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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7화 - 식사

Author: 뽁뽁이
last update Petsa ng paglalathala: 2026-04-26 22:43:40

그게 왠지 좋았다.

반 걸음 앞에서 먼저 걸어 주는 사람.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거리. 지안은 그 짧은 안도감이 생각보다 오래 남는 게 더 낯설었다.

혼자 버티는 게 익숙해진 사람은, 누가 옆에 서는 것만으로도 더 어색해졌다.

회사로 돌아오자마자 서연은 바로 원래 얼굴로 돌아갔다.

"오지안, 저녁에 자료 정리할 거면 나도 봐줄게."

"너 할 일 있잖아."

"있지."

서연이 모니터를 켜며 말했다.

"그래도 너 혼자 막 뒤지다 이상한 타이밍에 돌진할까 봐 하는 말이야."

지안은 피식 웃었다.

"나 그렇게 충동적이진 않거든."

"연애만 아니면."

그 말이 묘하게 정확해서,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오후엔 일이 평범했다. 평범해서 다행이었다.

메일 답장하고, 클라이언트 수정본 확인하고. 누구 하나 큰소리 안 냈고, 팀장도 드물게 조용했다. 그 평온이 오래갈 줄 알았는데, 보통 그런 날은 다른 쪽에서 틀어진다.

"오대리."

지안이 고개를 들자 태준이 자리 옆에 서 있었다. 손엔 태블릿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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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7화 - 밖이 좀 시끄럽더라

    "야, 오지안."서연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말했다."너 오전에 시간 돼?""왜?""열한 시쯤 회의실 잠깐.""무슨 일인데?"서연은 바로 답하는 대신 지안 책상 위에 종이컵을 밀어놨다."일단 커피 마셔.""박서연.""마셔 보라니까."지안은 한 모금 마셨다. 식지도 않았는데 썼다."이제 말해.""어제 내가 바깥 라인 조금 더 봤거든."서연이 자기 자리 쪽을 한번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포폴 비공개한 거, 그냥 서버 점검 아니래."지안은 컵을 내려놨다."확실해?""응. 그리고 출처 질문 돌던 것도 한 군데가 아니야. 단톡 하나에서 끝난 게 아니라, 행사 자료 쪽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두세 번 더 나왔대.""누가 먼저 꺼냈는지는?""아직 몰라. 근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니지."서연이 말을 끊듯 정리했다."이제 밖에서 '그거 이상하다'고 보는 사람이 생겼다는 거."지안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 말이 싫었다.이정환이 잘못했다는 사실보다, 업계에서 이상하다고 본다는 사실이 먼저 돈다는 것.진실은 늘 느렸고, 이상하다는 인상은 늘 빨랐다.맞은편에선 재하가 팀장 수정안을 정리하고 있었다.필요한 말만 하고, 필요한 만큼만 움직이는 얼굴. 어제부터 계속 저랬다.이상한 건 지안도 이제 그 침묵을 그냥 넘기기 어렵다는 거였다. 재하는 뭔가를 알고 있거나, 이미 뭔가를 시작한 사람처럼 보였다.그런데 그 감을 붙잡아 물을 만큼 아직 정리가 안 됐다."열한 시."서연이 다시 말했다."회의실 와. 거기서 얘기해."지안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열한 시 정각에 회의실 문이 닫히자 서연은 노트북을 바로 돌려 보여 줬다."여기 봐."화면엔 메신저 캡처 두 개와 메일 한 통이 떠 있었다.업계 사람들끼리 돌린 짧은 대화, 포트폴리오 비공개 화면 캡처, 그리고 행사 운영 쪽이 누군가에게 보낸 것 같은 확인 메일.이름은 가려져 있었고, 내용도 다 보이진 않았지만 방향은 충분히 읽혔다."이거 다 어디서 난 건데?""말 안 해.""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6화 - 보내기 직전

    재하는 잠깐 고개를 숙였다. 모니터 아래쪽에 비친 자기 얼굴이 흐리게 떨렸다.화가 나는지, 겁이 나는지, 둘 다인지 구분이 잘 안 갔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저 사람은 지안을 위해 말하는 척하면서 결국 지안 이름을 방패처럼 쓰고 있었다."할 말 끝났으면 끊겠습니다.""생각은 해 보시죠. 아직 보충자료 안 내셨잖아요.""네.""그리고 윤재하 씨."재하는 대꾸하지 않았다."업계 좁습니다. 한번 이름 잘못 붙으면 오래 가요."통화는 그쪽에서 먼저 끊겼다.짧은 종료음이 귀 안쪽에서 한 번 울리고 사라졌다.그제야 사무실 소리가 다시 들렸다. 멀리서 청소기 끄는 소리, 누가 의자 밀고 나가는 소리, 엘리베이터 도착 알림.조금 전까지는 전부 배경이었는데 지금은 유난히 또렷했다.재하는 휴대폰을 내려놓고 한동안 손을 떼지 못했다. 통화 시간이 화면에 남아 있었다.모르는 번호에서 걸어온 기록. 이건 지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업계 좁습니다.그 말 자체는 새로울 게 없었다. 광고판 좁은 건 누구나 알았다.걸리는 건 누가, 어떤 타이밍에, 어떤 의도로 그 문장을 꺼냈느냐였다. 저쪽은 지금 협박으로 보내고 있다.심지어 틀린 말도 별로 없었다. 회사 이름은 실제로 같이 걸려 있었고, 왜 이제냐는 질문도 분명 나올 거고, 자기 쪽 동선도 깔끔하다고만은 못 할 거였다.그 정돈된 비겁함이 짜증이 났다.맞는 말처럼 들리게 눌러 오는 게 제일 비겁했다.재하는 의자를 뒤로 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이라도 마셔야 할 것 같아서 탕비실 쪽으로 몇 걸음 갔다가, 바로 멈췄다.문득 그 몇 분 사이에도 마음이 식을까 봐 싫었다.그런데 탕비실 불빛 아래서 종이컵을 채우는 동안, 머릿속에 붙은 건 업계 좁다는 말이 아니었다.오지안 씨도 이 방식 원하진 않을 겁니다.그 문장이었다.저 사람이 지안을 끌어다 쓴 방식이 역겨웠는데, 진짜 문제는 그 안에 자기한테도 걸리는 게 있었다는 거였다.지안이 이걸 원했냐.재하가 자기 대신 이 판을 벌이는 걸 원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5화 - 정의감보다

    잠깐,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재하는 휴대폰을 귀에서 아주 조금 떼었다가 다시 붙였다. 통화가 끊긴 건 아니었다. 화면 위쪽 숫자는 그대로 올라가고 있었다.누군가 숨만 고르고 있는 침묵. 그런 종류의 머뭇거림은 더 기분이 나빴다. 모르는 번호로 먼저 걸어 놓고, 상대가 먼저 입을 열게 만드는 쪽."여보세요."재하가 한 번 더 말했다.그러자 낮고 매끈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윤재하 씨 맞죠."확인이 아니라 확인이 필요 없다는 톤이었다."네.""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저는 정환 씨랑 일하는 쪽 사람인데요."재하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지 못한 채 그대로 앉아 있었다. 책상 위 압축 파일은 아직 완성 전이었고, 메일 창은 열린 채였다. 화면 속 `credit_review_package`라는 이름이 갑자기 너무 또렷해졌다."누구시죠?""아, 이름 말해도 아마 모르실 겁니다. 그냥 업계에서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돼요."그 한마디로 끝이었다. 직함도, 소속도, 이름도 없다.대신 재하가 지금 이 전화를 끊기 어렵게 만드는 정보만 남겼다. 정환 씨랑 일하는 쪽. 업계. 그 정도면 충분하다는 식으로."무슨 일이시죠?""별건 아니고요. 젊은 분이 괜히 일 크게 만드는 것 같아서."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상대는 조급해하지도 않았다. 그 침묵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처럼 말을 이었다."이미 접수는 들어간 걸로 아는데, 아직 보충자료 단계잖아요. 그 정도면 서로 얼굴 안 붉히고 정리할 여지가 있거든요."재하는 시선을 책상 위 메일 창에 고정했다. `영업일 기준 3일 이내.`그 문장을 아까부터 몇 번이나 봤는데, 지금은 전혀 다른 뜻으로 보였다. 보충자료 단계. 아직 여지가 있다."정리라는 게 뭔데요?"그쪽에서 짧게 웃는 소리가 났다."말씀은 빠르시네.""물으셨잖아요.""예. 그러니까 제 말은, 대학 때 팀 작업이면 해석이 복잡할 수 있다는 거죠. 지금 와서 그걸 누가 먼저 만들었느냐 식으로 정리하면 보는 쪽도 피곤해져요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4화 - 정리본

    삼 일.기한이 숫자로 찍히는 순간부터는 마음이 아니라 순서가 먼저였다.재하는 회의실 벽 쪽으로 의자를 조금 더 붙이고 어젯밤 정리해 둔 폴더를 다시 열었다. 순서는 밤에 이미 맞춰 놨다. 오늘은 확인만 하면 됐다.발표 자료 원본을 한 번 더 열었을 때 손이 멈춘 건 순서 때문이 아니었다.슬라이드 첫 장에 컨셉 문장이 크게 박혀 있었다. 대학 축제장 스크린 위에서 처음 봤을 때, 광고가 저렇게 말할 수도 있구나 싶었다. 관객석 맨 뒤에서 무대를 올려다보던 자기가 떠올랐다.스무 살이었고, 아직 이 업계에 들어올 줄도 몰랐고, 그냥 저 문장이 좋았다. 누가 만들었는지는 나중에야 찾아봤고, 그 이름이 오지안이었다. 그 이름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는 걸 증빙 서류에는 적을 수 없었다.재하는 슬라이드를 닫았다. 지금은 그 감정이 아니라 사실만 보내야 했다.여기까지 쓰자마자 회의실 문이 두드려졌다."재하 씨, 여기 쓰고 있어요?"서연이었다.재하는 화면을 바로 덮진 않았다. 대신 문서 창만 줄여 두고 대답했다."네. 금방 끝납니다.""잠깐만. 팀장님이 찾아.""아, 네. 지금 나갈게요."노트북을 들고 일어나는 동안 서연은 안쪽을 힐끗 보지 않았다. 그게 고마웠다. 알 사람은 다 뭘 안다 해도, 대놓고 들여다보지 않는 거리라는 게 있었다.복도로 나오자마자 팀장이 수정안 얘기를 던졌다. 카피 길이, 배너 위치, 클라이언트 확인 순서.평소면 재하는 바로 받아쳤을 말들이었는데, 오늘은 대답이 조금씩 늦었다."네, 그쪽 먼저 정리하겠습니다.""그리고 오후 공유본은 압축해서 보내요. 파일명 통일 좀 하고."그 말에 재하는 아주 잠깐 웃을 뻔했다. 오늘 하루 종일 자기가 하고 있는 게 딱 그거라서.압축하고, 파일명 맞추고, 보는 사람이 한 번에 따라가게 정리하는 일. 회사 일과 회사 밖 일이 같은 손놀림으로 굴러간다는 게 좀 우스웠다.***지안은 퇴근 한 시간 전쯤부터 서연이랑 작은 회의실에 들어가 앉았다. 사무실에선 자꾸 누가 말을 걸었고, 그럴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3화 - 삼 일

    "선배님, 오전 송출표 다시 왔어요. 어제 버전 폐기래요.""왜 또?""매체 쪽에서 단가표 한 줄 잘못 올렸대요. 죄송해요, 제가 아까 확인 못 해서.""소율 씨가 왜 죄송해요. 보낸 쪽이 잘못한 거지."지안이 일정표를 넘겨받자, 소율은 안도의 한숨을 쉬고 바로 위층 회의 들어간다며 뛰어갔다.사무실은 다시 늘 그렇던 소리로 찼다. 키보드 치는 소리, 프린터 도는 소리, 회의실 문 여닫는 소리. 세상은 아무 일 없는 척 계속 굴러갔다.그 무심한 소리가 거슬렸다.지안은 수정안을 보다가 결국 맞은편을 한 번 봤다. 재하는 커피를 거의 다 비운 채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었다.얼굴은 멀쩡했는데 눈가가 평소보다 조금 더 건조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먼저 말을 붙이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만 물을 준비를 해 둔 사람처럼."윤재하 씨."이름을 부르자 재하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네.""커버 시안 두 번째 버전, 카피 자리만 세 줄 더 비워 주세요. 클라이언트가 문구 길이 늘릴 수도 있어서.""네. 20분 안에 다시 올리겠습니다."짧고 깔끔했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낯설었다. 예전 같으면 끝에 한마디쯤 붙였을 인간이. 지안은 저도 모르게 손가락으로 컵 뚜껑만 만지작거렸다. 지금 저쪽이 조용한 게 자기 배려인지, 자기 일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아닌지 판단이 잘 안 섰다.서연이 모니터 너머로 슬쩍 눈을 들더니 아무 말 없이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 식의 침묵이 제일 박서연다웠다.점심은 대충 편의점 샌드위치로 때웠다. 오후엔 클라이언트 수정 요청이 몰렸고, 팀장은 회의실과 자리 사이를 계속 오갔다.서연은 외부 레퍼런스 링크를 몇 개 더 보내 왔고, 지안은 그것들을 당장 열지 않은 채 별표만 해 뒀다.재하는 두 시쯤 빈 회의실을 잠깐 빌렸다. 노트북만 들고 들어가 문을 닫았고, 십오 분쯤 뒤에 나왔다.누구도 굳이 묻지 않았다. 오전 내내 평소보다 말을 아끼던 사람이었으니, 그 정도 자리는 다들 그냥 일이라고 생각할 만했다.그 안에서 재하는 메일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82화 - 자동 회신

    자동 회신 메일은 아침까지도 받은편지함 맨 위에 걸려 있었다.재하는 지하철 손잡이를 잡은 채 화면을 다시 눌렀다.`[공모전 사무국] 문의 접수가 완료되었습니다.`밤에는 그 문장이 실행 확인처럼 보였다.보냈고, 접수됐고, 이제는 물릴 수 없다는 식으로. 그런데 출근길에 다시 보니까 모양이 달랐다.끝났다는 문장이 아니라, 이제부터는 형식대로 움직이라는 문장에 가까웠다.본문 아래쪽에 짧은 안내가 하나 더 붙어 있었다.접수 건 검토 후 담당자가 별도 회신할 수 있으며, 필요 시 추가 증빙자료 제출을 요청드릴 예정입니다.재하는 엄지로 그 문장을 천천히 쓸어 내렸다. 밤새 몇 번이나 봤던 메일인데, 저 한 줄은 아침에야 제대로 눈에 들어왔다.검토. 담당자. 추가 증빙. 갑자기 일이 사람 손을 타기 시작한 기분.지하철이 역에 멈추자, 누군가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휴대폰을 잠갔다가 다시 켰다.보낸 편지함, 문의 양식 접수 화면 캡처, 전날 밤 정리해 둔 폴더까지 한 번 더 확인했다.폴더를 열자 어젯밤 정리해 둔 것들이 그대로 올라왔다. 아침에 다시 보면 후회할 것 같았는데, 막상 꺼내 보니까 후회보다 더 이상한 게 먼저 올라왔다.처음부터 이 용도로 모은 게 아니라는 사실. 처음엔 그냥 좋아서 모았다.대학 때 한 번 봤던 발표가 오래 남아서, 그 사람이 만든 구조가 어떤 식이었는지 다시 보고 싶어서. 그게 7년 동안 폴더 안에 들어 있었다. 증거라는 이름이 붙은 건 훨씬 나중이었다.사진 썸네일 하나가 눈에 걸렸다. 작은 화면에선 얼굴이 잘 안 보였는데 마이크를 든 손만 선명했다.저 사진 속 사람은 지금 같은 사무실에서 수정안을 넘기고 있었다. 재하는 화면을 잠갔다. 감정이 들어가면 느려질 것 같아서.회사 건물 앞에 도착했을 때도 재하는 바로 로비로 들어가지 못했다. 커피를 한 잔 사 들고 유리문 앞에 잠깐 섰다.평소보다 연한 아메리카노였는데도 한 모금 넘기자마자 썼다. 잠을 못 자서가 아니라, 오늘은 입안이 개운하지 않아서.결국 해야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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