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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화 - 먼저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4-07 16:19:52

지금 자기 지친 틈을, 오늘 하루 동안 누구보다 먼저 읽은 건 재하였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더 짜증이 났다. 알아차려도 모른 척하면 되는데, 저 인간은 꼭 필요한 만큼만 다가왔다. 지안은 모니터를 다시 봤다. 방금 받은 러프 위에 카피를 얹어야 했다. 일단 일부터 붙잡으면 나머지는 나중으로 미룰 수 있었다.

"이쪽 여백 조금만 더 줄여도 되겠네요."

재하가 건너편에서 말했다.

"그러면 카피 숨 막혀요."

"대신 첫 줄이 더 세게 들어오죠."

"지금 이 문장은 세게 들어오는 게 문제가 아니라 말이 많아요."

재하는 거기서 바로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기 노트북 화면을 몇 번 넘기더니 다른 버전을 띄워 보였다.

"그럼 문장을 줄이는 쪽으로 가죠."

딱 그 한마디였다. 이상하게, 태준이랑 부딪힐 때보다 재하랑 이렇게 붙을 때가 더 빨랐다. 말 몇 개 안 해도 어디가 막혔는지 서로 먼저 짚는 식이라서. 그게 편해야 맞는데, 지안은 그 편함이 늘 마음에 안 들었다.

밤 열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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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안은 결국 뒤돌아보지 않았다.가방을 들고 먼저 나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방금 본 화면 일부가 자꾸 눈앞에 남았다.공모전 규정. 이의 제기. 첨부 서류. 재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이제 대충 알았다. 정작 걸리는 건 그걸 알면서도 붙잡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집에 돌아오자마자 외장하드를 꺼냈다. 서연 말대로 감정이랑 자료는 따로 놔야 했다. 노트북을 켜고 폴더부터 다시 정리했다.`2018_adfest_final``PT_last_real``mail_capture`파일명은 여전히 촌스럽고 급했다. 그때는 그게 전부다. 졸업 직전이었고, 취업이 급했고, 싸울 기력도 없었다.그런데 지금은 다르게 봐야 했다. 누가 더 상처받았는지가 아니라, 누가 만들었고 누가 가져갔는지로.지안은 숨을 한번 고르고 문서들을 날짜순으로 다시 묶었다. 메일 발신 시점, 발표본 수정 날짜, 저장본 버전.손은 차분하게 움직였는데, 머리는 계속 다른 쪽으로 흘렀다.재하가 지금 뭘 하고 있을지. 그 사람이 가진 건 자기보다 훨씬 많을 텐데, 그걸 진짜 꺼낼 생각인지.문득 짜증이 올라왔다.이제 와서.그 말이 목 안에서 한번 걸렸다가 내려갔다. 늦었다는 생각과, 그래도 해야 하는 건 해야 한다는 생각이 같이 올라오는 게 피곤했다.노트북을 덮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보기로 했다. 이대로 더 했다간 감정만 터져 나올 것 같아서.휴대폰이 몇 번 울렸지만 확인 안 했다. 재하 쪽에서 온 건 아니었다.서연이 보낸 링크 두 개와, 소율이 올린 단체방 공지, 팀장 수정안 확인 메시지. 평소 같으면 바로 답했을 텐데 오늘은 다 조금씩 늦었다. 손이 느린 게 아니라, 마음이 자꾸 다른 쪽으로 가서.지안은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참 외장하드만 쥐고 있었다. 재하가 진짜 움직이면 어쩌지, 라는 생각과 이제 와서 움직이면 뭐가 달라지지, 라는 생각이 번갈아 올라왔다. 둘 다 싫었지만, 또 무시할 순 없다.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아직 이름은 못 붙이겠지만 화만으로는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79화 - 결심

    "이정환 쪽, 먼저 움직인 거 같아."서연 말이 끝나자마자 지안은 모니터를 더 가까이 봤다.포트폴리오 비공개 화면.업계 단톡 캡처.발표 자료 출처 질문.전부 따로 놓고 보면 애매했다."어디까지 돈 거야?"지안이 작게 물었다."확실하게 돈 건 아직 아니야."서연이 화면을 한 번 더 넘겼다."근데 냄새가 나. 갑자기 포폴 닫은 거랑, 출처 질문 씹는 거랑, 타이밍이 너무 겹쳐.""누가 먼저 물었는진 몰라?""닉네임이라 정확힌 모르지."서연은 입술을 한번 씹었다."근데 업계 좁잖아. 발표 자료 구조 이상하다고 보는 사람 몇 생기면 금방 타."지안은 대답 대신 의자에 등을 붙였다. 등받이가 생각보다 차가웠다."오지안.""응.""지금부터는 빨라야 돼."서연은 평소처럼 세게 말하는 대신 필요한 말만 골랐다."네가 가진 거 정리하고, 걔가 가진 거랑 따로 생각하지 말고, 회사 안에서 어디까지 얘기할 건지도 정해야 해."지안은 그 말이 싫지 않았다. 위로보다 할 일 목록이 더 도움이 되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회사까지 가면?"말이 거기서 한번 멈췄다."나도 설명해야겠지."서연이 바로 받았다."할 수도 있지.""왜 그때 대응 안 했냐는 말도 들을 거고.""그건 들을 수 있어."서연은 인정부터 했다."근데 그게 네 잘못이라는 뜻은 아니야."지안은 손가락으로 책상 모서리를 한번 눌렀다. 그 말은 알겠는데, 현실은 늘 그렇지 않다.회사는 피해자한테도 왜 그때 말 안 했냐고 묻고, 업계는 진실보다 타이밍을 먼저 따지니까."일단."지안이 숨을 한번 정리했다."내 자료부터 다시 묶어볼게.""오늘?""오늘 안 하면 잠도 못 자."서연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난 저쪽 라인 더 볼게. 이정환이 요즘 어디서 발표했는지, 포폴 내린 거 단순 서버 이슈인지 아닌지.""박서연.""왜.""고맙다."서연이 웃음을 새어냈다."그 말 나중에 더 비싼 걸로 갚아."그냥 농담인데, 그걸 듣고 나서야 지안은 겨우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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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로 돌아오는 길 내내 지안은 그 문장을 머릿속에서 한 번 더 굴렸다.더 요구받지 않는다는 것. 요즘은 그게 다정함보다 더 편했다.걸리는 건 그런 사람 앞에서도 미안해진다는 거였다.사무실에 들어서자 태준은 이미 자기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방금 같이 카페에 다녀온 사람 같지 않게, 모니터를 보고 있었고, 옆엔 정리된 회의 자료가 놓여 있었다. 지안이 들어오는 소리를 듣고도 특별히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게 의도적인 배려라는 걸 알아서 더 신경 쓰였다.잠시 뒤 태준이 먼저 말을 꺼냈다."오대리."지안이 고개를 들었다."네.""아까 말씀드린 건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목소리는 차분했고, 톤은 깔끔했다. 더는 개인적인 여지를 남기지 않는 쪽."네.""자료는 제가 회의실 쪽에 먼저 올려둘게요.""감사합니다."그걸로 끝이었다.다음 날 아침 회의에서도 태준은 완전히 원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오대리, 어제 정리한 방향대로 가면 될 것 같습니다.""네.""윤재하 씨는 비주얼만 한 번 더 정리 부탁드릴게요.""네."딱 그 정도. 더도 덜도 없었다. 지안은 자료를 넘기면서도 왠지 그게 더 선명하게 보였다.태준은 이제 둘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 거라는 것. 좋아하는 감정이 있었어도, 그걸 상대가 감당할 수 없는 상태면 물러나는 사람이 있다는 것.자꾸 비교되는 게 짜증났다. 굳이 비교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비교되는 쪽이 있었다.회의가 끝나고 나올 때 태준이 복도에서 잠깐 속도를 맞췄다."오대리.""네.""어제는 제가 선 넘지 않았나 싶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안 넘으셨어요."지안은 바로 대답했다."오히려 제가.""아닙니다."태준이 부드럽게 잘랐다."지금은 오대리 편한 게 제일 중요하죠."그 말은 호의였는데, 더는 답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래서 지안도 이번엔 숨지 않고 말했다."고마워요."태준은 아주 짧게 웃었다."그럼 됐습니다."그리고 거기서 멈췄다. 다시 같이 걸으려 하지도 않았고, 쓸데없이 점심 약속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77화 - 식사

    그게 왠지 좋았다.반 걸음 앞에서 먼저 걸어 주는 사람.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리. 지안은 그 짧은 안도감이 생각보다 오래 남는 게 더 낯설었다.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진 사람은, 누가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더 어색해졌다.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서연은 바로 원래 얼굴로 돌아갔다."오지안, 저녁에 자료 정리할 거면 나도 봐줄게.""너 할 일 있잖아.""있지."서연이 모니터를 켜며 말했다."그래도 너 혼자 막 뒤지다 이상한 타이밍에 돌진할까 봐 하는 말이야."지안은 피식 웃었다."나 그렇게 충동적이진 않거든.""연애만 아니면."그 말이 묘하게 정확해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오후엔 일이 평범했다. 평범해서 다행이었다.메일 답장하고, 클라이언트 수정본 확인하고. 누구 하나 큰소리 안 냈고, 팀장도 드물게 조용했다. 그 평온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보통 그런 날은 다른 쪽에서 틀어진다."오대리."지안이 고개를 들자 태준이 자리 옆에 서 있었다. 손엔 태블릿 하나, 얼굴은 평소처럼 차분했다."네.""잠깐 시간 괜찮으세요?"그 말에 지안은 반사적으로 맞은편을 안 보려고 했다. 굳이 안 봐도 알았다. 저쪽 자리 공기가 아주 조금 달라졌을 거라는 걸."지금요?""급한 얘긴 아닌데."그제야 시계를 봤다. 오후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커피 한 잔 마시기엔 애매한 시간.태준은 말을 부드럽게 했지만, 그 부드러움이 지금은 더 부담이었다. 지안은 저도 모르게 모니터 화면만 한번 눌렀다."자료 확인할 것도 있고.""그럼 커피만 잠깐이라도."거절할 수는 있었다. 원래라면 바로 그렇게 했을 거다. 그런데 오늘은 그게 어려웠다.태준은 아무 잘못도 안 했고, 이건 호감 이전에 배려에 가까운 제안이었다. 좋은 사람의 좋은 제안을, 지금 자기 기분이 엉망이라는 이유로 잘라내는 게 더 못됐다."십 분만요."결국 그렇게 말했다.회사 근처 카페는 너무 밝았다. 오후 해가 통유리로 그대로 들어와서, 사람들 얼굴이 전부 너무 멀쩡해 보였다. 태준은 창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76화 - 편

    복도 공기는 사무실보다 서늘했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아직도 예민했다. 소매 끝이 스친 것뿐인데, 몸이 기억하는 게 제일 기분 나빴다.문이 열리자 지안은 거의 도망치듯 탔다.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진 않았다. 혼자 내려가고 싶었고, 적어도 오늘만큼은 같은 엘리베이터 안 공기까지 버틸 자신이 없었다.집에 가서는 더 엉망이었다. 씻고 누웠는데도 잠이 안 왔다.눈만 감으면 비상계단, 탕비실, 늦은 사무실 형광등, 태블릿 모서리에 닿을락 말락하던 손끝 같은 것들이 엉뚱하게 돌아왔다. 끝냈다고 말해 놓고 이런 걸 계속 떠올리는 자기 쪽이 한심했다.다음 날 아침, 서연은 지안이 자리 앉기도 전에 컵부터 밀었다."마셔.""뭔데?""커피.""그건 보이거든.""그럼 그냥 마셔."서연은 의자에 반쯤 기대 앉아 지안을 봤다."어제 몇 시에 들어갔어?""기억 안 나.""에휴.. 얼마나 늦은거야?"지안은 대꾸 대신 컵을 들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가 입안을 한번 데우고 지나갔다. 잠이 깬다기보다, 그냥 지금이 아침이라는 사실만 확인해 주는 맛이었다."오지안.""왜.""오늘 점심 비워.""왜.""밥 먹자고.""바빠.""괜찮은 사람 얼굴이 아니니까 그러지."그 말에 지안은 컵을 내려놨다. 서연은 어제처럼 돌려 말하지 않았다. 대신 예전처럼도 안 굴었다. 농담 섞어 찌르지 않고, 그냥 필요한 말만 하는 쪽이었다."나 괜찮아.""그래."서연이 바로 끄덕였다."근데 나는 안 괜찮아."지안이 눈을 들었다."네가 멀쩡한 척하는 거 보는 거 이제 짜증나."그쯤에서 맞은편 의자가 조용히 끌렸다. 재하였다. 지안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재하가 지금 이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윤재하 씨."지안은 모니터를 켠 채 말했다."오늘 클라이언트 피드백 오면 바로 공유 부탁드려요.""네."짧은 대답이었다. 더도 덜도 없는 톤. 회사에서만 쓰는 목소리. 딱 일 얘기만 하기로 한 약속을 제일 잘 지키는 사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75화 - 거리두기

    "지금 네 얼굴은 정상이 아니야."목소리는 작았는데, 작아서 더 바로 꽂혔다.지안은 탕비실 선반 끝을 잠깐 봤다. 종이컵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커피캡슐 통은 절반쯤 비어 있었고, 다 평소 같았다. 평소가 아닌 건 자기 얼굴 하나뿐이라는 말이 딱 맞아서 더 짜증났다."나도 알아.""알면 집에 가.""지금 수정안 남았잖아.""일 핑계 대지 마."서연이 바로 잘랐다."네가 원래 일에 집중하는 얼굴이랑 억지로 버티는 걸 구분 못 할 줄 알아?"지안은 대꾸를 못 했다. 피곤해서가 아니라, 맞는 말을 들으면 보통 더 말이 없어졌다."걔랑 무슨 일 있었는지 지금 말하라는 거 아냐."서연이 한 걸음 가까이 왔다."근데 적어도 오늘은 혼자 버티는 척 좀 그만해."지안은 한숨을 삼켰다."그럴 여유가 없어.""오지안.""진짜로."지안이 먼저 시선을 들었다."지금은 일해야 돼."서연은 그 얼굴을 몇 초 보다가, 결국 더 말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그럼 끝나고라도 말해.""응."응이라는 대답은 했는데, 둘 다 그 약속이 오늘 안 지켜질 걸 아는 얼굴이었다.사무실로 돌아오자 다들 다시 모니터만 보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누가 말을 걸었으면 바로 표정이 무너졌을지도 몰랐다.자리에 앉자마자 자료를 다시 띄웠다. 마감 전 수정은 늘 사람을 살려 줬다. 생각을 잘라서 눈앞의 문장만 보게 만들어서.다만 오늘은 클라이언트가 유난히 집요했다.4시 반에 한 번.5시 십 분에 한 번.6시를 조금 넘겨 또 한 번.카피 수위, 메인 비주얼 톤, 세부 문구 위치. 이미 끝난 줄 알았던 수정이 계속 되돌아왔다. 팀장 얼굴도 점점 나빠졌고, 전략 쪽은 먼저 빠졌고, 소율은 매체 확정 때문에 미디어팀으로 다시 올라갔다."저 먼저 올라가 볼게요. 확정 나면 바로 다시 연락드릴게요.""네, 소율 씨."지안은 고개도 안 든 채 받았다. 서연은 일곱 시쯤 팀장한테 붙잡혀 다른 회의실로 불려 갔다."나 금방 올게.""응."그렇게 대답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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