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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화. 사 년

Author: Jino
last update publish date: 2026-10-21 11:00:00

"8시 53분이었어."

내가 말했다. 아주 낮게. 서아의 머리 너머로.

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이는 얼굴로.

"어린이집 앞. 서아가 유리에 손바닥 붙이고 들어간 다음. 골목 나와서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에서 쿵 소리가 났어. 천둥 같은. 그리고 무서웠어. 이유 없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

"……"

"돌아봤어."

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

"아무도 없었어. 원장 선생님도, 아이들도, 길에 있던 사람들도. 비둘기가 공중에 멈춰 있었어. 누가 떨어뜨린 커피가 쏟아지다가 굳어 있었어. 소리가 없었어. 내 숨소리 말고는."

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의 이마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세상이 멈춰 있었어. 8시 53분에. 나만 빼고."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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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뒷면   82화. 사 년

    "8시 53분이었어."내가 말했다. 아주 낮게. 서아의 머리 너머로.해인이 나를 보았다. 가로등 불빛에 반쯤 보이는 얼굴로."어린이집 앞. 서아가 유리에 손바닥 붙이고 들어간 다음. 골목 나와서 세 걸음, 네 걸음. 머릿속에서 쿵 소리가 났어. 천둥 같은. 그리고 무서웠어. 이유 없이. 뒤에 뭐가 있는 것 같아서.""……""돌아봤어."창밖에서 눈이 내렸다. 가로등 아래로."아무도 없었어. 원장 선생님도, 아이들도, 길에 있던 사람들도. 비둘기가 공중에 멈춰 있었어. 누가 떨어뜨린 커피가 쏟아지다가 굳어 있었어. 소리가 없었어. 내 숨소리 말고는."해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아의 이마에 얹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세상이 멈춰 있었어. 8시 53분에. 나만 빼고."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몰랐다.해인이 말했다. 하나도 빼지 말고. 그런데 사 년은 하나도 빼지 않고 말하기엔 너무 길었다. 천오백 날. 그 하루하루를 다 말하면, 서아가 깨고, 해가 뜨고, 다시 질 것이다.그래서 순서대로 했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 불량 보고서를 쓰듯이. 언제, 어디서, 무엇을.집에 갔다고 했다. 도어락이 안 열려서 비상키로. 식탁에 식빵 봉지가 그대로 있었다고. 서아 식판에 밥풀이.해인의 손가락이 조금 움직였다.벽에 금을 그었다고 했다. 거실 벽. 서아 키 눈금 옆에. 곰돌이 머리 위에. 잠을 한 번 자면 하루라고 정하고."……곰돌이 머리 위에."해인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거실 벽에 그 곰돌이 스티커가 있었다. 서아 돌 때 해인이 붙인."응. 거기. 금 하나, 둘. 처음엔 셌어.""몇 개까지.""집 벽엔 육십 몇 개. 그다음엔 도서관 벽에

  • 세상의 뒷면   81화. 열

    첫눈이 온다는 예보가 있던 날이었다.오지는 않았다. 하늘이 낮게 가라앉아 하루 종일 회색이었다. 퇴근 버스 창에 입김이 서렸다. 나는 손가락으로 거기 점을 찍었다. 하나, 둘, 셋. 입김이 금방 지워졌다. 흘러서.집에 오니 서아가 소파에 누워 있었다.해인이 이마에 손을 얹고 있었다. 체온계를 들고."38도 5부.""언제부터?""어린이집에서 오후에 전화 왔어. 낮잠 자고 일어나서부터 처져 있었대. 반차 쓰고 데려왔어. 해열제 먹였는데 아직."서아가 나를 보았다. 눈이 흐렸다. 볼이 빨갰다. 평소 같으면 아빠! 하고 달려왔을 텐데. 손가락만 조금 오므렸다 폈다."아빠 왔어?""응. 아빠 왔어."나는 서아 옆에 앉았다. 서아의 손을 잡았다. 뜨거웠다. 작은 손바닥이 불덩이 같았다."아빠 손 차가워.""응. 밖이 추워서.""좋아."서아가 내 손을 자기 볼에 갖다 댔다. 눈을 감았다.저녁은 해인이 끓인 흰죽이었다. 서아는 세 숟가락 먹고 고개를 저었다. 해인이 한 숟가락만 더, 했다. 서아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인이 한숨을 쉬고 숟가락을 내려놓았다.잠들기 전 서아가 곰 세 마리를 불러 달라고 했다.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나는 서아 옆에 누워 불렀다. 작게. 아빠 곰은 뚱뚱해. 엄마 곰은 날씬해. 애기 곰은."너무 귀여워."서아가 따라 했다. 눈을 감은 채로. 그리고 으쓱 으쓱에서 어깨를 들썩이려다 말았다. 힘이 없어서. 한쪽 어깨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잘한다.""……잘한다."서아가 내 말을 따라 하며 웃었다. 입꼬리만.아홉 시. 서아는 해인의 침대에서 잠들었다. 해인과 내가 가운데 서아를 두고 자는 날. 열이 나

  • 세상의 뒷면   80화. 짖는 소리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 세상의 뒷면   79화. 불가에 온 늑대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 세상의 뒷면   78화. 국밥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 세상의 뒷면   77화. 한 교수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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