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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등불

Author: moominkiller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07-10 19:29:46

마룻바닥에 숯으로 그린 부교가 놓였다.

배 수백 척, 그 한가운데의 단, 단을 둘러싼 차일들. 혈비가 숯 조각으로 단 위에 동그라미 셋을 쳤다. 낭독될 공훈록. 끌려 나올 죄인.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늙은 관인.

"열여드레를 어디 있는지 몰라 못 꺼낸 책이다." 혈비가 말했다. "폐막에는 저들이 제 손으로 금고를 열어, 제 손으로 단 위에 올린다. 영웅들의 이름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원본과 죄인이 같은 단에 나란히 서는 때는 앞으로도 그날 하루뿐이다."

기수들이 숯 그림 둘레로 머리를 모았다. 배치가 하나씩 놓였다. 사백은 단이 내려다보이는 강안 곡루의 지붕. 우르와 여섯은 구경 배로 부교 동편. 나머지는 인파에 흩어져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는 낭독이었다. 선우현이 원본의 열두 줄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온 강호의 귀가 무기가 된다 — 그것이 언니의 판이었다. 칼을 뽑는 판이 아니라, 저들의 붓을 저들의 목에 대는 판.

"저는요." 운설이 물었다.

"너는 내 곁에 선다. 강안 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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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설야팔부 (雪夜八部)   80. 마지막 장 (간수문)

    차는 식게 두는 것이 좋았다. 간수문은 오래전부터 그렇게 마셨다.더운 것을 더운 채로 삼키는 자는 혀를 데고, 혀를 덴 자는 말이 급해진다. 급한 말이 사람을 몇이나 죽이는지, 집법당에서 마흔 해를 보낸 노인은 잘 알았다. 그래서 그는 찻잔에서 김이 다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검신이 들어섰다. 흰 등롱의 사자를 따라, 검도 없이, 빈 손목으로."닷새 만에 뵙는군." 간수문이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게. 차가 알맞게 식었네."선우현은 앉지 않았다. "낭독을 막으려 부르셨소.""막다니." 노인은 서운한 낯을 지었다. 반쯤은 진심이었다. "청하려 불렀네. 읽어 주시게. 내일, 단 위에서, 원본 그대로. 한 자도 빼지 말고 — 한 자도 보태지 말고."젊은 눈에 경계가 지나가는 것을 노인은 즐겁게 보았다. 목숨을 걸고 빼앗으러 온 것을 상이 먼저 내어 주면, 뺏으러 온 자는 제 손부터 의심하는 법이다. 간수문은 곁의 함을 끌어당겨 봉인을 보였다. 열두 줄이 든 책이 그 안에 있었다. 십팔 년 동안 세 명의 당주만 봉인을 만졌고, 그중 둘은 이미 흙 속이었다."다만 하나 청이 더 있네." 노인이 말했다. "열두 줄을 다 읽거든 — 마지막 장까지 넘겨 주시게.""마지막 장에 무엇이 있소.""읽으면 아네."검신은 오래 노인을 보았다. 그 눈이 무엇을 재고 있는지 노인은 알았고, 재어 봐야 답이 안 나온다는 것도 알았다. 젊은 사람은 결국 제가 하려던 일을 남이 허락해 준 것뿐이라고 셈을 접을 것이다. 그 셈이 틀린 자리가 어디인지는, 내일 단 위에서 알게 될 것이고.검신이 나간 뒤, 노인은 함 곁의 다른 서류를 들었다. 검신 선우현이 실성하였음을 증언하는 문서였다. 의원의 소견이 갖춰졌고, 증인 아홉의 수결이 이미 받아져 있었다. 인수를 눈밭에 버린 일, 반역의 무리와 어울린 일, 그리고 내일 단 위에서 하게 될 말들. 노인은 문서를 함 곁에 나란히 두었다. 참말은 미친 자의 입에 담겼을 때 가장 쓸모가 있었다. 거기까지

  • 설야팔부 (雪夜八部)   79. 홰나무

    닫힌 찻집의 뒷마당에는 홰나무 꽃이 지고 있었다.여기까지 오는 길에 운설은 세 번 길을 바꿨다. 무두장이 골목의 새 은신처에서 나올 때 우르가 눈을 찡긋하며 망을 서 주었고, 혈비에게는 바람을 쐰다고만 해 두었다. 언니가 속았을 리는 없었다. 속은 척해 주는 것과 막지 않는 것 사이 어디쯤의 침묵을 등에 받으며, 그녀는 꽃물 들인 낯으로 밤거리를 건너왔다.주인은 은자를 받고 일찍 문을 닫았고, 등도 내걸지 않았다. 늙은 나무 아래 평상 하나, 식은 차 두 잔. 그것이 전부인 자리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내일이면 온 강호가 물 무대로 모인다. 그 전야를, 도시는 아무것도 모르는 낯으로 흥청거렸고, 먼 저자의 불빛이 담 너머에서 물처럼 일렁였다."물으려다 만 것이 있소." 선우현이 말했다. "그 이름 말이오. 눈 설에 밤 야라 하였는데, 뜻을 물으면 실례가 되오.""눈 내리는 밤에 태어났답니다." 운설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낳자마자 눈밭에 놓였고요. 그 밤 눈이 그치지 않았으면 얼어 죽었을 아이라, 이름이 그리 되었다 합니다. 어머니가 지었는지 언니가 지었는지는, 언니도 말을 아낍니다.""눈밭에 놓인 아이에게 눈 이름을 주었군.""원망하라고 준 이름은 아닐 겁니다." 그녀는 조금 웃었다. "눈은 저를 죽이려던 것을 다 덮어 줬으니까. 얼리는 것도 눈이고 덮어 주는 것도 눈이라, 저는 아직 그 이름과 사이가 서먹합니다."홰나무 꽃 하나가 찻잔 곁에 떨어졌다. 눈 이야기를 하기에는 철이 글렀다고, 두 사람 중 누구도 말하지 않았다."북방 말로는 눈 오는 밤을 다르게 부른다 합디다." 그가 문득 말했다. "하늘이 소리를 거두는 밤이라고. 겨울 궁에서 들었소. 눈이 오면 세상이 조용해지는 것이, 하늘이 들으라고 그러는 거라고.""무엇을요.""땅에서 우는 소리를." 그는 잔을 비웠다. "그렇다면 눈 내리는 밤에 태어난 사람은, 우는 소리를 듣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 아니겠소. 그대가 의녀가 된 것이 우연은 아니었나 보오."운설은 도망칠 때

  • 설야팔부 (雪夜八部)   78. 이상 무

    "칼은 소금에 묻어라."혈비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 층이 소리 없이 뒤집혔다. 검과 활이 아래층 가마니 속으로 눕고, 그 위로 소금이 덮였다. 꾸려 둔 짐이 풀어헤쳐져 행상의 봇짐으로 바뀌고, 자던 자리가 펴지고, 등잔 곁에 주판과 장부가 놓였다. 대문의 세 번째 두드림이 울릴 때, 물 창고 이 층은 대회 대목을 보러 온 북방 소금 상단의 숙소가 되어 있었다."장사치는 관을 무서워한다." 혈비가 낮게 말했다. "무서워해라."아래층에서 눈먼 주인의 갈라진 목소리가 문을 열었다. 세든 사람들이야 있지, 조용한 장사치들인데, 하는 대답이 웅웅 울려 올라왔다. 층계가 여럿의 무게로 울었다.흰 무복이 넷 올라왔다. 앞선 자는 아직 젊었고, 웃을 때가 아닌데도 입가에 덧니가 비죽 나와 있었다. 뒤의 셋이 등불을 들어 방 안을 훑었다."북방 상단이 물 창고에 세를 들었군." 덧니의 감찰이 말했다. "객잔을 두고 왜.""대목이라 객잔 값이 금값입지요." 혈비의 말씨는 어느새 늙은 상단 안주인의 것이었다. 허리가 반 치 굽고, 소매가 겸손해졌다. "소금쟁이가 소금 곁에 자는 게 흉은 아니잖습니까."감찰이 방을 돌았다. 봇짐이 뒤집히고, 장부가 넘겨지고, 등불이 낯들을 하나씩 지나갔다. 운설은 두건 그늘에서 눈을 내리깔았다. 등불이 그녀 앞에서 한 박자 오래 머물렀다. 그 곁의 봇짐이 풀리고, 감찰의 손이 그 속에서 작은 것을 집어 올렸다.붉은 실을 세 번 매듭지은 끈이었다."북방 매듭이군." 감찰이 끈을 등불에 비춰 보았다. "요즘 뒷수로에서 재미난 일이 많았지. 물이 서고, 배가 가라앉고. 그 물목에서 이런 실이 나왔는데.""액막이입지요." 혈비가 받았다. "북방 계집들은 물 탈 때 그걸 찹니다.""액막이라." 감찰의 눈이 끈에서 운설에게로 옮겨 왔다. 덧니가 입가에서 사라졌다. 웃음기가 걷힌 낯으로, 그는 운설의 낯을 오래 보았다.운설도 그제야 그 낯을 알았다. 재작년 겨울, 청하의 의막. 앓아 눕던 누이의 병상 머리맡에서 밤을 새우던 오라비.

  • 설야팔부 (雪夜八部)   77. 등불

    마룻바닥에 숯으로 그린 부교가 놓였다.배 수백 척, 그 한가운데의 단, 단을 둘러싼 차일들. 혈비가 숯 조각으로 단 위에 동그라미 셋을 쳤다. 낭독될 공훈록. 끌려 나올 죄인. 그리고 그것들을 지키는 늙은 관인."열여드레를 어디 있는지 몰라 못 꺼낸 책이다." 혈비가 말했다. "폐막에는 저들이 제 손으로 금고를 열어, 제 손으로 단 위에 올린다. 영웅들의 이름을 기린다는 명목으로. 원본과 죄인이 같은 단에 나란히 서는 때는 앞으로도 그날 하루뿐이다."기수들이 숯 그림 둘레로 머리를 모았다. 배치가 하나씩 놓였다. 사백은 단이 내려다보이는 강안 곡루의 지붕. 우르와 여섯은 구경 배로 부교 동편. 나머지는 인파에 흩어져 신호를 기다린다. 신호는 낭독이었다. 선우현이 원본의 열두 줄을 읽기 시작하는 순간, 온 강호의 귀가 무기가 된다 — 그것이 언니의 판이었다. 칼을 뽑는 판이 아니라, 저들의 붓을 저들의 목에 대는 판."저는요." 운설이 물었다."너는 내 곁에 선다. 강안 인파 속에." 혈비가 숯을 내려놓았다. "물에는 어차피 못 서는 몸이다. 그리고 판이 어그러지면 — 그때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패는 너다. 어떻게 움직일지는 그때 일러 준다."마지막 패. 듣기 좋게 싸 놓은 말이라는 것을 운설은 알았다. 물마당에서 실려 온 아우를 폐막의 물가에서 떼어 놓는 방법을, 언니는 판 위의 말로 지어낸 것이다. 서운함을 삼키는데, 혈비가 숯 그림의 단을 손바닥으로 지우며 말을 이었다."운백천은 단 위에서 데려온다. 물속이 아니라." 언니는 그림에서 눈을 들지 않았다. "수뢰를 치면 네 아비는 구하고 판은 버린다. 단을 치면 둘 다 얻는다. 나는 두 판을 다 이겨 본 적이 있다."회의가 파한 뒤, 운설은 혈비를 따로 붙들었다. 폐막의 단 위에 아버지가 선다. 열두 줄이 읽힌다. 그중 세 줄에 아버지의 이름이 있다. 온 강호가 듣는 앞에서, 선봉으로, 물길을 연 자로. 그 낭독이 아버지를 구하는 판이면서 동시에 아버지를 베는 낭독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언니가

  • 설야팔부 (雪夜八部)   76. 맹세

    소문은 물보다 빨랐다.이튿날 저자에 나갔던 기수들이 저마다 같은 이야기를 물어 왔다. 뒷수로에서 물이 일어섰다더라. 벽처럼 섰다더라. 배 두 척이 흔적도 없이 가라앉았다더라. 어물전 좌판에서도, 대회 구경 배 위에서도, 사람들은 물 귀신과 강룡과 이무기를 놓고 내기를 걸었다. 창고 이 층의 서른 기만이 그 이야기에 아무 내기도 걸지 않았다.케테의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염색장이 골목의 볼모 집은 그대로였고, 북방 손들도 그대로였다. 사라진 것은 손끝 하나뿐이었다.한낮에 노새가 밖에서 돌아와, 운설에게만 작은 것을 건넸다. 무명실을 두 번 감아 지은 매듭이었다. 스무날의 눈길 끝에서 처음 배운, 두 사람만 아는 모양의."찻집 이 층입니다. 뭍길로만 닿는 집을 골랐답니다." 노새가 말했다. "물가 금지령을 어디서 들었는지, 다리를 안 건너는 길을 그려 보냈습니다."잇꽃 꽃물로 낯빛을 바꾸고, 두건을 내려 쓰고, 운설은 노새가 그려 준 뭍길을 걸었다. 골목 여섯을 꺾는 동안 심장이 여섯 번 다른 박자로 뛰었다. 목덜미가 서늘한 것은 겨울바람 탓으로 돌렸다. 돌리면서도, 바람이 없는 골목에서까지 서늘한 것은 어쩌지 못했다.찻집은 늙은 홰나무를 안고 선 목조 이 층집이었다. 아래층에는 대회 이야기로 낮부터 목청 높은 상인들이 그득했고, 그 소란이 좋은 가림막이 되었다. 층계는 낡아 세 칸째가 울었다.이 층, 창을 등진 자리에 그가 있었다. 흰 무복 둘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 둘을 어디 두고 왔느냐고 물으니, 찻집 주인에게 은자를 주고 뒷문 열쇠를 빌렸다는 답이 돌아왔다. 반역한 검신이 열쇠 하나로 빠져나오는 감시라면, 맹의 눈은 그를 가두는 시늉만 하는 중이었다. 가두는 시늉과 풀어 두는 셈 — 그 사이에 무엇이 있는지는 간수문만 알았다."변장이 늘었소." 선우현이 말했다. 시선은 찻잔에 둔 채였으나, 문이 열리는 순간 어깨의 선이 풀린 것을 운설은 보았다. "한데 걸음은 못 속이는군. 층계 세 칸부터 알았소.""물이 일어선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 설야팔부 (雪夜八部)   75. 부적

    낮은 말소리에 잠이 갈라졌다.천장의 서까래가 먼저 보였고, 소금 냄새가 뒤따랐다. 물 창고였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관자놀이에서 물마당의 소용돌이가 되살아나, 운설은 도로 누운 채 소리 나는 쪽으로 귀만 열었다."경비를 버렸고, 서른의 자리를 적에게 보였고, 마님의 아우를 물가로 끌어들였다." 혈비의 목소리였다. 높지 않아서 더 시린. "셋 중 하나로도 활을 거둔다. 할 말이 있나.""없습니다." 사백의 목소리는 젖은 채 말라 있었다."있습니다." 운설은 몸보다 목소리를 먼저 일으켰다.이 층의 눈들이 일제히 돌아왔다. 혈비가 창을 등지고 서 있었고, 사백이 그 앞에 무릎 꿇려 있었다. 활은 이미 곁의 기수가 받아 든 뒤였다. 운설은 벽을 짚고 일어나, 어젯밤을 처음부터 옮겼다. 다릿기둥의 붉은 실. 뼈피리의 가락. 건너오라는 손과, 그 손을 겨눈 살. 내 아우는 눈 밑에서 죽었다, 하던 말까지."사백이 끌어들인 게 아닙니다. 제 발로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물가에서 저를 건진 건" — 운설은 잠깐 말을 골랐다 — "저 사람의 등이었습니다."젖은 그물을 어깨에 감은 채 정신 잃은 사람을 업고 뒷수로를 걸어 돌아온 것은 사백이었다고, 나중에 우르가 일러 주었다. 혈비는 오래 말이 없었다. 그 눈이 사백에게서 운설에게로, 운설의 코 밑에 마른 핏자국으로 옮겨 갔다가, 다시 사백에게 돌아갔다."벌은 폐막 뒤에 받아라." 혈비가 말했다. "지금은 활이 모자란다."활이 사백의 손에 돌아갔다. 무릎을 펴는 사백의 낯에는 고마움도 억울함도 없었다. 다만 제 활을 받아 드는 손이, 여느 때보다 반 박자 느렸다."너는." 혈비가 운설을 향해 돌아섰다. "물가에 서지 마라. 배도 타지 마라. 폐막까지.""아버지가 물 가운데 있습니다.""그래서 하는 말이다." 언니는 그 말만 두고 계단을 내려갔다.물가에 서지 마라. 그 말이 오후 내내 가슴에 걸려 있었다. 수뢰는 물 한가운데였고, 폐막은 사흘 뒤였다. 물에 못 가는 딸과 물에 갇힌 아버지 사이에서 무엇이 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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