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 connecter서이현은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리는 것 같았다!
약을 먹었다고?!
젠장!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고, 묵직하고 차가운 먹빛 관복 겉옷을 재빨리 벗어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빈틈없이 감쌌다. 그러고는 번쩍 안아 들고 객방 밖으로 성큼성큼 달려 나갔다.
심희연은 이미 얼굴이 싸늘한 흑의 암위 둘을 거느리고 뒤쪽 회랑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서이현이 사람을 안고 나오자, 정교한 구리 열쇠 하나를 그의 허리띠 사이에 슬쩍 밀어 넣었다.
"위층 천자호 객실이다. 열쇠는 네가 가져라."
얼마 지나지 않아, 소완월이 몇몇 명문가 규수를 끌고 오만하게 몰려와 휴게 객방의 나무문을 확 밀어젖혔다.
그녀는 현장을 덮쳐서 윤서린의 명예를 완전히 짓밟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광경에 그녀는 혼비백산해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거금을 주고 매수한 그 건달이 홀딱 벗겨진 채, 지독히 굴욕적인 자세로 굵은 밧줄에 묶여 탁자 위에 널브러져 있었다.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등 뒤에서 한 줄기 온기 없는 차가운 남자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소 아가씨, 그 비열한 수작을 엉뚱한 곳에 쓰셨군."
심희연이 어느새 그녀의 뒤에 서 있었다. 죽은 사람을 보는 듯한 차가운 눈빛이었다.
"태세 머리 위에서 흙을 파고 호랑이 수염을 뽑으면, 생사로 값을 치러야 하는 법이지."
소완월은 다리가 풀리고 얼굴이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렸다. 서둘러 다가가 미색으로 구슬려 보려 했다.
"심 공자, 우리가 그래도 대대로 알고 지낸 사이인데, 오늘 밤은 아무것도 못 보신 걸로 해 주시면 안 될까요?"
"미안하지만."
심희연이 무심하게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번엔 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당신은 하늘을 찌르는 큰 사고를 쳤어."
그가 차갑게 고개를 돌려 분부했다.
"끌고 가라."
탑처럼 건장한 흑의 암위 둘이 즉시 성큼 다가와, 비명을 지르며 살려 달라 애원하는 소완월을 죽은 개 끌듯 억지로 끌어냈다.
……
위층, 천자호의 귀한 객실.
서이현이 힘없이 늘어진 윤서린을 푹신한 침상에 내려놓기가 무섭게, 그녀는 나무를 휘감는 흡혈 덩굴처럼 미친 듯이 달라붙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작은 손 하나가 그의 단단히 여민 매듭단추 관복을 마구 잡아 뜯었다. 뼈 없이 보드라운 다른 손은 속옷 안으로 파고들어, 바위처럼 단단한 복근을 이리저리 정신없이 더듬었다.
서이현의 관자놀이에서 핏줄이 불끈불끈 뛰었다. 이마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릴 만큼 참아야 했다.
그는 마지막 자제력을 쥐어짜 그녀의 소란스러운 손목을 붙들고 낮게 호통쳤다.
"윤서린! 눈 똑바로 뜨고 봐라. 내가 누구냐!"
벼락같은 이 한마디에 윤서린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흐릿하게 풀린 물빛 눈동자가 애써 초점을 맞추었고, 마침내 뼛속까지 새겨진, 사랑하면서도 미워하는 그 차가운 얼굴이 또렷해졌다.
그녀의 동공이 격하게 오그라들었다!
서이현이잖아!
하필 서이현이라니!
안 돼! 이 남자와는 다시는 어떤 애매한 얽힘도 만들면 안 돼!
윤서린은 달궈진 인두에 덴 사람처럼 놀라운 힘으로 그를 확 밀치고, 데굴데굴 기다시피 옆의 욕실로 뛰어 들어가 "쾅" 하고 빗장을 단단히 걸었다.
그녀는 차가운 수도꼭지를 확 틀었다. 뼈가 시릴 만큼 찬물이 정수리에서 쏟아져 온몸이 흠뻑 젖었고, 머리가 순간 몇 분은 맑아졌다.
그녀는 두 무릎을 끌어안고 찬 벽돌 바닥에 웅크린 채, 달아오른 몸 위로 쏟아지는 찬물을 그대로 맞았다.
하지만 몸속의 그 천박한 불길은 찬물로 도저히 꺼지지 않았다. 도리어 수천수만 마리 독벌레가 온몸의 뼈와 피를 갉아 먹는 듯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너무나 괴로웠다.
그녀는 고통스럽게 몸을 바싹 웅크렸다가, 끝내 버티지 못하고 무릎에 엎드려 무너지듯 소리 내어 울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방 밖에서 또렷한 노크 소리가 났다.
이어서 욕실 문의 빗장이 엄청난 힘에 강제로 튕겨 열리고, 서이현이 성큼 들어섰다.
찬물 아래 오들오들 떨며 흠뻑 젖은 채 울음을 삼키지 못하는 작은 사람을 본 순간, 가슴 깊은 곳이 이유 모르게 바늘에 찔린 듯 세게 저렸다.
그는 알아챘다.
그녀는 스스로를 괴롭히는 한이 있더라도, 그와 얽히는 것만은 한 치도 원하지 않고 있었다.
서이현은 무표정하게 다가가 수도꼭지를 잠갔다. 크고 두툼한 마른 비단 겉옷을 끌어와 그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단단히 싸매고, 허리를 숙여 가볍게 안아 올렸다.
그는 그녀를 바깥방 긴 의자에 내려놓았다.
윤서린은 남은 힘을 쥐어짜, 쉰 목소리로 힘없이 말했다. 눈 속에는 경계가 가득했다.
"서이현……나가……이 방에서 나가……지금 당장."
서이현은 위에서 초라하면서도 자존심만은 꺾지 않으려 버티는 여자를 내려다보았다. 입꼬리가 극도로 비꼬는 싸늘한 냉소로 올라갔다.
"윤 수행원, 지금 네 신분으로는 아직 본관의 침상에 오를 자격이 안 된다."
그는 소매에서 정교한 양지옥 약병 하나를 꺼내 탁자 위에 차갑게 던졌다.
"해독약이다."
방금 전 심희연이 소완월을 심문한 뒤 올려 보낸 것이었다. 그는 소완월 뒤의 음모까지 낱낱이 털어놓게 해 두었다.
윤서린은 쳐다보지도 않고 약병을 낚아채 마개를 뽑았다. 알약 두 알을 입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억지로 삼켰다.
서이현은 스스로를 학대하듯 구는 그 모습을 차갑게 지켜보며, 목소리에 아무 파동도 싣지 않았다.
"젖은 옷부터 갈아입어라."
"내일 관아와 상인회 일은 아주 중요하다. 본관은 네 병가를 허락할 생각이 없다."
말을 마치자 그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성큼성큼 나갔고, "딸깍" 하고 문이 묵직하게 닫혔다.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들으며, 윤서린은 줄곧 목구멍에 걸려 있던 마음을 마침내 내려놓았다.
그가 갔다.
그것이 가장 맑은 정신의 선택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골이 너무 많이 가로놓여 있어, 애초에 다시 얽힐 이유가 없었다.
설령……지난 삼 년간 그녀가 단 하루도 진짜로 그를 놓은 적이 없고, 그를 위해 이 작은 고을에서 묵묵히 꼬박 삼 년을 기다려 왔다 해도.
하지만 그녀는 과거를 마주할 수 없었다. 그가 한창 승승장구하며 떠난 뒤, 서이현의 어머니는 몰래 경성의 고관 가문들을 움직여 압박을 가했고, 그녀와 병든 아버지는 갈 곳 없는 처지로 내몰렸다. 백씨 가문의 그 거만하고 사나운 영애는 두 사람을 하마터면 막다른 길까지 몰아넣을 뻔했다.
당시의 진상을 완전히 밝혀내기 전까지, 그녀는 절대로 이 남자와 옛정을 다시 불태워서는 안 된다.
……
잠시 후, 문밖에서 가벼운 노크 소리가 났다.
그녀가 옷을 걸치고 문을 열자, 문밖에는 서이현의 곁을 가장 잘 지키는 암위가 서 있었다.
"윤 수행원, 서 사또께서 분부하셔서 마른 옷을 가져왔습니다. 갈아입으시면 소인이 명을 받들어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윤서린은 옷을 받아 빠르게 갈아입고 서둘러 주루를 나섰다.
귀가하는 마차 안에서 머릿속이 엉킨 실타래 같았다. 서이현이 제때 달려오지 않았다면, 오늘 밤의 결과는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그때 마차가 거리의 방문 게시판 앞을 지나가는데, 행인들의 열띤 수군거림이 귓가에 들려왔다.
"들었어? 연성 소씨 보석 누각의 소 아가씨가 악질 건달과 짜고, 조정 관원의 수행원에게 약을 타 모함하려다가 관아에 의해 밤새 옥에 갇혔대!"
"그뿐만이 아니야! 소가가 운영하는 큰 보석 누각 몇 곳에서 독이 든 저질 광석이 섞인 게 밝혀져서, 관아가 전부 봉쇄하고 몰수했다는데!"
방문 하나하나가 단호하게 살벌했고, 일 처리 속도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윤서린은 가슴이 철렁했다. 설마 서이현의 솜씨인가?
그녀를 위해 복수해 준 걸까?
하지만 곧 이런 추측이 터무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버린 전처일 뿐이다. 지금 한 고을을 지키는 높디높은 칠품 현령 자리의 그가, 어찌 아직 그녀를 눈에 두겠는가.
그러니까……오늘 밤 그가 그녀에게 던져 준 건 그저 해독약 하나일 뿐이다.
이튿날 진시 초, 윤서린은 검고 무거운 다크서클을 단 채 상인회 사무처로 돌아왔다.
그런데 뒤뜰에 들어서자마자, 사무처 전체가 눈부신 꽃바다로 변해 있었다!
값비싸고 희귀한 갖가지 꽃 수십 다발이 회랑 양옆에서 곱게 피어 있었고, 달콤하고 매혹적인 꽃향기가 공기 속에 가득했다.
그리고 윤서린의 책상 한가운데에는 아주 귀하고 값비싼 서역 명화 '줄리엣' 한 다발이 놓여 있었다.
이 꽃 한 다발의 값은 그녀 비단 가게 몇 달 치 매출과 맞먹을 것이다. 그녀는 한눈에 누구의 솜씨인지 알아보았다.
일 년 넘게 그녀를 쫓아다닌 상인 집 도령 상욱이 또 온 것이다.
친구 이수연이 다가와 어깨로 그녀를 툭 쳤다.
"이 부잣집 도련님, 거의 일 년 쫓아다녔지? 그렇게 정성을 쏟는데 정말 조금도 마음이 안 움직여?"
윤서린은 잠시 말이 없다가, 대화를 받아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음……고려 중이야."
서이현이 이제 돌아온 이상, 그 오만한 남자에게 삼 년 동안 어떤 새 인연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마음속에서 그를 놓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걸 절대 들켜서는 안 된다.
만약 들키면, 그 나쁜 관리 놈 꼬리가 하늘까지 치솟을 테니까!
이수연은 속이 쓰린 얼굴이었다.
"다음엔 그냥 현금으로 보내라고 해! 이게 다 새하얀 은자인데, 이틀이면 시들잖아."
"너희가 가져가서 알아서 처리해."
윤서린은 담담하게 손을 내저었다. 꽃다발 속에 끼워진 고백 쪽지는 쳐다볼 마음도 없었다.
이 상욱이라는 사람은 그녀가 일 년 전 옛 상인회 회장을 따라 접대 자리에 나갔다가 알게 된 사이였다. 그 뒤로 그는 엿가락처럼 그녀에게 들러붙어, 사흘이 멀다 하고 귀한 물건을 보내며 그녀를 반드시 정복하고 말 상대로 여겼다.
이수연이 꽃다발 옆의 정교한 비단 상자를 집어 열어 보니, 눈부신 별하늘 다이아몬드 팔찌가 들어 있었다.
이수연이 비명을 질렀다.
"이것도 처리하라고? 이거 금해각 신상 '별마음 인연' 팔찌잖아. 몇백 냥은 할걸!"
그때 문밖에서 묵직하고 차가운 발소리가 들려왔다.
서이현이 성큼 들어섰다. 뒤에는 기품 있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아름다운 여인 하나가 따르고 있었는데, 몸짓 하나하나에서 명문가 여걸의 존귀한 기세가 배어 나왔다.
윤서린은 가슴이 철렁해 재빨리 일어나 다방으로 숨어들었다. 이수연도 날쌔게 따라 들어와 비밀스럽게 귓가에 속삭였다.
"저 절색의 미인……혹시 우리 서 사또의 미래 현령 부인 아니야?"
"누가 알겠어."
윤서린은 무표정했다.
경성에는 제국공 댁 영애가 있었는데, 강남에 와서는 또 높은 가문의 미인이 나타났다. 뒤에 줄 선 여자가 몇이나 더 될지 모를 일이다. 역시 남자는 권세와 재물이 생기면 변한다.
잠시 후, 윤서린은 우려낸 향기로운 차 두 잔을 들고 서재 문을 두드리고 들어갔다.
서이현과 그 아름다운 여인은 자단목 긴 의자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는 다리를 꼬고 느긋하게, 타고난 존귀함이 묻어나는 자세였다.
"서 사또 수하의 수행원들은 하나같이 미색이 뛰어나서 인기가 대단하네요. 서 사또가 손을 쓰자마자 상인회 건물 전체를 통째로 차지하신 것도 무리가 아니겠어요."
여인이 웃으며 말했다. 방금 바깥에 산처럼 쌓인 꽃다발과 반짝이는 팔찌도 분명 보았을 것이다.
"경성에서 일부러 쫓아와 본관을 비웃으려는 건가?"
서이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허물없이 놀리는 말투였다.
"본관은 네가 좀 더 늦게 올 줄 알았는데."
"당신이 강남의 온유향에 혼을 빼앗길까 봐서요. 당연히 바짝 쫓아와야죠."
여인이 방긋 웃었다.
"서 사또, 차 올립니다."
윤서린은 미소를 지으며 다가가, 허리를 숙여 두 사람 앞에 뜨거운 차를 한 잔씩 놓았다.
여인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 윤서린이죠?"
윤서린은 흠칫하고 서둘러 예를 갖췄다.
"예, 낭자. 소녀가 맞습니다."
여인이 환하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
"저는 남성이에요. 만나서 반가워요."
이게 무슨 상황이지? 현재와 과거의 정면 회담인가?
"안녕하세요, 남 낭자. 소녀는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윤서린은 예의 바른 직업적 미소를 쥐어짜 내고, 쓸쓸히 몸을 돌려 물러났다.
서재 안에서 남성은 시선을 거두고 차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이번엔……이 강남 소읍에 오래 머무를 생각이야? 경성에는 안 돌아가고?"
"안 간다."
서이현의 차가운 얼굴이 풀리고, 눈빛이 깊어졌다.
그가 이번에 경성의 번화함을 내려놓고 스스로 좌천을 청해 내려온 것은, 오로지 그녀를 위해서였다!
그는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다음 순간 그 느끼하고 끈적한 단맛에 하마터면 숨이 넘어갈 뻔했다…….
이 계집애, 분명 일부러 찻잔에 설탕 반 숟갈을 넣었다!
"참, 명목상의 서제라는 자도 몰래 강남에 숨어든 것 같아. 요즘 관외에서 움직임이 잦은데, 뭔가 큰일을 꾸미는 모양이야."
남성이 웃음을 거두고 일깨웠다.
"그놈은 큰 풍파를 못 일으켜. 서가와 작위는 영원히 그 잡종 손에 들어갈 수 없다."
서이현의 표정은 느긋하고 침착했다. 눈에 경멸이 스쳤다.
세상 사람들은 그가 전공을 세운 밑바닥 군졸 출신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서이현이 사실 경성 최상위 세가인 서국공 댁의 정통 유일 후계자라는 걸 아는 이는 드물었다.
윤서린조차 당시에는 그의 진짜 가문을 알지 못했다.
그가 여섯 살 때, 아버지가 사생아를 데려오자 어머니는 홧김에 그를 데리고 강남의 작은 고을로 떠났다. 그는 바로 이 물의 고장에서 자라, 윤서린과 서로 알게 되고, 마음을 나누고, 사랑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자기 두 손으로 그녀를 위해 밝은 미래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학업을 마치자마자 망설임 없이 장사와 공명의 길에 뛰어들었다.
그런데 공명을 이루기도 전에, 그녀는 일방적으로 그를 버리고 자기 세계에서 완전히 내쫓았다.
그녀는 지금……조금이라도 후회한 적이 있을까?
반 시진 뒤, 남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작별을 고했다.
서이현은 직접 그녀를 상인회 대문 밖까지 배웅했다. 돌아오는 길에 그가 차갑게 불렀다.
"윤 수행원."
윤서린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고 서재로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먼저 은자 팔만 냥짜리 보석 목걸이를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서 사또, 어제 빌려 주신 목걸이입니다. 살펴보세요. 흠집 하나 없습니다."
"음."
그는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눈꺼풀 한 번 들어 올리기도 귀찮다는 듯했다.
윤서린은 한숨 돌리고, 오늘 관아와 상인회의 일정을 차근차근 보고하기 시작했다.
보고가 끝나자, 서이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일곱 시와 아홉 시의 공무 면담은 전부 취소하고, 바다 순시 일정을 잡아라."
"알겠습니다. 사또께서 어느 상인회 관리를 동행시키길 원하십니까?"
윤서린은 진지하게 메모를 하며 물었다.
"오늘 밤은 네가 본관과 간다."
서이현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
"서 사또, 사또 휘하에는 관졸이 줄줄이……."
"본관 이마에 '나는 현령이다' 네 글자를 새겨 넣어야, 네가 본관의 지시를 의심하지 않겠느냐?"
그가 눈을 들어 그녀를 노려보며 차갑게 꾸짖었다.
“……알겠습니다.”
윤서린은 억지로 삼켰다. 잠시 멈췄다가 다시 말했다.
"소녀에게 작은 청이 있습니다."
"말해라."
"오늘 오후에 한 시진만 휴가를 내고 싶습니다. 저녁에는 반드시 제시간에 사또를 모시고 바다 접대에 가겠습니다."
"허락한다."
서이현이 흔쾌히 승낙했다.
이 계집애, 분명 또 맞선 보러 가는 거겠지!
지난번엔 미루더니, 이번엔 앞당긴 건가?
흥!
기회를 봐서 호되게 손봐 줘야 정신을 차리겠군!
"소녀 물러가겠습니다."
오후 신시 초, 윤서린은 일찍 상인회를 나섰다.
그녀는 마구간에 매어 둔, 빨갛고 싱싱한 딸기 스티커를 잔뜩 붙인 작고 앙증맞은 쌍륜 경마차의 고삐를 풀고, 익숙한 길로 곧장 마을 사립 서당으로 향했다.
이 경마차는 일 년 전 서우를 데리고 장터에 갔다가 경품 추첨에서 당첨된 것이었다. 운이 하늘을 찔렀다. 훗날 그녀는 일부러 마차 면허까지 따고, 아이가 딸기를 좋아해서 마차 전체를 빨갛게 붙여 놓았다. 영락없이 커다란 딸기 한 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뒤에서, 화려하기 그지없는 사두 대교 하나가 조용히 그녀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을.
마차를 모는 늙은 포졸이 앞에서 흔들흔들 아주 느리게 가는 작은 마차를 보았다. 이따금 급정거까지 해서 가슴이 철렁해진 그는 참다못해 투덜댔다.
"윤 수행원 마차 솜씨는 정말 걱정스럽네요. 지금은 저렇게 큰 비단 가게도 하시면서, 왜 하필 저렇게 낡고 허름한 작은 마차를 고르셨을까요? 관도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뒤집힐 텐데."
"뭐라고? 그 마차가 안전하지 않다고?"
서이현의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또, 민간 경품으로 받은 작은 마차가 튼튼해 봐야 얼마나 튼튼하겠습니까? 기껏해야 십여 냥짜리고, 평소엔 보통 부잣집에서 아이 데려다주거나 장 볼 때 쓰는 거지요."
서이현의 안색이 몹시 나빠졌다. 이혼할 때 그는 전 재산을 그녀에게 남겨 주었다. 그런데 그녀는 대체 어떻게 살림을 꾸렸기에 이렇게 궁색해졌단 말인가?
이층 지붕 대교는 마차를 줄곧 뒤따라가다가 사립 서당 문밖에 멈춰 섰다.
서이현은 휘장을 걷고 그 광경을 보다가 동공이 확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서당에는 무슨 일로 온 걸까?
가슴이 이유 없이 미친 듯 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윤서린이 서당 문 앞에서 온화한 얼굴로 분홍빛 옥 같은 사내아이를 번쩍 안아 올렸다. 토실토실한 볼에 쪽쪽 입을 맞추는 모습이 더없이 다정했다.
저 아이는……그의 아이인가?!
서이현은 감격에 온몸이 떨려, 숨결조차 완전히 평정을 잃었다.
"아빠! 멋진 아빠!"
품 안의 사내아이가 갑자기 그를 가리키며 말랑말랑한 목소리로 큰 소리로 두 번 불렀다.
윤서린은 반사적으로 홱 돌아보았다. 서이현이 어느새 자기 뒤에 서 있었다!
머릿속에서 "쾅" 하고 굉음이 울리며 새하얘졌다.
이 사람이 어떻게 여기까지 미행해 온 거지?!
서이현은 그녀의 품 안, 자신과 눈매가 꼭 닮은 사내아이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목소리가 떨려 나왔다.
"윤서린! 네가 나 몰래…… 내 아이를 낳았다고?!"
한편, 서이현은 답신을 듣자마자 잘생긴 얼굴이 물이라도 뚝뚝 떨어질 듯 어두워졌다.그는 서신을 움켜쥐었다. 손마디가 하얘졌다. 잠시 뒤, 마부에게 차갑게 분부했다."황조루로 가라."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곧 황조루 앞에 멈췄다.서이현은 곧장 위층으로 올라가 호화롭게 꾸민 별실의 문을 밀었다.그 안에서는 심희연, 고신, 남성 세 사람이 요염한 여인 하나와 탁자에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주령을 하며 한창 흥겨운 참이었다."넌 먼저 나가 있어."심희연이 그 여인에게 눈짓을 보냈다.
이 질문은 아무 예고도 없이 날아왔다.윤서린은 멍해졌다가 곧 웃음을 터뜨렸다."강 총관은 연봉이 천 냥인 데다 인물도 훤칠한데, 어떤 여자가 안 좋아하겠어요?"농담처럼 들렸지만, 도발의 기색은 분명했다.서이현의 눈빛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본관이 꼼꼼히 비교해 봤다."그가 몹시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그자는 본관보다 키도 작고, 인물도 못하고, 권세는 더더욱 못하다."윤서린: “……”이 사람은 대체 어디서 이런 자신감이 나오는 걸까?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한마디를 덧붙였다.물론 당신처럼 억지를 부리지도 않고요.얼굴에는 오히려 더 환한 웃음을 지었다."그야 당연하지요. 서 사또는 지금 강남에서 권세가 으뜸인 명문 귀공자시니, 강 총관이 어찌 감히 견줄 수 있겠어요."더없이 가식적인 아첨이었다.서이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윤 수행원, 눈을 본관 쪽으로 돌려 보는 게 어떠냐."윤서린은 멈칫하더니 이내 실소했다."사또도 참, 소녀가 어찌 감히요.""해 보지도 않고 감히 못 하는지 어찌 아느냐?"서이현이 몸을 일으켜 한
서 사또가 왜 또 내려왔지?설마 천하의 관리란 관리는 다들 남의 이야기를 엿듣는 게 취미인가?"예, 서 사또!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소소가가 황급히 대답하고는 몸을 돌려 다방으로 달려갔다.서이현이 의미심장하게 윤서린을 훑어보았다.윤서린은 영문도 모른 채 마주 노려보았다.뭘 봐?또 시비 걸 거리를 찾는 거야?"본관이 듣기로, 이달 말에 상인회가 나들이를 간다던데?"서이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예, 서 사또."윤서린이 사실대로 대답했다."본관도 간다."세 시녀는 그 자리에서 멍해졌다.현령 나리가 직접 상인회 나들이에 간다고?그러면 누가 마음 편히 놀 수 있겠는가. 다들 메추라기처럼 잔뜩 움츠러들 텐데.서이현은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본관의 명을 전해라. 급한 공무가 없는 한, 누구도 휴가를 낼 수 없다."말을 마친 그의 입꼬리에 의미를 알 수 없는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그는 걸음을 옮겨 위층으로 올라갔다.얼마 뒤, 소소가가 우려낸 차를 들고 서재에 들어갔다.서이현은 찻잔을 받아 들고도 곧바로 마시지 않았다.
"그러니까요!"이수연의 두 눈이 반짝였다."근데 우리 상인회 제일가는 미남 자리도 주인이 바뀌었어. 다들 입을 모아 서 사또를 뽑았거든. 강 총관은 이제 어쩔 수 없이 이등으로 밀려났지."강사는 한때 상인회에서 이름난 고고한 꽃이었고, 지금은 상인회 제이사를 맡아 연봉이 천 냥에 이르렀다. 수많은 여자 관졸들이 몰래 흠모하는 상대였다.외모가 수려하고 일 처리도 수완이 좋았다.그가 눈여겨본 계약은 성사시키지 못한 적이 없다는 소문이 돌았다."점심엔 우리 식당 위층에 가서 먹자. 우리 강 총관이 요즘 더 잘생겨졌는지 구경도 하고."이수연이 기대에 부푼 얼굴로 말했다.상인회 식당은 삼 층으로 나뉘어 있었다.일 층은 관원과 각 부서 책임자가 쓰고, 이 층은 일반 관리, 삼 층은 평범한 일꾼들이 식사했다.근접 수행원인 그녀들은 원래 일 층에 갈 수 있었지만, 평소에는 마음 편한 이 층에 머무르는 걸 더 좋아했다."나도 찬성."진열도 옆에서 웃으며 맞장구쳤다."밥은 못 먹어도 멀리서 두어 번 보면 눈요기는 되니까."여기까지 말하던 이수연
이튿날.현아 뒤뜰, 서재 안.서이현은 조각이 새겨진 큰 의자에 꼿꼿이 앉아, 잘생긴 얼굴을 굳힌 채 온몸에서 소름 끼치는 한기를 뿜고 있었다.곁에서 시중을 들던 관졸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자칫 사또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그 자신도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툭하면 말대꾸를 하던 그 작은 독초가 오늘은 출근하지 않았다. 서재가 고요해지자 오히려 온몸이 불편했다.뭔가가 빠진 것 같았다.그 여자가 어젯밤 그렇게 취했는데, 오늘 아침에는 좀 깨어났는지도 모르겠다.시중드는 몸종 소소가가 문서 책자를 받쳐 들고 조마조마하게 오늘 상인회 일정을 보고했다."진시 말, 과영 상단의 성 행수가 수로 계약 건으로 찾아오십니다…….""오시 이각, 상인회 쪽은……."그녀가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서이현이 불쑥 눈을 들어 차갑게 말을 끊었다."며칠 전 상인회 사무처 회랑에 놓여 있던 그 값비싼 꽃들은 누가 보낸 것이냐?"소소가는 멈칫했다.사또가 갑자기 그걸 물어볼 줄은 몰랐기에 서둘러 대답했다."그건 윤 수행원을 쫓아다니는 상욱 도련님이 보내신 겁니다."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소인의 정인이
동부 명원.하주는 마차를 세우자마자 서둘러 저택의 여집사를 불렀다. 두 사람은 힘을 있는 대로 써서 만취해 곤죽이 된 윤서린을 겨우 집 안으로 부축해 들였다.어렵사리 객방 푹신한 침상에 눕히고 나니, 하주는 허리를 짚고 지칠 대로 지쳐 길게 숨을 내쉬었다.침상 위의 사람이 불쑥 몸을 뒤척였다. 두 눈을 꼭 감은 채, 울먹이는 목소리로 욕을 했다."서이현……. 이 나쁜 놈…….""나는……우리 서우를……당신한테 안 줄 거야…….""그때……왜 나를 배신했어……."하주는 곁에 서서 한숨만 나왔다.취한 윤서린은 그야말로 닫히지 않는 취중 진담 기계였다. 아까 죽을힘을 다해 막지 않았다면, 서이현이 이 사람을 데려갔을 것이다.그랬다면 결과는 생각하기도 싫었다.그녀는 서둘러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서 따뜻한 꿀물 한 사발을 떠 왔다.그런데 사발을 들고 돌아와 보니, 침상 위의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하주는 가슴이 철렁해 병풍 뒤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