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1월이 되자 출국 날짜는 금방 다가왔다.애리는 공항 한가운데 서서 전광판을 올려다봤다.런던.목적지 옆에 적힌 도시 이름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정말 가는 것 같았다.“여권 잘 챙겼어?”엄마의 말에 애리가 가방을 열어 확인했다.“응.”“지갑은?”“있어.”“핸드폰 충전기는?”“있어.”옆에 있던 아빠가 말했다.“아까 집에서도 다 확인했잖아.”엄마가 아빠를 봤다.“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애가 열아홉이야.”“열아홉이면 여권 안 잃어버려?”애리가 웃었다.“안 잃어버려.”아빠가 캐리어 손잡이를 애리에게 넘겼다.“가서 연락 잘하고.”“응.”“도착하면 바로 전화해.”“응.”“줄리안 만났다고 연락 끊지 말고.”애리가 아빠를 쳐다봤다.“나 원래 연락 잘하거든?”“그래. 잘하니까 계속 잘해.”엄마가 물었다.“몇 시간 걸린다고 했지?”“일곱 시간 정도.”“가서 바로 공연 보러 가는 건 아니지?”“아니. 공연은 이틀 뒤야.”아빠가 말했다.“그럼 가서 좀 쉬어.”“알았어.”탑승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애리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았다.“나 이제 들어갈게.”엄마가 먼저 애리를 안아줬다.“재밌게 놀다 와.”“응.”“조심하고.”“알았어.”엄마에게서 떨어진 애리가 아빠를 봤다.“아빠도.”“내가 뭘.”“회사에서 너무 늦게까지 있지
겨울방학이 시작되자 애리는 뉴헤이븐을 떠났다.당분간 학교에 올 일이 없어서 기숙사에 있던 물건도 몇 가지 챙겼다.대부분은 뉴저지로 가져갔고, 일부는 뉴헤이븐 집에 그대로 두었다.어느 쪽에도 애리의 물건이 있었다.처음에는 기숙사 방 하나로 충분했는데 어느새 짐이 세 군데로 나뉘어 있었다.애리는 트렁크를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이걸 언제 다 정리하지.”당장 정리할 생각은 없었다.어차피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다시 뉴헤이븐으로 돌아올 예정이었다.차에 올라타려는데 핸드폰이 울렸다.줄리안이었다.“응.”“뭐 해?”“집 가려고.”“뉴저지?”“응. 지금 출발하려고.”“그럼 뉴욕 와.”애리가 차 문을 열다 말고 물었다.“왜?”“나 뉴욕이야.”“언제 왔어?”“오늘.”“공연은?”“며칠 쉬어.”애리가 웃었다.“진짜 크리스마스에 왔네.”“온다고 했잖아.”“아마라고 했거든?”“왔으면 됐지.”애리는 운전석에 올라탔다.“근데 나 집 가야 돼.”“왜.”“방학 시작했으니까.”“내일 가.”“싫어.”“왜.”“엄마한테 오늘 간다고 했어.”전화기 너머로 줄리안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애리가 시동을 걸며 물었다.“왜.”“그럼 내가 갈게.”“어디를?”“뉴저지.”“우리 집?”“응.”애리가 바로 웃었다.“미쳤어?”“왜.”“갑자
12월이 시작되고도 류정호의 퇴근 시간은 좀처럼 빨라지지 않았다.그날도 사무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몇 명 되지 않았다.류정호는 책상 위에 놓인 서류를 다시 넘겼다.이미 여러 번 확인한 내용이었다.문제는 거래 자체보다 그 이후였다.며칠 전부터 당시 승인 과정에 대한 자료를 다시 제출하라는 요구가 이어지고 있었다.노크 소리가 들렸다.“들어와.”문이 열리고 직원 한 명이 들어왔다.“부장님.”“응.”직원이 서류 한 묶음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요청하신 자료입니다.”류정호가 맨 위에 놓인 문서를 확인했다.“이게 전부야?”“네. 당시 결재 올라갔던 자료까지 다 넣었습니다.”“본사 쪽에서는?”직원이 조금 망설였다.“추가로 확인해 달라는 게 있습니다.”류정호가 고개를 들었다.“뭔데?”“최종 승인 전에 부장님께서 검토하셨던 내용이요.”“그것도 지난번에 보냈잖아.”“저도 그렇게 말씀드렸는데 다시 달라고 합니다.”류정호는 아무 말 없이 직원을 바라봤다.“알았어.”직원은 그대로 서 있었다.류정호가 물었다.“왜?”“괜찮으십니까?”“뭐가.”“계속 같은 자료를 요구하니까요.”류정호가 서류를 덮었다.“확인할 게 있나 보지.”“그래도….”“달라는 거 다 줘.”“네.”“우리가 문제될 거 한 것도 없잖아.”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습니다.”문이 닫히고 사무실이 다시 조용해졌다.류정호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추수감사절 연휴가 끝나고 애리는 뉴헤이븐으로 돌아왔다. 며칠 비워둔 집은 조용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 불을 켜자 거실은 떠날 때와 달라진 게 없었다. 소파 위에는 교재가 놓여 있었고, 테이블 한쪽에는 줄리안이 두고 간 잡지 몇 권이 쌓여 있었다. 애리는 가방을 내려놓고 코트를 벗었다. 혼자 들어오니 집이 더 크게 느껴졌다. 기숙사로 갈까 생각했지만 금방 마음을 바꿨다. 룸메이트와 좁은 방을 나눠 쓰는 것보다는 여기가 나았다. 애리는 가져온 옷을 위층에 가져다 놓고 다시 내려왔다. 저녁을 먹고 과제를 시작했을 때 핸드폰이 울렸다. 줄리안이었다. “응.” “뭐 해?” “과제.” “또?” “학생이 과제하지 그럼 뭐 해.” “나랑 통화해.” 애리가 웃었다. “하고 있잖아.” “과제 말고.” “오빠는 뭐 하는데?” “호텔.” “공연 끝났어?” “응.” 애리는 노트북 화면에 시선을 둔 채 물었다. “오늘 어디였지?” “디트로이트.” “내일은?” “시카고.” “또 이동해?” “아침에.” 애리는 펜을 내려놓았다. “힘들겠다.” “괜찮아.” “잠은?” 전화기 너머가 조용해졌다. 애리가 바로 물었다. “또 못 잤어?” “좀.” “얼마나?” “세 시간?”
뉴저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거의 넘어간 뒤였다.보스턴에서 출발한 지 네 시간이 훌쩍 넘었다.중간에 한 번 쉬기는 했지만 추수감사절을 앞둔 도로는 평소보다 차가 많았다.애리는 차를 세우고 한동안 운전석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힘들어.”혼잣말을 하고 나서야 안전벨트를 풀었다.차에서 내려 가방을 챙겨 현관으로 향했다.문을 열자 익숙한 냄새가 먼저 났다.애리가 신발을 벗으며 안쪽을 바라봤다.“엄마?”주방에서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다.“왔어?”“응.”“왜 이렇게 늦었어?”“차 막혔어.”애리는 가방을 현관 옆에 내려놓았다.“뭐 해?”“내일 먹을 거.”주방으로 들어가자 식탁 위에는 이미 재료가 잔뜩 올라와 있었다.불려놓은 당면과 손질한 채소가 보였고, 한쪽에는 전을 부칠 재료가 준비되어 있었다.애리가 냉장고를 열어 물을 꺼냈다.“이번에도 한국 음식 해?”“그럼 뭘 해.”“칠면조.”엄마가 애리를 한번 봤다.“먹고 싶어?”“아니.”“그럼 됐지.”애리가 웃었다.“뭐 하는데?”“잡채하고 갈비찜. 전도 좀 하고.”“송편은?”“사 왔어.”
다이너에서 나온 건 새벽 한 시가 가까워진 뒤였다. 지율과 샬롯, 이안은 먼저 하버드로 돌아가기로 했다. “조심해서 가.” “너도.” 짧게 인사를 나눈 뒤 세 사람이 먼저 차에 올랐다. 마커스와 노아도 곧 자리를 떠날 준비를 했다. 마커스가 줄리안에게 물었다. “너는?” “나는 목요일에 따로 갈게.” 마커스는 애리를 한번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노아도 대충 손을 흔들고 차에 올라탔다. 두 사람이 떠나고 나자 애리가 줄리안을 봤다. “나 진짜 여기 있어?” “응.” “내 차는?” “내일 가지러 가.” “옷도 없는데.” “내 거 입어.” 대답이 막힘없이 나왔다. 애리가 눈을 가늘게 떴다.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지?” “네가 올 줄도 몰랐는데 어떻게.” 그건 맞았다. 애리가 할 말을 잃자 줄리안이 웃었다. “가자.” 애리는 결국 그의 손을 잡았다. 호텔은 공연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투어팀이 머무는 곳이라 늦은 시간에도 로비에 익숙한 스태프들이 몇 명 보였다. 줄리안과 애리가 들어오자 몇 사람이 인사를 건넸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애리가 물었다. “사람들 다 아는 거 아니야?” “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