은의 목소리가 한층 날카롭게 가라앉았다.- 최민우가 회사 돈으로 윤세라 오피스텔 보증금 3억 원을 냈어. 매달 400만 원씩 켈브란 리스료도 나갔고. 백화점에서 수천만 원 긁은 전표까지 있어. 이건 바람피운 문제로만 끝날 일이 아니야. 횡령·배임 혐의도 검토할 수 있어.“……고마워, 지은아. 차근차근 전부 모아둘게.”통화를 마친 소율은 가슴을 깊게 쓸어내렸다.남편의 파렴치한 범죄와 배신의 증거들이 하나씩 소율의 손아귀로 들어오고 있었다.***다음 날 아침, 식탁에 마주 앉은 민우의 눈 밑은 퀭하게 가라앉아 있었다.어젯밤 세라의 히스테리를 달래느라 밤새 진을 뺀 모양이었다.민우는 식어버린 커피를 들이켜며 소율을 노려보듯 말했다.“어제 강 이사장이 제안한 문화재단 프로
저녁 7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38층에 위치한 프라이빗 한정식 VIP 룸.소율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네이비 정장 원피스를 입고 룸 앞에 섰다.도진에게 배운 대로, 소율은 아랫배를 단단히 끌어당기고 굽어 있던 양어깨를 활짝 폈다.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듯 꼿꼿하게 세운 척추.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남편 최민우가 소율을 돌아보았다.순간 민우의 눈동자에 찰나의 당혹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늘 구부정한 자세로 주눅 들어 있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목선과 편안하게 펴진 어깨. 소율은 민우가 당겨주는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보여?’민우는 불쾌한 위기감을 털어내듯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럽게 턱짓했다.“왔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앉아 있어.”잠시 후, 룸 문이 열리며 중후한 노신사와 기품 있는 여성이 들어섰다.국내 굴지의 투자사 대명인베스트의 박진우 대표와 그의 아내인 강혜란 문화재단 이사장이었다.민우는 즉시 비굴할 정도로 깍듯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박 대표님, 강 이사장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최 대표, 오랜만입니다. 옆에는…… 사모님이신가요?”박 대표의 물음에 민우가 짐짓 자랑스러운 척 소율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네, 제 아내 한소율입니다. 집에서 내조만 하느라 이런 자리는 낯설어해서요.”아내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가정주부’로 깎아내리며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술수.하지만 강혜란 이사장의 시선은 민우의 손길을 넘어 소율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식사가 시작되자 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브랜드의 모든 디자인과 브랜딩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온 양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이번 신제품 라인업도 제가 직접 밤을 새워가며 디렉팅했습니다. 소비자들의 감성을 관통하는 미니멀리즘과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그게 바로 제 경영 철학이자 디자인 철학이죠.”민우가
도진의 서늘한 일갈이 트레이닝 룸의 벽을 날카롭게 때렸다.세라는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당해 뒷걸음질을 쳤다.“도, 도진 쌤…… 전 그냥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려고 한 건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세라는 억지 눈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탄탄한 팔에 손을 얹으려 했다.하지만 도진은 닿기도 전에 세라의 손목을 서늘하게 피해 버렸다.“루미너스 VVIP 전담 룸은 담당 트레이너와 예약 회원 외에는 센터 대표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최고 등급 보안 구역입니다. 센터 규정 잊었습니까?”도진은 지체 없이 벽면에 설치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네, VVIP 인포데스크입니다.“차도진입니다. 3번 룸에 타 파트 프리랜서 강사가 무단 침입해 회원 레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데스크 매니저 즉시 올려보내서 강사 퇴실 조치 및 계약 위반 징계 절차 밟으십시오.”- 아, 넷! 죄송합니다, 팀장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인터폰 너머로 당황한 총괄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세라의 얼굴이 수치심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센터 내 최고 에이스이자 전 국가대표 출신 VVIP 총괄 팀장인 차도진의 말 한마디면, 프리랜서 강사에 불과한 자신의 계약은 당장 내일이라도 파기될 수 있었다.“……두 분, 정말 너무하시네요.”세라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소율과 도진을 번갈아 쏘아보고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달칵.문이 닫히고, 트레이닝 룸 안에는 다시 깊고 차분한 정적이 찾아왔다.도진은 천천히 소율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불미스러운 일로 레슨에 방해를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모님. 센터 차원에서 확실하게 재발 방지 및 징계 처리를 진행하겠습니다.”그러나 소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의 입가에는 엷지만 단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예?”“고마워요. 혼자 있으면 괜히 내가 잘못했나 싶었을 거예요. 방금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네요.”소율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