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강운이 의아해했다. “사진이요?”“네.”한현진이 대답했다. “스카이다이빙은 처음이라 기념하고 싶어서요.”주강운이 말했다. “액션캠은 가져오지 못했어요.”“그냥 내리기 전에 몇 장 찍으면 돼요. 가능할까요?”주강운이 웃으며 대답했다. “찍고 싶으면 찍어요. 전 그냥 액션캠이 없어서 사진이 현진 씨 생각처럼 나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한현진이 휴대폰 잠금을 해제하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해요.”말하며 카메라를 켠 한현진은 셀카를 몇 장 찍더니 휴대폰을 한편으로 던져버리곤 심호흡하더니 눈을 감고 말했다. “이제 됐어요.”주강운이 피식 소리 내 웃더니 장난스럽게 말했다. “단두대에 올라가는 장군 같네요.”한현진이 막 주강운의 말을 받아치려는데 주강운은 그녀를 데리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렸다. 차가운 바람이 순간 얼굴을 때리듯 스쳤다. 그 느낌은 마치 바늘이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자유낙하로 인해 귀압이 변화하면서 한현진은 귀에 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거대한 윙윙 소리를 제외하면 다른 건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한한현진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누군가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주강운이 그녀의 손을 잡고 두 팔을 벌리고 다리를 구부리라고 눈짓해서야 한현진은 정신이 들었다. 낙하산이 펴진 후 낙하 속도는 줄어들었다. 귓가에 맴돌던 바람도 점차 평온해졌다. 목을 꽉 막고 있던 공포도 조금씩 사라졌다. 한현진은 보호 안경 너머의 넓게 펼쳐진 땅을 보고 있었다. 한현진은 바로 그 순간 인간이란 자연과 우주 가운데서는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착륙하면서 작은 사고가 있었고 한현진은 바닥에 무릎을 부딪쳤다. 피가 나지는 않았지만 멍이 들었고 주강운은 굉장히 미안해했다. 같이 온 조종사가 주강우에게 뼈를 다치지는 않았다고 했지만 주강운의 미간은 전혀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병원에 가 봐요.”주강운이 제안했다. “괜찮아요.”한현진이 고개를 들며 말했다. “한 번 더 뛰어요.”주강운이
예술영화에 들어갔다는 소문 외엔 아무 소식도 없었다. 이렇게 오랫동안 조용하더니 갑자기 나타난 이유가 “연애” 때문이라니. 게다가 마케팅 계정은 증거나 논리가 명확했다. 한현진이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을 근거로 그녀 뒤에 턱이 반쯤 나온 남자의 사진과 전에 백화점에서 한현진을 지켜주던 변호사의 사진을 대조해 보니 목에 있는 점까지 똑같았다. 그러니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팬들은 곧 그 실검으로 인해 화가 나 죽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성공할 의지가 없는 사람을 많이 봐왔어도 한현진 같은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한현진의 페이스북의 댓글은 짧은 몇 시간 사이 벌써 몇만 개나 달렸다. [이 연애, 꼭 해야 해요?][언니, 일에만 몰두하면 얼마나 좋아요? 왜 남자를 만나요?][연예계에서 남자친구를 찾으면 뭐라고 안 하겠어요. 하필이면 변호사예요. 혹시 헤어지면 흑역사를 퍼뜨려 앞길을 막을까 두렵지 않아요?][수연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한현진이 다 까먹었어. 성취욕이 하나도 없네.][수연(중전의 어렸을 적 이름)은 수연이고, 한현진은 한현진이죠. 좋은 건 배우가 아니라 캐릭터의 이미지와 감독이에요. 모두들 콩깍지를 벗어버려요.][지나가는 사람인데, 전 꽤 어울리는 것 같아요. 팬들이 너무 많은 것까지 간섭하는 거 아니에요? 20대인데 연애도 못 해요? 어차피 아이돌도 연기파 배우로 나가는데, 좋아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에요?][댓글 중에 몇 개는 송민영 팬들이 한현진 팩인 척하는 거예요. 주인은 이미 나락 가버렸는데 계집종이 아직도 여기서 난리네요. 다른 사람 인기에 묻어가지라도 않으면 사람들이 잊어버릴까 겁이라도 나나 봐?][죄송. “봄의 연인”은 현진 언니의 시작이었지만 누군가는 영원히 오르지 못할 정상이었죠.]안티팬을 반박하던 사람들은 순간 뭔가를 떠올렸다. [전에 현진 언니가 페이스북에서 두 사람은 그저 친구 사이일 뿐이라고 했었잖아요. 이번엔 해명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실검에 오른지 이렇게 오래되었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잖아요. 설마… 묵인하는
“소문이 나든 말든 놔둬요. 가짜가 진짜가 되지는 않잖아요.”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한현진의 태도에 송민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해명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정말 너와 강운이 사이에 뭐가 있는 줄 알아. 강한서가 간지 이제 얼마나 됐다고 이런 소문은 너한테 불리해.”“우리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았을까요?”한현진은 마치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녀는 모든 사람이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가 더 중요한 듯 보였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알고 있든 신경 쓰지 말고 지금 당장 돌아와. 주강운과는 거리 둬.”한현진이 태연하게 말했다. “오빠. 날조된 기사 때문에 친구와 절교할 거예요?”“이건 달른…”“뭐가 달라요. 저도 주 변호사님도 신경 안 쓰는데 관련 없는 사람들만 다급해하네요. 그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하라고 하세요. 바이크 출발해요. 먼저 끊을게요.”말하더니 한현진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송민준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어젯밤 한현진 뜻대로 온 병원을 뒤져 강한서를 찾은 후 조금 진정된 것 같더니 이렇게 다음날 바로 이런 사고를 칠 줄이야. 그는 드디어 강한서가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깨달았다. 한현진은 제어할 수 있다니, 보통은 아니었다. 이때 벨소리가 울렸고 주강운이 휴대폰을 확인하니 주아름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굳이 머리를 굴리지 않아도 주씨 가문에서 떠보기 위한 것임이 틀림없었다. 송민준은 휴대폰을 무음모드로 전환한 후 벨소리가 울리든 말든 한편으로 던져버렸다. 한현진을 제어할 수 없으니 될 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한편, 전화를 끊은 한현진은 헬멧을 쓰고 주강운의 허리를 감싸안고 나지막이 말했다. “출발해요.”주강운의 몸이 움찔 떨렸다. 그는 고개를 숙여 허리에 올려진 손을 바라보았다. 심장이 두근두근 세차게 뛰었다. “민준이가 현진 씨에게 무슨 볼일이 있대요?”한현진이 말했다. “마케팅 계정에서 강운 씨가 제 남자친구라고 했대요. 오빠가 저더러 강운 씨와 거리를 두
주강운의 마음이 설레어왔다. 그는 나지막이 말했다. “꽉 잡아요.”그는 곧 바이크를 출발했다. 한현진과 주강운이 “열애 중”이라는 사실은 곧 인스타그램을 통해 퍼져나갔고 그 일은 꽤 소란스러워졌다. 한현진의 제일 친한 친구인 차미주도 다른 사람 입에서 그 소식을 듣게 되었다.물론 인터넷에 떠돌던 기사는 진작 보았었다. 하지만 당시 차미주는 그저 구경하듯 기사를 읽었을 뿐이었다. 한현진이 정말 주강운에게 마음이 있었다면 당시 이혼 후 강한서는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소문이 주변 사람들 사이에서도 퍼져나갈 때, 차미주는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했다. 헛소문이 도처에 퍼지도록 내버려두며 설명도 해명도 없는 것은 한현진의 일 처리 방식이 아니었다. 그러나 차미주는 그래도 끝까지 자기 친구를 믿었다. “환승 연애라니? 현진이가 연애하는데 내가 모르겠어? 이 자식들은 정말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슨 소란도 다 피운다니까.”한성우가 차미주를 힐끔 쳐다보았다 .“사귀는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네 친구는 요즘 전혀 가만히 있지를 못하네? 오늘은 스카이다이빙, 내일은 번지점프, 그다음 날은 또 사이클에 스키. 파파라치가 사진을 잘만 찍었던데? 강운이와 손 잡지 않으면 꼭 안겨 있고. 누가 보통 친구와 그러고 놀아?“차미주가 한현진 대신 해명했다. “꼭 안겨 있는 건 주 변호사님이 현진이에게 스카이다이빙을 가르쳐주느라 그런 거지. 손을 잡은 건, 그건 현진이가 넘어질 뻔하니까 주 변호사님이 부축해 준 거고. 그냥 마침 사진이 찍혔을 뿐이야.”“그래?”한성우가 휴대폰을 꺼내더니 주강운이 한현진에게 꽃을 선물하는 사진을 찾아 태연하게 물었다. “그러면 이건? 주강운 손에 들린 꽃을 빤히 보면서 왜 웃는 거야? 포장이 예뻐서?”말문이 막힌 차미주가 나지막이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한성우은 기가 막혔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왜 하필 주강운이야? 한서가 알면 젠장, 얼마나 마음에 내키지 않겠어?”“현진이 그런 사람 아니야.
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난 나의 그 ‘가치관이 이상한’ 친구 찾으러 가.”한성우가 캐리어를 잡아끌었다. “너 이건 너무 막무가내 아냐? 한현진 본인도 해명하지 않았어. 내가 한서 대신 화도 못 내?”“너 그게 화내는 거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나더러 현진이와 놀지도 말라고? 현진이가 아니면 내가 널 만날 수나 있었겠어?”“그래, 그래, 그래. 형수님이 우리를 이어준 거 맞아. 고맙게 생각해. 됐지?”말하며 한성우는 차미주를 안방으로 끌었다. “틈만 나면 가출하는 이런 못된 방법은 대체 누구에게 배운 거야?”차미주가 콧방귀 뀌었다. “여긴 네 집이지 내 집도 아니잖아. 가출이라고 할 것도 없어. 그리고 나 옷도 안 가졌어. 그냥 너 놀라게 하려는 거야.”한성우가 캐리어를 들어 확인했다. 역시나, 가벼워도 너무 가벼웠다. 한성우는 어이가 없었다. “늑대와 소년 이야기 알아?”차미주가 한성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야기 속 어른들은 딱 한 번 소년을 믿지 않고 소년에게 가지 않아 양을 잃었어. 현실에선 만약 네가 오지 않는다면 넌 여자친구를 잃게 되는 거야. 넌 내가 짐을 안 가지면 못 갈 줄 알아?”한성우는 말발 하나는 너무 좋았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봐, 나 지금도 쫓아왔잖아.”그는 말하며 차미주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자기야, 배 안 고파? 야식 뭐 먹고 싶어? 이 오빠가 사줄게.”야식이라는 말에 차미주는 기분이 좋아졌었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거울에 비친 동글동글해진 얼굴을 보니 순간 우울해졌다. “야식, 야식, 야식. 먹는 것밖에 몰라. 너 복근도 다 사라졌어.”한성우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탄탄한 복근을 내려다보고 또 화가 나 볼이 빵빵한 차미주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입술을 짓이기며 떠보듯 물었다. “그럼 나... 다이어트할까?”“진작 해야 했어.”한성우는 순간 모든 것이 이해가 되었다. 그는 우울한 척하며 말했다. “하지만 나 혼자서는 꾸준하게 할 수 없는데.”차미주가
차미주가 발신자 번호를 확인했다. 유선 전화로 걸려 온 전화였다. 차미주가 물었다. “지금 전화를 받기 불편한 상황이라서요. 무슨 일이시죠?”“한성우 씨 와이프세요?”차미주가 “네.”라고 대답했다. ‘여자친구도 와이프라고 할 수 있지.’상대방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희는 하나병원입니다. 저희 병원에서 최근 정자은행을 확장하고 있어서요. 건강하고 정자 품질이 좋은 남성분들의 기증을 적극 장려하기 위해 보상금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한성우 씨는 매년 저희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으셨고 저희 병원의 오랜 고객님이라고 할 수 있으세요. 그러니 이번 정책이 나오자마자 한성우 씨께서 혹시 기증 의사가 있으신지 여쭤보려고 저희가 먼저 연락드렸어요.”순간 상대방의 의도를 이해한 차미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의사가 있어도 그럴 능력이 없을 텐데?”“네?”“큼큼, 아니에요. 몸이 안 좋아서요. 기증하고 싶어도 어렵다고요.”전화 건 여자가 물었다. “한성우 씨 요즘 아프셨나요? 그건 급하지 않아요. 건강을 회복하면 그때 오셔도 돼요. 저희는 그저 먼저 등록해 드리려고요.”“아니... 한성우가 매년 그 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는데 한성우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모르세요?”“무슨 문제요?”여자는 조금 답답하다는 듯 물었다. “한성우 씨는 꽤 건강하신데요. 저희도 요즘 건강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연락드린 거예요. 말씀하신 문제라는게, 구체적으로 뭘 말씀하시는 거죠?”차미주가 말했다. “장전을 할 수가 없는데, 어떻게 총을 쏘겠어요.”여자는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한참 만에야 드디어 차미주가 말한 “장전하지 못하는 총”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되었다. “무슨 오해가 있으신 게 아닌가요? 저희가 직접 전화를 드려 기증을 요청하는 분들은 모두 정자의 품질이 굉장히 좋으세요. 절대 말씀하신 그런 상태가 있을 수 없어요.”차미주가 멈칫했다. “그러니까 회복했다는 말이에요?”“회복이요?”여자는 차미주의 말이 더
한성우는 차미주가 어떻게 그 사실을 안 것인지 생각할 새도 없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는 자신의 “죄”를 제일 작게 포장하려고 애를 썼다. “... 맞아. 다만 내가 표현한 만큼 심각한 건 아니었어.”차미주가 한성우를 노려보았다. “아직도 날 속이려는 거야.”“아니야.”한성우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땐 정말 너무 아팠어. 나도 네가 그렇게까지 긴장할지 몰랐어서 조금 장난하고 싶었어.”“장난?”차미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내가 바보처럼 네 곁을 맴돌면서 널 챙기느라 바삐 돌아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었어?”“아니, 난 그런 생각한 적 없어.”한성우가 움직였지만 또 차미주에게 밀리고 말았다. “일어나지 마. 패버릴 수도 있으니까.”한성우는 어쩔 수 없이 다시 바닥에 누워야 했다. 그는 나지막이 물었다. “미주야, 넌 언제부터 날 좋아한 거야?”차미주의 귀가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바득 이를 갈며 말했다. “누가 너 같은 사기꾼을 좋아해! 네가 애초부터 꾀병으로 날 속인 줄 알았으면 내가 왜 너 같은 개자식과 엮이겠어?”한성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난 진작부터 널 좋아했어.”차미주는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이 개자식이 자기를 몇 달 동안 속여 걱정에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던 것을 떠올리면 차미주는 혈압이 180으로 치솟는 것 같았다. “불쌍한 척 하지 마.”“거짓말 아니야.”한성우가 고개를 들어 차미주를 바라보았다. “처음엔 네가 한 음식이 좋았어. 나중엔 너와 티격태격하며 지내는 게 좋았고. 하지만 난 그때는 그게 좋아하는 건 줄 몰랐어. 왜냐하면 넌 정말 내가 전에 좋아하던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었거든. 목소리도 크고 힘도 세고, 툭하면 주먹부터 올라가고. 성격은 고집스러운 데다 외모도 너무 예쁜 편은 아니었고 다리도 짧았잖아.”차미주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녀는 순간 쿠션으로 한성우의 숨통을 눌러 죽여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그때의 넌 조준을 좋아하고 있었잖아. 아직 젊고
차미주는 마음이 복잡했다. “그래, 넌 내가 널 좋아하도록 유도한 적 없어. 하지만 네가 꾀병으로 동정심을 유발할 때, 그렇게 얻은 감정엔 이미 동정심과 죄책감이 섞여 있을 거라는 생각 안 해 봤어? 나에게 널 알아갈 시간을 준 거라고? 네가 꾀병을 부려 내가 네 여자친구인 척 연기를 하게 한 건 사실 나와 조 선생님이 만날 가능성을 아예 없애버리려던 거잖아. 한성우, 이것도 기만이 아니야?”한성우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너와 조준이 만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어, 맞아. 조준은 좋은 남편감이 아니야.”“그러면 넌 좋은 남편감이야? 네가 좋으면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고 바보처럼 내가 스스로 함정에 빠져들어 네 곁으로 오게 만들고, 네가 싫어지면 혹시 네 전 여자친구들에게 그랬듯이 집 한 채, 차 한 대로 날 내치려고?”한성우의 마음이 욱신거렸다. 그는 순간 6개월간 간 쓸개 다 내준 노력이 죽 쒀서 개 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넌 고작 날 그런 놈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차미주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난 정말 모르겠어. 나에게 무슨 장점이 있어서 네가 이렇게까지 하는 건지. 몸매도 외모도 평범하고 돈도 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로 벌잖아. 대단한 엄마가 계셔서 평생을 버신 돈으로 많은 혼수를 마련해 주셨지만, 너도 돈이라면 부족하지 않고.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은 바로 내가 멍청하다는 거야. 내가 바보라 재밌어서, 그래서 네가 지겨운 줄도 모르고 날 가지고 노는 거라고.”말이 끝나자마자 차미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너머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금 아래에 도착했습니다. 물건 옮기실 건가요?”“아뇨. 지금 바로 내려갈게요.”전화를 끊은 차미주가 몸을 일으키려는데 한성우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가려고?”차미주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여긴 네 집이잖아. 내가 여기선 차분하게 생각할 수가 없어.”차미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한성우가 갑자기 그녀의 목덜미를 잡더니 키스를 퍼부었다. 그 키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