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연적의 쓸모를 인정하는 데, 진묵은 꼬박 하루가 걸렸다. 하루 사이 조련장의 과녁 셋이 못 쓰게 되었고, 군관들은 까닭을 묻지 않는 것으로 목숨을 아꼈다.철장산의 지세를 아는 자는 북강에도 있었다. 폐광의 갱도를 아는 자도 찾으면 나올 것이었다. 허나 남쪽 물길로 드나든 짐의 결을 읽고, 감찰의 말이 언제 어느 나루를 거쳤는지까지 짚는 눈은— 인정하기 싫게도, 흰 옷의 것 하나뿐이었다.회의 전에 처결할 것이 남아 있었다. 진묵은 소월백을 문밖에 반 각 세워 두고, 군보 여섯 축을 마저 잘랐다. 북문 수비 교대는 윤허. 마초 값 인상은 불허. 술을 먹고 초소를 비운 십장은 곤장 스물에 강등. 여섯 축에 여섯 번, 붓은 같은 속도로 움직였다. 문밖의 흰 옷이 그 속도를 듣고 있다는 것을 알았고, 알아서, 줄이지도 늘이지도 않았다.서재의 서안 위에 북강 산세 지도가 펼쳐지고, 네 귀를 문진 대신 찻잔이 눌렀다. 등불 둘이 지도 위에 산 그림자를 지었다."산길은 세 갈래입니다." 소월백의 손가락이 능선을 짚으며 움직였다. "동쪽 갱도는 물이 차서 못 씁니다. 짐이 다닌 길은 남쪽 능선 하나뿐이지요.""그것을 어찌 아느냐.""숯장수들이 압니다. 광부가 떠난 산에 숯가마가 들어선 지 오래지요. 가마터가 능선에 셋, 골에 둘— 굴뚝 연기만 세어도 산 사람의 수가 나옵니다." 소월백은 진묵을 마주 보았다. "저는 숯을 삽니다. 왕야께서는 숯장수의 말을 사시면 됩니다."진묵은 지도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들면 저 흰 낯을 보아야 했고, 보면 골목의 그림이 돌아왔다. 그는 대신 능선의 길이를 쟀다. 재는 동안, 서안 맞은편에 앉은 여인의 붓이 종이 위를 달렸다. 숯장수, 나루, 날짜. 먹이 옅어질 무렵— 소월백의 손이 말을 끊지 않은 채, 벼루를 반 뼘 그녀 쪽으로 밀었다. 보지 않고 민 자리가 정확했고, 여인도 보지 않고 먹을 찍었다. 반 뼘 안에 스무 해가 들어 있었다. 진묵은 능선을 재다 말고, 지도 귀를 누른 찻잔 하나를 소리 나게 고쳐 눌렀다. 두 사람이
배첩의 격식은 나무랄 데가 없었다.남방 운수(雲水) 상단의 대공자 소월백, 북강 물길이 열린 것을 기려 왕부에 문안을 청한다— 는 글이었다. 종이는 남쪽의 귀한 죽지— 손끝에 닿는 결이 비단 같고 들면 매미 날개처럼 비치는 물건이었다. 글씨는 물 흐르듯 유려했으며, 예물 목록에는 남해 진주도 촉 비단도 없이 차 두 근과 말린 귤피 한 상자만 적혀 있었다. 물리칠 흠을 단 하나도 남기지 않은 첩이었다."물리친다."진묵은 첩을 보지도 않고 말했다."산흙의 임자를 아는 자이옵니다.""산은 본왕이 뒤져도 나온다.""봄 조운이 다 지나기 전에 나와야 하옵니다." 온보요는 첩을 상 위에 반듯이 놓았다. "북강의 산은 넓고, 저희에게 봄은 짧사옵니다."맞는 말이었고, 맞는 말이라서 사내의 심기는 더 험해졌다. 사흘을 물리치던 배첩은 나흘째 되던 날 받아들여졌다. 받아들이는 조건으로 회견 자리에 왕야가 동석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단서를 전하는 노강의 낯이, 어느 전장의 군령을 전할 때보다 비장했다.그날 아침 온보요는 제 옷이 아니라, 사내의 중의 자락을 반쯤 덮고 눈을 떴다. 제 옷은 어디부터가 간밤이고 어디까지가 잠결인지 가릴 수 없는 꼴이었다. 세작 노릇 열 해— 자다 깨워져도 매무새부터 갖추던 여인의 고름이, 요즘 아침은 태반이 이 꼴이었다. 서둘러 여미는 손끝을, 곁에서 관복을 갖춰 입던 사내가 거울 너머로 지켜보았다. 눈매가 흡족해서, 그녀는 더 빨리 여몄다. 빨리 여미는 것이 그 흡족을 더 키운다는 것은— 여미고 나서 알았다.소월백은 정오에 왔다. 흰 옷이었다.금령이 왕부 담장 안 사람들만 묶는 것이라, 손님의 흰 옷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눈처럼 흰 도포자락이 정당을 가로지르는 동안, 마당의 시비들이 일제히 숨을 들이켰다. 걸음에는 소리가 없었고, 소매가 바람을 스치는 결만 희게 남았다. 물 긷던 어린 것 하나가 두레박줄을 놓쳤고, 우물 속에서 첨벙 소리가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 소란에도 상석의 공기는 풀리지 않고, 오히려 한 겹 더
아침 관복 시중은 여느 날과 같이 시작해서, 여느 날과 다르게 흘렀다.다른 것은 그녀 쪽이 먼저였다. 간밤의 것들이 아침까지 남아 무릎이 미덥지 않았고, 생각이 한 뼘씩 늦게 도착했다. 세숫물을 두 번 갈고도 낯의 열은 다 가시지 않았다. 시중드는 시비들은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으로, 전부를 물었다.봄이라도 북강의 새벽은 화로가 필요했다. 숯이 낮게 튀는 소리 곁에서, 온보요는 조복의 깃을 여몄다. 먹빛 바탕에 은사로 구름을 놓은 조복은 무게가 갑주 반 벌은 되는 물건인데, 사내는 그것을 입는 동안 거울 속으로 그녀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매를 꿰고, 옥대를 두르고, 패옥을 거는 사이까지 말이 없었다. 말이 없는 대신 눈이 그녀의 팔목에 자주 갔다. 소매 속에 감춰진 붉은 자국들의 자리를, 그 눈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그자."옥대 고리를 채우던 손이 잠깐 멎었다."나이가 몇이냐.""······잘 모르옵니다.""저잣거리에서는 며칠이나 보았느냐.""철마다 오가는 상단이었으니, 해로 치면······.""해로 치지 마라."물음은 뚝뚝 끊겼고, 끊긴 자리마다 못마땅함이 고였다. 스무 해 전장의 용병술로도 어쩌지 못하는 것이 물음의 순서였다. 온보요는 패옥 끈을 매듭짓다가, 웃음을 옷고름 안쪽으로 삼켰다. 서툰 것을 처음 보았다. 서툰 것이 이상하게, 눈에 오래 남았다.낮에 금령이 내렸다.왕부 안에서 흰 옷을 금한다— 는 영이었다. 까닭은 붙지 않았다. 까닭 없는 영을 통변하는 것은 노강의 몫이었다. 노강은 반나절을 고심한 끝에 "봄 진창에 흰 옷이 상하기 쉬우니 아껴 입으라는 왕야의 어지신 뜻"이라 옮겼고, 옮기고 나서 제 통변에 제가 감복했다. 세탁장은 뒤집혔다. 삶아 널어 둔 흰 무명 서른 필의 거취를 두고 어멈들이 반나절을 다퉜다. 잿물에 담가 잿빛으로 만들자는 파와 궤짝에 재워 때를 기다리자는 파가 갈렸고, 빨랫방망이가 삿대질에 동원됐다. 흰 속적삼은 겉에 안 보이면 되는 것이냐는 물음에는 노강도 답이 없었다. 답이 없는 채로 사흘이 지
침소의 등불은 하나만 켰다.빛이 닿는 자리와 닿지 않는 자리가 선명했다. 사내는 빛이 닿는 자리에 그녀를 앉히고, 저는 그늘에 섰다. 그늘 속에서, 사내의 숨소리만 이따금 자리를 알렸다. 방 안에는 낮의 저자에서 묻어 온 먼지 냄새 대신, 그녀의 옷에서 풀린 옅은 살구 향이 떠 있었다. 그 향 속에서, 침묵이 오래 갔다.밤이 되어서야, 사내는 등불 아래 그녀의 소매를 걷었다. 말없이, 팔목에서 팔꿈치까지, 낯선 손이 닿았을 자리를 하나하나 눈으로 짚었다. 짚는 눈이 데일 듯 느려서, 닿지도 않은 살이 먼저 뜨거워졌다."자국도 없는데 무엇을 찾으십니까.""있다."거칠게 갈라진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짐승의 으르렁거림과 한 뼘 차이— 그 한 뼘이, 듣는 몸을 먼저 건드렸다."본왕 눈에는, 보인다."그리고 입술이 내려왔다. 눈으로 짚었던 길을, 이번에는 입으로 되짚었다. 팔목 안쪽 맥이 뛰는 자리에 오래 머물고, 머문 자리를 지그시 물고, 문 자리를 혀끝으로 달랬다. 등불 아래로 붉은 자국이 하나, 둘, 꽃잎 지듯 떠올랐다. 숨을 죽여도 숨이 새었다."그만······.""싫다."새는 숨이 등불 불꽃을 잘게 흔들었다.허리를 받았던 자리에는 손바닥이 옷감째 얹혀, 오래 눌렸다. 그 손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것을, 그녀는 숨을 죽인 채 느꼈다."보아라." 팔목의 자국 하나를 엄지로 느리게 쓸며, 사내가 말했다. "본왕 것이라고, 적혀 있지 않느냐.""아요."물음의 꼴도 갖추지 않은 두 글자였다."······어릴 적, 저잣거리에서 불리던 이름이옵니다.""저잣거리."사내는 그 두 마디를 오래 물고 있었다. 규방 밖의 그녀. 저 사내가 알고 저는 모르는 세월. 가둘 수도, 물릴 수도, 벨 수도 없는 것이 세월이라는 것을, 그는 그 밤 처음 배웠다."본왕이 모르는 네가 있다는 것을, 오늘 알았다."등불 심지가 타닥, 소리를 냈다. 이불째, 여인을 끌어들였다."모르는 세월이 열 해면, 아는 세월은 남은 전부다." 낮은 목소리에 오만이 평평
저자 남쪽 골목에서 왕비의 가마가 멎었다는 기별에, 진묵은 군마를 그대로 돌렸다.산흙의 임자를 찾는 걸음이라 했다. 남쪽 상단의 전을 돌며 돌 틈의 검붉은 흙을 아는 자를 찾겠다고, 앵무와 기별 시종만 딸려 나간 길이었다. 봄 저자는 소란했다. 엿장수 가위 소리, 옹기전 흥정 소리. 위험할 것 없는 낮 저자였다. 마중이라는 핑계를 만든 것은 저 자신이었다.골목 어귀에서, 그는 보았다.기울어진 짐수레. 쏟아지는 옹기. 놀라 물러서다 발이 엉킨 여인. 그리고 어디선가 흘러들듯 나타나, 그 허리를 받아 세우는 흰 소매.세상의 소리가 한 겹 꺼졌다.흰 옷의 사내는 여인을 바로 세우고도 손을 거두는 것이 반 호흡 늦었다. 눈처럼 흰 도포에 먼지 한 점 없었고, 낯은— 신선도에서 오려 낸 듯했다. 그 낯이 여인을 내려다보며, 오래 아는 웃음을 웃었다."여전히 발밑을 안 보는구나, 아요."아요.진묵이 모르는 이름이었다.턱선이 먼저 굳었다. 어금니가 맞물리는 소리를 저 혼자 들었다. 고삐를 쥔 손등에 힘줄이 곤두서, 흑마가 영문도 모르고 투레질을 했다.여인의 낯이 한순간에 희어졌다. 판이 뒤집힌 자의 낯이었다. 혼례의 밤에도, 돌 궤짝 앞에서도 저러지는 않았다. 저 낯을 만든 것이 저 사내라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먼저 왔다.그는 말에서 내렸다. 언제 내렸는지도 몰랐다.골목의 공기가 얼었다. 옹기장수가 주섬주섬 깨진 것을 안고 물러났고, 앵무가 새파랗게 질려 치마를 잡았다. 흰 옷의 사내만이 얼지 않은 낯으로, 손을 여인에게서 천천히 거두며 예를 갖췄다. 갖춘 예에 흠이 없어서 더 눈에 거슬렸다."그 손이 아직 팔에 붙어 있는 것은." 낮은 목소리에 높낮이가 없었다. "본왕이 한 걸음 늦은 덕이다.""잡지 않았으면 넘어지셨을 것입니다."진묵은 답하지 않았다. 답 대신 여인의 손목을 당겨 제 품에 거칠게 들이고, 검은 융복 자락으로 통째로 가렸다. 골목의 어떤 눈에도— 흰 옷의 눈에도, 닿지 않도록.사내는 웃었다. 다투지 않는 웃음이었고, 물러
네 글씨를 저자가 처음 본 것이 아니라는 말이 아직 귓가에 남은 낮— 앵아가 운 것은 회랑 모퉁이, 해가 잘 드는 자리에서였다.우물가 물확에는 새벽 얼음이 아직 남아 있었고, 소쿠리 속 무명들은 언 채로 각이 서 있었다. 앵아는 그것을 안은 채 주저앉아, 소매로 눈가를 누르고 있었다. 죽은 어미의 기일이라 했다. 시비 둘이 곁에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우물가의 늙은 어멈은 혀를 찼다. 볕이 눈물 자국 위에 고왔다. 울음소리는 크지 않았다. 크지 않아서, 더 멀리까지 들렸다.진묵이 그 앞을 지난 것은 군무를 파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지나갔어야 할 걸음이, 멎었다."이름이 무엇이냐."회랑이 통째로 조용해졌다. 앵아가 젖은 낯을 들었다. 왕야가 시비의 이름을 물은 것은, 왕부 사람 누구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었다."앵, 앵아라 하옵니다."진묵은 잠깐 그 눈물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노강을 돌아보았다."무명을 주어라."그는 다시 걸었다. 닿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말 두 마디와, 무명 한 장. 그뿐인 것이 회랑을 지나 부엌을 지나 반나절 만에 왕부를 한 바퀴 돌았다. 왕야가 변하셨다더라. 눈물에 약해지셨다더라. 부엌에서는 저녁쌀을 씻다 말고 셋이 머리를 모았고, 마구간의 늙은 마부는 콧방귀를 뀌었다가 이튿날 제일 먼저 회랑 쪽을 기웃거렸다. 고참 시비 하나만 아득한 낯으로 젊은 것들의 술렁임을 듣고 있었다.온보요는 그 모든 것을 제 창에서 보았다.보였다. 앵아가 앉은 자리는 볕의 자리이기 전에, 안채 창이 한눈에 걸리는 자리였다. 눈물은 소매에 눌리면서도 낯을 가리지 않는 각도로 흘렀다. 그리고 그 사람의 걸음이 멎은 자리— 마당의 눈들이 가장 많이 모이고, 제 창에서 가장 잘 보이는, 정확히 그 자리였다.무대였다. 그것도 두 겹의 무대. 우는 쪽도 무대를 알았고, 멎어 준 쪽도 무대를 알았다. 극과 극이 서로를 관객 삼는 판을, 그녀는 바둑 두 수 앞처럼 훤히 읽었다.읽었는데.수틀 위에서 바늘이 두 번 헛디뎠다. 오후에는 갈 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