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겨울 궁의 붉은 문은 안에서 걸려 있었다.성벽 위 신료들은 황실 군이 가까이 왔으니 왕을 들일 수 없다고 했다. 혈비가 들어오면 삭월이 왕가의 죄를 인정한 꼴이 되고, 황실에 전쟁 구실을 준다는 말이었다.“내 궁에 내가 들어가겠다.”혈비의 목소리가 성벽을 울렸다. 사백이 왕패를 들어 올렸지만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야란이 수레 휘장을 열었다.“왕명으로 열 겁니까?”혈비는 손을 내렸다. 성문 앞에는 궁에서 쫓겨난 하인과 겨울 장터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에게 물었다.“월계단 아래 우물이 무엇에 쓰였는지 아는 자는 말해라.”처음에는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혈비가 왕좌에서 내려오겠다는 말도 하지 않았고, 말하면 용서하겠다는 약속도 하지 않았다. 그저 눈밭 한가운데 서서 기다렸다.늙은 빨래꾼이 먼저 손을 들었다.“밤마다 작은 옷이 아홉 벌씩 나왔습니다. 피와 푸른 약물이 묻었지요.”“왜 말하지 않았느냐?” 신료가 성벽 위에서 외쳤다.노파가 고개를 들었다.“말한 딸이 사라졌으니까.”그 뒤로 마부가 우물에 아이를 싣던 검은 수레를 보았다고 했고, 부엌데기는 한겨울에도 아홉 그릇의 죽을 쑤었다고 했다. 한 사람은 왕가가 병든 아이를 살린 곳이라고 믿는다며 우물을 열지 말라고 했다. 자기 아들이 그곳 약을 먹고 사흘 더 살았다는 까닭이었다.성벽 위 대신 하나가 왕가를 모욕하는 거짓말이라 외쳤다. 빨래꾼은 소매를 걷어 오래된 채찍 자국을 보였다. 피 묻은 옷을 태우지 않고 딸에게 보여 주었다는 이유로 맞은 상처였다.“내 딸은 그날 사라졌습니다. 대신 나리는 그때도 저 위에 있었지요.”대신이 얼굴을 숨겼다. 혈비는 사백에게 잡아 오라 하지 않았다. 성문이 열리면 사람들 앞에서 직접 답하라고만 했다.궁 안 젊은 병사들이 서로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왕가를 지켜야 한다는 자와 자기 누이가 작은 옷을 빨았다는 자가 창자루를 맞댔다. 문밖 사람들은 그 싸움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야란이 그에게 물었다.“아들 이름이 무엇입니까?”“소맥.”재 속
첫 화살은 수레가 아닌 앞길에 꽂혔다.멈추라는 경고였다. 혈비의 기병들이 활을 들었지만 야란의 수레가 먼저 옆길로 돌았다. 마을 나무꾼이 알려 준 폐사까지 반 리였다.사람들은 눈발 속에서 수레를 밀었다. 선우현은 뒤축에 어깨를 댔고 운설은 야란의 맥을 놓치지 않으려 수레 위에서 열두 숨을 셌다. 황실 군은 쫓지 않았다. 세 갈래 횃불만 폐사를 에워싼 채 밤을 기다렸다.무너진 법당에는 지붕 절반이 남아 있었다. 사백과 흑요가 번갈아 바깥을 지켰다. 혈비는 야란과 같은 불가에 앉지 않고 문 가까이에 자리 잡았다.운설은 어머니 약패를 온기 가까이 가져갔다. 옻을 녹이지 않으려고 손바닥 열만 썼다. 얼어 있던 막이 천천히 풀리자 긁혀 지운 글씨가 드러났다.첫 사흘은 왕가 명대로 약을 댐.운설의 손끝이 멎었다.다음 줄에는 넷째 날부터 열두 숨으로 되돌림이라 적혀 있었다. 달무리 부인은 처음부터 구하러 온 사람이 아니었다. 왕가 의원으로 처방을 따랐고, 세 아이의 맥이 무너지는 것을 본 뒤에야 거슬렀다.아래에는 첫 사흘 동안 죽은 아이 둘의 맥수가 적혀 있었다. 이름은 쓰지 못하고 빈 동그라미만 두 개였다. 운설은 어머니가 그 동그라미를 적을 때 무엇을 보았는지 상상했다. 죄를 깨닫기 전의 손과, 깨달은 뒤 훔친 열쇠가 같은 손에 있었다.야란이 약패를 보며 말했다.“부인은 매번 미안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왜요?”“그 말을 하면 제가 괜찮다고 답해야 할까 봐서였겠지요. 대신 다음 약을 바꾸고, 문을 열려고 했습니다.”운설은 그 이야기가 위로가 되는 것이 싫었다. 그런데도 어머니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에 더 아팠다.“어머니도 했네.”혈비가 문가에서 고개를 들었다.“끝에는 살리려 했다.”“끝만 어머니로 남길 수는 없어.”운설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어렵게 되찾은 어머니와 짧게 나눈 날들이 약패의 첫 줄에 눌렸다. 그녀는 어머니가 악인이기를 바라지 않았고, 아무것도 몰랐던 선인이기를 더 바라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혈비가 다가오려 하자 운설이 손
북문 밖에는 깃발 없는 수레가 일곱 대 서 있었다.야란의 약수레, 아홉 이름을 베낀 수레, 약재와 곡식을 실은 수레가 서로 다른 주인을 두었다. 혈비의 왕마차는 맨 뒤에 비어 있었다.“전하께서 어찌 평수레를 타십니까?” 삭월 신하가 물었다.“나는 말을 탈 것이다.”“그럼 왕마차는—”“따라오고 싶은 자가 있으면 타라.”아무도 타지 않았다. 왕을 모시는 자리로 북행의 높낮이가 갈리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결국 왕마차에는 야란이 누울 깔개와 물동이가 실렸다.한겸은 무한에 남았다. 장부 사본이 겨울 궁보다 먼저 삭월 각 마을에 닿게 하겠다고 했다. 연화도 백련제의 다친 사람과 빈 창고를 맡았다. 연도하는 부서진 길을 고치고 수레를 뒤따르겠다고 했다.“왕보다 늦게 오겠다는 건가?” 혈비가 물었다.“왕을 따라가는 길이 아니니까.”연도하가 답했다. 혈비는 그 말에 화내지 않았다.출발할 사람은 저마다 까닭을 적었다. 사백은 왕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썼다가 지우고, 겨울 궁 백성에게 화살이 닿지 않게 하려고 간다고 다시 적었다. 흑요는 야란 증언이 왕가 칼에 잘리지 않는지 보겠다고 했다. 묵할멈은 빈 종이에 재 묻은 손을 찍었다.고윤은 죄수 수레에 올랐다. 감시인 셋이 쇠줄을 서로 다른 바퀴에 묶었다. 황실로 달아나지도, 삭월 왕가에 입을 막히지도 못하게 한 매듭이었다.운설이 수레에 오르려 하자 선우현이 발판을 받쳤다. 그녀가 손을 잡고 올라간 뒤 놓지 않았다.“당신은 왜 가요?”“네가 가니까.”“그 답만 쓰면 장부에서 돌려보낼걸요.”선우현이 잠시 생각했다.“내가 죽인 사람 중 이름 없는 셋이 삭월 북쪽 출신이다. 그 가족을 찾고 싶다.”“그건 당신 까닭이고.”“그리고 네가 무너질 때 곁에 있고 싶다. 이건 내 욕심이다.”운설은 두 답을 모두 종이에 적었다. 마지막 줄에 자기 수결도 나란히 눌렀다.첫날 길은 늦었다. 야란이 한 식경마다 수레를 세웠고, 고윤 감시인들은 마을마다 장부 내용을 읽었다. 혈비의 기마대는 평소 반나절 거리를 하루
고윤은 황실 약전 첫 장을 바닥에 놓았다.“내가 처음 받은 것은 이 한 장이었다.”나머지 장은 그가 채웠다. 삭월 약패의 열두 숨을 여섯으로 줄였고, 한 몸이 견디지 못하면 다른 맥을 잇는 법을 더했다. 황실은 죄수와 전쟁 고아를 내주었다. 실패할 때마다 고윤은 사람 탓을 하거나 몸이 약했다는 줄을 적었다.황실 사자가 소리쳤다.“죄인의 자백일 뿐이다!”“그러니 황실 장부를 열어 확인하시오.” 선우현이 말했다.“역적에게 나라 약고를 내놓으란 말인가?”“그대는 방금 삭월 기록을 내놓으라 했소.”사자의 낯이 굳었다. 같은 칼날이 자기 쪽으로 돌아왔다.고윤은 열여덟 명부의 첫 이름을 짚었다. 처음에는 한 사람에게 한 물길만 넣었다. 일곱이 죽고 하나가 살아남자, 살아남은 몸을 다시 열한 사람에게 나눠 이었다. 규모를 키운 것은 삭월 처방에 없었다.“왜 멈추지 않았습니까?” 연화가 물었다.“두 번째 사람이 첫 번째보다 오래 살았다. 세 번째는 말까지 했다.”“그게 성공으로 보였습니까?”“그때는.”고윤은 성공이라 적은 날마다 실제로 잃은 것을 말했다. 오래 산 몸은 제 이름을 잊었고, 말을 한 사람은 다른 사람 목소리만 냈다. 그는 잃은 것보다 늘어난 날수를 셌다. 황실은 그 셈에 상을 내렸다.“명주에게도 그랬습니까?”고윤의 대답이 늦었다.“딸에게는 다를 줄 알았다.”“다르길 바란 거겠죠.” 운설이 말했다.“그래.”고윤은 그 말 하나만 고치지 않았다.“누가 명했지?” 혈비가 물었다.“선제의 약감과 당시 태자.”“지금 황제군.”“그 이름을 적으면 네 딸이 죽는다고 했지.” 황실 사자가 끼어들었다.고윤의 눈이 흔들렸다.“그래서 적지 않았다.”그는 딸을 지키려 했다는 말로 자기를 덮지 않았다.“대신 다른 집 아이 이름을 숫자로 만들었다.”야란은 침상에 기대 모든 말을 들었다. 고윤이 삭월 처방을 베꼈다면 그보다 앞서 약패를 황실에 넘긴 사람이 있었다.“누가 가져갔습니까?”고윤은 첫 장 뒷면의 흐린 수결을 가리켰다. 삭월
황실 사자는 군사보다 먼저 칙서를 펼쳤다.“삭월 왕가가 월하 그릇을 처음 만들었음이 드러났다. 그러므로 황실의 열여덟 관은 북방 사술을 막기 위한 구휼이었다.”백련제에 모인 사람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사자는 목소리를 더 높였다. 삭월의 약패와 아홉째 피리, 생존자 야란을 황실에 넘기라고 했다. 고윤은 삭월 술법에 속아 그릇을 재현한 의원이므로 수도에서 다시 심문하겠다고 했다.“죄를 베꼈으면 죄가 아니게 됩니까?” 명주가 떠난 빈자리에서 연화가 물었다.“황실은 사람을 살리려 했다.”“삭월도 같은 말을 썼을 겁니다.” 운설이 답했다.사자는 삭월 옛 왕가의 붉은 인장이 찍힌 약패를 들어 보였다.“그대들 스스로 증거를 내놓았다. 역적의 처방을 감추면 무한도 같은 죄를 진다.”혈비의 신하들이 칼을 뽑으려 했다. 혈비는 손을 들어 멈췄다. 삭월이 먼저였다는 사실을 부정해 왕국을 지킬 수는 없었다.“우리는 겨울 궁으로 가서 나머지 기록을 열 것이다.”“황실이 먼저 봉할 것이오.”“그대들 봉인이 무엇을 했는지는 열여덟 관이 보여 줬다.”사자 뒤로 궁수들이 늘어섰다. 전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으나 활시위가 사람들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사자는 백련제에 곡식을 들이는 남쪽 나루를 봉하겠다고 했다. 기록을 내놓지 않으면 사흘 안에 약재와 소금도 끊길 터였다. 물난리를 막 벗어난 사람들에게 칼보다 빠른 협박이었다.연화는 남은 창고 양을 셌다. 약재는 닷새, 곡식은 이레였다. 수레꾼들은 황실 깃발 아래 물건을 옮기면 길을 열어 주겠다는 제안을 받았다.늙은 수레꾼이 깃발을 받아 들더니 수레 덮개로 찢어 썼다.“우리 길은 우리가 고칩니다.”모두가 따르지는 않았다. 아이 셋을 먹여야 하는 마부 하나가 황실 쪽으로 갔다. 누구도 돌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그가 가져가는 약재와 남은 식솔 이름을 장부에 적었다. 두려움에 고른 길까지 배신 한마디로 지우지 않았다.한겸이 새 장부 사본을 여러 사람에게 나눠 주었다. 한 권을 빼앗아도 다른 손에서 읽을 수 있게
묵할멈이 화로를 엎었다.검은 재가 새 장부와 약패 사이로 쏟아졌다. 사람들이 놀라 물러났지만 그녀는 재 속에 두 손을 넣었다. 불씨가 남아 손바닥을 태워도 멈추지 않았다.“할멈!” 운설이 손목을 잡았다.묵할멈은 뿌리치고 가슴을 가리켰다. 내가 했다.그녀는 빈 종이를 펼쳐 재 묻은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렸다. 겨울 궁, 우물 아홉 개, 그 앞에 쌓인 명부. 젊은 묵할멈이 등잔을 넘어뜨리는 모습. 불길 속에서 어린 혈비와 강보에 싸인 운설을 안고 달아나는 달무리 부인.혈비가 그림 앞에 무릎을 꿇었다.“그 명부를 태운 사람이 너였느냐?”묵할멈이 고개를 끄덕였다.“왜 내게 말하지 않았지?”노파의 손이 왕관 모양을 그렸다가 손가락으로 짓밟았다. 왕가 사람들이 살아 있는 한 공주에게 말하면 아이도 기록과 함께 사라질 터였다. 왕가가 무너진 뒤에는 혈비가 그 왕좌를 되찾으려 했다. 죄를 말하면 멸문당한 삭월의 억울함까지 더럽힌다며 신하들이 입을 막았다.묵할멈은 그때마다 침묵을 골랐다. 처음에는 아이 둘을 살리기 위해, 다음에는 달무리 부인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 끝에는 혈비의 왕좌가 무너질까 두려워서였다. 같은 침묵이 해마다 다른 까닭을 입었다.그녀는 목의 오래된 화상 자국을 내보였다. 명부를 태운 밤 붙잡혀 뜨거운 재를 삼켰고, 그 뒤 말을 잃었다. 혈비는 자신을 지키다 다친 충성의 상처로만 알고 있었다.“내가 네 상처를 훈장으로 만들었구나.”묵할멈이 혈비 손을 밀어냈다. 지금도 자기 죄를 왕의 슬픔으로 바꾸지 말라는 뜻이었다.“나를 지키려고?”묵할멈은 혈비와 운설을 번갈아 가리켰다. 두 공주를 지키고 싶었다. 달무리 부인이 맡긴 아이들을 또 우물에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야란이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그래서 우리 이름도 태웠습니까?”묵할멈의 어깨가 무너졌다. 그녀는 바닥에 이마를 찧으려 했다. 야란이 마른 발로 그 앞을 막았다.“절하지 마세요. 이름을 돌려주세요.”묵할멈은 울음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입을 벌린 채 목에서 공기만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