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진에게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제일 무거운 마음의 짐이었다. 그녀가 그 얘기를 꺼낸다는 것은 분명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강한서는 마음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유현진에게 가볍게 비볐다. 그는 다정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유등 날리면서 소원 빌자.”유현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구류되면 어쩌려고?”강한서가 말했다. “괜찮아. 한성우 이름 쓰면 돼.”유현진: …어쩐지 한성우가 늘 온갖 수단으로 강한서를 괴롭히더라니. 강한서도 한성우에게 못된 짓을 많이 하고 있었다. 오늘 능강 근처 사거리에서는 유등축제가 있었다. 거리의 상공에는 전부 유등으로 가득했고, 길에서 올려다보면 다양한 유등이 잇따라 올라가고 있어 유서 깊은 옛 골목은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유현진은 한 노점에서 고풍스러운 반쪽짜리 여우 가면을 발견했다. 그녀는 가면을 얼굴에 대더니 강한서에게 물었다. “예뻐?”강한서가 말했다. “네가 하니까 예뻐.”유현진이 그를 쳐다보았다. ‘입에 꿀이라도 발랐나?’유현진이 가면을 써보는 사이, 강한서가 이미 계산을 마쳤다. 진열대에는 많은 가면이 있었고 유현진은 반쪽짜리 금속으로 된 가면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막 손을 뻗어 그 가면을 집으려고 하는데, 누군가 그녀보다 먼저 가면을 가져갔다. 유현진이 미처 고개를 돌리지 못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음에 들면 써봐요.”송가람은 가면이 마음에 들었었지만 강현우의 말에 써보려던 마음이 사라졌다. 그녀는 입술을 앙다물고 가면을 다시 진열대에 올려두고 뒤돌아 가려고 했다. 바로 그때,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는 여자에게 다가가 나지막이 말하는 강한서를 발견했다. “더 고를 거야?”멈칫 행동을 멈춘 송가람이 얼떨결에 그를 불렀다. “한서 오빠.”강한서는 우뚝 멈춰서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니 그 곳엔 송가람과 강현우가 있었다. 1초간 시선을 멈춘 강한서는 곧 그들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이
유현진은 이번 일의 당사자였다. 그러니 그녀도 당연히 착하게 굴 수는 없었다. 전 와이프라는 관점을 내려놓고 보면, 다른 여자들에게 강한서는 확실히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여자들이 그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송가람은 유현진이 구해주었던 사람이다. 유현진이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바로 그녀의 전남편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은 정말이지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감정이라는 것이 아무리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래도 최소한 매너는 지켜야 했다. 그녀는 이런 한두 가지 일로 한 사람을 정의하고는 싶지 않았고, 이곳에 더 오래 머물며 상대방을 불편하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강한서의 손을 잡아끌며 나지막이 말했다. “가자.”강한서가 “응.”이라고 대답하고는 유현진을 데리고 자리를 벗어났다. 송가람은 유현진 손목에 있는 눈에 익은 루비 팔찌를 발견하고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창피함과 모욕감이 몰려왔다. 송가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한껏 꾸미고 데이트를 나왔지만, 강한서는 송가람을 강현우에게 던져줬다. 강한서의 전화는 통하지도 않았고 그녀는 그에게 갑작스레 일이 생겨 오지 못하는 것이라 스스로 다독였다. 하지만 강한서는 다른 여자와 데이트를 하고 있었다. 만약 강한서가 애초부터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더라면 이렇게 창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은 그 두 사람에게는 그저 웃음거리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녀의 자존심은, 그런 상황에서도 따져 묻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따져 물어봐야 자신만 바보가 되는 것 같았다. 강현우는 송가람의 표정을 주시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형이 한 우물만 파는 스타일이라서요. 한번 찜한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을 거예요. 가람 씨는 좋은 사람이니까, 굳이 형에게만 마음을 줄 필요는 없어요. 가람 씨 주변에 있는 사람도 둘러봐요.”송가람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말했다. “현우 씨, 저 좋아해요?”이렇게 돌직구를 던질지 몰랐던 강
유현진이 차에서 내려 강한서를 따라갔다. 엘리베이터에 타자 강한서가 갑자기 물었다. “밖에 비가 더 오는지 모르겠네.”유현진이 말했다. “아마 아닐걸. 일기예보에 비 온다는 말 없었거든. 아마 소나기일 거야. 곧 그치겠지.”강한서가 말했다. “지난번에도 소나기였는데, 두 시간이나 내렸잖아.”유현진은 바로 지난번 비를 쫄딱 맞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가 말했다. “내리면 내렸지 뭐. 어차피 이번엔 밖에 있는 것도 아닌데.”말하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강한서가 유현진을 따라 나오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비 오는 날 운전하면 위험한데.”유현진이 멈칫하더니 순간 강한서가 왜 계속 비 오는 얘기를 했는지 이해가 되었다. ‘이 자식, 자고 가려고 핑계를 찾는 거였어.’강한서의 모습에 유현진은 마음속으로 웃음이 났지만 그녀는 정색하며 말했다. “운전 천천히 하면 괜찮아.”그러더니 그녀가 말했다. “도착했어. 넌 이제 돌아가.”강한서는 실망한 듯 “응.” 대답하더니 나지막이 말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강한서는 유현진이 “불쌍한” 그를 보고 마음이 약해져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하라고 할 줄 알았지만 그녀는 “잘 가.”라고 인사한 뒤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강한서는 굳게 닫긴 문을 한참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집으로 돌어와 옷을 갈아입은 유현진은 자고 가고 싶으면서도 직접적으로 얘기는 하지 않고 결국 거절당해 축 처져 있던 강한서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현관으로 걸어가 잠시 서 있더니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강한서가 쭈그려 앉아 멍때리고 있었다. 유현진이 문을 열자 그는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유현진의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그녀는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안 가?”강한서가 말했다. “너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서.”유현진이 말했다. “예전엔 내가 너랑 더 같이 있으려고 하면 귀찮아했잖아.”강한서는 귀찮아하지 않았다고 대답하려고 했지만 곧 전에 자신의 말투를 떠올리고는
강한서는 또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한 걸음이, 내가 내디딘 수많은 걸음보다 더 용기 있는 거였어. 고마워.”유현진은 순식간에 19금에서 로맨스로 장르가 전환되는 경험을 했다. 로맨스… 그놈의 로맨스!“현진아, 난—”강한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유현진이 갑자기 그의 옷깃을 잡더니 그의 입술을 깨물어 버렸다. 그녀에게는 강한서처럼 가벼운 입맞춤과 깊은 키스 스킬을 보여줄 만한 인내심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막 깨물 뿐이었다. 그러더니 그녀는 강한서의 멱살을 풀고 그를 째려보며 욕설을 내뱉었다. “멍청이!”강한서: ???유현진은 어두워진 얼굴로 신발장에서 내려왔다. 강한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왜 화내고 가는 거야?’분명 아까 키스할 때까지만 해도 화도 내지 않고 거절도 하지 않았었는데.강한서가 자세히 기억을 되짚고 있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정신을 차린 강한서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아파트 경비가 꽃다발을 안고 서 있었다. 문을 연 사람이 남자임을 확인한 경비는 멈칫하더니 물었다. “안녕하세요. 유현진 씨 집에 계신가요?”강한서가 그의 품에 있는 꽃다발을 훑더니 태연하게 말했다. “무슨 일로 그러시죠?”경비가 말했다. “유현진 씨의 꽃다발이 경비실로 배달이 돼서요. 아까 당직인 동료가 집에 돌아오셨다고 하길래, 전해드리러 왔습니다.”경비가 말을 이었다. “유현진 씨께 물건을 수령해달라고 전해주시겠어요?”강한서가 말했다. “저한테 주세요.”경비가 조금 주저하며 말했다. “실례지만, 누구신지?”강한서가 태연하게 경비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남편입니다.”경비: …밸런타인데이에 유부녀에게 꽃을 선물했고, 심지어 남편이 대신 수령했다. 경비는 얼른 강한서에게 꽃다발을 맡기고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꽃다발을 안고 있던 강한서는 꽃 사이에 끼워져 있는 카드를 발견했다. 그는 카드를 꺼내 훑어보았다. 카드에는 단 한마디만 적혀있었다. 「크랭크인 축하해요.」보낸이의 이름을
유현진이 의아해했다. ‘이것 때문에 시무룩해 있는다고?’‘너무 유치한 거 아냐?’‘지난번이든 지금이든, 전부 자기가 준 거잖아.’하지만 오늘은 기분 좋은 하루를 보냈으니, 유현진은 그를 위로했다. “네가 전에 준 건 실용적이었어. 반신욕이나 화전을 만들 때 꽤 유용했어.“강한서: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다. 화전 말이 나오자 유현진이 잠시 생각했다. “미주가 만든 디저트가 아직 있을 거야. 가져다줄게. 먹어봐.”차미주는 정말 음식 솜씨가 좋았다. 어느 땐가 강한서는 거의 매일 이곳으로 장미 한다발을 보냈었다. 너무 싼 가격도 아니라 버리기엔 아깝고 남기자니 집에 더 이상 꽃을 둘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차미주는 꽃잎을 뜯고 씻어서 재워둔 뒤 화전과 꽃약과를 만들었다. 그녀는 음식이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일부러 건조제와 개별 포장지를 구매해 하나씩 밀봉하여 포장해 두었다. 차미주와 유현진은 가끔 드라마를 보면서 간식처럼 먹기도 했다. 한성우가 맞은 편으로 이사를 오면서 많이 가져가 이미 많이 남지 않았다. 유현진이 강한서에게 꽃약과를 건넸다. “먹어 봐.”포장을 뜯은 강한서가 한입 베어 물었다. 꽃약과에는 장미 잼이 조금 들어가 있어 시중에 판매하는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그리고 너무 달지도 않아 입안엔 장미와 약과 특유의 향기가 가득 퍼졌다. “맛있지?”유현진이 눈이 휘어지게 웃었다. “미주 솜씨 엄청 좋아.”강한서가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말했다. “너도 비슷해.”유현진이 멈칫하더니 말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은 할 필요 없어.”강한서가 거듭 강조했다. “난 진지해.”유현진이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너 내가 해준 도시락 버린 걸 내가 못 봤는 줄 알아?”“내가 언제—”강한서의 말이 뚝 멈추었다. 그가 기억해낸 듯싶었다. ‘그런 적이 있었던 것 같네.’그 뒤로 유현진이 다시는 음식을 하지 않은 것을 떠올린 강한서의 마음속에는 한가지 추측이 생겨났다. “내가 도시락을 버리는 걸 봐서 다시는 요리를
그대로 집에 가지고 가도 됐지만 매번 유현진이 빈 도시락을 보며 기뻐하던 모습을 떠올리고는 집 앞에서 상한 도시락을 쓰레기통에 비워냈다. 물론 그는 하필 그 장면을 유현진이 보게 됐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로 인해 유현진이 해주는 도시락을 영원히 받지 못하게 되었다. 유현진이 놀라며 말했다. “거짓말하지마. 너 분명 맛없다고 했어.”강한서가 말했다. “사실 너무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맛이 없지도 않았어. 네가 실력 발휘를 제대로 했을 때는 회사 구내식당보다 더 맛있었고 제대로 못 했을 땐, 오후 내내 물을 마셔야 했지만 그래도 괜찮은 편이었어. 도시락을 먹고 병원에 간 적은 없었으니까.”유현진: ...“평가하라고 안 했어.”강한서가 씩 웃더니 유현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녀의 손가락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 그렇게 양심 없는 놈 아니야. 네가 힘들게 만들었는데, 좋아하지 않았으면 아예 가져가지도 않았을 거야.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면 사람들이 얼마나 부러워했다고.”이 점은 민경하가 장담할 수 있었다. 강한서는 분명 사무실에서 밥을 먹어도 됐지만, 그는 굳이 도시락을 들고 회사 구내식당에서 시선을 한몸에 받으며 도시락을 데워달라고 했다. 상사가 오니 사람들은 편하게 식사를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지도 않고 굳이 옆에 앉아 함께 밥을 먹으니 직원들도 모른 척할 수도 없어 아무 말이나 떠들어대야 했다. 그러니 한 직원이 물었다. “대표님 도시락 싸 오셨어요?”그러면 강한서는 담담하게 말했다. “와이프가 밖에 음식은 건강하지 않다고 준비해줬어요.”밥을 먹는 사람과 밥을 한 사람 모두 말을 하고 싶지 않아졌다. 물론 최대 피해자는 현재 옆집 902호에 살고 있었다. 유현진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왜 매번 내가 푸념하는 일은 네 입장에서 들으면 마치 내가 억지를 부리는 것처럼 되는 거야?”강한서는 함정을 잘 피해 가며 대답했다. “그건 우리가 소통이 부족해서 그래. 넌 이렇게 현명하고 착하고 온화한 사
유현진과 전화를 끊은 유상수는 백혜주에게 임신을 했는지 물으러 갔다.백혜주가 깜짝 놀라며 그에게 반문했다. “누구한테 들었어요?”그녀의 반응이 조금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유상수는 사실을 숨겼다. “회사 동료가 얼마 전 병원 산부인과에서 당신을 봤다길래.”백혜주는 이번 주에 수술을 예약했었다. 하지만 수술을 하기도 전에 유상수가 그녀에게 그 일에 대해 물었다. 만약 임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의심 많은 유상수가 분명 사람을 시켜 알아볼 것이었다. 그러다 거짓말을 들키기라도 하면 사태를 더욱 수습하기 힘들 것이다. 생각을 마친 백혜주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저 임신한 거 맞아요.”유상수는 백혜주의 말에 매우 놀랐다. 유서훈을 가졌을 때 이미 몇 년 동안 애를 썼었다. 몇 년 전 신체 검사에서도 의사가 그의 정자가 활력이 떨어진다고 했기에 그는 더 이상 아이를 가질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니 백혜주가 다시 임신하게 될 줄은 전혀 몰랐다. 또 아들이 생긴다고 생각한 유상수가 얼른 백혜주를 부축하며 말했다. “이렇게 중요한 일을 왜 나한테 말하지 않은 거야?”백혜주의 눈빛이 슬프게 빛났다. “말하지 않은 게 아니라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어요.”유상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고?”백혜주가 말했다.“전에 병원에서 검사했을 때 의사가 태아가 불안정하대요. 혈당, 혈압도 좀 높고요. 낳으면 위험 부담이 크대요.”“어느 의사가 그래. 몇 군데나 가봤어? 정확한 거야?”“한주시에서 제일 좋은 병원에 갔어요. 거기서 잘못 보진 않았겠죠.”유상수가 입술을 짓이겼다. “성주네 막내도 걔 와이프가 40일 때 낳았어. 그때도 위험하니 어쩌니 했지만, 그래도 잘 자랐잖아. 의사들은 원래 겁주는 말을 하기 좋아하니까.”백혜주는 이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상수의 그 말은 정말 마음을 식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는 아이를 낳는 것이 임산부의 안위보다 더 중요했다. 백혜주는 불쾌한 기분을 누르며 나지막이
민경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커플의 감정을 증진시키는 데는 공포영화가 최고죠.”“그래요?”강한서가 무심하게 말했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아직도 솔로예요?”민경하: ...‘역시 이렇게 빨리 사모님의 마음을 돌리게 만들어서는 안 되는 거였어. 저 득의양양한 말투 좀 봐.’강한서가 사무실로 향하고 있을 때,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가 휴대폰을 들어 확인하니 메일이었다. 걸어가며 메일을 확인하던 강한서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고 그의 표정도 잔뜩 어두워졌다.이상함을 눈치챈 민경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왜 그러세요.”강한서는 말 없이 휴대폰을 넣었다. “잠깐 다녀올게요.”“같이 갈까요?”“아니요.”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회사에 있어요. 급한 일 생기면 연락하고요.”“네.” 강한서가 근무 도중 자리를 비우는 일은 드물었다. 민경하는 작은 일이 아님을 직감했다. 그게 아니라면, 강한서가 저럴 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민경하의 직감은 정확했다. 강한서는 협박 메일을 받았다. 탈의실에서 찍은 몰카였다. 사진 속에는 성장 발육도 아직 저대로 되지 않은, 15살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가 있었다. 아이는 거의 나체로 카메라 앞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여자아이의 이목구비는 조금 눈에 익은 정도라면, 등에 있는 모반은 그 아이가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게 했다. 유현진이었다. 미성년자인 소녀를 찍은 몰카 사진을, 상대방은 200억을 주면 원본 사진을 지우고 그게아니라면 사진을 공개하겠다고 했다. 유현진은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단계라, 만약 사진이 공개된다면 그녀의 꿈에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그녀가 왜 몰카를 당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단지 그것을 화젯거리로 삼아 사진을 공유하고 추측하면서 유현진에게 근거 없는 누명을 씌워 그녀를 비난할 것이 분명했다. 강한서는 그 짧은 순간, 그가 상상할 수 있는 제일 끔찍한 결과를 떠올렸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어두운 표정으로 이번 일의 경위를 할 번 곱씹은 홍혜림의 얼굴이 순간 일그러졌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해금은 항상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한 번도 어긋난 적조차 없었다. 조금만 먼저 얘기를 꺼냈다면 의심을 살 수 있었고 조금만 늦으면 도와줄 기회를 놓칠 수 있었다. 서해금은 늘 홍혜림이 더는 손 쓸 방법이 없는 타이밍에 나타났다. 궁지에 몰린 상황에 당연히 홍혜림은 평소처럼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었고 도움을 주려는 사람의 손길을 거절할 리가 없었다. ‘서해금이 어떤 인간인데?’서해금은 이익을 얻을 수만 있다면 거지도 아버지로 모실 수 있었고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면 친아버지도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을 사람이었다. ‘그런 인간이 아무런 계획도 없이 도와줄 리가 없어.’‘애초부터 이 모든 것이 서해금이 꾸민 짓이라면 말이 되긴 하지.’‘하지만 대체 왜?’홍혜림은 순간 자신에게도 조향대회의 투표권이 있다는 사실을 또 올렸다. ‘설마 그것 때문에?’서해금 의도를 파악하게 된 홍혜림은 순간 화가 치밀었다. ‘가식적인 X. 감히 날 두고 수작을 부려?’생각에 잠긴 홍혜림이 인상을 폈다 찌푸렸다를 반복하며 가끔은 이를 악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윤이 걱정스레 물었다.“엄마, 왜 그래요?”홍혜림이 감정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역겨운 일이 떠올라서 속이 좀 안 좋아서 그래.”아직 어린 나이라 홍혜림 말의 의미를 눈치 채지 못한 진윤이 말했다. “엄마도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차피 전 부정행위도 하지 않았잖아요. 지금은 제가 신고까지 했으니 저희가 여기저기 부탁할 필요 없어요. 오히려 그 사람들이 저희에게 사정을 해야겠죠. 엄마도 이젠 회사로 나가 보세요. 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의 표정이 조금은 누그러졌다. “너만 괜찮으면 엄마는 아무것도 겁나지 않아. 회사에는 네 아빠와 형이 있어. 내가 할 일은 널 지키는 거야.”그 말에 진윤은 강한서의 말을 떠올렸다.“너한텐 좋은 부
진윤: ...진윤이 흥, 콧방귀를 꼈다. “네가 얘기 안 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아? 한성 그룹 대표지?”진윤이 머리가 떨어질세라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 형님은 정말 대단한 사람이에요. 언변이 장난이 아녜요. 게다가 맞는 말만 골라서 한다니까요. 전엔 우리 형이 세상에서 제일 능력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형도 그 형님 앞에선 꼬마에 불과한 것 같아요.”진윤의 뒤통수를 툭 치려던 홍혜림은 그의 머리에 감싸진 붕대를 보고는 시선을 내려 엉덩이를 차버렸다. “형이 널 얼마나 예뻐했는데 팔이 밖으로 굽어?”진윤이 바지의 먼지를 털며 말했다. “좋은 건 당연히 형이 더 좋죠. 하지만 능력으로 따지면 형님이 더 뛰어난 것 같아요..”강한서를 향한 콩깍지가 두껍게 쓰인 진윤의 모습에 홍혜림은 괜히 질투가 났다. 하지만 상대방이 강한서라는 사실에 오히려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정인월이 직접 교육한 아이였으니 성품이 우수하고 능력이 뛰어난 것은 말 할 필요도 없었다. 진수 그룹과 한성 그룹은 같은 업계에 종사하지 않은 탓에 협업하는 일이 거의 없어 연계가 잦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진윤은 한성 그룹이 종사하고 있는 업계와 관련된 전공을 하고 있었고 강한서는 IT 업계의 정상급 인물이었다. 그러니 강한서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진윤에겐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홍혜림은 강한서가 아무 이유 없이 진윤을 도울 리가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강한서가 여자친구 대신 자신에게서 서해금의 일을 알아내려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홍혜림은 그 일엔 조금도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신세를 지고도 모른 척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강한서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자신의 요구를 이야기한 적도 없어 오히려 홍혜림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서 대표에게 우리가 신고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고 은근슬쩍 오 교수님을 귀띔하게 한 것도 너의 그 스승님 생각인 거야?”진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도와주겠다고
입가를 파르르 떨던 홍혜림이 진윤의 손을 툭, 쳐냈다. “저리 가. 엄마한테 그런 농담하지 마.”진윤이 웃는 얼굴로 다가가 홍혜림의 어깨를 주물렀다. 그러자 홍혜림이 진윤을 다시 자리에 앉혔다. “얌전히 앉아있기나 해. 넌 애가 다치고도 얌전히 있지를 못 해.”잠시 말이 없던 홍혜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왜 엄마한테 얘기도 안 하고 신고했어? 오 교수님께도 비밀로 하라고 하면서 말이야. 대체 무슨 생각인데 이렇게 수상하게 구는 거야.”“엄마, 만약 학교 측에서 빨리 결과를 발표할 생각이었다면 진위 여부는 신경 쓰지도 않은 채 얼른 이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을 거예요. 저희가 오 교수님께 부탁할 시간 같은 건 주지도 않았을 거라고요.”“그럴 시간이 있었다고 해도 학교 명예가 걸린 일인데, 누가 그 책임을 지려고 하겠어요?”진윤의 말에 홍혜림이 멈칫했다. “그러니까 네 말은 학교에서 너한테 처분을 내렸다는 말이 가짜라는 얘기야?”진윤이 말했다. “엄마, 서화 대학은 엄마와 아빠가 수많은 인맥과 돈을 들여 고르고 고른 대학이에요. 업계에서의 명성도, 학교 분위기도 말 할 것 없이 좋고요. 오랜 세월을 지내며 명성을 쌓아온 학교예요. 그만큼 수많은 일을 겪어왔다는 얘기잖아요.”“그런 학교가 고작 이런 여론에 궁지로 몰려 학생에게 처분을 내리는 것으로 여론을 잠재우려고 했을 가능성이 얼마나 있다고 생각하세요?”“지금은 예전과 달라요. 요즘은 순식간이면 소문이 퍼진다고요. 이런 일은 조금만 미숙하게 처리해도 오히려 힘들게 쌓아온 명성에 금이 가게 할 수 있어요. 그러니 어떻게 봐도 학교 측에서는 함부로 저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 할 수는 없어요.”“오히려 진실을 파헤치는 편이 학교의 명성을 지키는 제일 좋은 방법이에요.”잠시 조용하던 진윤이 말을 이었다. “엄마, 만약 엄마가 학교 이사진이라면 부정행위가 사실이었다는 결론과 부정행위가 루머였다는 걸론 중 어떤 게 신입생 모집에 더 큰 영향을 줄 거라고 생각했을 것 같아요?”홍혜림이 미간을
식사 자리가 마무리된 후 홍혜림을 배웅하러 나온 서해금의 뒤를 오성빈이 따라나서며 나지막이 물었다. “서 대표님이 말씀하신대로 했으니 약속하신 건...”“걱정마세요.”서해금이 시선을 거두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일만 잘 마무리 되면 약속드린 건 꼭 지켜드리죠.”“그럼 최대한 빨리 해결하도록 할게요. 질질 끌어봐야 좋을게 없으니까요.”“부탁드려요.”고개를 끄덕인 서해금이 성월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서해금의 뜻을 바로 알아들은 성월이 곧바로 오성빈을 배웅했다. 사실 학교에서는 진윤의 부정행위에 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린 것이 없었다. 여론은 여전히 뜨겁기만 했다. 하지만 그런 때일수록 여론에 흔들리지 말아야 했다. 만약 조사 결과에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그 여론은 오히려 학교에 독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은 학교 임원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며칠 동안이나 홍혜림의 연락을 무시했다. 물론 그 역시도 최대한 빨리 이 일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진윤이 부정행위를 저질렀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오성빈이 모든 증거 수집을 마치고 드디어 진윤의 누명을 벗겨주는 쇼를 하려던 그때, 경찰이 갑자기 학교로 찾아왔다. 진수 그룹에서 진윤의 시험 부정행위 문제로 경찰에 신고를 한 탓이었다. 교장의 연락을 받은 오성빈은 그만 멍해졌다. 제일 먼저 서해금이 떠올랐지만 그녀가 약속했던 일을 떠올린 그는 곧 주먹을 꽉 움켜쥐고 서해금에게 연락하고 싶은 충동을 꾹 참으며 홍혜림의 연락처를 눌렀다. 홍혜림이 전화를 받자마자 오성빈이 물었다. “사모님, 어제 분명 진윤 학생 일은 잘 처리해 드리겠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왜 신고를 하신 거예요?”홍혜림이 놀란 말투로 말했다. “신고라뇨? 전 신고한 적 없어요.”“사모님이 신고하신 게 아니라고요?”의아한 듯 묻는 오성 빈에게 홍혜림이 대답했다. “전 신고한 적 없어요. 교수님께서 이미 윤이가 부정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증거를 찾으셨다면서 조치를 취하시겠다고 말씀하셨잖아요. 그래서 계속
장준의 아버지는 요직을 맡고 있었고 장씨 가문엔 그의 아버지를 제외하고도 수많은 정치인들이 있었다. 그랬기에 가족 중 단 한명이라도 꼬리를 밟힌다면 그의 가문은 수습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기도 했다. 장준이 저질렀던 인간 같지도 않은 일들이 하나하나 밝혀지기 시작했다. 폭행, 음주 운전, 도박, 성폭행...피해자들이 하나둘 인터넷에 장준의 진짜 모습을 폭로했다. 수많은 피해자의 목소리를 누를 수 없었던 장씨 가문의 스캔들이 결국 전부 드러나고 말았다. 홍혜림 역시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곧 회사 계정으로 진윤은 그날 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발표와 함께 그와 관련된 증거들과 범죄경력증명서를 전부 공개 했다. [그러니까 진윤은 또 다른 도련님의 기사를 막기 위해 총알받이가 됐다는 거네?][어쩐지 뭔가 이상하더라니.][그렇게 심각한 교통사고에 진윤 한 사람만 공개 처형하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역시 여론을 부추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거네요.][발 빼려고 하지 마. 장준이 주범이었다고 하더라도 진윤이 그 경기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건 아니잖아. 끼리끼리는 과학이라고 했는데 그놈이 그놈 아니겠어? 서화 대학에서도 진윤의 재시험 부정행위를 인정 했잖아.][학교엔 이미 소문을 파다해요. 이번 일과는 관련이 없다고 해도 언젠가는 비슷한 사고를 쳤을 거예요. 장준이나 진윤이나 크게 다를 거 없잖아요.][저기요. 두 사람을 싸잡아 욕 하지는 마요. 한 명은 범죄자고 다른 한 명은 그저 인성에 문제가 있는 것뿐이에요. 그게 어떻게 같아요? 얼른 진상 규명이나 하시죠. 피해자에게 피해 보상은 해야 하잖아요.]...휴대폰을 한 쪽으로 던져버린 서해금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장준이었어? 어쩐지...”성월이 그녀에게 차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대표님, 진윤 씨 일은 이미 어느 정도 해결이 된 것 같아요. 그럼 저희 계획은 어떻게 해요?”“아직 끝나지 않았어요.”서해금이 찻잔을 들어 올리며 덤덤하게 말했다. “홍혜림은 누구보다
장씨 가문 아들이라는 이유로 여론이 들끓는 것을 염려한 탓인지 기사는 간단한 몇 마디 말로 상황을 간결하게 보도했다. 하지만 한현진은 감추려고 할수록 일은 점점 더 커질 것이라 생각했다. 드디어 주강운이 손을 쓴 모양이었다.고개를 들어 강한서를 바라보는 한현진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여보, 장준이 잡힌 것 같아.”강한서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그래?”한현진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강한서에게 한성우가 보낸 기사를 보여주었다. “시간, 교통사고, 장 모 씨, 약물. 이 단어들만 봐도 누군지 뻔하잖아.”강한서가 놀랍다는 듯 말했다. “장 모 씨가 정말 장준이야? 어떻게 잡힌 거지? 누가 신고라도 한 건가.”“나쁜 짓을 그렇게 많이 했으니 벌을 받는 거지. 피해가 한두 명이면 집안 세력으로 어떻게든 막을 수 있겠지만 그 수많은 피해자를 전부 막을 수는 없잖아?”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기사에 다른 얘기는 없어?”“없어. 그냥 언급만 한 수준이야. 하지만 이 기사를 시작으로 진실을 밝혀 나가려는 사람은 분명 있을 거야. 그건 우리가 상관할 일이 아니지.”한현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장준과 관련된 기사가 퍼져 나가기 시작하면 사모님께 이 기회를 빌려 진윤 씨에 관련한 입장 발표를 하시라고 말씀 드려.”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연락드릴게.”강한서는 이상할 정도 순순히 대답했다. 예전이라면 어떻게 된 일이냐며 꼬치꼬치 캐 물었을 것이 분명했다. 지금처럼 쉽게 넘어갈 리가 없었다.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한현진의 시선에 강한서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가 다정한 목소리로 한현진에게 물었다.“왜?”하지만 한현진은 곧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산책 가자.”강한서가 고개를 끄덕였다. “옷 가지고 올게.”강한서의 뒷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한현진이 휴대폰을 들어 한성우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늘 강한서가 좀 이상해요. 평소엔 꼬치꼬치 따지더니 오늘은 기사를 보여줘도 아무것도
멈칫한 강한서가 입술을 짓이겼다.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강한서의 목소리에 수화기 너머의 사람은 순간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곧 어색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한서야, 야근 안 했어? 오늘은 일찍 퇴근했네.”강한서는 화제를 돌리는 한성우의 말에 전혀 동요하지 않은 채 다시 물었다. “방금 누가 어딜 들어갔다고?”“방금 내가 뭐라고 했어?”한성우가 모른 척 대답했다. “갑자기 네가 튀어나오는 탓에 다 잊어버렸잖아.”강한서가 말했다. “강운이가 장준을 처넣었다며.”한성우: ...후회 막심한 얼굴로 자신의 입을 툭 친 한성우가 웃으며 대답했다. “어, 맞아. 바로 그거야. 나도 방금 어디서 그 소식을 듣고 형수님과 수다나 떨려고 전화한 거야. 너도 알잖아. 형수님과 내가 뒷담화 할 땐 죽이 척척 맞는 거.”“그래?”강한서가 담담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난 두 사람이 나한테 뭔가 숨기는 게 있는 줄 알았지.”“그럴 리가 있겠어?” 한성우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가 널 속일 수는 있고? 두 사람 요즘 진윤 씨 일 때문에 걱정이 많잖아. 그래서 나도 신경 좀 썼지. 봐, 소식을 듣고는 바로 알려 주려고 전화했잖아.”“그래.”강한서의 대답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던 한성우의 귓가로 곧 다시 강한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진이가 강운이한테 뭐라고 했는데?”한성우: ...한성우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뭐? 형수님이 강운이와 연락했어?”잠시 침묵하던 강한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전해달라고 한 말이 뭐냐고.”의심이 아닌 확신에 찬 말투에 한성우는 머리가 찌릿, 할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조금만 참았다가 나중에 전화할 것이지, 난 왜 하필 지금 한 거야?’어차피 한강서가 전부 눈치 챈 마당에 더는 숨길 필요가 없어진 한성우는 결국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형수님이 너한테 숨겼다고 뭐라고 하지 마. 형수님이 강운이에게 연락한 게 아냐. 나한테 눈치를 주라고 부탁하셨어. 강운이네는 줄곧 장씨 가문과 사이가 안 좋았잖아
“실망이라니. 엄마는 단 한 번도 널 창피하게 여긴 적 없어. 넌 엄마가 배 아파 낳은 내 자식이야. 내가 널 몰라? 엄마는 그냥 네가 이번 일 때문에 힘들어 할까봐 그래. 엄마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즘 네가 말도 없고 조용하기만 해서 우리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진윤의 등을 어루만지며 홍혜림이 나지막이 말했다.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야. 인생 살면서 이런 일 안 겪는 사람은 없어. 이겨내면 돼.”고개를 끄덕인 진윤이 홍혜림을 꽉 끌어안았다. ...아름드리.“그러니까 아주머니가 뒤에서 여론몰이에 동조했다는 거야?”한현진이 자몽을 까며 강한서에게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절묘한 타이밍에 나타나서 알아봤더니 오성빈 교수라는 사람, 성 비서님의 먼 친척이시더라고. 그러니까 그분이 나서서 얘기만 해주면 잘 해결될 가능성이 높아.”잠시 생각하던 한현진이 말했다. “그래서 일부러 홍혜림 씨가 신세를 질 수밖에 없게 만드시겠다? 홍혜림 씨를 다시 뺏어가려는 거야?”“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전부는 아닌 것 같아.”한현진이 눈을 반짝이며 강한서 곁으로 다가갔다. 꿍꿍이 가득한 얼굴로 한현진이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는 그걸 지켜보면 되겠네. 본인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고 착각하게 만든 다음대체 뭘 하려는 생각인지 지켜보자고.”강한서가 어쩐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한현진을 쳐다보았다. 그 표정에 어리둥절해진 한현진이 물었다. “왜 그렇게 웃어? 뭐야, 그 음흉한 웃음은.”강한서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근묵자흑이라는 단어가 너무 맞는 말인 것 같아서.”한현진: ?“설명 똑바로 해. 누가 그 묵인데?”강한서는 씩 웃으며 한현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한현진이 깐 자몽을 가져가 한 입 베어 문 강한서의 표정이 곧 강한 신맛에 잔뜩 일그러졌다. 자몽을 겨우 삼킨 강한서가 인상을 찌푸린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넌 이걸 대체 어떻게 아무렇지 않게 먹을 수 있는 거야.”한현진이 눈을 깜빡였다.
[그래도 학교 측에서 끝까지 부정행위라고 주장하면서 재수강하라고 하면 어떡해요?]강한서가 웃으며 말했다. [넌 언제든 법적 대응을 할 수 있다는 걸 잊지 마. 내가 대신 신고해줘?]진윤은 그제야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번뜩 정신이 들었다. 인터넷에 도배된 악플로 잔뜩 지친 진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일에만 몰두해 있었다. 그는 심지어 학교 측에 새로운 시험 문제를 내도록 제안한 후 라이브 방송을 통해 부정행위가 없었음을 증명할까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강한서의 한마디는 진윤의 모든 고민을 한 방에 해결했다. 스스로의 결백을 증명하는 건 결국 그 사람들이 파놓은 함정에 뛰어 드는 것 과 다를 바가 없었다. 사람들은 애초부터 그가 부정행위를 했을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니 진윤이 라이브 방송으로 결백을 증명한다고 한다고 해도 사람들은 또 미리 답을 알고 있으면서 카메라 앞에서 쇼를 하는 것이라며 의심하게 뻔했다. 부정행위의 증명해야 할 사람은 진윤이 아니라 그를 의심한 사람들이었다. 진윤이 순간 눈을 반짝였다. [얼른 엄마를 말려야겠어요. 교수님에게 부탁할 필요가 없잖아요. 전 당당하니까 얼마든지 조사하라고 해요.][잠깐만.]강한서가 진윤을 불렀다. [잠깐만 기다려 봐.][왜요?]입술을 깨물던 강한서가 중얼거렸다. [고작 학생인 네가 시험에서 부정행위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여론이 이 정도로 들끓는게 처음부터 이상했어. 이제야 의문이 조금 풀리는 것 같네.][그게 뭔데요. 얼른 얘기 해줘요.]성격 급한 진윤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는 강한서 때문에 괜히 마음만 조급해졌다. 강한서가 말했다. [넌 지금 아무것도 하지 마. 어머님께도 오 교수님이라는 분 만나보라고 해. 뭐라고 하는지 얘기나 들어 보고 다시 대책을 세워야해.]진윤이 조금 전처럼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 인간들의 계략을 역이용하시려는 거예요?]강한서가 쯧, 혀를 차며 말했다. [매형이라고 불러]진윤: ...홍혜림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