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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화. 다른 아침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17 12:22:57

해인이 들어간 뒤에도 나는 식탁에 앉아 있었다.

주황빛 아래. 해인이 끄지 않고 간 불.

손이 떨리지 않았다. 이상하게. 방금 전에 해인 앞에서 입도 열지 못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가만했다. 사 년 동안 무언가를 본 날이면 늘 그랬다. 떨리는 건 나중이었다. 먼저 적었다.

서재에 가서 검은 수첩을 가져왔다. 볼펜도.

다섯째 장을 펼쳤다.

맨 위에 적었다.

— 첫 번째. 목요일 밤 10시 41분. 식탁.

그리고 그 아래, 한 줄씩. 품질관리팀에서 불량 보고서를 쓰던 순서대로.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얼마나.

— 들어간 때: 해인이 «당신 누구야» 물었을 때. 대답 못 함. 막힘.

— 들어가는 느낌: 천둥 없음. 식은땀 없음. 돌아보지 않음. 불이 꺼지듯, 그냥.

— 머문 시간: 10초. (할아버지 시계로 셈.)

— 현실에서: 1~2초. 해인이 봄. «눈이 없었어.»

거기까지 적고 멈췄다.

시계로 셈.

그 줄을 오래 보았다.

사 년 동안 이 시계는 8시 53분이었다. 초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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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뒷면   86화. 열쇠

    엔터를 누르지 못했다.검색창에 한 단어가 떠 있었다. Emma. 커서가 그 끝에서 깜빡였다. 켜졌다가, 꺼졌다가.누르면 무언가가 나올 것이다. 아니면 아무것도 안 나올 것이다.엠마네는 나갔다. 확실했다. 공책의 마지막 장이 반듯했으니까. 그런데 나갔다는 것과 여기 있다는 것은 달랐다. 이쪽 세상 어딘가에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몇 분 쓰러졌다가 깨어나서, 카 시트의 엠마를 안고.만약 없으면.그러면 나 혼자였다. 돌아온 사람은. 사 년을 들고 이쪽으로 건너온 사람은. 도서관 벽의 금을 기억하는 사람은.만약 있으면.그 사람은 무엇을 들고 왔을까. 나처럼 이름 세 개를 매일 쓸까. 수도꼭지를 조금 풀어 둘까. 아내에게 말했을까.어느 쪽이 무서운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무서웠다. 둘 다 알고 싶었다.나 말고도, 있을까.해인이 옆 의자에서 책장을 넘겼다. 아까 또 막혀, 하고 물었을 때 나는 아니라고 했다. 아니었는데. 아니라고 한 지 오 분도 안 되어서, 나는 그 한 단어 앞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노트북 화면을 반쯤 덮었다. 해인이 아직 몰랐으면 했다. 누구를 찾는지. 찾지 못하면, 해인에게 없는 사람을 하나 더 얹는 일이었다."……해인아."해인이 책을 내렸다."막히는 것 같아."해인이 나를 보았다. 아까는 아니라며, 하는 얼굴이었다. 그런데 묻지 않았다. 휴대폰을 들었다. 스톱워치. 엄지를 올렸다."가도 돼. 여기 있을게."나무 사물함. 평상. 고개를 돌린 채 멈춘 선풍기. 바나나우유 냉장고.목욕탕 여탕 탈의실이었다. 양쪽 벽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평상 위에 도시락 가방이 놓여 있었다. 연분홍 누빔. 지퍼가 닫힌. 그 옆에 오답노트 한 권.

  • 세상의 뒷면   85화. 강가 씨의 노트

    목욕탕은 시장 뒷골목에 있었다.낡은 삼 층 건물. 입구 위에 붉은 온천 표시. 굴뚝. 유리문에 금색 글씨로 영업시간. 새벽 다섯 시부터.가을이 문을 밀었다. 딸랑, 하고 문에 달린 종이 울렸다. 소리가 몇 걸음 앞에서 삼켜졌다.카운터에 아무도 없었다. 작은 창구 너머에 수건이 개어져 쌓여 있었다. 그 옆에 요금표. 어른, 어린이. 그 아래 누군가 볼펜으로 적어 둔 메모. 사장님 오늘 병원, 열쇠는 서랍."여기 사장님은 엄마 계모임 친구예요. 제가 어릴 때 엄마랑 맨날 왔어요. 일요일마다."가을이 카운터 창구 안의 수건 더미를 보았다."엄마는 일요일에만 가게를 오후에 열었어요. 오전엔 저 데리고 여기 왔어요. 탕에 넣어 놓고, 불리고, 때 밀고. 엄마 손이 엄청 세요. 이태리타월로 등을 밀면 제가 아프다고 소리 질렀어요. 그럼 엄마가 그랬어요. 가만있어라, 다 벗겨지면 새 사람 된다."가을이 웃었다. 코로."초등학교 졸업하고는 안 왔어요. 혼자 씻는다고. 엄마가 좀 서운해했어요."가을은 카운터 앞을 지나며 창구 너머 수건 한 장을 집었다. 계산대에 동전 하나를 놓았다. 반듯하게."지난주에 씻으러 왔어요. 생수 들고. 탕 물은 안 흐르니까. 아저씨 공책에 욕조에 생수 부어서 씻었다고 써 있어서. 그러다 탈의실에서 거울을 봤어요. 양쪽 벽에. 어릴 때는 몰랐어요. 거울이 마주 보고 있는 줄. 엄마 등만 봤으니까."가을이 잠깐 말을 멈췄다."……엄마 등이 넓었어요. 그땐."가을이 카운터 옆 복도를 따라 걸었다. 여탕, 남탕. 가을이 멈췄다. 나를 돌아보았다."……거울은 여탕 탈의실에 있어요.""아.""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아요. 근데 좀 이상하죠."가을이 웃었다. 나도 웃었다

  • 세상의 뒷면   84화. 아저씨도 막히네

    시장이었다.반투명한 지붕. 형광등. 공중에 굳은 생선 가게의 물줄기. 어묵 냄비 위에 멈춘 김.그리고 통로 끝에서 흐르는 김.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 이제는 길을 알았다.돼지국밥 가게 앞. 가마솥 하나에서 김이 올라가고 있었다. 가을은 솥 앞에 없었다. 가게 안쪽, 스테인리스 테이블 위에 도마를 올려놓고 대파를 썰고 있었다. 탁, 탁, 탁. 붉은 앞치마. 걷어 올린 카디건 소매.칼질이 서툴렀다. 대파가 제각각의 두께로 잘렸다. 가을은 그걸 한 번 들여다보고, 얇은 것과 두꺼운 것을 따로 모았다. 그리고 다시 썰었다.가게 벽의 못에 도시락 가방이 걸려 있었다. 그 옆에 못이 하나 더 박혀 있었다. 거기 오답노트가 걸려 있었다. 끈을 달아서. 표지에 매직으로 크게. 5.가을이 고개를 들었다."우진 아저씨."칼을 내려놓았다. 앞치마에 손을 닦고, 허리를 숙였다. 나도 숙였다."오셨어요. 요즘 자주 오시네요.""……그런가요.""저번엔 교문에 십 초 오셨죠? 쪽지 위치가 조금 틀어져 있었어요. 제가 붙인 거랑."나는 웃었다. 가을은 그걸 확인한 것이다. 돌아와서, 교문 기둥의 쪽지가 몇 밀리 틀어진 걸."바람도 없는데 틀어져 있으면, 누가 온 거잖아요.""……내가 손댄 기억이 없는데.""그럼 읽다가 숨 쉬셨나 보죠. 아저씨 숨은 흐르니까."가을이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솥으로 가서 뚜껑을 열었다. 김이 피어올랐다. 흘러서."아직 십 분은 더 끓여야 돼요. 한 바퀴 도실래요?""한 바퀴요?""시장이요. 제가 소개해 드릴게요."가을이 앞치마를 입은 채로 가게를 나섰다. 도시락 가방은 못에 걸어 둔 채로. 처음이

  • 세상의 뒷면   83화. 문을 열어 둔다

    노란 포스트잇이었다.서재 문 손잡이 바로 위, 문짝 한가운데에. 네 귀퉁이를 꾹꾹 눌러서. 해인이 냉장고에 붙이던 것과 같은 크기.동글동글한 글씨.— 믿는 건 모르겠어.— 근데 당신이 사 년을 혼자 있었다면, 이제 혼자 있지 마.그 아래 줄을 한 칸 띄우고, 번호를 매겨서.— 1. 서재 문은 닫지 않는다.— 2. 막히는 것 같으면 부른다. 옆방이니까.— 3. 다녀오면 다녀왔다고 말한다.— (진짜임)나는 복도에 서서 그 포스트잇을 오래 보았다.복도 끝 안방에서 해인이 서아를 재우는 소리가 들렸다. 곰 세 마리. 해인의 음정은 늘 조금 낮았다. 서아가 으쓱 으쓱 부분에서 깔깔 웃었다. 열이 내린 지 하루 만에 웃음이 돌아와 있었다.막히는 것 같으면 부른다.막힘은 예고하고 오지 않았다. 식탁에서, 서재에서, 결승선 뒤에서, 서아의 침대 옆에서. 무언가를 끝까지 붙들다가, 어느 순간 멈췄다.그런데 그 어느 순간 전에, 붙들고 있는 시간이 있었다. 분명히. 서른세 번째 장 앞에서 한참. 서아 손가락을 쥔 채로 한참. 그 한참 동안 나는 늘 혼자였다. 문이 열려 있어도.해인은 그 한참을 달라고 했다.나는 포스트잇을 떼지 않았다. 손끝으로 네 귀퉁이를 한 번 더 눌렀다. 잘 붙어 있는지. 확인.그리고 서재 책상에서 포스트잇을 한 장 꺼냈다. 각진 글씨로 적었다. 꾹꾹 눌러서.— 1. 알겠습니다.— 2. 알겠습니다. (막히는지 모를 때도 있습니다. 그때는 미안합니다.)— 3. 알겠습니다.— (확인)해인의 포스트잇 바로 아래에 붙였다. 노란 것 두 장이 위

  • 세상의 뒷면   82화. 사 년

    "8시 53분이었어."내가 말했다. 아주 낮게. 서아의 머리 너머로.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이는 얼굴로."어린이집 앞. 서아가 유리에 손바닥 붙이고 들어간 다음. 골목 나와서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에서 쿵 소리가 났어. 천둥 같은. 그리고 무서웠어. 이유 없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돌아봤어."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아무도 없었어. 원장 선생님도, 아이들도, 길에 있던 사람들도. 비둘기가 공중에 멈춰 있었어. 누가 떨어뜨린 커피가 쏟아지다가 굳어 있었어. 소리가 없었어. 내 숨소리 말고는."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의 이마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세상이 멈춰 있었어. 8시 53분에. 나만 빼고."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해인이 말했다. 하나도 빼지 말고. 그런데 사 년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하기엔 너무 길었다. 천오백 날. 그 하루하루를 다 말하면, 서아가 깨고, 해가 뜨고, 다시 질 것이다.그래서 순서대로 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불량 보고서를 쓰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집에 갔다고 했다. 도어락이 안 열려서 비상키로. 식탁에 식빵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고. 서아 식판에 밥풀이.해인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벽에 금을 그었다고 했다. 거실 벽. 서아 키 눈금 옆에. 곰돌이 머리 위에. 잠을 한 번 자면 하루라고 정하고."……곰돌이 머리 위에."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실 벽에 그 곰돌이 스티커가 있었다. 서아 돌 때 해인이 붙인."응. 거기. 금 하나, 둘. 처음엔 셌어.""몇 개까지.""집 벽엔 육십 몇 개. 그다음엔 도서관 벽에

  • 세상의 뒷면   81화. 열

    첫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오지는 않았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하루 종일 회색이었다. 퇴근 버스 창에 입김이 서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거기 점을 찍었다. 하나, 둘, 셋. 입김이 금방 지워졌다. 흘러서.집에 오니 서아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해인이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체온계를 들고."38도 5부.""언제부터?""어린이집에서 오후에 전화 왔어. 낮잠 자고 일어나서부터 처져 있었대. 반차 쓰고 데려왔어. 해열제 먹였는데 아직."서아가 나를 보았다. 눈이 흐렸다. 볼이 빨갰다. 평소 같으면 아빠! 하고 달려왔을 텐데. 손가락만 조금 오므렸다 폈다."아빠 왔어?""응. 아빠 왔어."나는 서아 옆에 앉았다. 서아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작은 손바닥이 불덩이 같았다."아빠 손 차가워.""응. 밖이 추워서.""좋아."서아가 내 손을 자기 볼에 갖다 댔다. 눈을 감았다.저녁은 해인이 끓인 흰죽이었다. 서아는 세 숟가락 먹고 고개를 저었다. 해인이 한 숟가락만 더, 했다. 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인이 한숨을 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잠들기 전 서아가 곰 세 마리를 불러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나는 서아 옆에 누워 불렀다. 작게.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너무 귀여워."서아가 따라 했다. 눈을 감은 채로. 그리고 으쓱 으쓱에서 어깨를 들썩이려다 말았다. 힘이 없어서. 한쪽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잘한다.""……잘한다."서아가 내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입꼬리만.아홉 시. 서아는 해인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해인과 내가 가운데 서아를 두고 자는 날. 열이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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