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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집

Penulis: Jino
last update Tanggal publikasi: 2026-10-17 12:14:08

집까지는 걸어서 이십 분이었다. 서아와 함께라면.

혼자 걸으니 십이 분이 걸렸다. 아마도. 시계는 8시 53분에서 움직이지 않았으니 알 수 없었다. 나는 걸음 수를 셌다. 어린이집 앞 골목에서 우리 아파트 단지 입구까지 천육백사십 걸음. 세다가 두 번쯤 틀렸으니 천육백 몇십 걸음.

오는 길에 서아가 멈추는 곳들을 지났다.

빵집 앞 유리창. 진열대에 소보로빵이 놓여 있었다. 서아는 소보로의 울퉁불퉁한 껍질을 좋아해서 늘 유리에 코를 박고 들여다봤다. 유리에 작은 코 자국이 있을까 싶어 들여다보았는데, 없었다. 오늘은 여기서 안 멈췄으니까.

파란 대문 집. 고양이는 없었다. "냥이 출근." 서아의 목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들리는 것 같았을 뿐이다. 실제로 들리는 건 내 발소리뿐이었다.

전봇대 밑 민들레. 노란 꽃 세 송이가 있었다. 한 송이가 바람에 기운 채 멈춰 있었다. 바람은 없는데 기울어 있었다. 53분에 불던 바람의 모양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 정문은 사람 대신 차단기만 서 있었다. 경비실이 비어 있었다. 경비 아저씨의 라디오가 책상 위에 놓여 있었다. 소리 없이.

우리 동은 108동, 12층.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버튼을 눌렀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위 숫자판도 까맸다. 당연했다. 이것도 머리를 쓰는 기계였다.

계단을 올랐다.

12층까지 계단으로 올라가 본 건 이사 온 날 이후 처음이었다. 그날은 엘리베이터 점검 날이었다. 해인은 만삭이었고, 나는 해인의 가방과 내 가방과 화분 두 개를 들고 올라갔다. 해인은 7층에서 한 번 쉬고, 10층에서 한 번 쉬었다. 10층 계단참에 앉아서 해인이 말했다.

"우리 애는 엘리베이터 고장 나도 안 쉬고 올라가는 튼튼한 애로 키우자."

그 계단참을 지났다. 나는 쉬지 않았다. 쉬면 안 될 것 같았다.

1201호 앞에 섰다.

현관문은 도어락이었다. 번호를 누르는 전자식. 나는 번호판에 손을 댔다.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눌러도 삑 소리가 나지 않았다.

잠겼다. 당연했다.

나는 문 앞에 한참 서 있었다. 우리 집 문 앞에서. 들어갈 수 없는 우리 집.

그러다 기억났다. 도어락에는 비상 열쇠 구멍이 있다. 배터리가 나갔을 때를 위해서. 번호판 아래 작은 덮개를 밀면 열쇠 구멍이 나온다. 그리고 그 열쇠는, 해인이 잔소리해서 내 차 열쇠 꾸러미에 달아 둔 게 있었다.

주머니를 뒤졌다. 열쇠 꾸러미가 나왔다. 회사 사물함 열쇠, 차 스마트키, 그리고 작고 납작한 열쇠 하나.

열쇠를 꽂고 돌렸다. 딸깍.

문이 열렸다.

현관에 신발들이 있었다. 내 운동화, 해인의 슬리퍼, 서아의 장화. 해인의 구두 자리는 비어 있었다. 오늘 신고 나갔으니까.

거실로 들어갔다.

아침 그대로였다. 식탁 위에 먹다 남긴 식빵 반 조각. 서아의 턱받이. 곰 양말 한 짝이 소파 팔걸이에 걸려 있었다. 서아가 머리에 썼다가 던진 그 양말이었다.

부엌 싱크대 위에 머그잔이 두 개 있었다. 하나는 내 것, 하나는 해인의 것. 해인의 머그잔에 커피가 삼분의 일쯤 남아 있었다. 입술 자국이 잔 가장자리에 연하게 묻어 있었다. 해인은 커피를 늘 다 마시지 않고 나갔다. 나는 그걸 늘 대신 마셨다. 식은 커피를.

그 머그잔을 들었다.

커피가 흔들리지 않았다. 잔을 기울여도 커피 표면이 수평을 유지하지 않았다. 잔과 함께 기울었다. 잔 안에 굳은 갈색 유리처럼.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손이 떨렸다.

싱크대 수도꼭지에서 물이 떨어지다 멈춰 있었다. 해인은 늘 수도꼭지를 꽉 잠그지 않았다. 그래서 한 방울씩 떨어졌다. 그 한 방울이 꼭지 끝과 개수대 사이 중간쯤에 매달려 있었다. 동그랗게. 햇빛을 받아 작은 무지개를 품은 채로.

나는 수도꼭지를 돌렸다.

물이 나오지 않았다.

돌리는 감촉은 있었다. 손잡이는 돌아갔다. 하지만 물이 나오지 않았다. 관 속의 물도 멈춰 있는 것이다. 흐르는 건 없었다. 흐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그 순간 처음으로 목이 말랐다.

물이 없다는 걸 알고 나서야 목이 말랐다.

냉장고를 열었다. 생수병이 있었다. 뚜껑을 비틀어 열었다. 병을 기울였다. 물이 나왔다.

나는 놀라서 병을 내려다보았다. 물이 쏟아졌다. 입에 댔다. 마셨다. 차가웠다. 목을 타고 넘어갔다.

물이 흘렀다.

내가 뚜껑을 열고, 내가 병을 기울였으니까. 내가 하는 건 된다. 병 안의 물은 내 것이 되는 순간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수도관 속 물은 내 것이 아니었다. 그건 저 멈춘 세상의 것이었다.

나는 물을 반 병쯤 마시고 식탁 의자에 앉았다.

식탁 위에 해인이 나가면서 적어 둔 메모가 있었다. 포스트잇. 해인의 동글동글한 글씨.

— 카레 데우고, 서아 7시 반에 재워. 목욕은 내가 할게. 사랑해 ♡ (진짜임)

진짜임.

해인은 늘 그렇게 썼다. 사랑한다고 쓰고 나서 꼭 괄호를 붙였다. 쑥스러워서 그런다고 했다. 결혼 칠 년째인데도.

나는 포스트잇을 떼어 가족사진과 같이 주머니에 넣었다.

거실 창가로 갔다. 베란다 문을 열고 나갔다. 12층에서 내려다본 동네가 멈춰 있었다. 놀이터 그네 하나가 앞으로 한껏 올라간 채 멈춰 있었다. 탄 사람은 없었다. 누군가 방금 뛰어내린 것처럼. 단지 앞 도로에 차들이 섰고, 먼 한강 쪽 다리 위에도 차들이 섰다.

해는 동쪽 하늘 낮은 곳에 있었다.

나는 그 해를 오래 보았다. 눈이 부셔서 오래 볼 수는 없었다. 눈을 감았다 뜨고, 다시 보았다. 베란다 난간 모서리에 해를 맞춰 두고, 기다렸다.

해는 움직이지 않았다.

한참을 기다려도 난간 모서리에 걸린 그대로였다. 아침 해가 조금씩 높아지는 게 정상이었다. 조금씩 난간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런데 한 치도.

아침이었다. 영원히 아침일 것 같았다.

나는 베란다에 쪼그려 앉았다. 등을 벽에 댔다.

해가 지지 않으면 밤이 오지 않는다. 밤이 오지 않으면 잠을 언제 자야 하나. 서아는 7시 반에 재워야 하는데. 7시 반이 오지 않는데.

그 생각이 너무 엉뚱해서 다시 웃음이 나올 뻔했다. 나오지 않았다.

주머니에서 가족사진을 꺼냈다. 한강에서 찍은 사진. 서아가 내 어깨 위에서 웃고 있었다. 해인이 옆에서 서아의 발을 잡고 웃고 있었다. 사진 속 한강에서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해인의 머리카락이 날리고 있었다. 사진 속에서만 바람이 불었다.

사진을 가슴에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해인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서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들리지 않았지만 기억할 수는 있었다. "엄마 빠이." "냥이 출근." "찍."

기억할 수 있는 동안은 괜찮을 것 같았다.

눈을 떴다. 해는 난간 모서리에 그대로 걸려 있었다.

나는 일어나 거실로 들어가 커튼을 쳤다. 두꺼운 암막 커튼. 서아 낮잠 재울 때 치던 커튼이었다. 방 안이 어둑해졌다. 커튼 틈으로 아침빛이 가느다랗게 새어 들었다.

처음으로, 내 손으로 밤을 만들었다.

아주 가짜 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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