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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서재

작가: moominkiller
last update 게시일: 2026-07-21 10:26:40

부름은 해가 진 뒤에 왔다.

"서, 서재로 드시랍니다."

말을 전하러 온 어린 하인의 낯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왕부에서 나고 자란 아이가 아는 한, 그 방에 든 사람은 왕야뿐이었다. 청소하는 노비도 문밖까지만 들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마주친 하인들이 하나같이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보았다. 초상 행렬을 보는 눈 반, 구경거리를 보는 눈 반이었다.

문은 열려 있었다.

문턱을 넘는 데는 한 걸음이면 족했다. 한데 그 한 걸음을 왕부의 누구도 이십 년간 딛지 못했다. 그녀는 치맛자락을 여미고, 그 한 걸음을 조용히 디뎠다.

서재는 소문보다 검소했다. 서가 가득 병서와 장계 뭉치, 벽에 걸린 북강 지도, 그리고 등불 둘. 꾸민 것이라곤 없는 방에서 단 하나, 문 맞은편 벽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검이었다. 칼집의 옻이 손 닿는 자리만 닳아 있었고, 검수(劍穗)의 술이 색이 바래 있었다. 지금 왕야의 것이라기엔 낡았고, 버려두었다기엔 닦여 있었다. 누구의 것이냐 묻는 것은 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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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4화. 수결(手決)

    저녁 문안상은 왕부가 차렸다.경성식은 한 접시도 올리지 않았다. 잣을 갈아 쑨 뽀얀 죽, 볶은 좁쌀에 꿀을 먹여 굳힌 강정, 말린 산사 열매를 우린 붉은 차. 단것마저 북강의 단맛이었다. 허도위는 상을 한 번 내려다보고, 웃는 낯으로 자리에 앉았다. 산사차는 우린 빛이 깊어 잔 안이 노을 같았고, 김이 두 사람 사이에서 실처럼 풀렸다."간밤에는 왕부의 수고가 컸다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짐이 그리 쉽게 돌아올 줄은 몰랐지요.""쉽지는 않았습니다." 온보요는 차를 따랐다. "밤물이 차서, 군사들 손이 다 텄지요.""그 노고를 어찌 갚아야 할지.""갚으실 것 없습니다. 찾아 드린 김에, 돌려드리면 그만이지요."그녀는 소매에서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상 위에 놓았다. 물목이었다. 돌 스물세 궤짝— 큰 것 아홉, 중치 열하나, 작은 것 셋. 볏짚 서른 단. 궤짝을 동인 새끼줄 마흔여섯 발. 못 하나 셈하지 않고 낱낱이 적혀 있었다.두루마리는 길었다. 못 하나까지 적었으니 길 수밖에 없었다.허도위가 두루마리를 폈다. 읽는 시간만큼, 방 안의 숯 튀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읽어 내리는 동안 그의 잔이 상 위에서 멎어 있었다. 북강에 들어온 이래, 저 손이 멎는 것을 온보요는 처음 보았다."돌······이라 적으셨습니다.""든 것을 적었을 뿐입니다. 감찰께서 잃으신 짐이니, 무엇이 들었는지는 감찰께서 제일 잘 아시겠지요."문 곁의 진묵은 말이 없었다. 다만 제 찻잔을 비우고, 그녀의 잔에 새 물을 더해 주었다. 따르는 손이 지나가며 그녀의 손목 안쪽을 반 뼘쯤 데우고 갔다. 허도위의 눈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허도위는 오래 웃었다. 웃고 나서, 붓을 청했다."물목이 이리 고우니, 받는 자리가 부끄럽습니다."붓이 벼루를 다녀오는 동안 등불이 한 번 튀었다. 문가의 노강은 숨을 죽인 채 그 붓끝만 보고 있었다.수결은 매끄러웠다. 붓이 종이를 떠나는 끝자리까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두루마리를 제 소매에 넣으며, 지나가는 말처럼 얹었다."글씨가 좋으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3화. 답례(答禮)

    전갈은 상 위에 펼쳐진 채였다.감사 인사를 드리러 오겠다는, 곱고 짧은 문장. 종이는 감찰부의 관지(官紙)였고, 먹빛은 값비싼 송연묵의 깊은 검정이었다. 뒤채의 등불 넷이 그 위에서 흔들렸고,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돌을 문 낯들 위로 새벽이 허옇게 밝아 오고 있었다. 창호지가 재빛에서 젖빛으로 변해 갔다.그 정적 속에서, 온보요가 웃었다.소리 없이, 입꼬리만. 차가워졌던 손끝에 피가 돌아오는 웃음이었다. 진묵은 그 웃음을 보았다. 무너진 판 위에 첫 돌이 다시 놓이는 소리를, 그는 여인의 눈에서 들었다."잘되었사옵니다.""잘되었다?""잃어버린 짐이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녀는 서찰을 접었다. "그럼 찾아 드려야지요. 스물세 궤짝, 터럭 하나 축내지 않고 돌려드리겠사옵니다. 단— 물목을 낱낱이 적어서."돌 스물세 궤짝, 볏짚 서른 단. 물목에 낱낱이 적어, 감찰의 수결을 받고 넘긴다. 제 짐이라 하였으니 수결을 마다할 길이 없었다.갈고리째, 두 손으로 받들어 돌려드리는 것이었다.노강의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기까지 한참이 걸렸다. 다물어진 다음에는, 웃음을 참는 낯이 되었다. 참지 못한 상엄이 먼저 헛기침으로 웃었다.진묵은 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낯이 희게 질려 있던 여인이, 지금은 눈 안에 등불을 켜고 있었다. 그 눈이 저 아닌 것을 향해 저리 반짝이는 것이— 문득, 견딜 수 없이 아까웠다. 저 머릿속을 지금 감찰 따위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할 수만 있다면 그 안의 것들을 다 쏟아 버리고, 저 하나로 가득 채워 두고 싶었다. 문을 걸고. 열쇠는 삼키고.위험한 욕심인 줄 알면서도, 거두지 않았다."물목은 네 손으로 적는다." 그가 말했다. 지나가는 손이 귀밑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느리게 귀 뒤로 넘겼다. 손끝이 목덜미를 스치고도 물러나지 않았다. "먹은 본왕이 갈지.""······먹 가는 일에 왕야까지 나설 일은 아니온데요.""네 머리가 도는 것을 곁에서 보고 싶다." 낮은 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그것이 돌면— 가두고 싶어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2화. 돌

    달빛처럼 희던 옷자락이 눈에 남은 채로— 궤짝은 새벽에 열었다.새벽의 뒤채는 숨이 얼 만큼 찼다. 등불 넷이 켜지고도 어둠이 구석마다 남아, 궤짝 스물셋이 관처럼 줄지어 있었다. 뚜껑마다 밤이슬이 서려, 정이 닿을 때마다 물기가 튀었다. 문을 걸고, 지켜보는 눈은 다섯뿐이었다. 뚜껑에 정을 대는 노강의 손이 미미하게 들떠 있었다. 외척의 목줄이 이 안에 있었다.첫 궤짝의 뚜껑이 열렸다.돌이었다.궤짝 안에는 어른 머리만 한 산돌들이 볏짚에 싸여 있었다. 노강이 웃으려다 만 낯으로 둘째 궤짝을 열었다. 돌이었다. 셋째도, 다섯째도, 열째도.스물세 궤짝이 전부, 돌이었다.마지막 뚜껑을 열고 난 노강의 정이 바닥에 떨어졌다. 쇠붙이 구르는 소리가 뒤채를 한 바퀴 돌고 죽었다. 아무도 줍지 않았다.뒤채가 조용해졌다. 온보요는 산돌 하나를 내려다보았다. 여섯이 하나를 드는 무게— 쇠뇌 궤짝에 정확히 맞춘 무게였다. 낙인만 진품이었고, 짐은 처음부터 가짜였다.머릿속에서, 한 계절 치의 그림이 소리 없이 무너졌다.덫을 놓은 것은 이쪽이라 여겼다. 한데 이 돌들이 말하고 있었다. 저쪽도 그물을 보고 있었다고. 보고 있었을 뿐 아니라, 그물이 당겨질 밤에 맞춰 미끼를 갈아 끼웠다고. 재러 왔다던 저울은, 조운만 재고 있던 것이 아니었다."진짜 짐은." 진묵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다. "그믐 전에 빠져나갔겠지.""예. 아마— 절 뒷산을 다녀온 그 밤 언저리에."말하는 그녀의 손끝이 차가워졌다. 새벽의 한기가 그제야 옷 속으로 들어왔다. 여섯 겹을 껴입어도 막을 수 없는 종류의 한기였다. 계산 밖. 혼례의 밤 이후 처음으로, 그 말이 제 판 전체에 걸렸다.그리고 이 돌들은 짐이 아니라 덫이었다.감찰의 짐을 왕부가 한밤에 무력으로 털었다. 병기가 나왔으면 왕부의 공이되, 돌이 나온 이상 남는 것은 "감찰의 짐을 겁탈한 이성왕"뿐. 스물세 궤짝의 돌은, 무는 순간 목에 걸리도록 깎아 둔 갈고리였다."신첩이······ 판을 잘못 읽었사옵니다.""같이 읽었다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1화. 그믐

    그믐의 하구는 소리로만 있었다.물 부딪는 소리, 밧줄 삭는 소리, 멀리 조운선 쪽의 요란한 횃불 소리. 요란한 쪽은 미끼였다. 진묵은 어둠에 잠긴 갈대숲에 병사 열둘과 엎드려, 조용한 쪽을 보고 있었다.노강이 곁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열둘은 진묵이 손수 고른 자들로, 열둘 다 입이 무겁고 발이 가벼웠다. 갈대 사이로 왕부 쪽 하늘이 보였다. 등불 하나 보일 리 없는 거리인데, 사내의 눈은 제 버릇처럼 그쪽을 한 번 다녀왔다.떠나기 전 왕부에서, 여인은 그의 융복 고름을 여느 때처럼 매어 주었다. 매듭을 짓고도 손을 떼지 않아서, 그가 먼저 물었다. 할 말이 있느냐. 여인은 고개를 저었다. 젓고는, 매듭을 한 번 더 당겨 조였다. 그 손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사내는 알았고, 아는 것을 내색하지 않는 값으로 그 떨림을 통째로 받아 두었다.받아 두고, 값을 치렀다. 턱을 들어 올려, 숨이 달아날 때까지 입술을 물었다. 놓아줄 즈음 여인의 입술은 붉게 부풀어 있었고, 그는 그 자국을 엄지로 한 번 눌러 두었다. "지워지기 전에 돌아오지." 문루를 나설 때까지, 등 뒤의 시선이 목덜미에 얹혀 있었다.싸움터로 나서며 뒤가 밟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스무 해 전장에서 얻은 적 없는 병이, 한 계절 만에 생겨 있었다.자시가 넘자, 조용한 배가 움직였다.술도가의 짐배 두 척이 등불 없이 하구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산자락 쪽에서는 수레 소리가 낮게 굴러왔다. 여섯이 하나를 드는 궤짝들이 뱃전으로 옮겨지기 시작했다. 하나, 둘, 다섯. 짐꾼들의 어깨는 여전히 짐 지는 어깨가 아니었다.열둘째 궤짝이 뱃전을 넘을 때, 진묵이 갈대를 헤치고 일어섰다.싸움은 길지 않았다.어둠 속에서 지키는 어깨들이 칼을 뽑았고, 뽑힌 칼의 수만큼 빠르게 도로 떨어졌다. 진묵은 벤 것보다 눕힌 것이 많았다. 죽은 자는 입이 없고, 입이 없는 자는 값도 없다. 칼등과 주먹과 발이 어둠 속에서 일을 했다. 스무 해 만의 실전이 아니라, 스무 해 내내 하루도 거르지 않은 몸이었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40화. 덫

    그날 밤 침상 위에는, 한 계절 치의 밑그림이 다 올라왔다.이불 위에 펼쳐진 것은 약도 한 장과 종이 석 장. 남안 창고와 술도가와 세곡선단의 도장들. 곳간지기의 자백을 적은 문서. 그리고 무(武)와 위(衛)를 창이 가로지른 낙인의 탁본. 등잔 빛이 그 위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한 계절의 수확이 이불 위에서 반짝였다 어두워졌다 했다.종이들을 침상에 편 것은 서재를 피해서였다. 감찰이 온 뒤로 왕부의 벽들이 얇아졌다. 서재의 등불이 늦게 꺼지는 것도, 늦게 꺼진 다음 날 왕비가 늦잠을 자는 것도, 이제는 셋째 입을 거치면 객관까지 갔다. 침소만은 아직 왕부의 것이었다. 침소를 지키는 것이 방어멈의 반짇고리와 호위 아이의 귀라는 것을 아는 자는, 넷뿐이었다."쌀 도둑은 이제 언제든 잡습니다." 온보요가 도장 종이를 짚었다. "행수, 술도가, 곳간의 좀, 뱃길까지. 목만 치면 끝나옵니다.""한데 치지 말자는 낯이군.""예."그녀는 탁본을 도장 종이 곁으로 끌어왔다."쌀을 치면 요란해집니다. 요란해지면 쇠뇌가 숨습니다. 쇠뇌 백이 어디로 숨는지 모른 채 쌀 도둑 목이나 치는 것은— 여우 잡자고 몰이를 하다 범을 놓치는 격이옵니다.""하면.""쌀은 미끼로 두고, 병기를 뭅니다."진묵은 이불 위의 종이들을 한동안 내려다보았다. 여인의 붓끝이 약도 위를 짚어 갔다. 봄 조운의 둘째 배가 뜨는 날, 남안 창고는 다시 움직인다. 움직이는 날에는 술도가의 배가 뜨고, 그 배는 물때를 탄다. 쇠뇌를 옮기려는 자들도 같은 물때를 탈 수밖에 없다. 감찰의 눈이 조운에 쏠리는 날이야말로, 딴 짐을 옮기기 가장 좋은 날이니까."둘째 배가 뜨는 날이 곧 덫이 닫히는 날이옵니다. 쌀 배는 요란하게 오게 두고, 조용한 배만 뭅니다.""물때가 언제냐.""엿새 뒤이옵니다. 그믐 물때이니, 달도 없습니다."엿새. 사내는 그 말을 받아 잠깐 침묵했다. 침묵의 결이 여느 때와 달랐다. 온보요는 그 결을 읽었다. 엿새 뒤 그 자리에는 창끝 백을 끌고 온 감찰이 있고, 금군의

  • 삭왕은 세작을 총애한다   39화. 안부

    무기고 임자의 수결. 그 넉 자가 서재의 밤을 차지하고 있는 사이— 안채에는 청첩이, 다과의 낯을 하고 왔다.감찰 허도위가 왕비께 문안을 청한다는 것이었다. 경성 온부의 안부를 전할 겸, 다과나 한 상 하자는 청. 물리칠 명분도 있었으나 온보요는 받았다. 저울이 달겠다는데 달리지 않으면, 저울은 더 궁금해하는 법이다.가기 전에 서재에 들렀다. 진묵은 청첩을 한 번 훑고 도로 밀었다. 가라 마라 하지 않았다. 대신 나서는 그녀의 너울을 제 손으로 씌워 주며, 한 마디만 얹었다. 듣기만 해라. 답은 집에 와서 정하고.집이라는 말이, 너울 안에서 오래 울렸다.다과상은 객관 정청에 차려졌다. 시비 둘과 방어멈이 뒤에 시립하고, 감찰 쪽은 서리 하나뿐이었다. 낯익은 서리였다. 연회의 밤, 앵아와 보지 않고 비켜서던 그 어깨."온부 대감께서는 강녕하십니다." 허도위가 찻잔을 밀며 운을 뗐다. "지난달 조회에서도 뵈었지요. 다만."다만, 뒤에 반 상 차림의 침묵이 놓였다."요즘 조정이 하 수상하여. 개국공신 댁도 예전 같지는 않다는 말들이 돕니다. 충심이야 변함없으시겠으나, 충심만으로 지켜지지 않는 것들이 세상에는 있지 않습니까.""무서운 말씀입니다.""무서우라고 드린 말씀은 아닙니다." 허도위가 웃었다. "저희 가문과 온부가 서로 도울 일이 많다는 말씀이지요. 마마께서 북강에 계시니 더욱. 이를테면— 왕부의 병비가 장계의 숫자만 한지, 그런 소소한 것들 말입니다."찻김 너머로 값이 제시되었다. 가문의 안위를 저당 잡고, 왕부의 참을 사겠다는 것. 황제의 세작 노릇 위에 외척의 세작 노릇을 겹으로 얹으라는 흥정이었다.온보요는 찻잔을 들었다. 손끝 하나 떨리지 않게. 떨 일도 없었다. 이런 자리의 격이라면 세 살 전부터 배운 것이었다.찻상 위의 다과는 경성식이었다. 연꽃 문양 유밀과. 기름에 지져 꿀을 먹인 결이 노을빛으로 반질했고, 겹겹의 잎맥까지 눌러 새긴 문양이 경성 다방(茶房) 솜씨였다. 온부의 다과상에 늘 오르던 것과, 같은 문양이었다.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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