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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Author: 삼계절
이라는 전화를 끊었지만 지범에게 가서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하지만 혼사가 정리되지 않는 한 최씨 집안을 계속 상대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이라가 원하는 물건은 서건오의 손에 있었다.

그 물건은 오직 서건오만 갖고 있었다.

이라에게 먼저 파혼을 요구할 권리는 없었다.

하지만 최씨 집안 아들이 먼저 파혼을 입에 올리게 만들 수는 있었다.

체크인을 마친 이라는 캐리어를 끌고 객실로 올라갔다.

깨끗하고 텅 빈 방에는 낯선 냄새가 감돌았다.

그런데 그 안에 희미한 차가운 우드 향기가 섞여 있었다.

익숙하고, 마음을 조금 가라앉히는 향기였다.

이라는 코끝을 움직였다. 천천히 가느다란 손가락을 들어 코끝에 가져갔다.

손에는 은후의 몸에서 나온 향기가 남아 있었다.

은후의 차에 잠깐 탔을 뿐인데 몸에 향기가 묻었다.

이라는 은후의 몸에서 나온 향기에 유난히 민감했다.

사춘기 때 이미 깨달았다.

그때 아무것도 모르던 이라는 몰래 책을 찾아봤다.

책에는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감각이 커진다고 쓰여 있었다.

남들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그 사람에게서 맡는다고 했다.

사람들은 그걸 체취라고 불렀다.

확인하려 들었던 18살의 이라는 겁 없이 은후의 침대로 올라갔다.

그 향기에 거의 잠겨 죽을 뻔했다.

이라의 숨이 조금 무거워졌다.

그 2년 동안 몰래 맛본 금기의 뜨거운 장면들이 떠올라 뺨과 귓불이 달아올랐다.

이라는 서둘러 욕실로 들어가 찬물로 얼굴을 씻었다.

기억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때 초연의 전화가 걸려 왔다.

텅 빈 방의 정적이 깨졌다.

[이라야, 지금 어디야?]

목소리는 다급했다.

이라는 티슈로 얼굴의 물기를 닦았다.

“호텔. 왜 그래, 선배?”

[방금 세아픽처스 쪽에서 연락이 왔어. 계약을 갑자기 바꾸재. 박동혁이 우리 대본 단가를 깎겠대!]

초연은 분을 참지 못했다.

[오늘 투자 이야기가 잘 안 됐나 봐. TC캐피털 대표가 십 분밖에 안 보고 나갔대.]

이라는 얼굴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얼마나 깎았는데?”

[회당 900만 원에서 360만 원.]

반값도 아니었다. 뼈까지 깎아 먹겠다는 액수였다.

이라의 눈썹이 살짝 모였다.

“노망난 인간 같으니.”

초연의 말투에는 경멸이 가득했다.

[큰 회사 대본은 못 건드리니까 우리 같은 작은 회사만 누르는 거지. 진짜 못됐다.]

‘에코’는 생긴 지 얼마 안 됐지만 괜찮은 대본을 여러 개 만든 경험이 있었다.

작가 업계에서는 떠오르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국내 제작 환경에서는 아직 자리가 단단하지 않았다.

“신생 회사라 만만해 보이나 봐. 아무나 건드려도 되는 줄 아나 보지.”

이라는 하이힐을 벗고 맨발로 부드러운 카펫을 밟았다.

“시간 잡아서 직접 얘기해. 우리는 협력사야. 갑질까지 받아 주면서 굽실거릴 이유 없어.”

[알았어. 내가 시간 조율해서 미팅 잡아볼게.]

초연의 목소리가 조금 누그러졌다.

[근데 너 스카이클럽 갔다며. 뭐라도 봤어?]

“봤지.”

이라는 창가에 서서 불빛으로 가득한 밤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입가가 휘었다.

“뜻밖의 선물.”

[선물?]

초연은 이해하지 못했다.

‘약혼자 바람 현장을 잡은 게 선물이라니.’

이라의 낮은 웃음이 전화 속으로 흘렀다.

“내 심장을 뛰게 하는 선물.”

말하는 동안 머릿속에는 은후의 차갑고 먹음직스러울 만큼 아름다운 얼굴이 떠올랐다.

은후는 이라의 인생에서 언제나 가장 큰 선물이었다.

12년 전처럼.

...

12년 전, 남부시의 늦가을.

노란 은행잎이 굽어도는 시멘트 길을 덮고 있었다.

10살의 이라는 보육원 문 앞에 서서 누군가를 기다렸다.

전날 밤, 2년 동안 자신을 돌봐 준 외할머니는 눈물을 글썽이며 말했다.

“이라야, 할미가 못나서 그래. 할미가 널 더는 키울 수가 없다... 네 외삼촌네가 멀리 이사를 가는데 널 데리고 갈 수 없대...”

외할머니는 늙고 병치레가 많았다. 외삼촌 집에서 지냈지만 형편은 좋지 않았다.

이라는 짐 같은 존재였다. 이라 때문에 외할머니의 굽은 허리는 더 내려앉았다.

이라는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눈을 크게 떴고, 씩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은 알고 있었다.

2년 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이라는 갈 곳 없는 아이가 되었다.

“그래도 이라야, 걱정 마라. 할미가 너 고생하게 두진 않을 거야.”

외할머니의 나무껍질처럼 마른 손이 어린 얼굴을 쓰다듬었다.

“내일 보육원 문 앞에 데려다줄 테니 거기서 기다려. 누가 너를 데리러 올 거야.”

외할머니는 얼굴의 눈물을 닦고 몇 번이고 당부했다.

“그 사람 따라가. 집안 형편이 좋아서 너 하나쯤은 키울 수 있어.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는 돌봐 줄 거야. 그다음부터는 우리 이라가 자기 길을 걸어야 한다...”

“거기서 나가면 돌아오지 마.”

이라는 외할머니의 말을 마음에 새겼다.

...

다음 날 아침,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들고 보육원 문 앞에 얌전히 섰다.

바람이 몹시 거셌다.

외할머니가 정성껏 땋아 준 양 갈래머리도 바람에 흐트러졌다.

그 땋은 머리에는 외할머니 눈물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이라는 오래 기다렸다. 마침내 검은 차 한 대가 다가왔다.

그렇게 온몸이 검게 빛나는 차는 남부시 같은 작은 도시에서 보기 어려웠다.

차가 발치에 멈췄고, 문이 열렸다.

맑고 잘생긴 소년이 내렸다.

이라가 몰래 서민채의 만화책에서 보았던 남자 주인공보다 더 멋졌다.

소년은 키가 크고 길었다. 검은 바람막이를 입고 있었고 지퍼는 끝까지 올라가 있었다.

이라는 고개를 들었다.

시선은 바로 소년의 호박빛 눈동자에 닿았다.

가을바람이 지나가자 소년의 검은 머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깊은 눈썹뼈 위로 머리칼이 살짝 내려왔다.

소년은 두 손을 주머니에 넣고 있었다.

태도는 귀하고 여유로웠으며, 세상 모든 것 위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

소년은 양 갈래 머리를 땋은 한 어린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입술이 열렸다.

목소리는 맑고 차가웠다.

“강이라?”

이라는 그 눈빛에서 차가움과 얄팍한 무시를 보았다.

하지만 외할머니의 말을 기억했다. 데리러 오는 사람이 18살까지 자신을 키워 줄 거라고 했다.

이라는 어렵게 얻은 안정을 놓치고 싶지 않고, 얌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의 바르게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

고개를 들자 맑은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겁먹은 목소리로 불렀다.

“오빠...?”

눈앞의 소년이 갑자기 웃었다.

이어 손을 들어 머리 위에 얹고 몇 번 문질렀다.

원래도 흐트러진 땋은 머리가 더 엉망이 되어 털 선 강아지 같았다.

소년이 웃으며 말했다.

“내 항렬을 낮추려고?”

그 후에 이라는 알았다.

소년의 성은 ‘고’, 이름은 ‘은후’였다.

이라는 양녀의 신분으로 고씨 집안에 들어갔다.

그때 18살이었던 은후는 이라의 보호자가 되었다.

항렬상 이라는 은후를 삼촌이라고 불러야 했다.

12년 동안 이라는 자신의 머리 위에 닿았던 손의 온도를 기억했다.

그 손은 깨끗하고 길었으며 마디가 또렷했다.

도자기로 빚은 예술품 같았다.

그 손은 머리를 쓰다듬었고, 턱을 잡았고, 쇄골을 지나갔다.

고급 피아노곡을 연주하듯, 몸 곳곳을 스쳐 갔다.

그 손이 일으킨 불은 이라를 남김없이 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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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촌이라 부르지 마   제2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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