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이번에는 엘리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서로의 문장을 끝까지 설명하지 않아도 의도가 조금씩 맞아가기 시작했다.그 사실을 느끼고도 두 사람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천명몽도 없었다.접촉도 없었다.현재의 신뢰는 그런 방식으로 늘어나는 중이었다.밤이 완전히 내려온 뒤 흰 뿔의 왕이 폐병원에서 두 시각 거리까지 접근했다.7번 유생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왕을 기다리는 것처럼 북서쪽 도로 끝에 몸을 낮추고 있었고,함께 나온 유생 일곱 마리도 주위에 흩어져 있었다.하겐은 병력을 더 뒤로 물렸다.왕과 유생 사이에서 싸움을 시작하게 만들 이유가 없었다.문제는 폐병원 지하에 남은 개체들이었다.
미하일은 부상자를 바로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외부 세척구역에서 의복을 벗기고, 방향감각과 간단한 계산을 먼저 확인한 뒤 치료실로 옮겼다. 엘리시아는 상처에 성흔을 쓰지 않았고 봉합과 진통제로 충분하다는 미하일의 판단을 따랐다.“오늘도 제 차례는 없네요.”엘리시아가 마른 목소리로 말하자 미하일은 실을 정리하며 대답했다.“전쟁 중에 성녀님이 할 일이 없는 날이면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는데,요즘은 성녀님이 신성력을 안 써도 일이 산더미라 기준을 바꿔야겠습니다.”“그건 저도 동의합니다.”그녀는 웃음이 거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가만 움직였다.잠시 뒤 황도에서 왕핵 감정장비 추가 지원 여부를 묻는 통신이 왔다.예전이라면 엘리시아가 먼저 필요 없다고 거절했을지도 몰랐다.이번에는
맞았다.흑갑은 한 사람의 정체가 아니었다.특정 직무를 몸에 덮어씌우는 회수체계였다.착용자는 바뀌어도 번호와 역할은 남았다.레나르트가 흑갑 기사로 보였던 이유는 그가 오랫동안 7번을 입고 있었기 때문이지,그가 처음부터 그 역할을 선택했기 때문이 아니었다.엘리시아는 법무관에게 말했다.“흑갑 기사 ‘정체’를 사람 이름 하나로 쓰지 마세요.공식 기록에는 역할체계로 먼저 분류합니다.레나르트 씨의 개별 책임은 그가 실제로 한 행동만 따로 보고요.”그 결정은 바로 기록됐다.수십 년 동안 이름 없는 사람을 하나의 검은 기사처럼 보이게 만들었던 구조가처음으
두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약은 없었다.엘리시아는 치료소의 이동계획을 먼저 확인했다.폐병원과 현재 치료소 사이에는 충분한 거리가 있었지만,만약 백각수 유생들이 남동쪽으로 움직이면 수송로 하나가 겹칠 수 있었다.그녀는 모든 환자를 미리 옮기지 않고,이동 가능한 환자 열한 명만 서쪽 공회당으로 먼저 분산했으며중환자 네 명은 현재 치료소에 남겼다.이레나가 물었다.“성녀님도 공회당으로 이동하시겠습니까?”엘리시아는 지도와 환자표를 번갈아 본 뒤 고개를 저었다.“지금 제가 옮기면 의료인력까지 같이 움직이려고 할 겁니다.현재 치료소가 위험선에 들어오면 그때 가죠.”
폐병원 지하에서 수십 개의 생체 반응이 동시에 켜졌다는 보고가 올라온 뒤,로스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병원 주변에 사람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이미 그 근처에 사람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는 일이었다.전날부터 폐병원은 회각충과 수면이끼 때문에 접근금지 상태였지만,장비를 회수하거나 약초를 찾으려고 몰래 들어간 사람이 있을 가능성까지 없다고단정할 수는 없었다. 베른하르트는 최근 사흘간의 출입기록과 북서쪽 순찰보고를 한꺼번에 대조했고, 하겐은 성문 경비대에 사람 이름을 캐묻는 대신 마지막으로그 지역을 다녀온 수레와 발자국이 있었는지만 확인하게 했다.다행히 민간인의 최근 진입 흔적은 없었다.문제는 지하에서 깨어난 것들이 무엇이든, 수면이끼 군락의 습도를 낮추기 위해열어둔 배수판 때문에 활동조건이 바뀌었다는 점이었다.로스테가 회각충과 생체낭의 이동을 줄이려고 선택한 조치
세레나는 그 사실만 기록했다.실종이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확인이 필요했다.그런데 기록 담당자가 장부 마지막 장을 펼쳤다.“그리고 이게 제일 이상합니다.”날짜는 한 달 전.환자 발생이 급격히 늘기 시작하기 전이었다.루멘 성전 북부 지원국에서 제5광산촌 치료소로 보낸 행정 지침 사본.‘은빛 혈관·고열·배뇨 감소 동시 발생 시‘백휘석 노출 의심’ 표현 사용 금지.’그 아래.‘개별 질환으로 분리 기록할 것.’그리고 마지막 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