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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잠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14:15

가짜 밤 속에서 나는 한동안 소파에 앉아 있었다.

얼마나 앉아 있었는지는 모른다. 시계가 가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숨을 셌다. 들이쉬고 내쉬고가 한 번. 천 번쯤 셌을 때 세는 걸 그만두었다. 세는 게 더 무서웠다. 숫자는 늘어나는데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배가 고팠다.

어이없게도. 이런 상황에서도 배는 고팠다. 아침에 먹은 거라곤 해인이 입에 물려 준 식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몸은 몸의 시간대로 가고 있었다. 세상이 멈췄어도 내 위장은 멈추지 않았다.

냉장고를 열었다. 어머니가 주신 카레가 반찬통에 담겨 있었다. 가스레인지 앞에 섰다. 불을 켜려다 멈췄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전자식 점화였다. 버튼을 누르면 딸깍딸깍 불꽃이 튀는. 눌렀다. 아무 소리도 없었다.

주머니에서 편의점 라이터를 꺼냈다. 가스 밸브를 열고 버너 쪽에 라이터를 댔다.

칙.

화르륵, 파란 불꽃이 둥글게 일어났다.

나는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났다. 불이 붙었다. 가스가 나오고 있었다. 가스관 속 가스는 멈춰 있어야 하지 않나. 수도관의 물처럼. 그런데 불이 붙었다.

한참 들여다보고 나서야 알았다. 우리 집 가스레인지는 가스통이 아니라 도시가스였다. 관 속의 가스는 세상의 것이다. 그런데 불이 붙었다. 수도는 안 되고 가스는 된다.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자. 불량 분석의 첫 번째 원칙. 한 번 본 걸로 규칙을 만들지 않는다.

나는 불을 끄고 다시 켜 보았다. 붙었다. 끄고 기다렸다가 다시. 붙었다. 세 번째에 불꽃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불꽃이 흔들리지 않았다. 라이터처럼. 곧게, 둥글게, 가만히. 하지만 냄비를 올려놓자 냄비 바닥이 데워지기 시작했다.

타는 건 된다. 흐르는 건 안 된다. 그런가. 모르겠다. 모르는 채로 카레를 데웠다.

카레 냄새가 부엌에 퍼졌다.

그 냄새가 너무 평범해서 눈물이 날 뻔했다. 어머니의 카레 냄새. 감자를 크게 썰고 당근을 적게 넣는 카레. 해인은 이 카레를 "시댁 카레"라고 불렀고, 서아는 감자만 골라 먹었다.

냄새는 퍼졌다. 퍼졌지만 멀리 가지 않았다. 부엌 안에서만 맴돌았다. 바람이 없으니까. 냄새도 내 곁에서만 살았다.

카레를 밥 없이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밥솥은 전자식이었다. 쌀을 냄비에 안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오늘은 그냥 카레만.

서아 의자가 식탁 옆에 붙어 있었다. 높은 아기 의자. 식판에 밥풀 몇 알이 말라붙어 있었다. 아침에 서아가 먹다 흘린 것이었다. 해인은 늘 바로바로 닦으라고 했고, 나는 늘 나중에 닦겠다고 했다. 나중은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오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물티슈를 뽑아 식판을 닦았다. 밥풀이 떨어져 나왔다. 식판이 깨끗해졌다.

그게 이 세상에서 내가 한 두 번째 청소였다. 첫 번째는 어린이집 신발장의 운동화를 똑바로 넣은 것.

닦고 나서 식판을 한참 보았다. 서아가 여기 앉아 숟가락을 휘두르던 모습이 떠올랐다. 숟가락을 입에 넣다가 볼에 넣고, 볼에 넣다가 머리카락에 넣고. 해인은 한숨을 쉬었고 나는 웃었다. 웃지 말라고 해인이 내 팔을 쳤다. 그 팔이 아직 조금 얼얼한 것 같았다. 기억이 그렇게 생생했다.

기억은 아직 흘렀다. 이 세상에서 흐르는 몇 안 되는 것 중 하나였다.

먹고 나니 졸렸다.

이것도 어이없었다. 이런 날에도 밥을 먹으면 졸렸다. 몸은 정직했다. 몸은 아직 어제와 같은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는 것 같았다.

나는 설거지를 하려다 멈췄다. 물이 안 나오니까. 냉장고 생수로 헹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물을 아껴야 할지도 몰랐다. 얼마나 오래 이럴지 모르니까.

그 생각이 처음으로 구체적인 모양을 갖췄다.

얼마나 오래.

하루일까. 일주일일까. 아니면—

나는 거기서 생각을 끊었다. 대신 안방으로 갔다.

침대 위에 이불이 흐트러져 있었다. 해인 쪽이 먼저 일어난 모양대로 젖혀져 있었고, 내 쪽은 서아가 뛰어들어 헤집어 놓은 모양 그대로였다. 베개 위에 서아의 머리카락 한 올이 있었다. 가늘고 갈색인.

나는 그 머리카락을 집으려다 말았다. 대신 그 옆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암막 커튼 틈으로 아침빛이 한 줄기 새어 들어 천장에 금을 긋고 있었다. 그 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원래라면 해가 움직이면서 그 빛줄기도 천천히 방을 가로질러야 했다. 나는 서아를 재울 때 그 빛줄기를 보며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빛이 옷장 손잡이에 닿으면 서아가 잠들 시간이었다.

빛은 천장에 박혀 있었다. 옷장 손잡이에 영원히 닿지 않을 것이다.

눈을 감았다.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런데 왔다. 생각보다 빨리.

잠드는 순간이 이상했다.

보통은 천천히 가라앉는다. 생각이 흐려지고, 몸이 무거워지고, 어느 순간 꿈인지 생각인지 모를 것들이 떠다니다가. 그런데 그날은 그렇지 않았다.

뚝.

필름이 끊기듯이 끊겼다. 스위치를 내린 것처럼. 생각하던 중간에,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꿈도 없었다. 어둠조차 없었다. 어둠이라도 있으면 그걸 느끼는 내가 있을 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빈칸.

그러다 눈을 떴다.

천장에 빛줄기가 있었다. 같은 자리에. 같은 모양으로.

나는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뛰었다. 얼마나 잤지. 한 시간? 열 시간? 몸은 개운했다. 푹 잔 것처럼. 머리가 맑았다. 배도 다시 고팠다. 제법 오래 잔 것 같았다.

손목시계를 보았다. 8시 53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지만 확인했다. 그리고 확인하고 나서야 제대로 무서워졌다.

얼마를 잤든, 여기는 여전히 8시 53분이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방금 그 잠이 떠올랐다. 뚝, 하고 끊긴 그 느낌. 빈칸.

그건 잠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알던 잠은 아니었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나를 잠깐 꺼 두었던 것 같았다.

그리고 다시 켰다. 8시 53분의 이 방에서.

거실로 나갔다. 싱크대에 카레 냄비가 그대로 있었다. 숟가락도 그대로. 냄비 안쪽 카레가 조금 말라붙어 있었다. 잠들기 전 그대로였다.

그건 좀 안심이 됐다. 내가 한 일은 남아 있었다. 누가 되돌려 놓지 않았다.

나는 식탁에 앉았다. 주머니에서 볼펜과 어린이집 출석부 한 장을 꺼냈다. 출석부 뒷면이 비어 있었다.

맨 위에 적었다.

1.

그리고 그 옆에.

— 잠. 필름 끊김. 꿈 없음. 일어나도 8:53. 한 일은 남아 있음.

볼펜을 놓고 그 글씨를 보았다. 날짜를 세는 방법이 없었다. 해가 뜨지도 지지도 않으니까. 그렇다면 내가 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한 번 자고 일어나면, 하루.

그게 내가 정한 이 세상의 첫 번째 규칙이었다.

나는 볼펜을 쥔 채 커튼 틈의 빛줄기를 보았다. 그리고 문득, 아주 이상한 생각이 떠올랐다. 게임을 하다 잠깐 끄고 다시 켜면, 마지막으로 저장한 자리에서 시작하는 것처럼.

"……난, 세이브된 건가?"

말해 놓고 나니 우스웠다. 우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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