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l Chapters of 사모님, 자세가 야합니다: Chapter 1 - Chapter 10

14 Chapters

제1화

결혼 6주년 기념일 저녁.탁자 위에는 소율이 세 시간 동안 준비한 안심 스테이크와 프랑스산 와인이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은은한 촛농이 하얗게 굳어 내릴 무렵, 자정을 넘긴 시각에야 현관 도어록이 풀리는 전자음이 울렸다.문이 열리고 남편 최민우가 들어섰다.고급 맞춤 정장에서는 시트러스 향수와 함께, 낯설고 달콤한 플로럴 향기가 스치듯 풍겼다.“민우 씨, 왔어? 늦는다는 연락이라도 주지…….”소율이 앞치마를 풀며 다가갔다.하지만 민우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명품 서류 가방을 소파에 툭 던졌다.“일이 바빴어. 이런 날이라고 굳이 유난 떨며 차리지 말라니까.”식탁을 흘끗 본 민우의 눈동자에는 감동 대신 노골적인 피로와 귀찮음이 깔려 있었다.소율은 풀던 앞치마 끈을 놓쳤다. 매듭 끝이 손목에 걸렸는데도 한동안 빼내지 못했다.남편의 브랜드 사업이 연 매출 수백억을 기록하기 시작한 뒤로, 이런 냉대는 일상이 되어 있었다.“하린이는?”“아까 9시에 잠들었어. 아빠 기다린다고 끝까지 버티다가…….”“그래. 피곤하니까 먼저 씻을게.”민우는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며 안방 드레스룸으로 향했다.식탁을 정리하려던 소율의 시선에, 민우의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끄러져 나온 은색 봉투 하나가 닿았다.두툼한 엠보싱 봉투 겉면에는 청담동 초고가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의 금박 로고가 박혀 있었다.'선물인가……?'결혼기념일을 잊지 않은 남편의 깜짝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찰나의 희망이 스쳤다.샤워를 마치고 가운 차림으로 나온 민우는 봉투를 든 소율을 보고 피식 헛웃음을 흘렸다.“벌써 봤네. 내일 아침에 주려고 했는데.”“이게 뭐야, 민우 씨? 프라이빗 짐 회원권……?”민우는 탄산수를 들이켠 뒤 식탁 맞은편에 삐딱하게 기대어 섰다.소율을 위아래로 훑는 남편의 시선은 재고 상품을 품평하듯 서늘했다.“다음 달에 우리 브랜드 리뉴얼 VIP 갈라 파티 있는 거 알지?”“응, 알지. 당신이 반년 넘게 준비한 행사잖아.”“주요 투자사 대표들이랑 인플루언서들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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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망가졌다니…….”소율의 입술 사이로 메마른 음성이 흘러나왔다.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으면서도, 온몸의 피가 일순간 발끝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서늘함이 덮쳤다.어젯밤 남편 최민우가 던졌던 서슬 퍼런 비수들이 다시금 귓가를 짓이겼다.‘여자로 안 보여.’‘제발 사람들 앞에 내놓을 수 있게 사람 구실은 하게 만들어.’남편에게 받은 치욕적인 모멸감이 가시지도 않았는데, 생전 처음 본 이 건장한 남자 트레이너마저 제 몸을 ‘망가졌다’며 난도질하고 있었다.소율의 주먹 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처음 보는 회원한테…… 말이 너무 지나치시네요.”소율은 애써 턱을 치켜들며 차갑게 쏘아붙였다.상처 입은 내색을 감추기 위해 목소리에 가시를 돋웠지만, 미세하게 떨리는 눈동자까지 숨길 수는 없었다.도진은 물러서지 않았다.오히려 188cm의 압도적인 장신으로 소율을 내려다보며 한 걸음 더 다가왔다.그의 발소리는 대리석 바닥에 묵직하고 고요하게 가라앉았다.“기분 나쁘라고 드린 말씀 아닙니다.”도진의 목소리는 격앙되지 않고 낮고 차분했다.“문 열고 들어오실 때부터 봤습니다. 왼쪽 어깨는 안쪽으로 심하게 말려 있고, 턱은 앞으로 15도 이상 빠져 있습니다. 골반은 오른쪽으로 틀어져서 걸을 때마다 오른쪽 발뒤꿈치에 체중이 과하게 실리고 있죠.”소율의 숨이 멎었다.도진의 시선은 음흉하거나 평가하는 눈길이 아니었다.마치 엑스레이 필름을 판독하는 외과의사처럼, 그녀의 뼈마디와 근육이 겪고 있는 비명을 정확히 짚어내고 있었다.“목과 허리에 부담이 쏠리는 자세입니다. 조금만 서 있어도 어깨가 아프지 않습니까? 밤에 다리에 쥐가 나거나, 허리가 쑤셔서 깨신 적은요?”“…….”정확했다.하린이를 낳고 수유를 하던 시절부터, 밤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쑤셔 남몰래 파스를 붙이며 울던 밤들이 스쳐 지나갔다.민우는 그것을 ‘게으름과 나태함의 증거’라 치부했지만, 도진은 단 10초 만에 그녀가 감내해 온 육체적 고통의 궤적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도진이 트레이닝 룸 한쪽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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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도진의 커다란 손가락이 소율의 오른쪽 견갑골 언저리에 닿았다.두께감 있는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것은 차가운 가죽의 감촉이 아니라, 단단한 뼈마디의 압력과 묵직한 남자의 체온이었다.“읏…….”소율의 입술 틈새로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살갗이 닿은 부위부터 짜릿한 전류가 흐르듯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졌다.결혼 6년 동안 남편 민우의 손길조차 거의 닿지 않았던 몸이었다.낯선 남자의 거대한 체격이 바로 등 뒤에 밀착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심장이 갈비뼈를 부술 듯 요동쳤다.소율의 목덜미와 귓바퀴가 붉게 달아오르는 것이 거울 너머로 고스란히 비쳤다.“어깨 힘 빼세요. 잘하려고 버티실 필요 없습니다. 지금은 어디가 불편한지 보는 중입니다.”도진의 목소리가 서늘하게 귓등을 스쳤다.그의 손끝이 소율의 굽은 날개뼈 안쪽을 깊숙이 파고들며 묵직하게 압박했다.“아……!”날카로운 통증에 소율이 어깨를 흠칫 움츠리며 고개를 숙였다.숨을 들이쉴 때마다 갈비뼈 안쪽이 뻐근하게 조여오며 등 전체가 타는 듯했다.“죄송합니다…… 제가, 몸이 너무 굳어 있어서요.”소율은 반사적으로 사과를 내뱉었다.남편 민우와 살면서 뼛속까지 박혀버린 지독한 습관이었다.집안일이 조금만 늦어져도, 아이가 감기에 걸려도, 남편의 기분이 조금만 상해도 늘 먼저 “죄송해요, 내 잘못이에요”라고 말해야만 평화가 유지되었으니까.도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거울 속에 비친 도진의 눈썹이 서늘하게 찌푸려졌다.“왜 사과를 하십니까?”“네……?”“아픈 건 사모님 몸인데, 왜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시냐고요.”도진은 소율의 등 뒤에서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서, 거울 너머로 소율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그의 눈빛은 엄격했지만, 그 깊은 곳에는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승모근과 능형근이 이 정도로 굳어 있고, 흉추가 완전히 잠겨 있는 건 나태해서가 아닙니다.”도진이 소율의 쇄골 아래쪽 대흉근을 손가락 끝으로 지그시 짚었다.단단하게 뭉친 근육이 압박되자 묵직한 통증과 함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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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소율은 거울 속에서 달라진 어깨 높이를 살폈다. 조금 전에는 턱을 드는 데에도 목덜미가 당겼는데, 지금은 정면을 보는 일이 한결 수월했다.“그 자세로 숨을 쉬어보세요.”도진의 지시에 소율은 배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숨을 들이마시려는 순간 어깨가 다시 솟았다. 어렵게 펴놓은 자세가 무너질까 봐 저도 모르게 온몸을 굳힌 탓이었다.“이렇게요?”“숨을 참으셨습니다.”“아…… 펴고 있으라고 하셔서.”도진은 허리 옆에 댄 손의 힘을 풀었다. 소율이 제 발로 중심을 잡는 것을 기다린 뒤, 손끝으로 거울의 어깨선을 가리켰다.“꼿꼿하게 서 있는 것하고 굳어 있는 건 다릅니다. 힘을 조금 빼도 넘어지지 않아요.”소율은 발가락을 폈다. 운동화 안에서 말아 쥐고 있던 것조차 몰랐다. 뒤꿈치로 체중이 내려가자 무릎의 뻣뻣함도 조금 풀렸다.“제가 옆에 있으니까, 우선 숨부터 쉬어보죠.”바로 뒤에 있던 도진이 반걸음 옆으로 옮겼다. 거울에 두 사람의 얼굴이 나란히 잡혔다. 소율은 남자의 표정 대신 자신의 입술이 벌어지는 모습을 보며 짧은 숨을 내놓았다.도진은 자세를 확인하려 다시 등 뒤로 옮겨 섰다.도진의 넓고 단단한 가슴팍이 소율의 등 뒤를 거의 감싸 안듯 밀착해 있었다.남자의 몸에서 풍겨오는 서늘한 숲 향과 짙은 체열이 소율의 굳어 있던 감각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코로 깊게 들이마시고, 입으로 천천히 뱉으세요.”도진의 묵직한 손바닥이 소율의 갈비뼈 하단, 늑골 양옆을 지그시 감쌌다.소율이 떨리는 숨을 들이켜자, 도진의 손 아래에서 소율의 흉곽이 조심스럽게 부풀어 올랐다.“조금 더 들이마셔 보세요. 어깨는 두시고, 제 손이 닿은 쪽이 벌어지는지 느껴보세요.”도진의 손가락 끝이 늑골 마디마디를 미세하게 자극하며 굳어 있던 횡격막의 움직임을 유도했다.그 손길이 닿을 때마다 굳어 있던 흉추 사이로 묵직한 열감이 번져 나갔다.“아…… 흐읏…….”소율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깊은 호흡의 자극에 어지럼증을 느꼈다.늘 가슴 윗부분으로 얕고 가쁘게 몰아쉬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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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화

다음 날 오전 10시, 청담동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의 VIP 트레이닝 룸.소율은 어제보다 한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네이비 컬러의 브라톱과 레깅스를 갖춰 입고 매트 위에 섰다.불과 하루 만에 통증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허리를 짓누르던 묵직한 결림이 확연히 덜해져 있었다.발바닥 전체로 지면을 딛고 서는 감각 또한 이전보다 훨씬 단단하고 또렷했다.“매트에 바르게 누우세요.”도진의 묵직한 지시에 소율은 천장을 바라보고 매트 중앙에 반듯하게 누웠다.도진은 소율의 굳어 있는 장요근과 대퇴직근, 그리고 깊숙이 잠겨 있는 골반 심부 근육을 풀어내는 이완 스트레칭을 준비하고 있었다.도진이 소율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려 무릎을 직각으로 굽힌 뒤, 자신의 단단한 어깨 위에 소율의 발목을 얹었다.그의 커다란 손이 소율의 허벅지 안쪽과 골반 전면을 지그시 누르며 고관절을 깊숙이 밀어 넣었다.“읏……!”고관절 안쪽에서부터 찢어질 듯한 통증이 척추 라인을 타고 찌릿하게 올라왔다.소율은 이를 악물고 통증을 참아내려 손마디가 하얗게 질리도록 매트를 움켜쥐며 온몸에 잔뜩 힘을 주었다.“힘 빼세요, 사모님. 사모님이 억지로 버티시면 근육이 아니라 관절과 인대가 다칩니다.”도진은 소율이 매트를 움켜쥔 것을 보고 누르던 힘을 줄였다.하지만 6년간 뼛속까지 굳어버린 방어기제는 쉽게 긴장을 풀어내지 못했다.소율은 식은땀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죄송해요…… 제가 몸이 너무 뻣뻣해서 선생님께 민폐만 끼치네요. 정말 죄송합니다…….”반사적으로 튀어나온 사과였다.남편 최민우에게서 조금이라도 타박을 듣지 않기 위해 언제나 먼저 머리를 조아리던 비참한 습관이었다.그 순간, 소율의 골반을 지압하던 도진의 손길이 뚝 멈추었다.도진이 상체를 천천히 일으켜 세우더니, 깊고 서늘한 눈동자로 소율을 내려다보았다.트레이닝 룸 안에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사모님.”도진의 목소리는 어제보다 한층 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어제 말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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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화

욕실 문틈으로 쏟아져 나오는 거친 샤워 물소리가 거실의 적막을 날카롭게 갈랐다.소율은 숨조차 쉬지 못한 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소파 위 재킷 주머니에서 반쯤 드러난 남편 최민우의 스마트폰 화면.그 위로 선명하게 떠오른 이름과 메시지가 망막을 사납게 난도질했다.[윤세라 : 대표님, 오늘 호텔에서 너무 좋았어요. 내일 오전 레슨 전에 잠깐 오피스텔로 오실 수 있죠?]손끝이 감각을 잃은 듯 차갑게 식어 들어갔다.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튀어나올 것처럼 미친 듯이 요동쳤다.‘호텔……? 내일 레슨 전에 또 만나겠다고?’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불길한 조각들이 단숨에 하나의 잔인한 그림으로 맞춰졌다.결혼기념일이라며 자정이 넘도록 들어오지 않던 남편.몸에서 풍기던 낯설고 달콤한 플로럴 향기.그리고 아내에게 던져주었던 회당 30만 원짜리 프라이빗 짐 회원권.모든 것이 자신을 조롱하고 밀어내기 위한 역겨운 기만이었다.‘울지 마. 지금은 주저앉을 때가 아니야.’소율은 입술을 짓이기며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휴대폰을 꺼냈다.손가락 마디마디가 굳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지만, 필사적으로 카메라 렌즈를 민우의 화면에 가져다 댔다.찰칵 소리가 나지 않도록 무음 카메라 앱을 켠 채 화면 속 윤세라의 이름과 메시지를 연속으로 촬영했다.그 순간, 욕실 안에서 물소리가 뚝 끊겼다.소율은 재빨리 자신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고 테이블에서 서너 걸음 물러섰다.달칵.가운을 걸친 민우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욕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민우는 거실 한가운데 꼿꼿이 서 있는 소율을 흘끗 보더니, 아무런 의심 없이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화면을 켜 알림을 확인한 민우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슬쩍 올라갔다.소율의 시선이 그 비열한 입매에 가닿았다.“물은? 아직 안 떠놨어?”민우가 턱짓으로 묻자, 소율은 감정을 억누른 메마른 목소리로 대답했다.“정수기에서 직접 떠 마셔. 나 이제 잘 거야.”민우가 미간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참나, 오늘따라 유난히 뻣뻣하게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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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화

청담동 프라이빗 짐 ‘루미너스’ 전용 주차장.소율은 차 시동을 끈 뒤, 운전대에 이마를 깊게 묻고 가쁘게 떨리는 호흡을 골랐다.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과 수치심이 온몸의 신경을 날카롭게 긁어댔다.하지만 지금 무너지면 모든 것을 빼앗긴다.소율은 이를 악물고 감정을 억누르며 단축 번호 1번을 눌렀다.신호음이 세 번 울리기도 전에 익숙하고 명쾌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어, 소율아! 웬일이야? 이 시간에 먼저 전화를 다 하고.대학 동기이자 국내 최고 로펌 출신의 이혼 전문 변호사, 박지은이었다.“지은아. 지금 통화 괜찮아?”- 응, 방금 서면 하나 넘겼어. 왜 그래? 목소리가 왜 이렇게 가라앉았어?지은의 예리한 물음에 소율은 떨리는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며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나…… 이혼하려고. 어디서부터 준비해야 할지 모르겠어.”수화기 너머로 잠시 팽팽한 침묵이 흘렀다.- ……최민우? 여자 생겼어?“응. 어젯밤에 링크온 메시지를 봤어. 호텔에서 만났다더라. 사진도 찍어뒀고.”- 잘 들어, 소율아. 지금 절대 남편한테 티 내거나 화내면 안 돼. 유책 배우자들은 낌새를 채는 순간 차명 계좌로 돈부터 빼돌리고 증거부터 인멸해.“알아. 안 그래도 아무 일 없는 척하고 나왔어.”- 잘했어. 네 부모님이 빌려준 돈하고 네가 회사에서 한 일부터 정리하자. 계좌 내역이나 카드 전표는 네가 합법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료만 보내. 없는 자료는 내가 절차 밟아서 확보할게. 블랙박스도 원본을 함부로 건드리지 말고. 하린이 문제는 따로 꼼꼼하게 볼 거야. 지금은 밥부터 먹고, 운전 못 하겠으면 차 세워.“응. 사진부터 보낼게. 나 지금 주차장이야. 숨 좀 돌리고 올라갈게.”전화를 끊은 소율은 뜨거워진 눈가를 손등으로 꾹 눌러 닦았다.이제 단순한 피해자로 주저앉아 눈물 흘리던 시절은 끝났다.하린이를 지키고 자신의 삶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똑바로 서야만 했다.***라커룸에서 기능성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트레이닝 룸으로 들어서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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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거울 앞에 선 소율은 수건으로 눈가를 눌렀다. 도진도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문가의 여자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열린 문틈 사이로 화려한 네온 핑크빛 필라테스 웨어를 입은 여자가 불쑥 몸을 내밀었다.짙은 눈화장과 코를 찌르는 인공 바닐라 향수 냄새, 그리고 과시하듯 잘록하게 드러낸 허리선.윤세라였다.세라는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도진을 향해 교태 섞인 눈웃음을 흘렸다.“도진 쌤, 오늘 오전 레슨 비었다면서요? 저 이따가 VIP 전용 스트레칭 룸 좀 빌려 쓰려고 왔는데…….”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세라의 시선이 도진의 등 뒤에 서 있는 소율에게 가닿았다.순간 세라의 짙게 칠한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미세하게 굳어졌다.거울 앞에 등을 곧게 펴고 서 있는 소율의 단아하고 우아한 골격.어젯밤 민우가 침대 위에서 “애 낳고 몸 다 망가진 아줌마”라며 비하했던 그 ‘아내’라는 것을 세라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소율은 민우의 험담처럼 초라하거나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오히려 수술이나 인위적인 시술로는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타고난 기품과 단단한 아우라가 트레이닝 룸 전체를 서늘하게 압도하고 있었다.순간 세라의 가슴 밑바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질투와 불쾌감이 사납게 치밀어 올랐다.세라의 입꼬리가 얄팍한 비소를 머금고 비틀려 올라갔다.‘흥, 최고급 운동복으로 휘감았다고 애 낳은 아줌마가 처녀 몸매가 되나.’세라는 특유의 과장된 걸음걸이로 트레이닝 룸 안으로 또각또각 걸어 들어왔다.손목에 찬 수천만 원대 명품 다이아몬드 테니스 팔찌가 조명 아래에서 번쩍였다.그것은 소율이 회사 초기 브랜딩을 완성하고도 한 푼도 챙기지 못했던 피땀의 대가, 민우의 법인 카드로 긁어준 불륜의 전유물이었다.세라의 눈동자가 소율의 쇄골, 허리, 골반 라인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노골적으로 훑어 내렸다.천박할 정도로 노골적인 품평이자 불손한 경계의 시선이었다.“어머…… 혹시 최민우 대표님 사모님 맞으시죠?”세라는 마치 소율을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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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도진의 서늘한 일갈이 트레이닝 룸의 벽을 날카롭게 때렸다.세라는 도진의 살기 어린 눈빛에 압도당해 뒷걸음질을 쳤다.“도, 도진 쌤…… 전 그냥 반가운 마음에 인사드리려고 한 건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세요?”세라는 억지 눈웃음을 지으며 도진의 탄탄한 팔에 손을 얹으려 했다.하지만 도진은 닿기도 전에 세라의 손목을 서늘하게 피해 버렸다.“루미너스 VVIP 전담 룸은 담당 트레이너와 예약 회원 외에는 센터 대표조차 함부로 출입할 수 없는 최고 등급 보안 구역입니다. 센터 규정 잊었습니까?”도진은 지체 없이 벽면에 설치된 인터폰을 집어 들었다.- 네, VVIP 인포데스크입니다.“차도진입니다. 3번 룸에 타 파트 프리랜서 강사가 무단 침입해 회원 레슨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데스크 매니저 즉시 올려보내서 강사 퇴실 조치 및 계약 위반 징계 절차 밟으십시오.”- 아, 넷! 죄송합니다, 팀장님! 즉시 조치하겠습니다!인터폰 너머로 당황한 총괄 매니저의 목소리가 다급하게 울려 퍼졌다.세라의 얼굴이 수치심과 공포로 하얗게 질려 들어갔다.센터 내 최고 에이스이자 전 국가대표 출신 VVIP 총괄 팀장인 차도진의 말 한마디면, 프리랜서 강사에 불과한 자신의 계약은 당장 내일이라도 파기될 수 있었다.“……두 분, 정말 너무하시네요.”세라는 분을 삭이지 못한 채 소율과 도진을 번갈아 쏘아보고는 하이힐 소리를 요란하게 울리며 문밖으로 뛰쳐나갔다.달칵.문이 닫히고, 트레이닝 룸 안에는 다시 깊고 차분한 정적이 찾아왔다.도진은 천천히 소율을 돌아보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불미스러운 일로 레슨에 방해를 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사모님. 센터 차원에서 확실하게 재발 방지 및 징계 처리를 진행하겠습니다.”그러나 소율은 고개를 가로저었다.그녀의 입가에는 엷지만 단단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아니에요. 사과하실 필요 없어요, 선생님.”“……예?”“고마워요. 혼자 있으면 괜히 내가 잘못했나 싶었을 거예요. 방금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했네요.”소율의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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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화

저녁 7시, 서울 시내 최고급 호텔 38층에 위치한 프라이빗 한정식 VIP 룸.소율은 군더더기 없이 단아한 네이비 정장 원피스를 입고 룸 앞에 섰다.도진에게 배운 대로, 소율은 아랫배를 단단히 끌어당기고 굽어 있던 양어깨를 활짝 폈다.정수리가 천장에 닿을 듯 꼿꼿하게 세운 척추.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와 있던 남편 최민우가 소율을 돌아보았다.순간 민우의 눈동자에 찰나의 당혹과 놀라움이 스쳐 지나갔다.늘 구부정한 자세로 주눅 들어 있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단정하게 빗어 올린 머리 아래 드러난 목선과 편안하게 펴진 어깨. 소율은 민우가 당겨주는 의자를 기다리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뭐야, 왜 저렇게 멀쩡해 보여?’민우는 불쾌한 위기감을 털어내듯 헛기침을 하며 퉁명스럽게 턱짓했다.“왔어? 늦지 않아서 다행이네. 앉아 있어.”잠시 후, 룸 문이 열리며 중후한 노신사와 기품 있는 여성이 들어섰다.국내 굴지의 투자사 대명인베스트의 박진우 대표와 그의 아내인 강혜란 문화재단 이사장이었다.민우는 즉시 비굴할 정도로 깍듯한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굽혔다.“박 대표님, 강 이사장님! 귀한 걸음 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최 대표, 오랜만입니다. 옆에는…… 사모님이신가요?”박 대표의 물음에 민우가 짐짓 자랑스러운 척 소율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네, 제 아내 한소율입니다. 집에서 내조만 하느라 이런 자리는 낯설어해서요.”아내를 ‘세상 물정 모르는 무능한 가정주부’로 깎아내리며 자신의 입지를 돋보이게 하려는 얄팍한 술수.하지만 강혜란 이사장의 시선은 민우의 손길을 넘어 소율의 얼굴에 오래도록 머물렀다.식사가 시작되자 민우는 기다렸다는 듯 자신이 브랜드의 모든 디자인과 브랜딩을 독자적으로 이끌어 온 양 온갖 미사여구를 늘어놓았다.“이번 신제품 라인업도 제가 직접 밤을 새워가며 디렉팅했습니다. 소비자들의 감성을 관통하는 미니멀리즘과 타이포그래피의 조화, 그게 바로 제 경영 철학이자 디자인 철학이죠.”민우가
last updateLast Updated : 202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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