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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화 - 이름 없이

작가: 뽁뽁이
last update 게시일: 2026-04-01 13:29:11

"지금 내려도 돼요." 그가 말했다.

"내릴 생각 없어요."

"다행이네요."

"좋아하긴 일러요."

"좋아한다는 말 안 했는데."

지안이 픽 웃었다. 택시 창에 비친 자기 입꼬리가 생각보다 풀려 있었다. 남자의 손등이 이번엔 정말로 스쳤다. 아주 짧게. 피할 수 있었는데 지안은 피하지 않았다. 대신 다리를 꼬려다 말았다. 그 어정쩡한 멈춤이 대답이 된다는 걸, 둘 다 알아버린 채였다.

***

호텔 방 문이 닫히자 둘 다 바로 키스하지는 않았다. 그게 더 질이 나빴다.

지안은 카드키를 콘솔 위에 내려놓고 돌아섰다. 남자는 문 앞에 기대 선 채 지안을 보고 있었다. 객실 조명은 더 솔직했다. 그럼에도 괜찮았다. 아니, 그쪽이 더 괜찮았다.

"지금이라도 물어볼래요?" 지안이 물었다. "이름."

"말해 줄 거예요?"

"아뇨."

"그럼 굳이."

지안이 먼저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가 다가왔다. 저렇게 기다리는 게 예의인 건지, 잔인한 건지 잠깐 헷갈렸다. 지안이 그의 셔츠 앞섶을 잡아당겼다. 그제야 키스가 붙었다. 처음은 생각보다 느렸고, 두 번째부터는 아니었다.

입술이 겹칠 때마다 술 냄새보다 체온이 먼저 밀려들었다. 남자의 손이 지안의 허리를 짚었다가, 허락을 묻듯 아주 잠깐 멈췄다. 지안은 대답 대신 그의 어깨를 밀어 침대 쪽으로 걸음을 옮기게 했다. 구두가 카펫 위로 둔하게 스쳤고, 코트가 바닥에 떨어졌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셔츠 단추가 빠르게 풀렸다.

"성격 급하시네." 남자가 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가 거슬렸어야 했다. 거슬리지 않아서 문제였다.

"실망했어요?"

"전혀."

대답 끝에 다시 입술이 붙었다. 이번엔 더 깊었다. 지안은 그의 목을 짚고 각도를 바꿨다. 혀끝이 닿을 때마다 목덜미가 먼저 뜨거워졌다. 심장이 뛰었다는 식의 뻔한 자각보다, 블라우스 단추를 푸는 자기 손이 평소보다 서툴러졌다는 사실이 먼저 들어왔다.

남자가 손등으로 지안의 옆구리를 쓸어내리자 짧은 숨이 새었다. 그가 그 소리를 들은 표정을 했다. 지안은 괜히 그의 아랫입술을 한 번 세게 깨물었다.

"웃지 마요."

"안 웃었는데요."

"지금 웃었어."

"좋아서요."

그 말이 너무 간단해서, 지안은 잠깐 멈췄다. 좋다는 말을 그렇게 쉽게 하는 사람을 믿은 적은 없었다. 대개는 그 뒤에 원하는 게 붙었다. 그런데 지금은,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 말 뒤에 다른 문장이 따라붙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험했다. 그래서 지안은 더 깊이 끌어당겼다.

침대 가장자리에 걸터앉는 순간 남자가 무릎 사이로 들어왔다. 지안은 그의 셔츠를 완전히 벗겨 바닥에 던졌고, 손바닥으로 등을 훑었다. 마른 줄만 알았는데 등 쪽 근육이 생각보다 단단했다.

"계속 볼 거예요?" 남자가 낮게 물었다.

"보라고 해놓고?"

"아뇨. 더 하라고."

말끝이 닿자마자 지안이 그를 다시 끌어내렸다. 입맞춤은 더 거칠어졌고, 손길은 빨라졌다. 허벅지를 스치는 손바닥, 귓가를 스치는 숨이 가까워질수록 문장은 짧아졌다. 남자의 입술이 쇄골 아래를 느리게 훑을 때 지안은 시트를 움켜쥐었다.

"거기." 지안이 숨을 골랐다. "천천히."

남자가 곧바로 속도를 낮췄다. 제멋대로 밀어붙이지 않는 사람. 그러면서도 물러나지는 않는 사람. 입술이 가슴선을 따라 내려오고, 허벅지 안쪽에 닿은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압을 더했을 때 지안은 고개를 젖혔다. 손끝보다 먼저 허리가 반응했고, 지안은 그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이 정도면." 남자가 올려다봤다. "좋은 밤 맞죠?"

지안은 대답 대신 그를 끌어올려 다시 키스했다. 그 뒤의 답은 말보다 몸이 빨랐다. 서로의 숨이 엉키고, 시트가 여러 번 구겨지고, 억눌렀던 소리가 더는 억눌리지 않을 때까지 둘은 쉬지 않았다. 지안은 아주 잠깐, 아무도 자기한테서 뭘 가져가지 않는 밤이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이 가장 취한 부분이었다.

***

아침 햇빛은 밤보다 훨씬 무례했다. 커튼 틈으로 들어온 빛이 침대 끝을 잘라 놓고 있었고, 지안은 그 선을 한참 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허리가 약간 뻐근했다. 바닥엔 어젯밤 옷이 대충 겹쳐 있었고, 남자는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었다.

자는 얼굴은 의외로 더 어렸다. 그 사실이 괜히 웃겼다. 지안은 한 발 다가갔다가 멈췄다. 이름을 묻지 않은 건 잘한 일이었다. 번호도 직업도 아무것도. 좋은 밤은 좋은 밤으로만 끝내는 편이 나았다.

지안은 조용히 옷을 챙겨 입었다. 립을 다시 바르고, 휴대폰 진동을 확인했다. 월요일 오전 아홉 시 회의 알림이 화면 위에 떠 있었다. 현실은 성실했다. 사람을 기다려 주는 법이 없었다.

문고리를 잡기 전에 지안은 한 번 뒤를 돌아봤다. 남자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깨우지 않는 쪽이 깔끔했다. 이 밤을 설명해야 할 이유도, 설명 들을 이유도 없었다.

지안은 문을 열고 나갔다.

이름은 끝내 묻지 않았다.

월요일이 오기 전까지만, 그걸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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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101화 - 그거 좋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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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길은 생각보다 빨리 왔다.서연이 먼저 가방을 챙기면서 "둘이 알아서 가" 한마디를 놓고 나가자 지안은 노트북을 덮고 자리를 정리했다.소율은 이미 내려갔고, 사무실엔 재하와 둘만 남았다. 재하가 태블릿을 가방에 넣는 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지안은 그걸 보다가 먼저 말했다."뭐 해?""가방 싸고 있잖아요.""세상에서 제일 느린 짐 싸기네."재하가 고개를 들어 웃었다. 능글거리는 쪽이 아니라 그냥 좋은 쪽의 웃음이었다. 지안은 괜히 이미 꺼진 모니터를 한 번 더 확인했다."우리 집 갈래?"말이 나가고 나서 조금 아차 싶었다. 아, 이거 예전에도 이렇게 말했지.그때는 횡단보도 앞이었다. 지금은 빈 사무실이었고, 숨길 이유도 없었다.재하가 가방 지퍼를 올리며 대답했다."안 간다고 하면 믿을 거예요?""아니.""그럼 가죠."밖은 저녁이었다.택시 안에서 재하는 지안 손을 먼저 잡지 않았다. 대신 무릎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고, 그 손등이 지안 허벅지에서 손가락 두어 개 거리에 있었다.예전 같았으면 지안이 먼저 거리를 벌렸을 것이다.오늘은 그 거리를 그대로 뒀다.가로등 불빛이 유리창을 길게 지나갈 때마다 재하 손등 위로 빛이 한 번씩 미끄러졌다.지안이 먼저 손을 올렸다. 잡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손등 위에 손가락을 얹는 정도. 재하가 그쪽을 보지 않고 아주 작게 웃었다.현관문이 닫혔을 때 둘 다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신발을 벗는 동작, 가방을 내리는 동작, 불을 켜는 동작.그 사이에 들어간 침묵이 어색하지 않았다.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현관에서 긴장이 먼저 올라왔다.비밀이었으니까.그다음에는 피로와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지금은 달랐다 숨길 게 없는 사람들이 집에 같이 온 것. 그 단순한 사실만으로도 공기가 더 가벼웠다."물?"지안이 물었다."아뇨."재하가 웃지 않고 말했다."물 마시러 온 거 아니라서요."지안은 재킷을 소파 위에 놓다가 멈췄다."그럼 뭐하러 왔는데?"재하가 한 걸음 가까이 왔다. 좁은 거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9화 - 공개

    "재하."이름이 입 밖으로 나간 뒤에도 회의실 공기는 바로 바뀌지 않았다.화가 다 풀린 것도 아니고, 바깥 문제가 끝난 것도 아니고, 몇 주를 건너온 마음이 한 번에 정리될 리도 없었다.그런데도 그 한 단어 이후로는 숨길 게 줄었다. 지안은 그걸 먼저 알았다. 더는 다시 모른 척할 수 없는 거리라는 걸.재하는 지안이 손을 놓을 때까지 그대로 서 있었다.섣불리 끌어안지도 않았고, 급하게 붙잡지도 않았다. 그게 지금은 맞았다.지안이 먼저 열었고, 그래서 재하도 그 속도를 그대로 받는 쪽을 고르는 게."가요."지안이 먼저 말했다."네."둘은 회의실 문을 나섰다. 복도는 퇴근 직전보다 더 조용해져 있었다.멀리서 팀장 목소리가 아직 회의실 안쪽에 걸려 있었고, 프린터 불빛만 하나 남아 있었다.예전 같으면 이 시간에 둘이 같은 복도를 나오는 것부터 신경 썼을 거다. 누가 보는지, 몇 걸음 차이 둘지, 엘리베이터는 따로 탈지. 그런데 오늘은 그런 계산이 올라오지 않았다.그냥 재하랑 나란히 걸었다.그 사실만으로도 웃길 정도였다.***다음 날 아침, TF는 사실상 끝난 분위기였다.최종본 전달은 마무리됐고, 남은 건 자잘한 수정 대응이랑 종료 정리 정도.팀장은 아침부터 유난히 얼굴이 펴져 있었고, 소율은 "이제 좀 살겠다"는 말을 세 번쯤 했고, 서연은 외부 공유 폴더 정리하면서 삭제해도 되는 버전들을 하나씩 골라냈다.지안은 자리에 앉자마자 커피 뚜껑을 열었다.맞은편에선 재하가 메일을 보고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잠깐, 시선이 마주치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피하려다 멈췄다.예전 같았으면 바로 돌렸을 거리인데, 오늘은 안 돌려도 됐다. 그 차이가 아직 몸에 안 붙어서 좀 어색했다.그리고 재하는 평소처럼 묻는 대신, 아주 자연스럽게 말했다."커피 식기 전에 드세요."지안은 컵을 들다가 멈췄다.별거 아닌 말인데, 그걸 별거 아닌 얼굴로 듣는 게 낯설었다.예전 같으면 누가 들을까 먼저 봤을 텐데, 오늘은 그 반사 동작이 나오지 않았다."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8화 - 다시

    이번엔 자기가 먼저였다.손잡이를 누르자 회의실 문이 조용히 열렸다.안엔 재하 혼자 있었다. 통화는 끝난 뒤였는지 휴대폰은 화면만 꺼진 채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다.재하는 문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가, 지안을 보자 그대로 멈췄다. 놀란 표정이 길게 가지는 않았다. 대신 아주 짧게 숨을 고르는 얼굴. 예상은 못 했는데, 도망치지도 않는 얼굴."잠깐 얘기해요."지안이 먼저 말했다.재하는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네."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는 몇 걸음이 생각보다 길었다.지안은 테이블 맞은편에 서 있다가 결국 의자를 당기지 않았다. 앉으면 괜히 더 오래 돌릴 것 같아서. 지금은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돌릴 만큼 돌렸고, 피해 갈 만큼 피해 갔다."나 확인했어요."재하 시선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발표본이랑 메일이랑, 사진이랑. 다.""...네.""운영사무국 메일도 봤고."재하는 변명하지 않았다. 죄송하다는 말도 바로 안 했다. 그 침묵이 재하답다고 생각하면서, 지안은 괜히 더 짜증이 났다."그게 제일 열받았어."지안이 낮게 말했다."네가 맞았다는 거."재하는 눈을 들었다. 뭔가 말하려는 얼굴이 잠깐 스쳤다가 다시 가라앉았다."내가 나중에야 확인한 것도 열받았고, 네가 그걸 다 해 놓고도 말 안 한 것도 열받았고."지안은 잠깐 쉬었다."아직도 화나요. 늦은 거, 숨긴 거, 멋대로 시작한 거. 다.""알고 있습니다."짧고 조용한 대답이었다."아니, 모를 수도 있지."지안은 피식 웃었다."윤재하 씨는 맨날 절반만 말했으니까."그 말에 재하가 입을 열었다."선배님.""근데."지안이 바로 끊었다. 지금은 저 사람 설명으로 끌려가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화가 나는데도, 끝이라고 말하는 건 또 안 되더라."회의실 안이 아주 조용해졌다. 에어컨 바람 소리만 얇게 돌았다.재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섣불리 다가오지 않는 쪽을 고르는 사람처럼.지안은 테이블 위에 손끝을 짚었다. 손바닥에 힘이 조금 들어갔다."한동안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97화 - 찾아갈 이유

    내가 먼저 가서 물을 수도 있겠구나.그 생각은 집에 도착하고도 사라지지 않았디.지안은 현관에 서서 한참 신발도 못 벗었다. 가방 끈이 어깨에 걸린 채로, 휴대폰만 쥐고 있었다.누구한테 연락할 것도 아니고, 당장 어디로 갈 것도 아닌데 몸이 먼저 멈췄다.갈 수 있겠구나, 가야 하나, 는 완전히 다른 문장이라서.지안은 결국 가방을 내려놓고 소파에 앉았다.거실은 조용했고, 시계 초침 소리만 얇게 들렸다. 생각은 계속 같은 데를 맴돌았다.왜 그랬냐고 묻는 건 이미 늦었다. 그 질문 뒤엔 결국 또 재하 설명만 남을 것 같았다. 지안이 알고 싶은 건 이제 조금 달랐다.그 사람이 뭘 했는지보다, 그걸 다 보고 난 뒤 자기가 뭘 할 건지.그게 어려웠다.지안은 눈을 감았다 뜨고, 머릿속으로만 몇 번 정리했다.용서해 주려고 가는 거 아님.불쌍해서 가는 것도 아님.내가 선택할지 말지, 그걸 더 미루기 싫어서.그 정도까지 오자 좀 숨이 붙었다. 이유가 없어서 못 가는 건 아니었다.이유를 자꾸 상대 쪽에서 찾느라 늦었던 거지.지안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와서야 겨우 방향이 잡히는 게 웃겼다. 그래도 적어도 끌려가는 쪽은 아니라서 전보다 낫긴 했다.다음 날 아침, 사무실은 평소보다 더 분주했다.프로젝트 마감 주간 특유의 조급한 공기."오늘 끝나면 TF도 사실상 정리네."소율이 지나가듯 말했고, 지안은 그 말에 손을 잠깐 멈췄다.사실상 정리.그 단어가 유독 오래 남았다.프로젝트가 끝나면 숨길 이유도, 핑계도 같이 줄어든다. 회사 안에서 둘 사이를 가리는 명분도 점점 얇아진다. 그 사실이 갑자기 너무 분명해졌다.계속 미루다 보면 그냥 타이밍이 지나가는 쪽이 먼저 올 수도 있다는 뜻.맞은편에선 재하가 내부 수정본을 정리하고 있었다.대외 공유에서 빠지고 난 뒤로 더 조용해진 자리. 움직임은 평소 같았는데, 일의 결이 달라진 건 이제 누가 봐도 알았다.팀장도 재하한테 말 거는 횟수가 줄었고, 외부 통화는 거의 서연이나 지안 쪽으로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1화 - 바에서

    바 안은 적당히 어두웠고, 지안은 그런 조명을 대체로 신뢰하지 않았다. 피곤한 티가 덜 나게 해주고, 괜찮지 않은 밤에도 괜찮은 척할 구실을 줬다. 오늘은 그 구실이 필요했다. 클라이언트와 저녁을 세 시간 넘게 붙어 있었고, 휴대폰에는 월요일 오전 회의 일정이 벌써 두 개나 들어와 있었다."독한 걸로 주세요."바텐더가 잠깐 지안을 봤다가 잔을 골랐다. 설명이 더 필요 없는 주문이 제일 좋았다. 지안은 의자에 반쯤 기대 앉아 립을 한 번 눌러 발랐다. 거울은 보지 않았다. 안 봐도 알았다. 멀쩡한 쪽에 가까울 거다. 오지안은 그런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5화 - 오른쪽이요

    눈이 전혀 후배답지 않았던 남자는, 그날 오후 지안의 숨통까지 정확히 조여 왔다.회의실에서 나온 뒤 지안은 재하 쪽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보면 질 거 같아서가 아니라, 이미 진 기분이 들어서였다. 이름 없는 밤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얼굴이 사원증까지 달고 사무실을 돌아다니는 것도 짜증났는데, 하필 저 눈으로 선배님이라고 부르는 건 반칙에 가까웠다."야."서연이 팔짱을 낀 채 지안 책상 옆에 섰다."왜.""설명.""없어.""그럼 만들어서라도 해."지안은 노트북을 켜며 고개도 들지 않았다. "지금 바빠.""방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4화 - 윤재하

    숨이 아니라 손이 먼저 멈췄다. 들고 있던 펜 끝이 자료 위에 눌려, 잉크 점 하나가 동그랗게 번졌다."윤재하 씨입니다."이름이 뒤늦게 들어왔다. 윤재하. 이름 없는 밤에 두고 온 줄 알았던 남자가 월요일 오전 회의실 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안녕하세요. 오늘부터 잘 부탁드리겠습니다."목소리는 아는 톤이었다. 다만 온도가 달랐다. 금요일 밤보다 훨씬 공손했고, 훨씬 깔끔했고, 오히려 모르는 사람 같았다. 재하는 팀장 옆에 선 채 회의실을 한번 둘러봤다. 그 시선이 지안에게 닿았을 때 아주 짧게 멈췄다.한 박자.길

  • 선배님, 그 밤 기억나시죠   # 3화 - 진한 립

    월요일은 왔다. 지나치게 성실하게.알람 세 개를 다 끄고, 샤워를 두 번 하고, 진한 립을 평소보다 한 번 더 눌러 발라도 토요일 새벽의 체온은 안 가셨다. 지안은 그 사실이 제일 짜증났다. 이름도 묻지 않았고, 번호도 남기지 않고, 다시 볼 일도 없게 끝낸 밤이었다. 그러면 끝이어야 했다. 주말 내내 침구를 갈고, 출장 캐리어를 비우고, 밀린 메일을 처리하면서도 자꾸 호텔 복도 조명 같은 게 떠오르는 건 규칙 위반이었다.그래도 출근은 출근이었다. 애드리프트 사무실 유리문이 열리고 익숙한 냉기가 목덜미를 스쳤을 때, 지안은 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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