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이건 무엇입니까?”
“황제 폐하께서 보내신 결속 관련 원본 사본입니다.
황실 보안문서도 모두 열람 허가가 내려왔습니다.”
엘리시아는 상자를 바로 열지 않았다.
“언제 명령하셨죠?”
“오늘 아침 일곱 시 조금 넘어서입니다.”
그녀가 기록보관실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칼릭스는 엘리시아가 어떤 자료를 요구할지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움직였다.
하지만 그것이 배려인지, 자신이 유리한 문서만 먼저 골라 보낸 것인지는 아직 판단할 수 없었다.
엘리시아는 봉인의 번호부터 확인했다.
“봉인 목록과 반출 기록도 주세요.”
서기관이 준비한 장부를 내밀었다.
번호가 일치했다. 상자는 황제 집무실이 아니라 황실 중앙문서고에서 직접 봉인됐고,
레온하르트 재상이 입회했다. 중간에 칼릭스 혼자 내용을 바꿀 수 있는 구조는 아니었다.
엘리시아가 직접 봉인을 잘랐다.
상자 안에는 결속 준비 문서와 성녀 거처 규정,
결속 후 황후 예정자의 생활지침이 순서대로 들어 있었다.
그중 가장 아래에 낡은 장부 하나가 놓여 있었다.
열네 살 때 대신전에 들어가며 작성했던 성녀 선발 동의서였다.
엘리시아는 자신의 어린 서명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획이 서툴렀고 마지막 글자가 작았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성녀가 되면 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다는 말만 믿고 이름을 적었다.
그 서명 아래로 작은 조항이 이어졌다.
‘성녀로 선발된 자는 제국의 안정을 위하여 황제와의 결속 의무를 수락한다.’
결속 상대도, 시기도, 거부 절차도 적혀 있지 않았다.
다음 페이지에는 더 짧은 문장이 있었다.
‘성녀가 별도의 거부 의사를 제출하지 않는 경우, 침묵은 결속 동의의 유지로 간주한다.’
엘리시아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한 번은 성녀로서, 한 번은 처형당한 사람으로서.
전생의 자신은 결속을 원했다. 칼릭스를 사랑했고,
그와 함께라면 제국의 의무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원했다는 사실이 선택할 기회를 받았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녀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결속을 두려워했거나, 황제를 싫어했거나, 다른 삶을 원했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미 동의한 사람이 됐을 것이다.
엘리시아는 장부의 가장자리를 잡았다.
손가락이 조금 떨렸지만 종이를 구기지는 않았다.
“이레나.”
“예.”
“법률관을 불러주세요.”
“황실 법률관입니까, 대신전 법률관입니까?”
“둘 다요. 로젠베르크가의 법률대리인도 부르세요.”
이레나는 엘리시아의 얼굴을 살폈다.
“오늘 안에 모두 모으시겠습니까?”
“가능하면요.”
“무엇을 준비하라고 전할까요?”
엘리시아는 오래된 서명 아래 놓인 문장을 손끝으로 가렸다.
침묵은 동의로 간주한다.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문장은 이미 머릿속에 남았다.
“결속 거부서를 준비하라고 하세요.”
기록관의 숨이 짧게 멎었다.
황실 서기관들이 서로를 바라보았고,
이레나의 손도 검집 위에서 움직임을 멈췄다.
엘리시아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내일 오전, 공개 기록이 남는 장소에서 제출하겠습니다.”
“황제 폐하께 먼저 알리지 않으셔도 되겠습니까?”
이레나의 질문에는 만류보다 절차에 대한 확인이 담겨 있었다.
엘리시아는 상자 위에 놓인 칼릭스의 명령서를 펼쳤다.
그곳에는 짧은 문장이 적혀 있었다.
‘당사자 의사 확인 전 집행 금지.’
황제의 서명과 오늘 날짜가 선명했다.
엘리시아는 그 글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문서를 다시 상자 안에 넣었다.
“알리지 마세요.”
그녀가 낡은 동의서를 덮었다.
“이번에는 제가 먼저 말하겠습니다.”
셀레스틴이 설계해오던 분산 신관망이 아직 완성된 제도는 아니었지만,그 원칙을 지금부터 적용할 수 있었다.왕핵이 중앙의 하나의 목록을 읽어 대체 그릇을 찾지 못하도록 정보를 흩어놓는다.황도 신전은 즉시 각 지역 신관청에 통지를 보냈다.현 성녀 외 고신성 적합자 생체자료의 중앙 전송 임시 중단.이름과 혈액·성흔 자료는 지역 보관.중앙에는 인원수와 상태만 보고.강제 이동 금지.검사 역시本人 동의 없이는 진행하지 않는다.왕핵 보정 때문에 사람들을 한곳에 모으는 순간, 같은 구조를 더 크게 만드는 셈이었다.후보 17의 저장값을 없애는 문제는 더 복잡했다.그 기록은 단순한 신전 파일이 아니었다.왕핵 제4층 안쪽에 복제값이 들어가 있었다.
황실 예배실.신관들의 목소리.황제와 성녀의 이름이 나란히 불리고,제국의 안정을 위해 둘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던 순간.당시에는 그것이 오래된 신성의식이라고 생각했다.이제 도면 위에는 그 장엄함이 모두 지워져 있었다.남은 것은 황제의 심박을 읽는 선, 성녀의 신성력을 읽는 선,두 값을 비교하는 공명판, 부족한 쪽에 부하를 더 보내는 보정장치였다.엘리시아는 왼손목 안쪽을 눌렀다.한 번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내쉬었다.네 번째 호흡까지 마친 뒤에야 입을 열었다.“증거를 보존하면서 선만 분리할 수 있습니까?”테사가 황도 기술관과 회선을 공유해 구조를 확인했다.
로스테에서 치료를 받았던 기록 전체가 넘어간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성흔의 과열 여부, 신성력 사용량, 순환 이상 유무처럼 ‘성녀 기능’으로 분류된 값은 중앙신전의 자동 보고항목에 포함돼 있었다.엘리시아는 문서를 읽다가 손가락으로 표 가장자리를 천천히 눌렀다.“제가 치료받은 기록이 왕핵에 쓰인다는 동의는 한 적이 없는데요.”신전 법무관이 답하지 못했다.그 기록전송은 불법적으로 새로 설치된 장치가 아니었다.오래전부터 정상 업무로 취급돼온 절차였다.성녀가 사람이 아니라 제국 기능으로 분류되는 순간 의료정보도개인의 것이 아니라 관리정보가 되었다.엘리시아가 목소리를 낮췄다.“전송을 지금 끊을 수 있습니까?”“가능합니다. 다만 중앙신전 의료규정상 현 성녀의 상태보고를 중단하려면 신전의회 승인이 필요합니다.”“왕핵이 그 자료로 제 몸을 찾고 있는데도요?”법무관이 잠시 말을 고르다 답했다.“긴급위험으로 판단하면 임시차단은 가능합니다.”“그럼 임시차단부터 해주세요. 영구 폐기 여부는 절차대로 따로 결정하고요.”엘리시아는 황제 명령이나 성녀 권위를 앞세워 기록을 지우라고 요구하지 않았다.당장 왕핵이 이용하는 길은 막되, 누가 어떤 자료를 얼마나 보관할 수 있는지는 별도 법적 문제로 남겼다.몇 분 뒤 중앙신전 의료망에서 현 성녀 기준표의 자동 갱신이 중단됐다.왕핵 제4층 화면에서도 첫 번째 변화가 나타났다.후보 17의 오래된 적합값은 남아 있었지만, 현재 대상 확인에 사용하던 신전 의료경로가 응답 없음으로 바뀌었다.그러나 강제 결속 보정 절차는 멈추지 않았다.왕핵은 다음 경로로 넘어갔다.이번에는 중앙신전이 아니라 황궁 안에 남은 결속식 준비시설이었다.현재 의식은 취소된 상태였지만, 황궁 동쪽 예배실 아래에는 황제와 성녀의 왕핵 반응을 동시에 읽기 위한 결속판이 아직 철거되지 않고 있었다. 의식 자체를 하지 않는다고 결정한 뒤에도 시설은 증거와 연구자료라는 이유로 봉인된 채 남아 있었다.칼릭스는 보고를 받자 예배실을 바로
로스테에서 이미 끊어낸 성녀 표본 중계선과 성녀 묘역의 오래된 수집망이 그 말과 동시에 떠올랐다.북부에서 끊은 장치들이 단순한 표본 저장시설만은 아니었다.왕핵 심층부에서 보조 그릇을 찾을 때 현재 성녀와 연결하기 위한 외부 확인선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던 것이다.그러나 그 대부분은 이미 폐기되거나 끊겨 있었다.제4층 화면에서 첫 번째 연결시도가 실패했다.두 번째도 응답 없음으로 끝났다.세 번째는 로스테의 성녀 묘역 옛 중계선을 찾았지만, 현행 지역 조례에 따라 차단된 상태였다.테사는 숨을 조금 내쉬었다.“현재는 못 찾습니다.”도미니크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왕핵은 한 번 실패했다고 그만두지 않습니다.”벽면에서 다음 검색경로가 열렸다.이번에는 북부가 아니었다.황도 신전 중앙보관소.현행 규정상 성녀의 현재 생체표본을 중앙에 보관해서는 안 됐지만,십일 년 전 자료 전체가 실제로 폐기됐는지는 아직 완전히 확인되지 않은 장소였다.엘리시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중앙보관소를 봉인해주세요. 사람부터 들이지 말고 출입기록과 현재 저장목록부터 원격으로 확인합니다.”칼릭스가 같은 화면을 보고 있었다.그는 성녀를 황도로 부르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대신 법무부에 보관소 긴급 봉인영장을 신청하게 했고, 현재 엘리시아의 혈액이나 성흔 표본을 누구도 새로 채취하지 못하도록 기존 금지명령을 재확인했다.왕핵은 오래된 규칙대로 불안정한 황제 옆에 ‘보조 그릇’을 붙이려 하고 있었다.그리고 저장기록 속 후보 17이 적합 판정을 받는 순간, 내부벽에 더 오래된 절차명이 드러났다.도미니크는 그 글자를 보는 즉시 눈을 감았다.엘리시아는 감정을 설명하지 않은 채 화면을 끝까지 읽었다.그곳에는 사랑도, 신탁도, 운명도 적혀 있지 않았다.사람 둘을 제국 안정장치로 묶는 기술적인 명칭만 남아 있었다.‘황제 닻-성녀 그릇 강제 결속 보정 절차.’왕핵은 칼릭스의 잃은 수명을 되돌릴 수 없었다.대신 부족하다고 판단한 몫을, 다른 사람의 몸으로 메우려
세 보조선이 순서대로 내려갔다.황궁 안쪽 자동경보석 일부가 꺼지고,동부 역참의 실시간 왕핵 신호가 일반 봉화와 기계식 통신으로 전환됐다.관리원 지하에서는 환기장치가 멈추며 기술자들이 수동 펌프를 돌리기 시작했고,그 과정에서 낡은 압력관 하나가 터져 뜨거운 증기가 쏟아졌다.가까이 있던 기술자 한 명이 팔에 화상을 입었다.중상은 아니었지만 작업에서 즉시 빠졌다.의료진이 그를 옮기는 동안 보조선 차단은 잠시 중지됐고,누구도 ‘거의 끝났으니 계속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교대 인력이 들어온 뒤 마지막 선이 내려갔다.제4 명령층의 보정값이 크게 흔들렸다.칼릭스의 절명흔 통증도 그 순간 한 번 높아졌지만,주치의가 기록한 수
무인관측기는 왕핵관리원에서 쓰던 작은 궤도수레를 개조해 만들었다.사람의 손보다 느렸지만 온도, 방향성, 지맥압, 왕핵 잔류량을 한꺼번에 측정할 수 있었고앞쪽에는 문을 밀거나 작은 물체를 집을 수 있는 두 개의 기계팔이 달려 있었다.법무 감시관이 제4 명령층 외부에서 작동기록을 봉인한 뒤,기술관 둘이 오래된 유지통로의 잠금을 풀었다.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나온 것은 열기가 아니었다.아주 차가운 공기였다.십일 년 동안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공간인데도 내부에는 약한 기류가 있었고,바닥에는 사람이 지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오래된 먼지 위에 최근 발자국이 찍힌 것은 아니었지만,십일 년 전 조사팀이 사용했던 바퀴자국과 끌린 금속흔적이 아직 그대로 굳어 있었다.관측수레가 첫 모퉁이를 돌자 벽면에 정비갑 보관대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