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suk둘째 날, 나는 사람을 찾으러 나갔다.
첫날은 무서워서 집에 숨었다. 둘째 날은 무서워서 밖으로 나갔다. 같은 무서움인데 방향만 달랐다.
나가기 전에 거실 벽 앞에 섰다. 서아 키를 재는 눈금자가 붙어 있는 벽이었다. 곰돌이 그림 옆에 연필로 그은 선 세 개. 돌, 18개월, 두 돌. 선 옆에 날짜와 키가 적혀 있었다. 77센티, 82센티, 87센티.
나는 그 옆, 곰돌이 머리 위쪽 빈 벽에 연필로 금을 두 개 그었다.
하나, 둘.
해인이 보면 벽지에 낙서했다고 잔소리할 것이다. 나는 그 잔소리를 듣고 싶었다.
두 돌 선을 긋던 날이 생각났다. 서아는 벽에 등을 대고 가만히 서 있지 못했다. 자꾸 발뒤꿈치를 들었다. 키가 커 보이고 싶어서가 아니라 연필이 머리에 닿는 게 간지러워서였다. 해인이 서아 이마를 손바닥으로 살짝 누르고, 나는 그 틈에 재빨리 선을 그었다. 87센티. 해인은 1센티쯤은 속은 것 같다고 했다.
나는 내가 그은 금 두 개를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연필 가루가 조금 묻어났다. 흑연 냄새가 났다. 서아의 선보다 훨씬 짧고 가는 금이었다.
현관을 나서며 도어락 비상 열쇠를 챙겼다. 편의점 라이터, 볼펜, 출석부 종이. 그리고 서아의 분홍 실내화는 가방에 넣었다.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경찰서부터 갔다.
가는 길에 어린이집 쪽 골목은 일부러 피했다. 유리문의 손자국을 또 보면 거기서 한 발짝도 못 움직일 것 같았다.
동네 지구대는 걸어서 십 분 거리였다.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자 민원 창구 앞에 번호표 기계가 서 있었다. 대기 번호 17. 호출 번호 16. 번호표 한 장이 기계 입에서 반쯤 나오다 멈춰 있었다. 누군가 뽑으려던 17번.
그 번호표를 뽑았다. 종이가 쉽게 빠져나왔다. 내 손에 들어온 순간 그냥 종이였다.
얇고 매끄러운 종이였다. 17이라는 숫자가 까맣게 찍혀 있었다. 나는 그걸 창구 위에 올려 두었다. 부를 사람이 없는 번호였다. 그래도 구겨서 버리지는 못했다.
"실례합니다."
창구 너머 책상들이 비어 있었다. 모니터들은 까맸고, 무전기는 조용했다. 벽에 걸린 게시판에 실종자 전단이 붙어 있었다. 오래된 것들. 나는 그 전단들을 한참 보았다. 사람을 찾습니다. 이 사람을 보신 분은.
이 세상에서 실종된 건 누구일까. 저 사람들일까, 나일까.
지구대 안쪽 사무실까지 들어갔다. 누군가의 책상 위에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뚜껑이 반쯤 열린 채. 나무젓가락이 뚜껑 위에 올려져 있었다. 3분을 기다리던 중이었을 것이다. 영원히 끝나지 않는 3분.
컵라면 앞에 얼굴을 가까이 대야 겨우 스프 냄새가 났다. 한 걸음 물러나면 없었다. 뚜껑 틈으로 새어 나오던 김이 하얗게 굳어 있었다. 어린이집 조리실의 냄비처럼.
지구대를 나와 동네 병원으로 갔다. 소아과였다. 서아가 다니는 곳. 대기실 소파에 아이들 장난감이 흩어져 있었다. 접수대 위 종이 대기 명단에 이름들이 있었다. 9시 예약, 9시 10분 예약. 아직 오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
서아는 이 대기실에서 늘 울었다. 주사를 맞기도 전에.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소독약 냄새를 맡고 내 목을 끌어안았다. 해인은 서아 귀에 대고 다 끝나면 스티커를 주겠다고 속삭였다. 나는 서아가 늘 앉던 초록색 개구리 의자를 보았다. 비어 있었다.
약국, 은행, 주민센터, 교회. 문이 열리는 곳은 다 들어가 보았다. 잠긴 곳은 유리창으로 들여다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어디에도. 누구도.
문을 열 때마다 나는 먼저 안쪽에 대고 말했다. 계세요. 약국에서도, 은행에서도, 주민센터에서도. 대답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입이 먼저 움직였다. 남의 문을 열고 들어가는 사람의 버릇이었다.
대신 사람의 흔적은 어디에나 있었다. 반쯤 마신 커피, 펼쳐진 신문, 벗어 둔 카디건, 켜진 채 멈춘 형광등. 모두가 방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 53분까지. 그리고 동시에, 한꺼번에, 증발했다.
아니. 증발한 건 나일지도 몰랐다.
그 생각은 어제도 했다. 오늘은 조금 더 오래 붙잡고 있었다. 저 사람들은 저쪽 세상에서 지금도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넘기고 있고, 나만 여기, 사진 같은 세상 속으로 빠져 들어온 거라면.
그렇다면 서아는 저쪽에서 지금도 교실에 있다.
실내화를 한 짝 잃어버린 채로. 선생님이 "서아야, 실내화 어디 갔어?" 하고 찾아 주고 있을 것이다.
나는 가방 위로 실내화를 한 번 만져 보았다. 토끼 얼굴이 그려진 코가 손바닥에 잡혔다. 저쪽의 서아는 한쪽 발만 양말 바람일 것이다. 서아는 양말만 신고 교실 바닥을 미끄러지듯 걷는 걸 좋아했다. 그러니까 괜찮을 것이다.
그 상상이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서아가 무사하다는 상상. 다만 그 상상 속에 나는 없었다.
오후쯤, 아니 오후라고 할 만큼 걸었을 무렵, 나는 해인의 회사로 향했다.
지하철은 멈춰 있었다. 역 입구 셔터가 반쯤 내려와 있었다. 걸어가야 했다. 해인의 회사는 강 건너, 걸어서 두 시간쯤 걸리는 곳이었다.
다리를 건넜다.
한강 다리 위에 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운전석이 빈 차들이. 나는 그 차들 사이, 차선 한가운데를 걸었다. 평생 한 번도 걸어 볼 일 없던 자리였다. 다리 난간 너머로 강물이 보였다. 강물이 멈춰 있었다. 물결 모양 그대로. 햇빛이 물결 위에 부서진 채로 박혀 있었다. 수만 개의 작은 빛 조각이 하나도 반짝이지 않고.
강 한가운데 유람선 한 척이 멈춰 있었다. 뱃머리에서 튄 물보라가 하얀 부채처럼 펼쳐진 채 굳어 있었다.
아름다웠다. 아름다워서 끔찍했다.
다리 중간쯤에서 난간 아래 턱에 잠깐 앉았다. 손바닥을 짚은 아스팔트는 햇빛을 받고 있는데도 데워져 있지 않았다.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뜨거운 건 오래 걸은 내 발바닥뿐이었다.
해인의 회사 건물에 도착했다. 유리 회전문은 손으로 밀어서 돌렸다. 로비에 보안 게이트가 있었다. 사원증을 대야 열리는 게이트. 당연히 열리지 않았다. 나는 게이트를 넘었다. 무릎을 걸치고, 넘었다.
회사 보안 게이트를 넘다니. 경비원이 달려올 일이었다.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해인의 층은 9층이었다. 계단으로 올라갔다.
9층 계단참 창문에 해가 비스듬히 걸려 있었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본 것과 같은 높이였다. 강을 건너 두 시간을 걸어왔는데, 해는 그대로였다.
영업팀 사무실은 넓었다. 책상들이 섬처럼 모여 있었다. 해인의 자리는 창가에서 두 번째. 한 번 서아를 데리고 놀러 온 적이 있어서 알았다.
해인의 책상 위에 가방이 놓여 있었다. 방금 출근해서 내려놓은 모양대로. 가방 옆에 텀블러. 모니터 옆에 사진 액자. 우리 셋. 사물함에서 떼어 온 것과 같은 한강 사진이었다. 같은 날 찍은 다른 장.
키보드 옆에 해인의 립밤이 뚜껑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해인은 뚜껑을 늘 어디다 두고 잊어버렸다. 집에도 뚜껑 없는 립밤이 서랍마다 굴러다녔다. 나는 책상 위를 둘러보다 모니터 받침 아래서 뚜껑을 찾아 끼워 주었다. 딸깍.
의자는 비어 있었다. 등받이에 해인의 카디건이 걸려 있었다.
나는 그 카디건을 손으로 쓸었다. 해인의 향이 났다. 섬유 유연제와 해인이 늘 뿌리는 향수. 향이 났다. 향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내가 만지는 순간 다시 퍼진 건지도 몰랐다. 내 손에 든 것은 다시 흐르니까.
나는 카디건을 들어 얼굴에 댔다.
그리고 거기서, 해인의 사무실 한가운데서, 처음으로 울었다.
소리를 내어 울었다. 울음소리가 넓은 사무실에 퍼졌다. 그리고 사라졌다. 벽에 닿지도 않고. 아무도 듣지 않았다. 아무도 괜찮냐고 묻지 않았다.
한참을 울고 나니 이상하게 속이 비었다. 가볍지는 않았다. 그냥 비었다.
창밖으로 강 건너가 보였다. 우리 동네 쪽이었다. 해인은 점심을 먹고 가끔 이 창가에 서서 그쪽을 본다고 했었다. 서아 어린이집이 저쯤일 거라고. 보일 리 없는 거리였다. 나도 그쪽을 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보았다.
해인의 책상 위 메모지를 한 장 뜯었다. 해인의 볼펜으로 적었다.
— 나 여기 왔었어. 우진. (진짜임)
그리고 그 메모를 모니터 가장자리에 붙였다. 해인이 늘 할 일 메모를 붙이는 자리에.
이 메모를 해인이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알고 있었다. 저쪽 세상의 해인은 이쪽의 메모를 볼 수 없다. 그래도 붙였다. 내가 여기 있었다는 걸 어딘가에는 남겨 두고 싶었다.
카디건은 제자리에 걸었다. 가져가고 싶었지만 걸었다. 해인이 퇴근할 때 입어야 하니까.
또 그 생각이었다. 해인이 퇴근할 때. 서아가 돌아올 때. 나는 계속 누군가 돌아올 때를 생각하고 있었다.
돌아오는 다리 위에서 내 그림자는 갈 때와 반대쪽으로 누워 있었다. 해는 그대로인데 나만 방향을 바꾼 것이다. 나는 그림자를 앞세우고 걷다가, 가끔 손을 흔들어 보았다. 그림자 손도 흔들렸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네 시간을 넘게 걸었다. 시계는 8시 53분이었다.
거실 벽 앞에 섰다. 서아 키 눈금 옆, 어제 그은 금 두 개.
나는 연필을 들어 세 번째 금을 그으려다 멈췄다.
아직 안 잤다. 한 번 자고 일어나야 하루다. 내가 정한 규칙이었다.
규칙은 지켜야 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 규칙이라서 더.
나는 연필을 벽 앞 선반에 올려 두었다. 내일 아침 — 아침은 계속 아침이지만 — 일어나서 그을 수 있도록.
선반 위에 연필 한 자루. 벽에 금 두 개. 곰돌이 옆에서, 서아의 키보다 조금 높은 곳에.
일요일 아침, 서아와 둘이 빵집에 가기로 했다.해인은 밀린 빨래를 돌리고 있었다. 베란다에서 세탁기가 덜컹거렸다. 식탁에는 해인이 마시다 만 커피가 반 잔 남아 있었다. 나는 그걸 마셨다. 식은 커피. 쓴맛이 혀 뒤에 오래 남았다."빵 사 오면서 우유도."해인이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세탁기 소리를 넘어서."흰 우유. 서아 거 말고 큰 거.""응.""그리고 당신 거 소보로 말고 다른 거. 맨날 소보로만 먹어."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해인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서아는 현관에서 운동화를 신겨 달라고 발을 내밀었다. 찍찍이를 붙여 주자 서아가 따라 했다. 찌익.현관문을 나서기 전에 나는 가스레인지를 보았다. 꺼져 있었다. 문을 잠그고 손잡이를 한 번 당겨 보았다. 잠갔고. 서아가 옆에서 따라 했다. 잠갔고!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거울 앞에서 셋을 셌다. 서아가 옆에서 손가락을 폈다. 하나 둘 셋 많이.문이 열렸다. 안에 사람이 있었다. 14층에서 타서 내려가는 중인 모양이었다. 흰머리를 짧게 자른 할머니. 누빔 조끼. 그리고 할머니 발치에 개 한 마리.누런 털에 등 쪽만 조금 희끗한. 귀가 한쪽은 서고 한쪽은 접힌. 주둥이 둘레가 하얗게 센. 늙은 개였다.서아가 내 다리 뒤로 숨었다. 바지 자락을 두 손으로 쥐고."……멍멍이.""안 물어. 얘는 이빨도 몇 개 없어."할머니가 웃었다. 개가 서아 쪽으로 코를 한 번 킁 했다. 서아가 바지 자락을 더 세게 쥐었다. 그런데 숨지는 않았다. 내 다리 옆으로 얼굴을 반만 내밀고 개를 보았다. 눈이 동그랬다.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 서아는 그 자세 그대로였다. 반은 숨고 반은 보고.1층에서 문이 열리자 개가 먼저 나갔다. 천천히. 뒷다리가 조금
한 교수의 연구실은 이공관 사 층 복도 끝에 있었다.토요일 오전 열 시. 복도에 아무도 없었다. 문에 붙은 이름표가 누렇게 바래 있었다. 내가 문을 두드리기 전에 안에서 먼저 문이 열렸다."발소리 들었어요. 토요일엔 이 층에 아무도 안 와서."한 교수가 흰 운동화를 신고 서 있었다. 회색 니트 소매에 분필 가루가 묻어 있었다.책이 바닥부터 천장까지 쌓인 방이었다. 창가에 말라 가는 화분 하나. 칠판은 지우개 자국으로 뿌옜다. 한 교수가 의자를 하나 비워 주었다. 의자 위에 쌓여 있던 논문 더미를 바닥으로 옮기면서.한 교수는 서른한 번째 장 복사본을 먼저 폈다. 빨간 동그라미 옆, 여백의 내 글씨. 같이 먹어 보고, 넣어 주십시오.한 교수가 그 줄을 한참 보다가 웃었다. 소리 내어. 안경이 콧등으로 미끄러질 만큼."이게 무슨 수학이에요."그러고는 칠판 앞으로 갔다. 분필을 쥐고, 한 걸음씩 적기 시작했다. 나는 옆에서 보았다. 틀리면 말했다. 거기 아니에요. 한 교수는 왜 아니냐고 묻지 않았다. 지우고 다시 적었다. 흰 운동화 뒤꿈치를 들었다 놓았다 하면서.한 시간이 금방 갔다.한 교수가 분필을 내려놓고 의자에 앉았다. 손가락의 분필 가루를 바지에 닦았다. 그리고 나를 보았다."이우진 씨.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네.""이우진 씨 눈에 보이는 거요. 저도 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보여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한 교수가 기다렸다. 그러다 먼저 웃었다."그렇겠죠. 알면 가르치는 사람이 되겠죠. 숙제로 할게요. 저도, 이우진 씨도."한 교수가 칠판 모서리를 분필로 톡톡 쳤다. 세 번. 그리고 칠판 한구석에 작게 적었다. 어떻게 보이는가. 물음표를 붙이지 않고."이십 년 전에 제 지도 교수님이 그러셨어요.
바람이 없었다. 똑딱.교문이 아니었다.지붕이 있었다. 반투명한 플라스틱 지붕. 그 아래로 좁은 통로가 길게 뻗어 있고, 양옆으로 가게들이 다닥다닥. 천막, 좌판, 빨간 고무 대야, 플라스틱 바구니. 형광등이 줄지어 켜져 있었다.시장이었다.나는 통로 한가운데 서 있었다.생선 가게. 얼음 위에 고등어와 갈치가 은빛으로 누워 있었다. 주인이 방금 물을 뿌린 모양이었다. 대야에서 쏟아진 물줄기가 공중에서 굳어 있었다. 유리 막대처럼. 물방울 몇 개가 갈치 비늘 위에 떠 있었다.맞은편 어묵 가게. 커다란 사각 냄비에 꼬치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그 위로 김이 피어오르다 멈춰 있었다. 하얀 솜뭉치처럼. 냄비 위 한 뼘에 걸려서.그 옆 전 가게. 넓은 철판 위에 기름이 끓다 멈췄다. 방울방울 부풀어 오른 채로. 동그랑땡 하나가 뒤집히다가 공중에 떠 있었다. 뒤집개 끝에서 반쯤 떨어져.전부 아침이었다. 늦가을 아침 여덟 시 칠 분의 시장. 장사를 막 시작한. 채소 가게 앞 소쿠리에 쪽파가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새벽에 다듬어 놓은. 가격표가 매직으로. 한 단 삼천 원.아무도 없었다.그런데.통로 저편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하얀 것이. 천장의 형광등 아래서. 피어올라서, 흩어지고, 또 피어올라서, 흩어지는.김이었다.흐르는.나는 그 김을 따라 걸었다. 천천히.통로 끝 가까이, 오른쪽. 간판이 낡은 작은 가게. 돼지국밥. 유리문이 반쯤 열려 있고, 그 앞에 가마솥 두 개가 가스 화구 위에 올라 있었다. 하나는 김이 멈춰 있었다. 솥뚜껑 틈에서 새어 나오다 굳은 하얀 솜뭉치.다른 하나에서 김이 흘렀다.솥 앞에 가을이 서 있었다.교복 치마 위에 가게 앞치마를 두르고. 붉은색.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고. 긴
봉투를 보낸 지 열엿새째 되는 날이었다.오전 열한 시. 측정실에서 TF 첫 샘플을 재고 있었다. 오민재가 가로 표를 그리고 있었다. 색을 네 개나 써서. 생산팀 과장님이 그 표를 보고 한참 웃었다. 이거 좋네, 첫 장만 봐도 알겠네.선배가 측정실 문을 열었다. 이마에 안경을 올린 채로."이 대리. 1층 로비에 손님.""손님이요?""대학교수래."나는 캘리퍼스를 내려놓았다.선배가 문틀에 기대 나를 보았다. 가늘게 뜬 눈으로."아침에 회사 대표번호로 전화가 왔더래. 총무팀이 받았는데, 이 도면 번호 쓰는 부서가 어디냐고. 우리 팀으로 돌렸지. 내가 받았어. 교수님이 그러더라. 이면지 뒷면에 모터 하우징 커버 도면이 찍혀 있는데, 이 이면지를 쓰는 사람이 누구냐고."선배가 코로 웃었다. 흥."우리 팀에 이면지 들고 퇴근하는 놈은 하나밖에 없잖아."나는 눈을 감았다.이면지. 회사에서 가져온 A4. 한쪽은 비어 있고, 한쪽엔 폐기된 도면이 인쇄된. 서재 책상에 한 묶음 쌓아 두고 쓰던. 그 뒷면을 한 번도 확인하지 않았다. 품질관리팀 이 대리가."……뭐라고 하셨어요?""이 대리 바꿔 드릴까요, 했지. 그랬더니 직접 오시겠다고. 한 시간 만에 오셨다. 서울에서."선배가 안경을 내려 썼다."너 뭐 했냐.""……수학 문제요.""수학 문제."선배는 그 말을 되뇌더니,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가 봐. 기다리신다. 커피는 내가 시켰다."로비 한쪽 창가 소파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쉰 후반쯤. 짧게 자른 흰머리. 둥근 뿔테 안경. 회색 니트에 검은 바지. 흰 운동화. 발치에 낡은 검정 백팩.
분기마다 한 장씩 내야 하는 종이였다.사내 개선 제안서. 전 직원 의무. 칸이 다섯 개. 현재 문제, 원인, 개선 방법, 예상 효과, 제안자. 내면 커피 쿠폰 한 장을 주고, 뽑히면 상품권을 주었다. 대부분은 마감 날 오후에 오 분 만에 썼다. 탕비실 커피 머신 위치를 바꾸자, 복사기 옆에 쓰레기통을 하나 더 두자.나도 삼 년 동안 그렇게 썼다. 마감 날 오후, 오 분 만에.그 분기 마감은 목요일이었다. 오후 다섯 시 반. 총무팀에서 메일이 왔다. 품질관리팀 이우진 대리님, 미제출.나는 빈 양식을 띄웠다. 현재 문제.측정실 벽 너머에서 가공 라인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쿵, 쿵. 선반이 쇠를 깎는 소리. 그 라인에서 나온 부품은 바로 측정대로 온다. 뜨거운 채로. 깎을 때 난 열이 아직 남은 채로.나는 그걸 매일 보았다. 삼 년 동안은 그냥 보았다. 돌아와서는 보였다.쇠는 뜨거우면 늘어난다. 아주 조금. 그 조금이 공차의 절반을 먹는다. 뜨거울 때 재서 합격한 부품이, 식으면 줄어서 불합격이 된다. 거꾸로도. 라인은 그 오차를 잡으려고 매일 기계를 조금씩 고치고, 고친 기계는 다음 날 또 틀어지고. 생산팀은 그 때문에 야근을 했다. 매일.측정을 삼십 분만 늦추면 됐다. 식힌 다음에. 그리고 기준면을 하나 바꾸면. 지그가 부품을 잡는 자리를, 열이 가장 덜 가는 쪽으로.나는 다섯 칸을 채웠다. 칠 분 걸렸다. 커피 쿠폰 한 장.제출을 누르고, 퇴근했다.그 주 내내 머릿속엔 다른 것이 있었다. 누런 빛. 떠 있는 서가. 도시락 가방에 얼굴을 묻고 울던 가을. 우진 아저씨, 하고 부르던 목소리의 메아리. 그 종이 한 장은 커피 쿠폰과 함께 금방 잊었다.잊은 종이가 먼저 나를 찾아왔다.다음 주 화요일, 생산팀 과장님이 측정실에 찾아왔다.손에 내 제안서를 출력해서
오민재가 달라졌다.처음엔 몰랐다. 측정실에서 나란히 앉아 샘플을 잴 때였다. 오민재가 캘리퍼스를 영점에 맞추고, 부품을 쟀다. 그리고 소리 내어 말했다."12.03. 확인."나는 캘리퍼스를 든 손을 멈췄다.다음 부품."12.04. 확인."오민재는 나를 보지 않았다. 표에 숫자를 적고, 다음 부품을 집었다. 확인. 확인.그날 오후 오민재가 올린 보고서는 내 보고서와 똑같았다. 항목 순서, 표의 모양, 맨 끝에 붙이는 한 줄 요약. 내가 삼 년 동안 써 온 방식을. 오민재는 원래 표를 가로로 그렸다. 색을 많이 썼다. 요약은 맨 앞에 두었다. 그게 오민재의 보고서였다.이번 건 내 것이었다."민재 씨."퇴근 무렵, 나는 오민재의 자리로 갔다."보고서 양식 바꿨어요?"오민재가 얼굴을 붉혔다. 안경을 밀어 올렸다."아, 네. 대리님 거 보고…… 대리님처럼 하고 싶어서요. 대리님은 자료 안 보고도 다 보시잖아요. 저도 그렇게 되고 싶어서. 대리님 하시는 거 다 따라 해 보면 되지 않을까 해서요. 확인하는 거랑, 표 그리는 거랑."나는 오민재를 보았다."부품은요? 요즘도 뒤집어 봐요?""……네?""3번 캐비티 찾을 때. 부품을 뒤집어서 안쪽 숫자를 봤잖아요. 요즘도 그렇게 해요?"오민재가 머뭇거렸다."요즘은 잘…… 대리님은 안 뒤집어 보시잖아요. 그냥 보시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냥 보려고 연습하고 있어요."나는 대답하지 못했다.오민재는 부품을 뒤집어 보는 사람이었다. 내가 보지 못한 걸, 뒤집어서 찾는. 그게 오민재의 손이었다. 그 손을 내려놓고, 내 눈을 흉내 내고 있었다.그리고 내