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튿날 그녀는 하루 종일 남쪽으로 걷는 저를 발견했다.
깨달은 것은 해가 기울 무렵이었다. 갈림길 돌무더기 앞에서 발이 멎었을 때, 그림자가 가리키는 쪽이 어제까지의 방향과 반대였다. 몸이 마음보다 먼저 셈을 끝내고, 임자 몰래 저울 위로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제 발로 맹 앞에 서면 가주는 살려 준다고.
운설은 돌무더기 곁에 오래 서 있었다.
남쪽 하늘은 무거웠다. 저 하늘 아래 어딘가에 갇힌 집이 있고, 화로가 있고, 목이 아직 붙었다더군, 하는 소문 속의 아버지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그녀가 제 발로 걸어 들어가면 열린다는 문이 있었다. 문 안에서 무엇이 기다리는지는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다. 맹의 법이 재앙의 씨에게 어떤 그릇을 준비해 두었을지, 짐작은 어렵지 않았다.
죽는 것이 두려워 발이 멎은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멎게 한 것은 노인의 손이었다. 문 앞에 쓰러졌던 밤, 죽어 가면서도 그녀의 손을 놓지 않던 마른 손. 삭월의 마지막, 이라고 그 손은 말했다. 잊으라고 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저울 위로 올라가 버리면, 그 밤에 넘겨받은 것들은 임자를 잃는다. 멸문당한 부족의 마지막 물음이, 답을 듣지 못한 채 맹의 창고에서 녹슨다. 아버지가 열여덟 해를 감춘 것도, 노인이 목숨으로 넘긴 것도, 흰 무복이 골목에서 비켜서며 북으로 가시오, 하던 것도 — 모두 헛것이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는 아직 제가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모르는 채로 죽으러 갈 수는 없었다. 그것은 효도 아니고 속죄도 아니고, 다만 셈이 빠른 자들에게 셈을 넘겨주는 일이었다. 아버지를 살릴 길이 정말 그 저울 위에만 있는지, 저울을 만든 손을 알기 전에는 믿을 수 없었다. 진실이 북에 있다면 — 아버지를 옭아맨 열여덟 해 전의 매듭도 북에 있을 것이었다. 매듭은 푸는 것이지, 목을 거는 데 쓰는 것이 아니다.
죄책은 분노보다 먼저 와 있었다. 그녀가 문을 열어 노인을 들인 밤부터, 청하 운씨의 마당은 기울기 시작했다. 삼백 식솔. 어제까지 그녀를 조카라 부르던 입들, 그 입에 딸린 아이들의 밥. 그들이 그녀를 버린 것은 참이나, 그들을 그 저울 앞에 세운 것이 누구인가를 따지면 셈은 자꾸 그녀의 문간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지 말았어야 했나. 죽어 가는 사람을 문밖에 두었어야 했나. 그 물음에 이르면 그러나 그녀는 매번 같은 자리에 닿았다. 의녀는 문을 연다. 그 밤으로 백 번 돌아가도 백 번 열 것이었다. 그렇다면 죄는 문을 연 손에 있지 않았다.
운설은 북쪽 길로 들어섰다.
걸음은 무거웠고, 무거운 채로 나아갔다. 분노가 걸음마다 조금씩 자리를 잡았다. 낯선 감정이었다. 의녀의 손은 성내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속에서 자라는 것은 분명 분노였다. 사람의 정을 그물코로 쓰는 자들. 종이 한 장으로 열여덟 해를 재앙이라 고쳐 쓰는 자들. 늙은 아비의 목숨에 값을 매겨 딸을 부르는 자들. 그 모든 것이 법(法)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세상.
분노는 뜨겁지 않았다. 화로의 불꽃이 사그라진 뒤에 남는 숯의 온도. 오래가는 온도였다. 그녀는 그것이 무서웠다. 이 온도가 세월을 먹으면 어떤 것이 되는지, 아직 알지 못해서 무서웠다.
밤이 왔다. 바람이 자고, 눈 벌판이 달빛을 받아 낮게 빛났다.
운설은 바위 그늘에 짐을 부리고, 소매에서 신패를 꺼냈다. 처음으로, 달빛에 비추어 오래 들여다보았다. 손바닥만 한 쇠 위에 이지러진 달이 돋을새김되어 있었다. 하늘의 달도 마침 이지러져 있었다. 쇠 속의 달과 하늘의 달이 같은 모양으로 기울어,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삭월(朔月). 그믐과 초승 사이, 어둠에 잠기는 달. 그 이름을 가진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어떤 밤에 이 패를 새겼을까. 이것을 품고 죽으러 오던 노인은, 이 달을 보며 무엇을 빌었을까.
그때였다.
물소리가 났다.
강이 흐르는 소리였다. 낮고, 넓고, 아주 먼 데서부터 차오르는. 운설은 고개를 들었다. 눈 벌판은 달빛 아래 끝까지 비어 있었다. 이 들에 강은 없었다. 얼어붙지 않은 물은 더욱 없었다.
소리는 바깥에서 오지 않았다.
가슴 안쪽, 노인이 두고 간 것이 가라앉아 있던 그 깊은 자리에서 — 강이 흐르기 시작한 것이었다.
선우현은 오래 서 있었다.바람이 두 번 지나가고 깃발이 두 번 누웠다 일어서는 동안, 그는 돌처럼 서서 노인을 보았다. 이윽고 입을 열었을 때, 목소리는 여느 때처럼 낮고 골랐다."아버지가 그 밤에 무엇을 베었습니까.""공훈록에 길게 적혀 있네. 대회에서 낭독될 걸세." 노인은 물음을 받아넘기는 데 이골이 난 손길로 받아넘겼다. "듣고 싶으면 베고 와서 주빈석에서 듣게. 자네 집안의 공이 반 두루마리야.""공." 선우현은 그 글자를 입안에서 한 번 굴렸다. "아홉 살에 그 공의 잔치를 보았습니다. 고기 냄새가 사흘을 갔지요. 저는 그 냄새를 공의 냄새로 배웠습니다."잔치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노인의 낯에서 무언가가 잠깐 지나갔다. 그 잔치에 저도 있었던 낯이었다. 십팔 년 전의 공훈록에 집법당의 이름이 어떻게 적혀 있을지, 운설은 문득 궁금해졌다."훌륭하게 배웠지.""요즘은 그 냄새가 다르게 기억납니다."노인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눈길이 사람을 상하게 한다더니.""눈길이 아니라 눈이었습니다. 이 땅의 눈 밑에 무엇이 묻혔는지를 보았습니다." 그는 거기서 운설 쪽을 보지 않았다. 보지 않는 것이 그가 그녀를 지키는 방식이라는 것을, 그녀는 쉰 개의 활 앞에서 이해했다. "당주. 저는 이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수장.""베라는 명도, 끌고 가라는 명도, 받들 수 없습니다."선우현은 허리에서 인수를 끌렀다. 옥으로 깎은 수장의 인(印)과 붉은 끈. 그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쳐 들었다가, 눈 위에 내려놓았다. 무겁게 다루지도 던지지도 않았다. 남의 물건을 임자에게 돌려주는 손이었다.운설은 그가 인수를 끄르는 손을 보고 있었다. 매듭을 짓던 손이었다. 그녀의 손바닥에 무명을 감아 주던, 조이지도 늦추지도 않던 그 손이 지금 제 평생을 끄르고 있었다. 말리고 싶었다. 저 인수 하나가 그의 스물몇 해였다. 넷에 목검을 잡은 날부터 검신이라 불린 오늘까지가 저 붉은 끈에 묶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말리지 않았다. 말릴 자격의 문제가 아니었다.
물러설 길은 없었다. 등 뒤 비탈에 이미 매복 둘이 붙어 있다고 선우현이 말했다. 그물 안에서 몸부림치면 그물만 조여든다는 것을 두 사람 다 알았다."내가 먼저 내려가겠소." 그가 말했다. "그대는 반 마장 뒤에서 오시오. 달아나지 마시오. 활이 쉰이오."두 사람은 언덕을 내려갔다. 흰 무복들이 창을 세우며 길을 열었고, 그 길 끝에서 가마의 휘장이 걷혔다.집법당주는 늙어 있었다. 성읍의 마당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그러나 가마에서 내려 눈을 밟는 걸음에는 지팡이가 없었고, 운설을 훑는 눈에는 흐림이 없었다.운설은 반 마장 뒤에 서서 그 문답을 다 들었다. 쉰 개의 활이 그녀 한 사람을 향해 반쯤 당겨져 있었다. 강물 소리가 가슴 밑에서 몸을 뒤척였으나 그녀는 숨으로 눌렀다. 여기서 물이 넘치면 활 쉰이 운다. 그다음은 폐사의 눈밭이 다시 벌어질 뿐이고, 이번에는 부러지는 것이 뼈 몇 대로 끝나지 않을 것이었다."수장." 노인이 먼저 선우현에게 예를 받았다. "소환장이 느린 것 같아 늙은이가 마중을 나왔네. 북쪽 눈길이 험하다더니, 과연 상하지 않고 잘 있었군. 몸도," 노인의 눈이 운설에게 옮겨 왔다. "짐도.""짐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선우현이 말했다."그 말버릇부터가 보고와 같군." 노인은 웃었다. 웃음이 눈가에 깊게 파였다. "감찰의 아이들이 별소리를 다 적어 올렸지. 수장이 계집의 손에 제 팔을 맡기더라, 밥을 마주 앉아 먹더라. 나는 그 보고를 덮었네. 검신의 이름이 그런 종이 쪼가리로 상해서야 쓰나."노인이 소매에서 두루마리를 꺼냈다. 붉은 인장이 찍힌 첩지였다."영웅첩일세. 보름 뒤 중원 무한(武漢)에서 대회가 열리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다 오지. 거기서 저 계집은 강호 공적이 되네. 삭월의 남은 씨, 월하심법의 임자, 왕가 삼 형제를 꺾은 요녀. 첩에 적힌 죄목일세." 노인은 두루마리를 펴지도 않고 도로 넣었다. "한데 공적첩이라는 게 말이야, 이름이 둘 오르면 값이 헐해져. 수장, 자네 이름이 지금 그 곁에 오르내리네.
이튿날 아침, 밥그릇을 사이에 두고 그가 말했다."다녀오겠소."밥은 노인이 지어 준 조밥이었고, 처음으로 마주 앉아 먹는 밥이었다. 하필 그 밥상에서 그 말이 나왔다. 운설은 수저를 내려놓지 않았다. 내려놓으면 말이 더 무거워질 것 같았다."소환에 응하겠다는 말씀입니까.""응하는 모양을 갖추겠다는 말이오." 그는 제 그릇을 보며 말했다. "가서 시간을 벌겠소. 보고 올릴 것이 있고, 물을 것이 있소. 척후 보름이라 적은 붓이 누구 것인지. 정병 삼천이라 세운 숫자가 어느 서고에서 나왔는지. 맹의 안에서만 열리는 문들이 있소.""그 문들이 당신을 되돌려 보내 줄 것 같습니까.""모르오.""모르는 문으로 들어가시겠다고요.""그대는 얼음강을 거슬러 겨울 궁으로 가지 않소."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쪽도 모르는 문이오."맞는 말이어서 운설은 답을 잃었다. 두 사람 다 모르는 문 앞에 서 있었고, 두 문은 반대 방향으로 나 있었다. 조밥에서 김이 다 빠지도록 아무도 수저를 들지 않았다."나루까지는 같이 가겠소." 이윽고 그가 말했다. "사백이라는 자의 눈은 믿을 만하오. 그대를 나루에서 넘기고, 나는 남쪽 관도를 타겠소."넘기고, 라는 말을 그는 물건 옮기듯 담담하게 골랐는데, 그 담담함이 도리어 서툴렀다. 운설은 문득 이 사람이 이별의 말을 지어 본 적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다. 넷에 목검을 잡은 아이는 작별을 배울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돌아올 수 있으면," 그녀는 그릇을 포개며 물었다. "어디로 돌아오실 겁니까. 나는 어디 있을지 모르는데.""북쪽에는 강이 하나뿐이오." 그가 말했다. "강을 따라가면 되오."강을 따라가면 되오. 그 말을 운설은 캐지 않고 받아 두었다. 두 사람은 짐을 꾸렸다.노인은 사립도 없는 움막 앞에서 배웅했다. "겨울 궁에 닿거든," 노인이 운설의 봇짐 끈을 여며 주며 말했다. "마님을 만나거든 — 부수가 돌을 다 못 쌓고 죽거든 마저 쌓아 달라고 여쭈어라. 그 말이면 된다."그 말이면 된다는 말의 뜻을
"— 베지 말고 살려 두어라. 쓸 데가 있으니."사백은 명의 뒷절을 마저 옮기고 입을 닫았다. 벼르던 칼이 도로 칼집에 드는 것 같은 침묵이었다. 살려 두라는 말이 이렇게 서늘하게 들리기는 처음이었다. 북쪽의 그이는 선우가의 핏줄을 미워하는 것도 아니었다. 쓸모를 셈하고 있을 뿐이었다.선우현도 그 말의 온도를 들었을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다만 아주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값이 매겨진 자가 값을 매긴 자에게 보내는, 기이하게 정중한 목례였다.기름종이 안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었다.하나는 서신이었다. 접힌 자리가 낡지 않은, 오래 기다렸다 급히 쓴 글씨. — 눈이 녹기 전에, 달이 두 번 이지러지기 전에, 겨울 궁으로 오라. — 서명은 없었다. 서명 대신 종이 끝에 핏빛 실 한 올로 이지러진 달이 감쳐져 있었다.다른 하나는 천 조각이었다.빛바랜 무명에, 색 죽은 실로 놓인 수. 이지러진 달 아래 아이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다. 한 아이는 크고 한 아이는 작았다. 바늘땀은 고르지 않았다. 수를 배운 손이 아니라, 다만 놓고 싶어서 놓은 손의 땀이었다."부인의 수다." 사백이 말했다. "강보의 귀퉁이야. 마님께서 십팔 년을 품에 지니셨다. 그 절반을…… 너에게 보내신 게다."절반. 운설은 천의 잘린 가장자리를 손끝으로 쓸었다. 가위가 아니라 칼로 자른 자리였다. 달 아래 아이 둘 가운데 작은 아이 쪽이 그녀의 손에 있었다. 큰 아이는 북쪽의 누군가에게 있을 것이었다."보름 뒤, 얼음강 나루에서 기다리마." 사백이 말에 올랐다. "그리고 하나 더. 중원이 시끄럽다. 맹이 영웅첩(英雄帖)을 돌린다더라. 재앙의 씨를 강호 공적으로 세우는 대회(大會)를 연다고. 수장에게는," 매의 눈이 선우현을 지났다. "소환령이 떨어졌다더군. 기한 안에 돌아오지 않으면 수장의 이름도 공적첩에 나란히 오른다고."세 기수는 올 때 그랬던 것처럼 소리를 죽이고 사라졌다.노인은 수 조각을 보고 오래 말을 잃었다. "부인께서 수를 놓으시면 늘 저 모양이었지.
말은 셋, 사람도 셋이었다.눈을 죽여 밟는 말발굽이 움막 앞에서 멎었다. 재갈에 헝겊을 물린 말들이었다. 소리를 지우고 달리는 법을 아는 자들, 그러니 지금 소리를 내며 온 것은 알리며 온 것이다. 노인이 문을 밀고 나갔고, 운설과 선우현이 뒤따랐다.앞선 기수가 말에서 내렸다. 여자였다. 눈보라에 그을린 낯에 왼 눈썹을 가르는 오랜 흉이 있고, 등에는 활, 허리에는 삭도(朔刀)라 부를 법한 휜 칼을 찼다. 나이는 마흔쯤. 눈매가 사냥매의 것이었다.달빛 아래에서 보니 세 사람의 가죽옷 안깃에 같은 문양이 박혀 있었다. 이지러진 달. 다만 신패의 달과 달리, 달의 안쪽에 가느다란 핏빛 실이 한 올 감쳐져 있었다. 같은 달을 쓰되 다르게 쓰는 사람들. 혈비라는 이름이 어떤 식으로 달을 쥐고 있는지, 그 한 올이 먼저 말해 주고 있었다."부수 어른." 여자가 노인에게 북방 말씨로 예를 올렸다. "봉화가 헛것이 아니기를 빌며 왔소.""헛것이면 늙은이가 삭정이만 축낸 게지." 노인이 운설 쪽으로 반걸음 비켰다. "보아라."매의 눈이 운설에게 옮겨 왔다. 두건 아래의 흰 낯을, 값을 매기는 법 없이, 그러나 한 치도 놓치지 않고 훑는 눈이었다. 이윽고 여자가 손을 내밀었다. "패."운설은 신패를 건넸다. 여자는 그것을 달빛에 비추고, 뒤집고, 이지러진 달의 획을 엄지로 쓸었다. 그러고는 도로 내밀며 말했다."진짜 패다. 한데 패는 죽은 손목에서도 벗겨 올 수 있지.""그렇겠지요." 운설은 패를 받으며 답했다. "제가 저를 증명할 길은 저도 모릅니다. 저는 제 피를 구경한 적도 없으니."매의 눈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그 대답을 예상 못 한 눈이었다. 여자는 품에서 작은 것을 꺼냈다. 손가락 두 마디 길이의, 누렇게 바랜 뼈피리였다."삭월의 아이들은 이 소리를 들으며 업혔다." 여자가 말했다. "피가 삭월이면, 몸이 기억한다."피리가 입술에 닿았다. 소리는 가늘고 낮았다. 곡조라 부르기도 어려운, 세 음이 오르내리는 짧은 가락이 눈 내린 골짜기에 풀렸
노인의 움막은 사당 뒤 바위틈에 붙어 있었다. 세간이라고는 화로 하나, 그릇 몇, 벽에 걸린 낡은 활 한 자루. 십팔 년을 산 살림이 하룻밤 살림처럼 가벼웠다.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자의 방이 아니라, 언제 죽어도 좋은 자의 방이었다.화롯불에 마른 뿌리차가 끓었다. 노인은 두 사람에게 그릇을 내밀고, 저는 마시지 않았다."그 밤 이야기를 해 달라 했지." 노인이 불을 보며 입을 뗐다. "눈부터 말해야겠구나. 초저녁부터 눈이 왔다. 발등이 묻히는 눈이었어. 그런 밤엔 늑대도 굴에서 안 나온다. 우리는 화덕에 겨를 넣고 일찍들 문을 닫았지. 사냥 나간 장정 서른을 빼면, 마을에 남은 건 아녀자와 늙은이, 그리고 아이들이었다.""정병 삼천은요." 운설이 물었다."삼천." 노인은 웃지 않았다. 웃음보다 오래된 것이 그 낯을 지나갔다. "삭월부가 다 긁어도 활 잡는 손이 오백이다. 그나마 절반은 사냥꾼이지 병(兵)이 아니야. 중원을 친다? 우리는 겨울을 나는 게 전쟁이었다."운설의 안에서 무언가가 천천히 식었다. 재앙의 씨. 침략의 핏줄. 그녀를 묶어 온 말들의 밑동이 이 화롯가에서 삭고 있었다. 성읍의 집법당주가 마당에서 외치던 죄목들, 방에 적힌 글자들, 화톳불 가의 이야기들 — 그 모든 것이 딛고 선 바닥이 삼천이라는 숫자 하나였다. 그리고 그 숫자를 지어낸 붓이 어딘가에 있었다.선우현은 그릇을 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기록을 외는 자의 낯이었다. 척후 보름, 정병 삼천, 국경 도발 세 차례. 그가 자란 집의 서고에서 몇 번이고 읽었을 글자들이, 화롯불 앞에서 하나씩 재가 되고 있었다."한밤에 잠이 깼다. 오줌이 마려웠는지 개꿈을 꿨는지, 그건 기억에 없어. 기억나는 건 이상한 고요다." 노인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이보게, 젊은이들. 낯선 것 수백이 마을을 에워싸면 제일 먼저 우는 게 무언지 아나.""개." 선우현이 말했다."개지. 삭월의 개들은 눈 밑의 쥐도 듣는다. 한데 그 밤에," 노인은 화로의 재를 부지깽이로 천천히 골랐다. "개들이 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